통일 정세- 견해와 의견

(편주: 여기에 모은 글들은 범민련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혀 둡니다.)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범죄는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산물/종태위 진상조사보고서

(평양 5월23일발 조선중앙통신)<종군위안부>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는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범죄의 일단을 또다시 자료적으로 립증한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진상조사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일본 나까시마비행기주식회사 한다제작소에서 감행된 조선인강제련행범죄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서

지금 진보적인류는 지난 세기에 국제법과 인륜도덕에 저촉되는 온갖 범죄를 저지른 전 범국인 일본이 과거청산을 회피한채 21세기에 들어 선데 대하여 경악을 금치 못하면 서 항의와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과거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강점하고 조선청장년들을 체포와 랍치,유괴 등 악랄한  방법으로 강제련행하여 노예로동을 강요하였다.
이미 수많은 사료들과 피해생존자들과 목격자,가해당사자들의 증언 등에 의하여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범죄의 전모가 여지없이 밝혀 졌으며 지금도 일제의 천인공노할 강제련행 만행을 립증하는 새로운 자료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는 최근 일본 아이찌현조선인강제련행진 상조사단과의 련계밑에 아이찌현 나까시마비행기주식회사 한다제작소에 강제련행되였던 조 선사람들의 이름이 기입되여 있는 <피보험자명부>에 들어 있는 피해생존자와 그 유가 족들을 새롭게 찾아냄으로써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범죄의 일단을 또다시 자료적으로 립 증한것과 관련하여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발표한다.

1.일본 나까시마비행기주식회사 한다제작소에 강제련행되였던 조선인피해자들에 대한 조 사경위
1992년 일본 아이찌현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은 당시의 아이찌현 한다시장이였던 다 께우찌 히로시에게 과거 나까시마비행기주식회사 한다제작소에 강제련행되였던 조선인<피 보험자명부>를 공개할것을 강력히 제기하였다.
이전 한다시장은 이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조사단에 당시의 조선인아동수 등을 기입 한 <학적부>,<제적부>를 제공한데 이어 한다제작소의 <후생년금(1944년까지는  로동자년금)>대상자들이 기입되여 있는 <피보험자명부>를 공개하였다.

조사단은 한다제작소 로동자 약 2만 2,800여명의 이름이 기입된 명부를 분석종합 하여 그속에서 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 1,235명을 발견하고 그 가운데 36명의 녀성 들도 포함되여 있다는것을 확증하였다.
또한 한다시가 공개한 <공습에 의한 순직자명부>를 통하여48명(함경남도출신 47명, 함경북도출신 1명)의 조선사람들이 한다제작소에 강제련행되여 갖은 고역을 당하던 도중 미군의 공습으로 희생되였다는것을 확인하였다.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는 1999년 7월 일본 아이찌현조선 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으로부터 조선인<피보험자명부>와 <공습에 의한 순직자명부>의 사 본을 넘겨 받아 피해생존자들과 그 유가족들을 찾아 내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 <피보험자명부>에 359번,<요시오까 요꾸덴>이라는 일본이름으로 기입되 여 있는 사람이 현재 함경남도 북청군에 살고 있는 최익천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으며  그를 통하여 명부에 357번,<후미야마 잉고>라는 일본이름으로 기입되여 있는 사람 이 피해자 최은행이라는것을 확인할수 있었다.
또한 명부에 73번,<미야모또 찌하꾸>라는 일본이름으로 기입된 리지백의 안해 신금 녀와 323번,<가네모또 호라류>라는 일본이름으로 기입된 김봉룡의 동생인 김봉인  등 피해자유가족을 찾아 내게 되였다.
조사과정에 가장 큰 애로는 명부에 피해자들의 이름과 주소가 일본이름,광복전 주소로  표기되여 있은것이였다.

2.나까시마비행기주식회사 한다제작소에서의 강제련행범죄
-나까시마비행기주식회사 한다제작소에 대한 개괄

나까시마비행기주식회사는 일본이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면서 기업규모를 확대하였 으며 태평양전쟁기간에는 미쯔비시중공업주식회사와 견주는 비행기제작회사로 알려 졌다.
이 회사는 1942년에 일본 아이찌현 한다시에 제작소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한다제작소에서는 주로 일본해군의 함상공격기 <덴산-b6n>과 함상정찰기 <사이운- c6b>를 조립생산하였는데 패전할 때까지 총 1,404기가 생산되여 침략전쟁에 리 용되였다.일본의 패전 당시 한다제작소의 종업원수는 약 2만 6,000명이였다.

일제는 1945년 1월에만도 조선의 북부에서 1,200명의 청장년들을 강제련행하여   군수공장에 밀어 넣고 중세기적인 노예로동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다제작소 로무과에 근무하였던 모리따 지로는 1944년 11월 3일에  한다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건너 가 <징용공>들을 모집하였다고 하면서 강제련행된 그 들이 <일본전국에 있는 나까시마의 각 공장에 1,000여명씩 할당되였다.한다공장에 도 1,200명이 할당되였던것이다>(<한다의 전쟁기록> 한다시발행,1995년 10 월 31일)고 증언하였다.

나까시마비행기주식회사의 경성(지금의 서울)사무소에는 한다제작소뿐아니라 오따,고이즈 미,다나,하마마쯔 등 일본 전국의 여러 공장들에서 조선인강제련행자들을 모집하기 위 하여 담당자들이 자주 기여 들었는데 이렇게 하여 나까시마비행기주식회사에 끌려 간  조선사람만 하여도 6,000여명에 달하였다

-강제련행피해자들에 대한 야수적만행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은 징발,체포,랍치,사기 등 강제적수법에 의하여 진행되였다. 피해자 최익천(남자, 78살)의 경우에도 군사적강제수법에 의한 징발형태로 끌려 갔다. 그는 함경남도 북청군 후창면 오평리에서 출생하였는데 가정살림이 너무도 가난하여 1 9살까지 소작살이를 하다가 21살에 결혼을 하였다고 하면서 <당시 일제놈들은 군대 에 나갈 나이를 넘어 선 21살,22살짜리 청년들을 마구 붙잡아 갔다.일본놈들은  나에게도 바로 (특별징용)이라는 딱지를 붙여 끌고 가려고 하였다.일제의 (징용)을  피해 덕성광산,라흥광산 등지를 몇달동안 피신해 다니던 나는 1943년 11월 중순 에 끝내 남대천다리에서 (징용),(징병)으로 내모는 오평리 책임자였던 일본순사놈에 게 붙잡히고 말았다>고 증언하였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후창면에서만도 6명의 청장년들이 강제련행되였다. 일제가 조선사람들을 일본으로 련행해 가는 과정은 참으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것이 였다. 이에 대하여 최익천은 <우리는 일본헌병들의 호송하에 짐승들이나 실어 나르는 화물차 칸에 올랐는데 구석에 변을 볼수 있는 구멍이 나있을뿐 바깥을 내다 볼수조차 없게  되여 있었다.놈들은 기차가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에게 물 한모금도 주지 않았다 >고 증언하였다.

일제는 일본 후꾸오까현 모지에 도착한 최익천을 비롯한 1,336명의 조선사람들을  간몬턴넬(야마구찌현 시모노세끼와 후꾸오까현 모지를 련결한 해저턴넬)의 위험한 렬차 시운전에 동원시켰다. 이때 렬차의 <운전사>도 <차장>도 <승객>들도 모두 조선사람들이였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을 그야말로 말하는 짐승,소모품,노예로 여겼다.

일제는 한다제작소에 강제련행한 조선인피해자들을 <나가네료>라는 이른바 합숙에 30 명씩 조를 무어 밀어 넣고 짐승먹이보다도 못한 식사를 시켰으며 그들에게 중세기적노 예로동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익천은 <놈들은 하루에 300∼400그람되는 수수,통밀,콩이 섞인  밥덩어리를 주었다고 하지만 실지로는 100그람도 되나마나하였다.아무리 먹어도 기별 이 없는 밥그릇을 놓고도 일본말로 (잘 먹겠습니다)라고 외워야 했고 먹은 후에는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해야 했다.그리고도 우리는 하루에 1618시간동안 고 역을 치르어야 하였다.놈들은 우리가 참다 못해 배 고파 일을 못하겠다고 항의하자  (주는대로 먹고 시키는 일이나 착실히 하면서 대일본제국에 복종하라,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고 증언하였다.

피해자유가족 신금녀(녀자,70살)는 <우리 남편의 말에 의하면 그때의 로동강도가  상상을 초월했는데 변소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변소에 가려면 감독에게 보고 해야 했 고 5분을 초과하면 감독이 변소에까지 찾아 와 꾸물거린다고 발로 차고 손찌검을 하 였다.남편은 죽지 않고 돌아 왔지만 페인이 되여 한생을 고통속에 살다가 1996년 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였다.

일제는 작업도중에 옆사람과 말을 주고 받거나 곁눈질을 하면 길이 1메터 30센치메 터되는 야구방망이로 사정없이 때렸으며 조성원 30명중 한사람이라도 저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였을 때는 전원에게 30키로그람의 물건짝을 등에 지고 2시간 3 0분씩 뛰게 하거나 다리짬에 각목을 끼우고 앉힌 다음 10키로그람짜리 모래주머니를  머리우에 올려 놓는 벌을 가하였다.
최익천 등 피해자들이 이 제작소에서 일하는 기간 일제는 저들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 조선사람들을 불러 내여 어디론가 끌고 갔는데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였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일제는 이 시기에 충청도에서 꽃 나이 조선녀성들도 <녀자근로 정신대>의 명목으로  끌어 갔다.
그들 역시 비행기동체에 뼁끼칠을 하거나 잡일을 하는 등 노예로동을 강요 당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한다제작소에 끌려 가 노예로동을 강요 당하였던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1945년 7월 24일 일본에 대한 미군의 폭격시에 희생되였다.일제는 당시 제작소 안에 있던 방공호에 저들만 들어 가고 조선사람들이 들어 가려고 하면 발길로 차서  밖으로 내쫓았다.
이에 대하여 최익천은 <피할 길이 없는 우리는 할수 없이 멀리에 있는 소나무숲으로  뛰여 갔다. 이때 소이탄이 떨어 지면서 옷에 불이 달렸기 때문에 저저마다 저수지로 뛰여 들었 다.그런데 저수지에도 폭탄이 떨어 져 저수지물은 조선사람들의 붉은 피로 변하였다> 고 증언하였다.

피해자유가족 김봉인(남자,72살)은 <우리 형은 미군 폭격시 이리 저리 피하다가  보리낟가리속에 숨었는데 그만 기총탄알을 가슴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그런데도 일본놈 들은 우리 형을 치료해 주지 않아 3일만에 죽었다.형의 동료가 유골을 가져 왔는데  작은 뼈 3개와 손톱,발톱,머리칼이 전부였다.우리 아버지는 너무도 기가 막혀 몸부 림치다가 3일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였다.

이상의 증언자료를 통하여 일본에서 1944년말 혹은 1945년초에 실시된것으로 알 려 져 있는 나까시마비행기주식회사 한다제작소에로의 조선인강제련행이 그보다 1년전인  1943년 11월경에 시작되였다는것이 확인되였을뿐아니라 충청도출신의 조선녀성들까지  <녀자근로정신대>로 끌려 가 노예로동을 강요 당하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 지게  되였다.
또한 광복후에 일제에 의하여 나까시마비행기주식회사 한다제작소에 강제로 끌려 갔다가  사망한 조선인피해자들중 50여명의 유골을 살아 남은 100여명의 강제련행피해자들이  가지고 와서 유가족들에게 넘겨 주고 고향으로 돌아 갔다는것이 확인되였다.
제반 사실은 조선인강제련행범죄가 일제의 군사적강제수법에 의하여 철두철미 군권과 관 권의 안받침밑에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감행되였다는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3.조선인강제련행범죄는 중대한 인권유린죄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범죄는 군사적강제수법에 의한 로동력의 징발과 노예화,소멸을 목 적으로 한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산물이다. 조선민족말살정책의 본질은 조선의 멸망과 국토략탈,민족멸종을 목표로 한것이다.
과거 일제는 군사적강제수단으로 600여만명의 조선청장년들과 근 20만명의 조선녀성 들을 징발하여 로동노예,성노예,군노예로 만들어 생명의 법적담보가 없는 노예고역장, 성폭행장,전쟁죽음터로 내몰아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살륙하거나 로동능력상실자,성기능불 구자로 만드는 반인륜적범죄를 범하였다.
일제는 우리 국가와 령토,민족의 인적력량은 물론이고 민족어와 민족문화,민족정신,나 아가서 성과 이름까지 깡그리 빼앗는 세계정복력사와 동화정책에서 그 류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가장 야만적이고 악독한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조선을 지구상에서 영원 히 없애 버리려고 하였다.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범죄는 국제적 정의와 도의,국제법을 짓밟으면서 국가정책으로 공 공연히 감행된 중대한 인권유린죄이다.
중세기적 포악성과 현대적 교활성을 겸비한 일제는 조선민족말살정책에 기초하여 우리  민족의 존엄과 명예,우리 인민의 인권을 가장 잔악하게 침해하고 유린함으로써 국제사 회의 정의와 도의를 심히 파괴하고 국제법을 란폭하게 위반한 중대한 인도에 대한  죄,노예범죄,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법적시효에 관한 국제관습법과 성문법에는 전쟁범죄나 인도에 대한 죄,노예범죄 등 기 본인권과 관련한 범죄에는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는것이 명기되여 있다. 따라서 일본은 전쟁법규와 국제인도법원칙에 따라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범죄에 대한 법 적책임을 인정하고 철저히 사죄하고 보상할 국제적의무를 지니고 있다.

4.일본의 태도와 립장
일본은 패망한지 반세기가 지나고 21세기에 들어 선 오늘까지도 온갖 모략과 수법으 로 조선인강제련행범죄에 대한 국가적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일본반동들은 기만적인 <국민기금>놀음에 계속 매달리면서 <종군위안부>피해자들을 우 롱하고 있을뿐아니라 구일본군의 <군인>,<군속>으로 끌려 갔던 몇몇 재일외국인피해 자들에 대한 이른바 <위문금지급>놀음으로 저들의 강제련행범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  나 보려고 발악하고 있다.
더우기 간과할수 없는것은 일본반동들이 년초부터 침략력사를 외곡하고 미화분식하는 력 사교과서개정책동에 열을 올리면서 범죄적인 과거를 재현하려는 기도를 더욱 로골적으로  드러 내 놓고 있는것이다.

오늘 강제련행피해생존자들은 70∼80살의 고령으로서 인생말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청춘시절에 일본군에 의하여 받은 야수적인 노예로동의 후과로  하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미전에 페인이 되였거나 장기적인 병약자들이다. 일본에서 벌어 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일본정부가 모든 피해생존자들이 이대로 죽기 를 바라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하고 있다.
일본반동들은 오산하지 말아야 한다.강제련행피해자들의 생사여부를 알지 못하고 있는  헤아릴수 없이 많은 혈육들과 과거에 <징병>,<징용>으로 끌려 가 인간생지옥에서  노예로동을 강요 당하고 일본침략군의 대포밥으로 내몰리웠던 피해자들,유가족들의 피의  대가를 기어이 받아 내고야 말겠다는것은 전체 조선인민의 확고한 의지이다.

이전 한다시장이 늦게 나마 과거의 조선인 <피보험자명부>를 공개하였지만 그것은 빙 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일본에는 아직도 구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련행된 우리 피해자들의 명단을 비롯하여 수많 은 과거문건들과 자료들이 보관되여 있다.

지난해 10월 미국국회에서도 일본의 전쟁자료들을 공개하는 법률인 <일본제국정부에  관한 정보공개법>이 제출통과되였다.
일본이 조선인강제련행진상을 비롯한 과거죄행을 철저히 조사규명하고 그 사실들을 그대 로 공개하는것은 침략과 범죄력사를 청산하려는 의사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척도로 된 다.
일본은 조선인강제련행진상자료를 공개한데 기초하여 그 범죄자들을 처벌하며 모든 피해 자들에 대한 국가적사죄와 보상을 시급히 하여야 한다. 죄는 묻어 둘수록 커지기 마련이다.
일본은 21세기에도 과거범죄를 숨기면 숨길수록 2중,3중의 죄를 범하게 되며 그  죄는 후세들에게 더욱 무겁게 가해 지게 된다는것을 똑똑히 알아야 할것이다.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는 앞으로도 세계 여러 나라의 진보적  단체들과 굳게 련대하여 일제의 과거범죄를 폭로하고 그 청산을 위한 활동을 보다 적 극적으로 벌려 나갈것이다.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주체90(2001)년 5월 22일
평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