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민족대회 10년 역사

통일운동 그 자랑찬 역사

외세에 의해 조국이 분단된 이래 우리 겨레의 조국통일을 위한 노력은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통일을 향한 전민족의 열망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원칙과 이 원칙에 의거한 연방제 통일방안을 밝혀내었으며 통일운동의 역사는 바로 이 원칙과 방도를 실현하는 역사였다.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냉전이 종식됨에 따라 더 이상 이 땅에 주둔할 명분이 없어진 미국은 한반도 분단 고착화를 통해 이남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영구화하며 남한을 정치 경제 군사적 교두보로 하여 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 확대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남북의 UN분리가입과 교차승인으로 분단상태를 국제적으로 합법화하는 한편 남한에서 친미 세력을 총집결하여 3당 합당을 자행하여 친미사대정권의 영구집권을 획책하였다.
이같은 정세 속에서 조국통일운동은 미국에 의한 영구분단음모를 끝장내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당국자들만의 남북대화가 아닌, 민간차원의 거족적인 만남을 실현하며, 이 힘으로 남북사이의 불신을 제거하고 민족의 화합과 단결을 이루어 통일의 조건을 만들어내야 할 절박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북 UN분리가입과 교차승인저지, 남북자유왕래 전면개방 실현, 국가보안법 철폐, 정권의 창구 독점 분쇄와 민간차원의 통일대화 실현등을 목표로 범민족대회가 추진되었다.

1. 1990년 1차 범민족대회

1차 범민족대회는 88년 제기되어 3년만인 90년도에 열린 대회로서, 반통일세력의 집요하고 교활한 방해책동으로 인한 거듭된 난관을 뚫고 자주의 시대 90년의 첫해에 조국통일의 새로운 단계를 개척하였다.
88년 여름, 애국청년학생들은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이땅이 뉘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는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를 외치며 한반도의 통일의 열기를 몰아 넣었으며. 이러한 청년학생들의 통일투쟁은 7천만겨레의 통일 의지에 불을 지피게 되었다. 8월 1일 남측 각계사 1,014 명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발기취지문>을 통해 북과 해외의 온 민족성운이 참여하는 범민족대회을 열어 민족의 통일방안과 통일실천과제를 논의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8월 23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세계대회에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협하고 저해하는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세계평화운동세력과 함께 확인하였다.

이에 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은 결성대회에서 범민족대회사업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고 나섰으나 미국과 노태우정권에 의해 저지당하고 간부들은 대거 체포 구속되게 된다.
그러나 3월 11일 범민족대회 유럽지역추진본부, 18일 북미주지역 추진본부, 30일 일본지역추진본부가 결성되는 등 범민족대회를 성사시키려는 동포들의 들불같은 통일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에 고무되어 전민련은 90년 3월 2기 대의원대회에서 8월 15일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고 이후 미국과 노태우정권의 악랄한 방해책동은 계속되었으나 범민족대회 주체의 결속력은 강화되었으며 반통일세력은 그 본질을 여실히 드러내게 되었다.
7월 27일 평화군축을 위한 국민걷기대회에 이어 8월 3일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발족식, 13일 범민족대회 학술제, 14일 범민족대회 통일문화제, 15일 판문점에서의 범민족회의로 이어진 1차 범민족대회는 12개 지역, 66개 부문, 연인원 20여만명이 참가하였다.

1차 대회는 비록 남측추진본부가 미국과 노태우 정권의 봉쇄로 인해 북, 해외동포와 판문점에 마주 앉지는 못했으나 서로의 뜨거운 통일열망을 확인하고 통일문제에 관련된 기본입장을 거의 일치시켜 내었다. 특히 대회의 성과를 기초로 남, 북, 해외를 망라하는 거족적 민간급 통일운동 연합체인 범민련을 탄생시킴으로써 1차 범민족대회는 90년대 통일운동에 획기적 진전을 열어낸 역사적 대회로 된다.

제 1차 범민족대회 (연세대)
최초의 범민족대회는 88년 세계대회에서 제기되었다. 88년 3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선거에서 기호 2번으로 나온 김중기 학 형의 '김일성 종합대학교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된 청년학생들의 통일열기는 그해 여름 아스팔트 위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느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외치고 남북청년학생회담을 제안하며 한반 도를 통일열기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8월 1일 남측의 각계 인사 1014명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 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발기취지문"을 통해 북과 해외의 모든 민족성원이 참여하는 범민족 대회를 통해 민족의 통일방안과 통일실천의 과제를 논의하자고 제안 하였다. 이에 8월말에 열린 세계대회에서는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범민족대회 를 제안하였다.
이에 89년 1월 전국민족민준운동연합(전민련)은 결성대회에서 범민족대회사업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고 실무회담 대표단을 판문점에 파견하였다. 노태우 정권은 이를 저지하였으나 이에 3월 범민족대회 북미주 추진본부와 일본지역 추진본부가 결성 되는 등 범민족대회를 성사시키려는 동포들의 통일열기는 들불처럼 타올랐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정치협상, 임수경 전대협 대표의 평양축전 참가등의 성과는 마침내 90년 제 1차 범민족대회를 개최하는 데로 발전하였다.

1차 범민족대회에는 12개 지역 66개 부문, 연인원 20만명이 참가하여 성대히 치러졌는데 범민족대회의 추진과정은 남, 북, 해외 의 3자가 통일의 주체로서 연대할 필요성과 그 결속력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이었으며 반통일세력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내외의 반통일세력들의 집요한 방해와 탄압을 뚫고 성사된 1차 범민족대회는 조국통일 실현의 과제인 남, 북, 해외 7천만 겨레의 민족통일대연합전선인 범민족적 통일운동체를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90년 11월 19-20일 베를린에서 남, 북, 해외의 실무대표들이 만나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결성하기로 합의하여 90년 12월에 해외본부, 91년 1월23일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1월 25일 범민련 북측본부를 각각 결성하였다. 이처럼 90년대의 첫해에 거듭된 난관을 뚫고 성사된 1차 범민족대회는 조국통일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개척한 민족적 쾌거 였으며 민족대단결의 구심체인 범민련을 탄생시킨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2. 1991년 2차 범민족대회

당시의 정세는 미국의 북에 대한 핵사찰 공방이 시작되었으며 미국과의 방위조약을 재확인하고 주한미군의 지속적 주둔을 역설하며, 미국의 경제개방요구를 수용하는 등 노태우 정권의 사대적이고 민족대결적 책동이 노골화 되어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정권의 통일방안으로 제출되었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허구성을 알려내고,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으로 인한 분단 고착화 기도를 분쇄하는 전민족적 투쟁을 요구하였다.
8월 3일 전민련, 전교조, 전대협등 36개 단체는 '91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출범식을 갖고 한반도의 평화정착 방안과 구체적인 통일방안에 대한 범민족적인 논의를 목표로 12일부터 18일까지 경희대에서 2차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노태우 정권은 통일대행진을 제안하면서 범민족대회는 허용할 수 없음을 밝혔고, 북측에서는 범민족대회를 인정하지 않는 현정부의 통일대행진 제의를 거부하였다.
미국과 노태우정권은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원회를 탄압하고 경희대를 봉쇄함으로써 범민족대회로의 결집을 막아나섰으나 통일애국세력은 이를 뚫고 2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범민족대회를 성사시켜냈다. 특히 전대협 통일선봉대의 국토종단대행진과 남, 북, 해외 청년학생 통일대축전, 박승희, 성용승의 방북투쟁은 국내외 분열주의자들의 반통일적 음모를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범민족대회는 북측대표단 참가의 정부불허로 북축과 해외동포들은 판문점 북측지역. 일본 도쿄에서 각각 대회를 가짐으로써 분산 개최되었다. 그러나 전화와 팩스를 통해 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한 지지와 남북한 비핵군축을 촉구하는 내용의 공동결의문을 동시에 발표함으로써 남과 북, 해외의 전민족적 대단결을 세계만방에 과시하였다.
2차 대회는 비핵군축과 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한 대중적 논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정착 방안과 구체적인 통일방안에 대한 범민족적 논의를 불러 일으켰으며 범민련이 통일운동세력의 조직적 구심으로 잦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남한 내의 핵무기 완전철수, 불가침 선언 채택,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한 투쟁을 전개하고 연방제 통일방안에 관한 그 구체적 내용을 협의할 통리협상회의를 별도로 열자는 데 원칙적 합의를 이룸으로써 2차 대회는 남북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키는 기폭제가 되고 남과 북의 화해와 불가침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제 2차 범민족대회 (경희대)- 연방제 방안 합의
91년 미국은 이북에 대한 핵사찰 문제를 들고 나와 한반도에서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에 91년 8월 초 전민련, 전교조, 전대협 등 36개 단체는 91년 범민족대회 추진본부를 결성하고 한반도의 평화정착방안과 구체적인 통일방안에 대한 범민족적 논의를 목표로 경희대에서 제 2차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노태우 정권의 탄압으로 2차 범민족대회는 서울, 평양, 도쿄에서 분산 개최되었지만 남, 북, 해외의 3자는 긴밀한 협의를 통하여 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한 지지와 남북한 비핵군축을 촉구하는 내용의 공동결의문을 동시에 성사시키는 기폭제가 되고 남과 북의 화해와 불가침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3. 1992년 3차 범민족대회

방대한 해외의 미군주둔비용과 막대한 무역, 재정적자로 위기에 직면한 미국은 제 3세계 국가에 대한 경제적 침탈의 가속화와 적극적 군사개입으로 무기판매시장의 활기를 되찾는 것으로 그 출로를 찾았다. 이에 미국은 한반도에서 남북사이의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선언의 이행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나섰으며, 노태우 정권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고 나섬으로써 합의서 이행을 계속 지연시키는 엄중한 사태를 야기시켰다.
따라서 한반도를 새로운 긴장상태로 몰고가려는 미국과 이에 동조해 나서는 노태우 정권의 사대매국적 행위를 분쇄하고 남북합의서 이행 요구투쟁을 광범위하게 벌여 나가는 것은 92년 통일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나서게 된다.

3차 범민족대회는 범민련을 중심으로 전국연합 자통위와 전대협, 진청대협 등 자주적 평화통일세력이 각 계층, 부문별로 결합, 범추본을 구성하여 합의서 이행과 비핵군축 실현, 통일방안 합의 확산, 자주교류 확대를 목포로 준비, 주친되었다.
8월 12∼17일 동안 판문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제 3차 범민족대회는 당국의 원천봉쇄로 중앙대로 변경하여 개최하고자 하였으나 행사 예정지인 중앙대에 전두경찰이 난입하여 전대협의장 등 지도부를 연행하고 또다시 원천봉쇄함으로써 대회장을 서울대로 옮겨 대회를 진행하였다.

남과 북, 해외의 범민족대회에 참여한 동포들은 결의문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제도, 두개의 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통일방식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고 당국의 통일논의 독점을 반대하며 주한미군 철수와 군축 요구 들을 결의하였다.
또한 거족적인 청년학생조직인 '범민족청년학생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자들이 대오를 갖추어 독자적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와 같이 3차 범민족대회는 범민련을 중심으로 각계각층에서 대오를 갖추어 참여했으며,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공동의 내용으로 결의문을 채택, 선포함으로써 민족대단결의식을 한층 고취하였다.

제 3차 범민족대회 (서울대)- 3자연대 학생조직 범청학련 결성
범민족대회 성사를 통해 마련되고 강화된 3자연대의 원칙과 범민족적 통일운동체는 청년학생들의 투쟁을 통해 더욱 더 획기적으로 강화, 발전하게 된다. 정권의 탄압이 더욱더 기승을 부리는 시점 에서 민족의 통일열망을 제대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각 부분별로 남북해외연합을 실현시키는 과제가 제기되었고, 언제나 투쟁의 선두에 섰던 청년학생들이 가장 먼저 떨쳐나서 범민련의 부문 연합 '조국통일 범민족 청년학생연합'을 결성하게 된다.

당시 제 3차 범민족대회는 정권의 엄청난 탄압으로 대회장이었던 중앙대가 경찰에 의해 침탈당해 전대협 6기 태재준의장님을 비롯한 간부들과 학우들이 연행되었고 학교는 10여 억원의 피해를 입었을 정도로 파괴당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청년학생들은 서울대에서 범민족대회를 성사시켰고 범청학련이 결성되었다.
또한 노동자들이 대오를 갖추어 대회에 참가하고 독자적인 집회를 갖는 등 각계각층이 망라된 명실상부한 거족적인 통일광장으로 되었다.

4. 1993년 4차 범민족대회

소위 문민정부임을 자처했던 김영삼 정권의 출범이후 진행되었던 4차 범민족대회는 정권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고 대회 성사를 위한 노력에서 양보를 거듭하며 수세적 입장을 취함으로 인해 대회 성사를 위한 노력에서 양보를 거듭하며 수세적 입자을 취함으로 인해 대회 성사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다.

"민족의 화해와 단결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13∼15일까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4차 범민족대회는 정부의 탄압으로 서울과 평양 그리고 동경에서 분산개최 되었으며, 서울대회는 대회장소인 연세대를 경찰이 봉쇄하여 한양대로 옮겨 개최하였다. 4차 대회는 100여개 시군구 단위까지 지역행사가 치루어졌으며, 본대회에도 참여폭이 크게 넓어져 대학생 이외에 1만여명 이상의 각계각층이 대오를 이어 참여함으로써 조국통일의 열기를 과시하였으며, 범민족대회에서는 남측결의문을 채택하여 남북합의서 실천촉구, 한반도 평화정착, 일본군국주의화 반대, 연방제 통일방안의 거족적 합의 등을 발표하였다.

정권의 탄압 이외에도 범민련과 범추본 내부의 어려움을 동시에 겪으며 추진된 4차 범민족대회는 이같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대회 개최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결집되었다.
이는 민족의 통일의지는 그 무엇으로도 꺽을 수 없으며 조국의 통일역량은 날로 장성강화되고 있음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특히 '남북 합의서 설천 촉구 범민족 서명운동'을 대중적으로 벌여내어 남북합의서 실현에 대한 공감과 지지를 얻어낸 것은 소중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4차 대회는 대회 준비과정에서 남측 범추본이 해외나 북과의 연락과 실무접촉을 애초에 포기하였으며 범민련 해소문제가 제기되고 공동 결의문도 채택되지 못하는 등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벌생하였으며, 이후 통일운동상의 편향과 통일애국세력의 분열을 가져오는 첫 지점으로 평가된다.

제 4차 범민족대회- 범청학련공동사무국 건설, 3자연대 강화
3자연대의 요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에 대한 정권의 탄압은 거세어져만 갔다.
분단을 자신의 유일한 기반으로 삼고 있는 김영삼 정권은 그것을 위협하는 어떠한 움직임도 용납하지 않았고, 통일의 본질적 요구로 제기되는 3자연대 사업은 더더욱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범청학련은 베를린에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을 마련하기로 합의, 남한에서는 박승희, 성용승, 최정남 대표를 파견하여 범청학련 사업과 나아가 범민련 사업을 강화해 나가게 된다.
이로 인해 남북의 연대는 더욱 더 강화되고 내용적 질적 연대는 보다 심화되게 된다.

5. 1994년 5차 범민족대회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가 통일의 열기로 휩싸이고 있을 즈음 정상회담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북의 김일성 주석의 서거는 남북관계와 통일에 큰 장애를 가져오게 된다.
김영삼 정권의 조문파동과 주사파 시비는 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며, 남한의 통일애국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이어져 민족대결구도가 극단적으로 전개되었다.
이같은 상황은 통일운동으로 하여금 민족분열행위를 일삼는 김영삼 정권을 규탄하고 민족대단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가열차게 벌여 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5차 범민족대회는 14∼15일 양일간 서울과 평양, 도쿄에서 분산 개최되었으며, 김영삼 정권은 헬기까지 동원하여 최루액을 쏘아대는 만행을 저지르며 대회 전기간동안 2,400명 연행, 44명 구속, 139명의 불구속 입건 등 역대 군사정권이 무색하리 만큼 대대적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자랑찬 통일전사들은 통일 선봉대의 불굴의 투쟁, 각 지역의 통일축전, 5천여명의 건국대 진입 시도투쟁 등으로 김영삼 정권의 탄압을 정면으로 맞받아 쳤으며, 3만이 넘는 통일대오가 일사분란한 모습으로 대회장을 변경하여 서울대로 진입하는 진풍경을 연출하여 결국 범민족대회 사수, 성사라는 자랑찬 승리를 쟁취하였다.

5차 범민족대회는 4차 대회에 이어 내부의 의견대립이 더욱 심화되어 3자 공동의 범민족대회 추진(범민족회의, 3자 실무회담, 공동대회장, 공동평가, 공동결의문 채택 등), 연방제 통일방안, 주한미군 철수 문제 등이 쟁점이 되고 의견일치가 되지 않음으로 인해 대회추진과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범추본은 범민족회의와 공동결의문을 채택하지 않았으며. 범민련만이 범민족회의를 열어 남, 북, 해외 공동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범민련과 범청학련은 민족대단결 사업을 포기하려는 통일운동 내부의 흐름에 동요하지 않고 3자연대를 실현함으로써 민족대단결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이를 확산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범민족대회 추진과정은 김영삼 정권의 반통일적 본질을 명확히 밝혀 주었다. 5차 대회는 민족민주운동 대오 내의 김영삼 정권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이에 기반한 투쟁회피, 개량주의적 흐름을 실천속에서 극복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제 5차 범민족대회(서울대)- 김영삼 정권의 공안 탄압과 헬기사건
94년도는 김영삼정권의 엄청난 공안탄압 속에서 통일운동을 벌여내었다.
"주사파 파동"이라 불리는 상황 속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민중들은 긴장과 대결이 아닌 평화와 통일의 내용을 가지고 투쟁을 전개해 나갔고, 그만큼 험난했던 과정이었다.
하지만 제 5차 범민족대회를 적들의 물리적 탄압 속에서 사수해냈던 것은 우리가 뜻과 의지를 모으면 그 어떠한 것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94년 범민족대회에서 청년학생들은 92년 결성되었던 범청학련을 강화해내기 위해 범청학련 총회를 치루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권의 헬기까지 동원하는 광폭한 탄압 속에서 행사진행 자체를 해내지 못했다.

6. 1995년 6차 범민족대회

94년 하반기와 95년 상반기의 정세는 민족민주운동진영에게 미국과 김영삼 정권을 상대로 한치의 타협없는 투쟁을 전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무엇보다도 민족의 공멸을 가져올 미국의 핵전쟁 놀음을 파탄시키고 민족의 생존권을 보호하며 한반도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전민족이 대단결하여 가열찬 반미투쟁을 벌여나가야 했으며, 신공안탄압을 일으키며 이미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김영삼 정권에 맞서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을 광범위하게 벌이고 정권의 반민족적, 반민중적 경제정책에 파열구를 내는 투쟁을 통해 김영삼 정권을 퇴진으로 몰아가야 했다.

이로부터 범민련에 제기된 과제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로부터 한반도 평화를 지킬수 있는 제도적 장치인 북미평화협정체결과 국가보안법 철폐, 통일원년 1995년을 맞아 연방제를 대중속에 더욱 확고히 뿌리 내리게 하는 연방제 합의, 확산투쟁이었으며 이는 6차 범민족대회 중심 투쟁과제로 제기 되었다.
95년은 지난 2년간 범민족대회 추진과정에서 드러난 내부의 이견이 노골화 되어 통일애국세력은 민족공동행사와 범민족대회라는 2개 대회를 치르게 된다. 준비과정에서 민족공동행사 준비위는 범민족대회라는 2개대회 성사 의지는 꺽을수 없었으며 범민족대회를 민족공동행사 내에서 치르고자 일정을 겹치지 않도록 하는 등의 세심한 배려를 기울인 범추본의 노력에 의해 6차 범민족대회는 서울대에서 어렵게 치루어 졌다.

6차 범민족대회는 참가여부를 두고 14일 오후까지 논란을 벌임으로 해서 그 성사여부는 매우 불투명 했다. 그러나 14일 밤부터 서울대로 모여든 대중은 수만에 달했으며, 탄압과 개량의 거센 도전을 물리치고 의연히 범민련을 사랑하고 지켜론 대중들의 힘에 의해 범민족대회는 성사되었다.
6차 범민족대회는 범민족대회의 의의를 자각한 대중들이 오로지 밑으로부터 주동적으로 참여해 옴으로써 성사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자주적 통일운동의 구심으로서의 범민련의 운동사에 또 하나의 금자탑을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대회는 전국연합을 비롯한 민족민주 운동세력의 대다수 상층부가 범민족대회를 철저히 막아나서는 가운데 그야말로 자주적 통일운동세력들이 자발적으로 온갖 지혜와 힘을 모아 이룩해 낸 땀의 결정체였으며 그런만큼 규모나 열기에 있어서도 그 어느 대회보다도 성대히 치루어 질 수 있었다.

6차 대회는 어떤 어려움도 대중을 철저히 믿고 그에 근거하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음을 실증하였으며, 남측 통일운동진영 상층 일부의 패권성과 개량주의적 조류를 대중적으로 심판하고 범민련을 크게 강화시켰다.
또한 대중들의 반미, 반김영삼 투쟁의지를 모아냄으로써 반미, 반김영삼전선을 공고히 해 낸 대회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제 6차 범민족대회(서울대)- 해방 50돐 경축행사, 범민족대회 성사
통일운동의 새로운 전기 마련

김영삼 정권 출범 이후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었었다.
통일운동은 남, 북, 해외가 공히 주체로 나서야 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남쪽의 입장만을 무리하게 관철하려 하거나 3자의 합의를 하찮게 여기는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대중화라는 명목하에 이처럼 3자연대의 원칙을 저버리거나 반통일정권과 손을 잡으려는 움직임에 대해 제 6차 범민족대회는 기층의 수많은 통일일꾼들의 주체적 노력에 의해 치루어 지면서 그 동안 남측에 존재했던 많은 편향들을 일소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김영삼 정권의 수많은 반통일적인 모습은 해방 50돐 공동행사거부를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 나게 되었으며, 범민족대회 성사를 통해 남, 북, 해외 3자간의 연대가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7. 1996년 7차 범민족대회

7차 범민족대회는 96년 민족앞에 제기되는 조국통일 투쟁의 과제를 실천하고 민족의 반역자 김영삼 정권의 실체를 낱낱히 밝힌 애국적 통일항전이다.
미국과 김영삼 정권의 군사긴장, 대결책동에 맞서 민족의 대단결된 힘으로 투쟁하고자 북미평화협정체결, 연방제 확산 실천, 국가보안법 철폐, 콘크리트 장벽 철거 등을 투쟁내용으로 한 7차 대회는 통일의 성지 연세대에서 개최되었다.

대회의 원천봉쇄 입장을 밝힌 김영삼 정권은 이미 8월 초순부터 대회장을 막아나섰다.
이에 맞서 한총련 통일전사들은 대회장 사수를 즉극 결의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통일의 불바람을 이으키던 통일선봉대를 중심으로 속속 연세대로 모여들었다. 대회까지 수십차례의 침탈과 계속된 연행으로 한총련은 건설이후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으며, 김영삼 정권은 한총련과 범민련 와해를 선언하고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함으로써 정권과의 일대격돌에 들어가게 된다.

대회는 한총련을 비롯한 애국통일세력의 항거로 성사되었으며 대회성사 이후 안적적 귀가를 희망하는 학생들을 다시 막아나섬으로 해서 한총련을 농성에 들어가게 되었고 10여일간의 항쟁으로 단일사건으로는 최대의 구속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총련의 애국적 항거로 김영삼 정권은 통일애국세력들과 전체 민중들의 거센 항의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이듬해 전국을 휩쓸었던 김영삼 정권 타도투쟁의 거세찬 불길을 지피게 되었다.
수많은 구속자와 조직 파괴책동으로 한총련을 와해시키고자 하는 김영삼 정권의 의도를 분쇄하고, 내부의 개량적 흐름을 청산함으로써 더욱더 굳건한 조직으로 우뚝선 자랑한 모습은 한총련은 불패이며 그 누구도 애국적 흐름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제 7차 범민족대회 (연세대)- 연세대 항쟁
96년 김영삼 정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악한 폭압을 예고하였다.
범민련과 한총련이 주최하는 7차 범민족대회와 6차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원천봉쇄 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탄압 속에서도 2만이 넘는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대회장인 연세대에 입장하였으며 한총련 사수대의 희생적인 투쟁으로 경찰병력의 침탈로부터 대회장을 엄호하는 사이 체 7차 범민족대회 개막식과 범민족회의의 전과정을 성대하게 치러내었다.

그러나 김영삼정권은 범민족대회 폐막식을 알리고 청년학생들이 해산을 하려는 과정에서 갑자기 학생들을 건물 안으로 몰아넣고 대규모 섬멸전을 감행하였다.
고립된 학생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물론 의약품과 여성용품마저도 반입을 차단한 체 총기까지 사용하겠다고 협박하면서 고사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김영삼정권은 7차 범민족대회에 대하여 6천 여명을 연행하고 500여명을 구속하는 반통일 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7차 범민족대회는 민족의 통일의지와 김영삼 정권의 민족분열주의적 기도가 대회전을 벌인 가운데 통일운동내부의 반통일적 흐름에 치명타를 입혔다.
7차 범민족대회와 청년학생들의 조국통일을 향한 헌신적인 투쟁은 김영삼 정권의 반통일적 본질과 폭력성을 널리 폭로하였으며 문민과 개혁으로 치장하고 있는 마지막 허울을 벗겨버렸다.

8. 1997년 8차 범민족대회

94년 통일운동진영의 조직적 이탈과 분립으로 인하여 이남의 통일진영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민민진영 일부의 타협절충식, 개량주의적 사고를 발단으로 하여 발생된 통일운동진영의 분산 분립으로 하여 95-96년 남측 통일운동진영의 두 개의 독자적인 행사를 치름으로써 민족대단결이라는 민족의 절대적 과제에 난관이 조성되게 된 것이다.

8월 조국통일투쟁을 하나의 역량으로 결집시키기 위하여 범민련 남측본부는 남측내의 또다른 통일운동단체인 민족회의를 상대로 협상을 하면서 통일운동에 원칙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탄력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민족회의는 이후 범민련의 범민족회의와 범청하가련 통일대축전을 8월 통일행사의 공식행사로 인정할수 없다는 분열적 논리 등을 내세움으로써 8월 통일투쟁을 거족적 으로 전개하려는 각계 각층의 통일진영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제 된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범민련 남측본부는 통일투쟁의 기본적 실천사업들을 책임있게 실천하지 못하는 아쉬운 상황에서 급작스레 8차 범민족대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어떠한 성과도 발전시키지 못한 기나긴 협상과정으로 인하여 실무준비에 많은 차질을 빚게된 것으로 인해 범민련 남측본부는 어렵사리 7월 27일 "범민족대회 남측본부 결성식"을 한양대에서 치루게 되었다.

8월 13일∼15일 판문점에서는 범민련 북측본부와 해외본부의 수많은 성원들이 모여 8차 범민족대회를 힘차게 진행하고 있을 때, 남측추진본부는 김영삼 반통일정권의 폭압적 탄압으로 인하여 판문점 범민족대회에 참여(범민련은 3자 실무회담을 통하여 남측추진본부가 김영삼 정권의 탄압으로 인하여 판문점에서 집결하지 못할 경우 남측 추진본부는 남쪽에서 범민족대회를 진행한다라고 합의하였다.)하지 못하고 무장헬기와 특수진압부대를 동원하여 범대회장 진입을 가로막고 범대회를 무산시키려던 적들의 폭압을 뚫고 마침내 혁명의 도시, 반미의 도시 광주에서 8차 범민족대회를 장엄하게 치루어내었다. 8차 범민족대회는 김영삼 반통일정권의 살인적인 광란으로 인하여 애초에 준비한 행사기간을 힘차게 진행시키지는 못했지만, 일정을 탄력적으로 조정하여, 지난 시기 여러차례의 범민족대회보다도 가장 결사적이고도 장엄한 대회로 성사시켜내었다.

주요 학생간부들을 끝까지 책임있게 보위하기 위해서 판문점 진격 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으나, 범민족대회 참가만 하여도 전원구속하겠다는 반통일 정권의 최후 통첩에도 굴하지 않고 이남땅 곳곳에서 참가한 애국대중들의 통일 의지는 8차 범민족대회를 단 한사람의 희생도 없이 치루어 낼 수 있게 하였다.

제 8차 범민족대회(조선대)- 통일운동 역사의 소중한 징검다리
97년 범민족대회는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조국통일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함으로서 성과적으로 통일운동의 성전을 수행하였다. 97년 당시 범추본은 몇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범민족대회를 어떤 형태로라도 반드시 성사시킨다는 것이었다. 96년 하반기와 97년 상반기를 관통한 한총련에 대한 마녀사냥이 공안국면을 조성하고 있는 조건에서 정권과의 대결 속에서 대회가 무산되기보다는 통일운동의 맥잇기를 중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8차 범민족대회가 많은 수가 참가하지 못하고 비록 상징적이긴 하였지만 대회의 기치를 또 다시 들어옴으로써 98 범민족대회가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역량을 최대한 보존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오는 조선대에서 최소한의 역량을 집중함으로써 대중적 보위를 형성하고 대회를 성사시켰다.

다음은 3자연대를 확고히 고수한다는 것이었다. 3자연대는 통일운동의 처음이자 끝이다.
분단이라는 것이 제국주의의 반민족, 반민중적 탄압의 본질이라는 역사적 인식을 확고히 할 때 3자연대는 비로소 통일의 기반이자 초석이 됨을 알 수 있다.
8차 범민족대회는 이러한 3자연대 원칙을 지켜내고 빛내는 장이었다.

9. 1998년 9차 범민족대회와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위한 대축전

범민련은 날로 높아가는 7천만 겨레의 통일열기를 모아내고 90년대 연방통일조국건설의 전민족적 의지를 주동적으로 실현해 나가는데서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범민련 공동의장단 회의를 예년보다 앞당겨 1월 22-23일 중국 북경에서 개최해 올해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의 해'로 정하고 범민련 두리에 굳게 뭉쳐 90녀대 연방통일조국 건설을 위한 총력 투쟁에 나설 것을 7천만 겨레에게 호소하였다.

이북에 대해서는 군사적 압박과 경제봉쇄를 이남에 대해서는 국제통화기금을 앞세운 경제신탁통치와 내정간섭으로 조국반도 전역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미국과 김대중정권의 광폭한 탄압, 개량화 술책에도 7천만 겨레는 전민족이 합의한 조국통일 3대원칙을 견결히 틀어쥐고 나감으로써 9차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 성사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에 통일애국민중은 6월 6일 김대중정권의 원천봉쇄를 뚫고 <9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결성식>을 성사시켜내었으며 곧이어 지역추진본부결성식, 지역총련 통일축전, 국가보안법 철폐서명운동등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남북연석회의 50주년을 맞이하여 4.18 <남북연석회의 5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남북연석회의의 역사적 경험을 오늘에 되살려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 재산의 유무, 지역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실현하는 길에 온 민족이 떨쳐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이북이 남북연석회의 50주년을 맞이하여 제안한 <통일대축전>을 적극 환영하여 성사시키기 위한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에 김대중정권은 민간급의 자주적인 통일행사인 <통일대축전>에 범민련과 한총련을 배제한다고 함으로써 <통일대축전>을 판타내려 하였다.
이러한 김대중 정건의 민간통일운동 와해, 분열책동은 '민화협' 결성으로 극에 달하였다.
김대중정권은 이제까지 반공, 반북에 앞장서 왔던 관변단체들을 모아 '민화협'이라는 관변어용기구를 결성하여 민간통일운동을 분열와해시키고 통일대축전을 파탄내려고 함으로써 민족의 통일의지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범민련 남측본부와 통일애국민중은 <통일대축전>남측준비 위원회를 결성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통일대축전> 성사의 전민족적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투쟁에 과감히 나섰다.
기어이 통일애국민중은 8월 12일 험난한 관악산 산줄기를 타고 서울대에 입성함으로써 민족적 대단함과 조국통일의 의지를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5천여명의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속에서 진행된 9차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 전야제는 쏟아지는 폭우속에서도 민족의 통일열기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8월 15일 판문점에서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을 성사시켜내려는 통일애국민중의 판문점 진격투쟁을 헬기와 물대포, 최루탄 속에서도 한치의 동요도 없이 7천만 겨레의 조국통일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통일선봉대의 임진각 진출투쟁, 연신내에서 판문점 진격투쟁, 한총련 김대원, 황선대표의 방북투쟁, 문규현 신부의 축전 참가는 제 9차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을 명실공히 남과 북 해외 3자 연대의 장으로 빛내이고 통일애국민중에게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에 대한 신심을 안겨 통일애국민중의 과감한 투쟁을 통해 김대중정권의 반통일성이 여실히 드러났다.

김대중정권은 집권초기부터 상호주의니 뭐니 하면서 남북관계를 긴장시키더니 통일이후에도 주한미군을 주둔시켜야 한다고 역설하며 주한미군 주둔을 구걸하고, 겉으로는 남북의 평화와 교류, 협정울 떠들면서 수조원의 민중의 혈세로 무기를 사들이고 종족을 대상으로 전쟁놀음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김대중정권의 사대매국적이고 반통일적인 본질은 9차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 성사투쟁의 과정에서 만천하에 드러났다. 통일애국민중은 김대중정권의 광폭한 탄압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아감으로써 더 이상 김대중정권에 대한 그 어떤 기대와 환상도 가지지 않고 드팀없이 반통일세력과의 투쟁을 통해 조국통일을 안아와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금 되새겼다.

또한 9차 통일대축전 성사투쟁을 통해 기간 통일운동 선상에 존재하였던 '기만적인 대중화'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통일노선과 통일로 위장된 반통일노선을 잘라내고 올바른 통일운동의 길이 무엇인가를 대중적으로 확인되었다.
대중에 의거하여 조국통일 3대원칙을 튼튼히 거머쥐고 3자연대를 추진하였던 통일대축전과 9차 범민족대회는 김대중정권의 광폭한 폭압과 악조건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통일애국민중의 열기와 의지로 성대히 성사되었다. 이로서 기간 분열주의자들이 내걸었던 통일운동의 '대중화'라는 것은 탄압이 두려워 3자연대라는 통일운동의 기본과 원칙을 내던진 것이고 나아가서는 정권의 개량화 무력화 책동에 일로한 것임이 확연히 드러났다.

9차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을 통해 기간 통일운동선상의 분열과 혼탁함이 일소되고 원칙과 정도만이 승리의 보검임을 심어주었다. 또한 범민련의 위상이 확고히 다져지고 조국통일은 3자연대속에서 그 전진과 승리라 보장됨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9차 축전을 통해 민족의 통일기운은 비상히 높아지고 범민련 두리로 굳게 뭉쳐 반드시 90년대 연방통일조국을 안아오고야 말겠다는 민족의 통일의지 또한 꺽일줄 모르고 있다.
남과 북 해외 7천만 겨레는 모든 장애와 난관을 과감히 뚫고 나아갈 것이며 전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조국통일의 역사적 사명을 우리대에 이룩하고야 말 것이다.

제 9차 범민족대회와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위한 대축전 (서울대)
범민련은 날로 높아가는 7천만 겨레의 통일열기를 모아내고 90년대 연방통일조국건설의 전민족적 의지를 주동적으로 실현해 나가는데서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범민련 공동의장단 회의를 예년보다 앞당겨 1월 22-23일 중국 북경에서 개최해 올해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의 해'로 정하고 범민련 두리에 굳게 뭉쳐 90년대 연방통일조국 건설을 위한 총력 투쟁에 나설 것 을 7천만 겨레에게 호소하였다.
이북에 대해서는 군사적 압박과 경제봉쇄를 이남에 대해서는 국제통화기금을 앞세운 경제 신탁통치와 내정간섭으로 한반도 전역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미국과 김대중 정권의 광폭한 탄압, 개량화 술책에도 7천만 겨레는 전민족이 합의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지켜 나감 으로써 9차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 성사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남북연석회의 50주년을 맞이하여 4.18 <남북연석회의 5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남북연석회의의 역사적 경험을 오늘에 되살려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 재산의 유무, 지역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실현하는 길에 온 민족이 떨쳐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이북이 남북연석회의 50주년을 맞이하여 제안한 <통일대축전>을 적극 환영하여 성사시키기 위한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에 김대중 정권은 민간급의 자주적인 통일행사인 <통일대축전>에 범민련과 한총련을 배제 한다고 함으로써 <통일대축전>을 무산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김대중 정권의 민간통일운동 와해, 분열책동은 '민화협'의 결성으로 극에 달하였다.
김대중 정권은 이제까지 반공, 반북에 앞장서 왔던 관변단체들을 모아 '민화협'이라는 관변어용 기구를 결성하여 민간통일운동을 분열 와해시키고 통일대축전을 무산시키려 함으로써 민족의 통일의지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범민련 남측본부와 통일애국민중은 <통일대축전> 남측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통일대축전> 성사의 전민족적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투쟁에 과감히 나섰다.

통일애국민중은 8월 12일 험난한 관악산 산줄기를 타고 서울대에 입성함으로써 민족의 대단합과 조국통일의 의지를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5천여명의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속에서 진행된 9차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 전야제는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굽힘없이 민족의 통일열기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8월 15일 판문점에서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을 성사시켜 내려는 통일애국민중의 판문점 진격투쟁을 헬기와 물대포, 최루탄 속에서도 한치의 동요도 없이 7천만 겨레의 조국통일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통일선봉대의 임진각 진출투쟁, 연신내에서의 판문점 진격투쟁, 한총련 김대원, 황선대표의 방북투쟁, 문규현 신부의 축전 참가는 제 9차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을 명실공히 남과 북 해외 3자 연대의 장으로 빛내이고 통일애국민중에게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에 대한 확신을 안겨 주었다.

9차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을 통해 원칙과 정도를 지키는 통일투쟁만이 승리의 보검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범민련의 위상이 확고히 다져지고 조국통일은 3자연대 속에서 그 전진과 승리가 보장됨을 다시금 확인하는 장이었다.

10. 1999년 10차 범민족대회와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위한 대축전

1. 범민족통일대축전는 2000년대를 조국통일의 세기로 만들고자 하는 7천만 겨레의 통일의지를 세 계 만방에 과시한 역사상 가장 찬란한 대회였다.
다가오는 21세기를 조국통일의 세기, 민족번영의 세기로 맞이하고자 하는 7천만 겨레의 통일의지 를 세계만방에 과시한 거족적인 축제의 장, 전 민족의 대단결의 장, 조국통일 대투쟁의 장이었다.

2. 범민족통일대축전는 미국과 김대중정권의 전쟁책동, 민족분열, 탄압책동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민족자주, 민족대단결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미국과 일본, 김대중정권의 한반도 전쟁책동, 민족분열 책동을 분쇄하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전환적 국면을 열어내는 데서 커다란 의의를 남긴 역사적인 대회였다.

3. 범민족통일대축전는 조국통일 3대헌장을 폭넓게 합의확산하며 조국통일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대전기를 마련하였다.

4. 역대 대회사상 최상의 수준에서 3자연대를 이루어 민족대단결을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 대회였 다. 3자 연대가 민족대단결의 생명이며 조국통일의 지름길임을 다시 한번 확고히 다지는 대회였다.

5. 범민족통일대축전는 범민련의 조직력과 정치적 위상이 비상히 강화되었고 대중적 지반이 확대 되었다.
범민련의 위상과 역할을 민족대단결의 구심체로 더욱 비상히 높여냈으며 범민련 조직을 확대강화 하고 대중적 지반을 획기적으로 넓혀 통일운동을 한 차원 높은 궤도로 올려놓았다.

6. 범민련을 중심으로 일부 분열주의 세력의 책동을 분쇄하고 남측 통일애국세력의 통일단결을 이 루어냈다.
범민족통일대축전는 김대중정권의 탄압책동과 일부 분열주의 세력의 범민련 음해, 통일운동대오 분열책동을 대중적 힘으로 격파해 버리고 통일운동의 원칙과 신념을 확고히 다졌으며 범민련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단결을 새로운 높은 차원에서 실현시킨 대회였다.

7. 어느 해보다도 다양하고 왕성한 대중실천활동이 전개되어 통일운동의 대중화에 크나큰 기여를 한 범민족통일 대축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