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원인과 형성과정

1.시작하며

조국이 분단된 지도 반세기를 넘었다. 외세에 의해 조국의 혈맥과 지맥이 끊어진 때로부터 벌써 50년의 세월을 넘기고 있다. 어떤 이들은 분단 50년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통일을 말하면서도 분단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하기도 한다. 과연 분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냥 지나치는 가벼운 일상처럼 우리 민족의 삶 속에 큰 의미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분단 속에서도 잘 살고 있으니 굳이 통일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문제인가. 그러나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는 김남주 시인의 시에서처럼 분단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존재하면서 우리 민족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근원이 되고 있다.
분단은 외세의 지배를 온당한 것으로 왜곡하는 명분이 되고 있다. 분단으로 인해 미국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세계를 수호하는 수호자'로 되고 있고, 이 명분을 뒤집어 쓴 채 한국사회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 정치 경제적으로 종속된 한국의 운명은 오늘도 미국의 이익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으며, 민중들의 삶은 유린당하고 있다.
분단은 독재정치를 용인하고 민중들을 억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승만독재로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 김영삼 문민독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독재자들이 민중들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집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분단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왔다. 독재자들의 폭압정치에 저항한 사람들은 오늘도 빨갱이로 몰려 차디찬 감옥에서 살고 있는 반면에, 독재자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고대황실과도 같은 집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다. 분단은 또한 경제적 고통을 가중시키고 자립적 민족경제로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분단으로 인해 해마다 수조원의 천문학적 돈이 군사비로 지출되고 있으며 민중들의 세금 부담은 늘어가고 있다. IMF 체제에 들어선 올해에도 지난 해보다 12. 5%나 증가한 15조 5천억을 군사비로 책정하여 지출하였다. 민중들의 수입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도 세금 부담은 늘리면서 민중들의 경제적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분단은 일천만 이산가족의 고통의 근원이다. 분단으로 인해 천만 가족이 혈육과 헤어져 살아가고 있다. 해마다 명절이면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고향과 혈육을 그리워하고 한맺힌 이산의 아픔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누가 우리를 분열시켜 우리 민족을 이처럼 고통과 불행 속에서 살도록 만들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광복을 이룩한 그날부터, 우리 민족의 운명이 엇갈렸던 단독정부수립에 이르기까지 시기를 살펴보면서 분단이 누구에 의해, 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아보자.


이글은 우리민족 주체의 통일독립 투쟁과 노력을 주요하게 보면서 이를 탄압하며 분단을 강요한 외세의 개입과 영향을 파헤치는데 중점을 둘 것이다.
그리하여 '주체의 투쟁과 노력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어떻게 짓밟혔는가'와 '외세에 의해 조국이 분단되어 졌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분명히 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운명이 가늠지어졌던 해방 3년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분단의 형성과정을 더욱 전면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에 우리는 민족주체의 열망과 투쟁을 중심으로 해방 3년사를 고찰할 것이다. 아울러 3시기로 나누어 해방 3년사를 고찰하고자 한다.

조국통일의 문제는 전국적 차원에서 민족의 자주권을 실현하고 민족적 화해와 단합을 실현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분단의 본질은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이다. 왜 조국통일이 '계급문제'가 아니라 '민족문제'인지, 민족의 자주권을 실현하는 문제가 왜 핵심인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원인과 형성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식이 실천을 전제로 하는 것이야 한다. 실천으로 나타나지 않는 인식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민족주체세력의 열망과 투쟁, 저항의지를 되살리는 것도 오늘 통일의 노정에서 우리의 지혜와 힘을 다하고자 함이요, 분단과정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도 오늘 통일투쟁에서 실천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2. 해방직후부터 유엔이관까지

1) 식민지배하의 상황과 해방의 의미
1945년 8월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었다. 조국의 해방은 단지 빼앗긴 '조선'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일이 아니었다. 조국이 해방됨으로써 36년간에 걸친 일제의 식민통치가 끝장나고 우리 민족은 자유와 광명을 찾았으며, 조선 민중은 나라의 주인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보람찬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일제의 조선 강점과 가혹한 식민지 통치로 우리 민족은 나라 잃은 노예적 처지에서 억압과 착취, 수탈을 당하며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야만 하였다.
일제 식민통치 36년간 조선 민중은 가혹한 파쇼적 억압을 받았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자마자 식민통치의 본거지로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조선 민중의 초보적인 인권마저도 박탈하였다. 일제 식민통치 기간동안 조선 민중은 언론, 출판, 시위, 결사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기고 일제의 군대와 헌병, 경찰 등의 폭압기구들로 무참한 탄압을 받았다.(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통계연보」에 따르면 1911년부터 1918년까지의 《범죄즉결》 총건수는 33만 25건, 연인원 46만 1,442명에 이르고 있으며, 1919년에는 검거인원수가 7만 9,343명, 1929년에는 13만 8,020명에 이르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식민지 조선에 대한 파쇼적 폭압통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 시기 일제는 조선주둔 일본군과 경찰을 증편하여 군경에 의한 폭압을 자행하고 위협하였는데, 1940년대에는 그 규모가 군대는 23만 여명, 경찰은 3만 5,239명에 달하였다. 이와 함께 저항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어용조직을 조작하여 친일행위를 강제하였으며, 일본인으로 조선인들을 감시하며 크고 작은 일을 망라하여 반일적 움직임을 철저히 차단, 탄압하였다.


일제는 가혹한 식민통치와 함께 사상문화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주의식을 말살하고 식민통치의 안정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1911년 8월에 《조선교육령》을 공포하면서 식민지노예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1920년에는 학령아동의 취학률이 겨우 4.6%에 불과하였다. 일제는 38년 4월을 기해서는 조선어 사용을 전면으로 금지하여 민족말살정책을 노골화하였으며 '내선일체론', '창씨 개명', 신사참배 등의 악질적인 민족말살책동을 감행하였다. 또한 일제는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을 저해하였으며, 고분, 왕릉은 물론 사찰, 지방 서당에 이르기까지 전국 곳곳에서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파괴하거나 도굴 약탈해 갔다. 나아가 일제는 우리 역사를 왜곡, 편찬하면서까지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려 하였다.

일제의 강도적인 착취와 수탈로 조선민중은 생명을 영위하는 것조차 힘겨운 식민지 노예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사회의 물질경제적 모든 명맥을 자기들의 수중에 넣고는 식민지 초과이윤을 착취하였다.

일제는 「회사령」(1910년 12월 공포, 1920년 4월 철폐), 「광업령」(1915년 공포)을 통해 조선의 민족공업 발전을 억제하고 일본자본의 대대적인 침투를 보장하였으며, 1920년대 후반기에는 조선의 전체 공업투자액의 90%이상을 일본 자본이 장악하였다.
또한 일제는 그나마 생산되는 제품들도 원료와 반제품들로 한정시켜 조선경제를 일본경제의 부속물로 편입시켰으며, 전통적인 수공업마저 파산시켜 조선경제의 정상적인 발전의 길을 완전히 차단하였다. 공업을 완전히 장악한 일제는 조선의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다. 조선의 노동자들 대부분은 하루에 12∼18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했지만,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 또는 1/3에도 미치지 못했다. 아울러, 그 임금마저도 벌금과 각종 명목으로 빼앗겼으며, 노동자들의 가장 초보적인 요구 또한 무자비하게 탄압을 받았다.


일제는 노동자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농촌도 극심하게 수탈하였다. 일제는 1910년부터 약 9년에 걸쳐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면서 「동양척식회사」등의 토지약탈기관을 설치하고 토지를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당시 총경지면적의 20%가 일본인 회사난 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200정보(1정보는 3000평) 이상의 땅을 가진 대지주의 81%가 일본인이었다.
또한 일제는 이른바 '공출'로 일컬어지는 식량수탈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다. (이 '공출'에 의해 1927∼1931년 당시 쌀 총생산량의 12%를 강탈당했으며, 말기에 접어드는 1941년에는 43%, 42년에는 45%, 43년에는 55%를 강탈당한데 이어, 44년에는 64%에 이르는 수탈을 당하였다.) 이러한 식량수탈로 농민들은 일년 내내 굶주리는 생활을 하였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증대되어 1940년대에 들어서는 전체농가의 77%의 농가가 기아에 허덕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일제는 이러한 억압과 착취, 수탈로도 모자라 '강제징용', '강제징병'으로 수많은 조선인을 노동과 전쟁터로 내몰았으며, 특히 조선여인들을 이른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하여 일본군의 더러운 욕망의 배출구로 유린하였다.
이 모든 상황이 나라의 주권을 상실한 데서 나온 식민지 노예의 비참한 삶이었다. 조국이 해방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자주적인 민족독립국가를 건설해야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조국이 해방됨으로써 또한 우리민족은 외세로 인해 차단당했던 사회의 자주적 발전을 이룩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18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자본주의적 요소가 점차 눈에 띄게 성장하였다.
상품생산이 증대되고 전국적으로 화폐유통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19세기 초에는 상업자본이 현저하게 형성되었다. 광업(철광과 금, 은, 동)과 금속가공업이 증가하고 그 경영에서 점차 자본주의적 방법이 적용되었다. 20세기 초에는 방직, 제지등에서 회사형태의 기업들이 생겨났으며 기계설비들이 도입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상업대부와 저당 업무를 담당하는 은행들이 생겨났으며 1903년 경에는 조선은행을 비롯한 다섯 개의 은행이 설립되었다. 농촌경리에서도 생산량이 증대되면서 상품생산이 늘어났으며 특용작물의 매매량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요소는 점점 더 확대되었으나 봉건지배층에 의해 그 자본주의적 발전이 저해되고 있었다. 그러나 봉건제도를 반대하는 반봉건 투쟁이 일어나고 날로 확산되면서 조선 사회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로 점차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봉건국가 조선은 구미 자본주의와 일제로부터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였고,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과 식민정책으로 자본주의로의 정상적 발전을 차단당한 채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전락하였다. 그 결과, 농촌에서는 봉건적 토유소유관계가 온존·강화되었으며 어느 정도 발전된 근대적 산업조차 일제의 수중에 장악되어 조선은 일본경제에 편입된 한부분, 완전한 부속물로 되었다.

조국 광복으로 우리 민족은 외세로 인해 차단당했던 조선 사회의 자주적 발전을 실현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제를 바탕으로 우리 민족은 해방 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

2) 해방, 조선민족의 피어린 투쟁의 결과
흔히들 조선의 해방을 일제 패망에서 야기된 결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미, 소를 비롯한 국제진영의 승리에 따른 결과이고 해방정국에서 미, 소 양국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는다.
물론 해방은 일본 제국주의 파시즘의 필연적 패배로 인한 결과이기도 했다. 일제는 혹독한 식민정책과 침략으로 전 세계와 대결을 벌임으로써 스스로 사면초가의 위기를 불러 일으켰으며, 자국내에서조차 억압과 탄압의 강화로 국민적 지지를 상실함으로써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유럽 전선에서 승리한 미국, 소련을 비롯한 국제 세력이 일제에 대한 공격을 대대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는 무조건 항복을 내걸었으며, 일본의 급격한 패망은 조선의 해방의 시기를 앞당기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조국의 해방은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의 피어린 반일 투쟁의 성과였다.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우리 민족은 한순간도 그치지 않고 반일민족해방투쟁 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 이전에 반일투쟁은 주로 시위와 폭동, 봉기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특히 1919년 3월 봉기에는 전국에 걸쳐 수백만 민중이 떨쳐일어나 조선민족은 결코 일제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노동자·농민·청년학생들이 파업투쟁과 소작쟁의, 동맹휴업등의 투쟁을 끊임없이 진행하였다. 30년대에 접어들면서 반일민족해방투쟁은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정책이 강화되자, 조선민중들이 직접 무장을 손에 들고 일제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항일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항일무장부대가 조직됨으로써 반일투쟁은 정연한 체계하에 조직적으로 전개되었고, 일제와의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항일무장부대는 백두산 일대를 거점으로 하면서 만주와 간도에서 일제를 위협하면서 투쟁하였으며 넓게는 연해주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 걸쳐 끈질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항일무장대의 출몰횟수는 2만 4000여회, 전투참여 연인원은 136만 9000여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항일무장부대의 투쟁은 일제의 대륙침략에 상당한 장애를 조성하였고 국내 조선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투쟁의지를 고무하면서 민족해방을 위한 전진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적 영향으로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민중들의 반일투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노동운동의 경우 1931∼35년 사이에 920여건의 파업이 일어나고 7만 929명에 달하는 인원이 참가하였는데, 이는 1920년대 파업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많았다. 또한 대규모 공장에서 파업투쟁이 강화되었는데 노동조건의 개선, 8시간 노동제실시, 민족적 차별대우 철폐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투쟁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정치투쟁의 성격을 띠면서 전개되었는데 일제의 식민지배를 반대하는 데로 모아졌다. 농민들의 투쟁도 강화되었는데, 1931∼35년 사이에 350여건의 대중적 소작쟁의가 일어나고 약 1만 8000여명의 농민들이 이에 참여하였다. 또한 지하농민조합의 형태를 띠면서 조직체계를 잘 갖추면서 효율적인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소작권 박탈과 고리대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악질 지주와 일제통치기관을 습격하는 투쟁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일제에 대항하였다. 청년학생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민중들도 동맹휴학, 독서회를 조직하였으며,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는 전단을 배포하고 반일투쟁을 연일 전개하였다. 이러한 민중들의 투쟁은 1936년 5월 '조국광복회'라는 반일민족통일전선으로 이어짐으로써 더욱 더 조직적이고 대중적으로 반일투쟁을 전개하는데까지 이르렀다.


1940년대에 이르러 일제의 말기적인 정책이 강화되면서 반일민족해방투쟁은 한층더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일제의 파쇼적 정책과 탄압에 대해 우리 민족은 '조국광복이 멀지 않았다',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자'며 낙관을 가지고 투쟁하면서 조국광복을 위한 준비를 동시에 진행하였다. 수차례에 걸쳐 공격작전을 전개하면서 국내로의 진공을 감행하였던 항일무장부대는 마침내 1945년 8월 최후공격작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악독한 식민통치를 허물기 위한 민중들의 총궐기투쟁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동맹'이 결성되어 해방을 위한 준비가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투쟁은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개척하여 결국 일제로부터 해방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다.

3) 해방 후 자주적 민족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
해방직후부터 우리 민족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적 민족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 돌입하였다. 그 흐름은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꾸준히 준비해온 세력들에 의해 나타났다.
전황이 시시각각 불리하게 돌아가고 패망이 임박하자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1944년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조국광복을 준비해오던 여운형을 행정권의 인수책임자로 선택하면서 자신들이 평화적으로 철수하기를 원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여운형은 즉각 '건국준비위원회' (이하 '건준')를 조직하여 행정권 인수 의사를 밝힌 다음, 치안과 행정에 관한 권한을 총독부로부터 이양받았다. 이는 총독부로부터 사실상의 항복을 받아낸 것으로서 권력기구의 등장과 자주적인 민족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우리 민족의 준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일제패망을 낙관하면서 줄기차게 광복을 준비해 왔던 조선민중은 해방과 동시에 전국적 범위에서 '인민위원회'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인민위원회는 민중들의 자발적인 의사와 결정에 의해 조직된 지방자치기관으로서 행정과 치안 등을 독자적으로 집행하였을 뿐만아니라 실질적인 통치기능을 수행하였다. 인민위원회는 나름의 정연한 조직체계를 갖추고 지역의 특성에 따라 여러 부서를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일제로부터 재산을 접수하는 일까지 있었다. 또한 인민위원회는 그 범위와 구성면에서 자주적 민족국가의 권력의 모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는 전국 시, 군, 면의 90%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조직되었고 그 구성도 일부 계급이나 계층에 치우치거나 일부 사상에 치우친 것이 아닌 각계각층의 민족성원모두를 망라한 명실상부한 자치기관이었다.

이러한 인민위원회에서 우리 민족의 힘과 능력, 해방을 위한 준비정도는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다.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건국사업과 함께 우리 민족,민중은 자신들의 힘으로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한 적극적 개혁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공장에서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조합노동자들은 일제의 파괴로부터 공장을 지키고 접수하여 자주적 관리를 단행하였다. 또한 농민들도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일본인들과 친일지주들로부터 토지를 되찾거나 소작료를 인하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또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중의 자발적인 치안조직이 조직되었으며, 강제징병된 사병들을 중심으로 국군준비대가 창설되었으며 군사훈련에 돌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해방직후의 정치정세는 근로민중을 비롯한 애국민주세력이 지주, 매판자본가, 민족반역자를 비롯한 사대매국세력을 고립시키면서 일제의 식민잔재 청산과 참다운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수행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1945년 9월 8일 미국이 38도선 이남을 점령하면서 정국은 조선민중의 염원과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를 식민지화, 군사기지화하려는 미국의 정책이 일제의 무장해제라는 미명하에 서서히 진행되었다.

미국은 38도선 이남을 점령하기 하루 전날, 맥아더 사령부는 포고 제 1호를 발표하면서 한반도 점령의 첫발을 내딛었다. 포고 제 1호의 주내용은 ①38도선 이남 지역에 대해 군정을 실시한다는 것, ②모든 공무원의 정상업무 수행과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호보존해야한다는 것, ③미군정의 명령에 일체 복종할 것과 이에 불복시 가차없이 엄벌에 처한다는 것으로 되어있다.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국은 포고 제1호의 내용대로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들을 그대로 이어받아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지주, 매판자본가, 친일·친미파, 민족반역자 등의 사대매국세력을 끌어모아 자신의 정치적 지배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을 부인하고 인민위원회를 해산시키고 탄압하였다. ('인공'은 미국의 진주에 앞서 조선민중들의 주도권을 위해 여운형을 중심으로 창건되었는데, 일제 법률의 완전한 철폐, 친일반역자 및 민족반역자의 토지 몰수, 철도·통신·금융기관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정책시안을 공표하면서 자주적인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과 그 모습을 내외에 시위하였다.
그러나 '인공'은 친미사대주의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내세우는 등 민족주체성을 확고히 정립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하였고 결국은 사대매국세력들을 재결집시킬 수 있는 단초를 남기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일제가 우리 민족으로부터 약탈해 간 자산, 이른바 '적산'을 약탈하고 친일반역자와 친미사대분자들에게 할당분배하여 새로운 식민지배체제 구축을 위한 포석을 전개하였다.


한편, 북도 미군점령 전의 이남처럼 해방과 더불어 광범위하게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물론 소련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지만 인민위원회에 권한을 이양하고 간섭을 배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남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에 적대적인 정부가 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소련측의 판단(실제로 해방정국에서 대다수 국민들은 국호에 있어서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호하였으며 정권형태에서도 인민위원회형태를 선호하고 있었다.)과 당시 소련의 정책이 동유럽에 집중된 데서 기인된 것으로 파악된다.

1946년 2월 북한에서는 북조선 민주주의 각 정당, 사회단체, 행정국 및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표들이 확대협의회를 열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였다. 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한 전역을 포괄하는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최초의 중앙권력기관이었다. 권력의 문제를 해결한 후 북한에서는 본격적인 식민잔재 청산과 민주주의적 개혁조치들이 단행되었다.

가장 먼저 단행된 조치는 토지개혁이었다. 토지개혁은 1946년 3월 「북조선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고 농촌위원회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으로 단행되었는데, 일제와 민족반역자, 5정보 이상의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다. 그 결과 북한 총경지면적의 53%에 해당하는 약 1백만 정보의 토지가 무상으로 몰수되었고 그중 98만 여 정보가 농가 총수의 70%에 해당하는 고농, 토지없는 농민, 토지적은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되었다. 이러한 토지개혁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핵심사업으로서 봉건적인 토지소유관계를 철폐하였다.

토지개혁에 이어 46년 6월에는 8시간 노동제, 사회보장보험, 근로조건 개선등을 규정한 「노동법령」이, 7월에는 축첩, 매음, 여아 살해 등의 일체의 봉건적 여성착취를 금지한 「남녀평등권법령」이 공포, 시행되었다. 또한 8월에는 「중요산업의 국유화령」이 공포되어 실시되었는데, 일제와 민족반역자, 매판자본가가 소유했던 1,034개의 중요산업시설이 무상으로 몰수되어 국유화되었다. 그 결과 일제와 민족반역자, 매판자본가들의 경제적 지반이 완전히 청산되었다. 또한 47년 경에는 교육체계가 정비되고 문맹퇴치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남북의 양상은 외세의 개입과 간섭에 의한 결과였다. 외세의 개입과 간섭은 우리 민족,민중의 운명을 또다시 노예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려 하고 있었다.

외세의 개입과 간섭의 부당성은 먼저 38도선에서 나타났다. 38도선은 소련의 남하에 대응할 방편을 찾던 미국이 급조하여 내놓은 임시선이었다. 미국은 수백년간 도읍지였던 서울을 포함하는 위도상의 좌표로서 38도선을 그어놓고 소련에 '일제의 무장해제'라는 명목을 내세워 제안하였으며, 소련은 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서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민족의 운명이 결정될 위기에 이르렀다.

미제의 점령으로 38도선은 '일제의 무장해제'를 위한 형식적인 분계선이 아니라 남과 북의 통일적 발전을 가로막는 실질적인 분단선으로 변화하면서 자주적인 민족독립국가건설을 위해 투쟁하던 조선민중의 투쟁은 남과 북이 각기 다른 환경에서 각이한 형식과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남과 북은 투쟁에 있어서는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임시위원회의 건설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각계각층의 전국적 조직의 결성에서도 잘 드러난다. 1945년 11월 전국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 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이하 '전평')가 결성되었으며, 12월에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하 '전농')이 결성되었다. 이외에도 전국청년단체총동맹, 전국부녀총동맹, 조선문화단체총동맹, 학병동맹 등의 다양한 대중단체들이 건설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성된 각종 민주적 대중단체들은 일부정당과 손잡고 상설적인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
이북도 조직에 있어서는 직업동맹, 근로동맹, 민주청년동맹 등 각계각층의 대중단체가 건설되고 이들의 상설적인 공동전선으로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지만, 투쟁에 있어서는 이남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 전개되고 있었다. 외세의 개입과 간섭의 부당성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도 잘 드러난다.


1945년 12월 '일제의 무장해제'라는 명목으로 분열된 한반도의 재통일에 관한 강대국간의 국제협정인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렸는데, 3상회의의 결정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같다.

삼상회의의 결정은 우리 민족의 의사와 기대와는 관계없이 민족의 운명이 강대국의 손에 의해 결정되고 처리된다는 데서 조선의 자주권을 유린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미소양국의 분할하에 놓여있던 조선으로서는 통일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왜곡하여 국내에 전달함으로써 이른바 '탁치논쟁'의 불을 지피면서 우리 민족의 내부분열을 조장하고 식민지배를 위한 포석을 진행하고 있었다.
1945년 12월 30일 AP발 보도가 국내의 한 일간신문에 대서특필로 장식되었다. "신탁통치 결정, 소련이 이를 제안". 이 보도가 나오자마자 국내는 들끓었다. 46년 새해 벽두부터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이른바 '반탁시위'가 잇달았다. 이를 기화로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하던 친일반역자들이 다시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이들은 미군정의 보호하에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허울을 쓰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작하였으며 연일 "소련은 신탁통치를 강조하였고 미국은 즉각적인 독립을 옹호하였다"라는 왜곡과 날조를 거듭하였다. (엄밀히 말해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1943년 얄타회담에서 미국의 루즈벨트였다. 그는 종전 후 조선문제를 놓고 30년의 신탁통치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오히려 당시 소련의 스탈린이 신탁통치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면서 이를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국면은 반탁의 허울을 쓴 3상회의 결정 반대세력과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의 수립을 중심으로 하는 3상회의 지지세력으로 나누어지면서 민족내부의 분열을 조장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반탁운동은 반소운동과 연결되면서 3상회의 결정 지지는 곧 소련에 조국을 팔아먹는 매국행위로 간주되고 3상회의 지지세력에 대한 탄압과 테러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는 미국이 의도한 대로였다.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자신의 식민지화, 군사기지화가 차질을 빚게 되자 소련의 영향력을 거세하여 자신의 야욕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사대매국세력이 위기에 몰리자 이를 반전시키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중들의 열망을 차단해자신의 야욕를 실현하려고 음모적으로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과 날조에 의한 반탁운동은 3상회의 진행의 전모와 결정 내용이 정확히 전달되면서 민족반역자들과 일부 민족주의자를 제외하고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지지로 반전되었다.
46년 1월 26일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측대표인 스티코프 중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의 전말을 공개하였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신탁통치를 제안했던 것은 미국이었으며, 미국의 제안에 의하면 신탁통치는 10년까지 지속될 수도 있었을 뿐만아니라 미국은 신탁통치에 앞서 조선 전체의 통일민족정부 수립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반탁운동은 급격하게 허물어졌고 3상회의 결정지지대열은 꾸준히 확대되었다. 노동자, 농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적 인사들도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하고 나섬으로써 미제와 그에 결탁한 사대매국세력을 타격하였다.


외세의 개입과 간섭은 결국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나타나고 미국은 일방적으로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함으로써 우리 민족,민중의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 수립 의지와 열망을 완전히 거세하려 하였다.

1946년 3월에 시작된 미소공동위원회는 형식적인 1차 위원회 이후 사실상의 결렬을 전제로한 2차 위원회가 47년 5월 덕수궁에서 재개되었다. 결렬은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1차 미소공위가 진행중이던 46년 4월부터 미국은 단독정부 수립을 들고 나섰으며 46년 6월에는 미 국무장관 마샬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표명하였다.
46년 6월 3일 미국의 충실한 대변자였던 이승만은 정읍발언(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남쪽만의 임시정부라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되도록 하여야 한다.)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였다. 이처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시점에서 진행된 2차 미소공위는 사실상의 결렬을 전제로 타협에 대한 모색에 불과했다. 그리고 2차 미소공위는 결렬되었다.
표면상의 결렬이유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조선 임시정부 협의 위원회에 참여할 정당 및 사회단체의 규정을 둘러 싼 이견차이였지만, 본질적으로는 단독정부수립과 책임 회피 및 전가를 위한 면책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의도대로 미국의 거수기이자 사교단체인 유엔으로 조선문제가 이관됨으로써 조선은 자주적인 민족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의 염원과 기대가 좌절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3. 유엔이관부터 남북연석회의까지

47년 9월 미국은 일방적으로 조선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또한 그 해 10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막을 내림으로써 미소양국의 협력관계는 1년 6개월만에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미국에 의한 조선문제의 유엔이관은 미소의 협력관계의 붕괴에 따른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결정이 아닌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사전의 계획에 의한 치밀한 과정이었다.

47년 봄, 미국은 막대한 전쟁특수로 축적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는 의도를 전세계에 드러낸다.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으로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의 대소련, 대공산주의 봉쇄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선언은 대소봉쇄, 공산주의확산 방지라는 미명아래 전세계의 맹주로 군림하려는 미국의 세계 제패전략의 일환이었다.
미국은 당시 국무장관 마샬이 제안한 '마샬플랜'에 입각하여 대규모의 대유럽 원조를 실시하였다. 이는 유럽에서의 공산주의의 확산을 봉쇄하고 서독을 대소전진기지화 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였는데, 유럽 선진제국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결과도 가져왔다. 또한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미명아래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국의 식민지로 재편하거나 반공친미정권을 조작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세계 제패전략, 적극적인 대소반공노선은 한반도에서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미국은 대륙진출과 대소련봉쇄의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조선을 자신들의 전략적 거점으로 삼기 위해 한반도 전체의 식민지화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조선 민중의 드높은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열망과 노력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도가 좌초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일단 한반도 남단만이라도 확보해야 한다는 38도선 이남의 식민지화 구상을 꾀하고 이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구상은 결국 단독정부수립으로 구체화되었고, 결국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함으로써 보다 현실적인 과정으로 전변되었다.
조선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조선의 정세는 매우 긴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자주적 민족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우리 민족민중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될 뿐만 아니라 해방된 조선의 운명이 우리 민족 자신의 힘과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세에 의해 결정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한 우리 민족은 계급과 당파,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의 생명인 자주권을 지키고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공동의 행동과 투쟁을 진행하였다.
1947년 9월 조선문제의 유엔 상정을 앞두고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던 우리 민족민중은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유엔 이관이 결정되자 즉각적인 반대투쟁과 자주적인 민족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거족적인 투쟁에 돌입하였다.
9월 30일 38도선 이남의 민주적 정당·사회단체의 상설적인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미소 양군의 동시철병을 촉구했고 10월 18일에는 근로인민당, 사회민주당, 민주한독당, 민중동맹, 신진당이 공동성명을 통하여 즉각적인 미소 양군의 철수, 통일정권 수립을 위한 전국적 총선거 준비기구의 구성,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의 남북교류등을 제창하였다. 이어 11월 2일에는 반탁운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김구의 지도하에 있던 한국독립당을 비롯한 온건중도세력들까지도 나서서 미소 양군의 철병 촉구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였다.
사상과 이념, 계급과 당파는 다를지라도 민족의 운명이 외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데는 모두가 일치하였으며, 이러한 민족주체성에 근거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투쟁에 의해 미국과 이에 결탁한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친미세력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되었고 날이 갈수록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민족통일국가 수립의 열망과 요구는 높아만 갔다.
조선 민족민중의 거족적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끌고간 미국은 유엔에서도 심각한 비판에 봉착해야만 했는데, 이는 한반도에 반소, 반공정부 수립을 원하지 않았던 소련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사실상 유엔 이관 전까지의 소련의 대한반도정책은 소극적 개입과 방조였는데, 이유는 당시 조선민중의 정서와 준비정도에 비추어 반소, 반공정부가 건설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으로 판단된다.)

유엔 운영위원회에서 소련대표는 미국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이하 '삼상회의') 결정을 준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파기했다고까지 주장했다. 소련대표의 주장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삼상회의'의 결정에 의한 것이므로 미소공위의 회담이 불충분하다면 4대 후원국들(미, 영, 중, 소)에 조선문제를 회부해야 하는데도 미국이 아무런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유엔에 조선문제를 상정하여 '삼상회의' 결정을 파기하였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미국은 4대 후원국에 조선문제를 회부할 수 없는 필연적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4대 후원국회의가 미국의 결정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보다는 불리하거나 별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실제로 4대 후원국 중 미, 소를 제외한 두 개의 후원국(영, 중)이 각기 국내문제에 직면하여 미국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2차 대전 중의 심각한 피해에 대한 전후 복구문제에 빠져 있었으며 중국은 국공내전으로 국민당정권이 패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국의 결정이 제대로 관철되리라는 보장이 없었고 또한 미국의 결정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될 수도 있었던 모스크바 회의마저도 미국의 의도가 관철되지 못하였다는 피해의식에서 감히 4대 후원국에 조선문제를 회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소련대표는 조선문제는 유엔 총회안건으로는 상정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일국의 내정문제나 국제조약이 이루어진 전후처리문제는 총회 의제로 될 수 없다는 유엔헌장에 의거한 지적이었다. 이러한 소련의 주장에 사회주의 진영의 6개 회원국이 지지해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동맹국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유엔 운영위원회는 조선문제를 유엔 총회의 심의안건으로 상정하였다.

조선문제가 정치위원회에 회부되어 정식으로 심의되자, 소련대표는 다시 모든 외국군이 동시에 철수하고 조선인들이 자신의 정부를 아무런 개입없이 수립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 제안은 조선문제를 조선 민족의 손에 맡기자는 상당히 원칙적이면서도 당시 조선 민족민중의 염원에 대체로 부합하는 대안적 제안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제안에 대해 군대의 철수는 시기상조라면서 일축하면서 정치위원회에서는 물론 총회 본회의에서도 부결되었다. 당시 우리 민족민중이 유엔 이관을 반대하고 남북연합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던 상황에서 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는 미국으로서는 한반도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엔 본회의에서 소련대표는 조선의 대표 없이 조선문제를 토의할 수 없다며 당사자인 조선인 대표를 참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 또한 미국은 반대하였고 대안으로 유엔 조선임시위원단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회의에 조선인 대표를 참석시킨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요구를 일방적으로 묵살한 미국으로서는 자신들의 야욕과 음모를 전세계에 드러내놓는 것이었기 때문에 격렬하게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는 결국 유엔 조선임시위원단을 설치하고 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여기서 선출된 대표로 통일정부를 구성한다는 미국의 제안이 찬성 43, 반대 9, 기권 6으로 통과되고 말았다.
이렇게 채택된 유엔 총회 결의안은 지금까지 조선 민족주체역량이 혼신을 기울였던 자주적 민족통일국가 건설의 열망과 노력을 무시하고 짓밟는 결정이었고 우리 민중의 능력과 민족성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민중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주동적으로 준비하고 광복을 안아왔을 뿐 아니라 자체의 힘으로 해방된 조선에 참다운 민족자주와 참다운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열망으로 반제 반봉건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민족민중의 투쟁과 노력을 점령한 그날로부터 부정하고 탄압해 나선 것이 바로 미국이었고, 형식적인 38도선을 실질적인 분단선으로 고정시킨 것도 미국이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민중의 열망과 노력을 짓밟은 외세가 오히려 자신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라고 나온 것이 바로 유엔 결의안, 즉 미국의 제안이었던 것이다. 외세의 감시하에 실시되는 총선거란 바로 미국의 입맛에 맞는 선거, 자신들이 의도하는 대로 진행되는 선거를 의미했다.
또한 유엔 총회 결의안은 유엔이 전면에 나섬으로써 조선문제에 관한 미국의 일차적인 책임을 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책임을 오히려 우리 민족과 소련에 전가하는 결의안이었다.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설치된 조선임시위원단은 그 구성과 활동에서 너무도 졸속적이었다. 임시위원단은 9개국(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 대표로 구성되었지만, 우크라이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의 동맹국들이었고, 따라서 임시위원단의 활동도 미국의 사주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유엔 총회 결의안을 우리 민족민중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미국은 애초부터 결의안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사실 이러한 결의는 38도선 이남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명분쌓기와 책임전가의 무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유엔 총회 결의안에 대한 반대와 자주적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투쟁은 이듬해인 1948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 다.
48년 1월 유엔 임시위원단이 입국을 했는데 이날부터 전국적으로 입국거부투쟁이 이루어졌다. 38도선 이북뿐만 아니라 이남에서도 노동자를 비롯한 각계 민중들이 파업과 시위로 입국거부와 남북연합에 의한 자주적인 통일정부 수립을 열망하고 투쟁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아무런 권한도 없는 유엔 소총회를 개최하여 이남만의 단독선거를 결정하고 만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미국의 사주아래 있던 유엔 임시위원단마저도 반대하고 결정과정에서 수많은 나라들이 반대와 거부를 행사함으로써 미국의 고립과 위신을 실추시켰지만 미국은 강행하여 결정하였다.
유엔 소총회에 의한 미국의 단독선거 결정은 명백히 유엔 운영방침에도 어긋나는 결정이었지만, 이로서 우리 민족의 운명이 영구분단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민족이 분단되고 다시 식민지화될 위기에 처하자 우리 민족은 사상과 이념, 지역과 계급을 넘어선 거족적 투쟁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지펴 올렸다.
투쟁의 불길은 이른바 2·7 구국투쟁으로 시작되었다. 48년 2월 7일, 「전평」 산하의 30만 노동자들이 일제히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하였고 농민들은 무장소조를 조직하면서 봉기의 형태로까지 나아갔으며, 학생들도 동맹휴학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조직하였다. 투쟁에 참여한 인원은 이남에서만도 무려 200만 명에 달했고 그 주장의 주요내용은 ①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유엔 조선위원단을 반대한다. ②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③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 통일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인에게 맡기라. ④국제 제국주의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반동파를 타도하자. ⑤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⑥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라. ⑦노동임금을 배로 올리라. ⑧노동법령과 사회보험제를 즉각 실시하라. ⑨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등으로 나타났다.

우리 민족민중의 투쟁이 미군정의 모든 행정업무를 마비시키면서 거부하는 데까지 나아가자 미국은 무자비한 탄압에 나서 100 여명을 무참히 학살하고 8,500 여명에 달하는 애국민중을 검거, 투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 민족민중의 투쟁은 더욱 거족적인 투쟁으로 치달으며 민족자주권을 위한 투쟁을 보다 높은 단계로 전변시키면서 전개되었다.
김구, 김규식, 조소앙을 비롯한 온건중도세력들도 함께 나서 단독선거 반대를 표명하고 나섰으며, 48년 3월에 들어서면서 한반도 전체가 단독선거 반대를 주장하며 시위와 군중집회를 열었다. 수백만의 군중이 참가한 이남에서의 투쟁과 마찬가지로 이북에서도 수백만의 군중들이 군중집회를 열며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나섰다.(이북의 군중집회에 참여한 연인원은 평양 42만, 평남 35만, 평북 50만, 함남 29만, 함북 48만, 황해 100만, 강원 42만에 달했다.)

이러한 투쟁은 외세의 개입과 농간에서 벗어나 민족주체성에 근거하여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남북진영의 총단결론으로 나아갔다. 전체 조선민중이 마침내 하나가 되어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정세는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려는 전체 조선민중과 이남을 식민지화하려는 미국 및 소수 분열세력간의 격렬하고 치열한 대립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거족적인 투쟁은 48년 3월 25일 이북의 노동당, 조선민주당, 천도교청우당, 직업동맹, 농민동맹 등 9개 정당 사회단체가 소속되어 있는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이 남북연석회의를 제안함으로써 새롭게 발전하였다. 남북간의 구체적인 단결의 모색과 행동통일에 접근한 것이다.


남북연석회의 제안에 이남에서는 한민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이 일제히 환영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100여 개의 사회단체는 물론 저명한 문화인, 종교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통일애국세력이 호응해 나섰다.
마침내 4월 19일, 평양에서 남북의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하여 '남북한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연석회의는 김일성의 개막연설로부터 시작되어 26일까지는 공식회의를, 27일부터 30일까지는 남북요인회담을 개최하여 단독선거 분쇄와 통일정부수립의 방도에 대해 폭넓게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러한 남북연석회의는 내용에 있어서는 우리 민족이 통일국가 수립에 합의하고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 수립의 열망과 능력을 전세계에 시위·공포하는 것이었으며 실천에 있어서는 민족자주권을 위한 전민족의 단결된 투쟁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남북연석회의 결과 남북의 통일애국역량의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 다.

이와 함께 공동성명서에 서명한 모든 정당·사회단체와 개인이 참가하는 '남조선 단독선거반대투쟁 전국위원회'를 결성하였는데, 이로서 우리 민족은 남과 북의 모든 통일애국역량이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단결과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남북연합의 기운이 높아지는 속에서도 미국은 민족해방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우리 민족민중들의 투쟁을 무력을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탄압하였고, 이러한 탄압에 맞서 우리 민중은 무장을 하고 나섬으로써 투쟁은 무장봉기형태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변화하였다. 무장투쟁은 2·7 구국투쟁 이후 농촌을 거점으로 형성되었던 초보적인 무장조직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어 제주도의 4·3 봉기를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미국과 조선민중간의 투쟁은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남북의 통일애국역량이 모두 나서 거족적인 단독선거 반대 투쟁을 전개함과 동시에 지역적으로는 무장봉기의 형태로 미국의 지배를 거부해 나섰다.

이렇듯 조선 민족민중의 거족적이고 치열한 투쟁에 밀리던 미제는 마침내 48년 5월 10일 우리 민족의 자주적 의사와 요구를 완전히 묵살한채 강도적으로 단독선거를 감행함으로써 단독정부 조작으로 나아갔다.

4. 단독선거부터 단독정부수립까지

48년 4월, 민족의 운명을 놓고 사상과 이념, 노선과 지역의 차이를 넘어 거족적인 단합과 행동의 통일을 보장하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가 성과적으로 개최됨으로써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우리 민족의 노력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연석회의'는 민족자주성의 명백한 표출이었다. 외세의 개입과 간섭으로 민족의 운명이 또다시 식민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위기에서 외세를 반대 배격하고 민족의 자주적인 힘으로 조선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자주선언을 온 겨레와 전 세계에 표방한 것이다.
또한 '연석회의'는 민족의 운명 앞에서 사상과 이념,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어 전 민족이 조직적 단결과 행동에 나섬으로써 민족대단결을 실현하였다.

민족자주와 민족대단결의 기치아래 진행된 '연석회의'로 다급해진 것은 미국과 이에 결탁한 친일친미 사대매국세력이었다. 미국은 세계적인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편법으로 강행한 '유엔감시하의 단독선거'결정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친미사대와 단독선거에 목숨을 걸고 있던 사대매국세력의 운명은 장대 끝에 매달려 경각에 달했다. 이에 미국과 사대세력은 파쇼적인 폭압과 강권으로 거족적인 통일정부수립 투쟁을 탄압하고 단독선거 강행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였다.

미국은 전 미군에게 특별경계령을 시달하여 철저히 무장하도록 조치하였으며 민중들의 저항을 압살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증파하였다. 또한 모든 경찰과 국방경비대를 중무장시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민중들을 영장없이 구속수사할 수 있는 파쇼적 권한을 부여하였으며, 이에 저항하는 민중들에 대해서는 살육과 테러행위를 자행하였다.
또한 미국은 이른바 '향토보위단'이라는 관제조직을 조작하고 만 18세 이상 55세 이하의 모든 남자들을 강제로 편입시켜 민중들을 강제적으로 선거 투표장으로 밀어넣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미국의 단독선거 실시를 반대하는 언론인 다수를 피검하여 중형을 선고하였으며 모든 우편물을 검열하고 통행금지 시간을 연장하여 한반도 남단을 파쇼적 암흑천지로 만들었다.
이처럼 미국은 우리 민족민중의 단독선거 반대와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을 폭력적으로 탄압압살하는 한편, 유엔임시조선위원단마저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하였다. 유엔 조선위원단은 모든 업무를 감시당하고 한국인과의 접촉을 차단당한채 모든 정보를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위원단에게 보내지는 우편물까지도 검열을 당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엔 조선위원단은 4월 28일 회의에서 미국의 지시에 따라 5월 10일 거행될 단독선거를 감시할 것이라고 결정함으로써 사실상 미국의 수중에서 놀아나는 단독선거 감행을 승인하였다.


이러한 미국과 사대매국세력의 단독선거 강행에 맞서 우리 민족민중은 결사적으로 투쟁하였다.
남북연석회의로 조직된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투쟁 전국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민족민중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거족적인 투쟁에 나섰다.

시민동포들에게! 경애하는 부모형제들이여! 오늘 당신들의 아들, 딸, 동생들은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독립과 완전한 해방을 위하여! 당신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국주의와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들의 궁극적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이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에 따라 매국적 단독선거를 분쇄하기 위한 민중들의 투쟁은 총파업과 폭동, 동맹휴업등의 형태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5월 8일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 총파업위원회'의 호소와 주도아래 노동자, 사무원들의 총파업이 진행되었고, 연이어 농촌에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며, 학생들은 동맹휴업으로 이에 호응하였다. 모든 애국민중들의 투쟁으로 철도와 선박이 정지되고 체신과 교통이 마비되었으며, 도로와 교량은 끊어지고 발전소들이 파괴되었으며 시장이 철시되었다.
이러한 민중들의 투쟁양상과 규모는 통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미군정의 공식발표에 의하면 5월 7일부터 5월 10일까지의 단독선거 반대투쟁으로 인해 학살된 민중의 수는 도합 350명, 검거투옥된 수는 5,425명 달했다. 통계 자체로도 상당한 규모인데, 진실이 은폐당하고 있었던 당시의 사정을 고려하면 그 규모와 투쟁양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매국적 단독선거를 분쇄하기 위한 민중들의 투쟁은 또한 무장투쟁으로까지 진전되었다.
'2·7구국투쟁'이후 농촌을 거점으로 야산대라는 초보적인 무장조직이 등장하였다. 이는 미국의 폭력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고 투쟁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민중들의 자위조직이었다. 이러한 야산대의 활동은 미국과 이승만일파의 살육과 테러행위로 인해 점점 더 격화되었고 농민들은 폭동의 형태로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진행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폭력적인 탄압이 쏟아졌다.
따라서 폭력탄압과 무력진압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은 자연스럽게 무장을 하고 봉기를 단행하는 데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4월 3일 제주도의 무장봉기는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민중들의 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구호를 들고 제주도 민중들은 일제히 투쟁을 감행하여 인민위원회를 재건하고 지역자치권력을 장악하였다. 이에 놀란 미군정은 제주도에 병력을 증원 급파하고 해안을 봉쇄하며 계엄령을 선포하여 항쟁 주모자 색출과 민중학살에 들어갔다. 경찰과 테러집단은 무고한 주민들을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으며 임산부와 어린아이까지 참살하였다.
이러한 피의 학살과 탄압속에서도 제주도 민중들은 단독선거를 파탄시키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투표당일 읍사무소, 경찰서, 관청등이 습격되고 투표소와 선거사무소등이 타격을 받았으며 선거인명부, 투표용지, 투표함이 불태워졌다. 그리하여 선거는 파탄되었으며, 그나마 진행된 투표에서도 투표함에는 단 몇 표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진행된 무장봉기는 이후 테러와 무력진압이 격화되면서 '동족 학살에 동참할 수 없다'는 국방경비대내의 애국적 군인들과 결합되면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이후에까지 계속되었으며 이후 전국적인 무장투쟁의 봉화가 되었다.

매국적 단독선거를 분쇄하기 위한 민중들의 투쟁은 또한 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투쟁으로 진행되었다.
단독선거가 노골화되고 임박한 상황에서 우리 민중들은 선거기관을 공격하였으며, 매국적인 단선 입후보자를 처단하고 선거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였으며, 투표장과 미군정 행정기관에 대한 타격을 감행하였다. 민중들의 투쟁에 의하여 46개소의 투표장과 73개소의 경찰서, 행정관청이 완전히 파괴·소각되었으며, 수백 개소의 경찰서와 관청, 선거사무소들이 일제히 타격을 받았다.

마침내 5월 10일 망국적인 단독선거가 미국과 사대매국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행되었다.
선거당일 미국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탱크와 기관총은 물론, 함대와 정찰기, 대형폭격기까지 동원하여 저항하는 민중들을 압살하는 한편, 모든 민중들을 위협하고 협박하는 무력적 시위를 감행하였다.
선거투표장에는 바리케이트와 기관총을 배치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경찰과 향보단을 동원하여 민중들을 강제로 투표장까지 끌어내었다. 이렇게 끌려나온 민중들도 '누구의 이름밑에 찍어야 하는지'를 물어보고 투표하였고, 후보자의 이름을 볼 것도 없이 강제로 도장을 찍었다.
투표장에서의 폭압과 공포분위기는 개표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개표 중에라도 선거거부와 선거무효를 주장하는 민중들의 저항과 투쟁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장총으로 무장한 무장경관과 사복경관, 향보단원들로 개표장을 가득메워 경비를 강화하였다.


이처럼 강압과 불법으로 진행된 단독선거를 유엔조선위원단은 '위원단의 감시하에 자유롭게 진행된 선거였다'고 허위보고하여 미국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5·10 단독선거는 반민중적 매국선거였다.
단독선거의 매국성과 반민중성은 선거 결과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먼저 정당별로 보면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의가 54석, 한민당이 29석, 대동청년단이 12석, 민족청년당이 6석, 대한노동연맹이 2석, 기타군소정당이 10석을 차지하였으며, 나머지 85석은 무소속이 차지하였다.
또한 출신별로 보면 지주가 83석으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자본가가 32석, 친일관리가 23석, 사무원이 20석, 문화계가 9석, 종교계가 6석, 기타 25석으로 대부분이 친일친미적인 인사들이었고 노동자나 농민의 대표는 한 명도 없었다.

이처럼 강도적으로 진행된 매국적 5·10단선을 통해 선출된 이른바 제헌의원은 무소속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에 불과하였다. 이는 단독선거에 대다수의 애국적 인사들이 불참한 것으로부터 나온 당연한 결과였고 전체 민중의 의사를 반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명이었다.

5·10 단선은 또한 불법적 폭력선거였다.
단독선거의 불법성과 폭력성은 선거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승만을 비롯한 매국세력은 경쟁후보가 없다는 핑계로 자동당선을 선언하거나 선거권자들을 매수하여 당선되었다. 경쟁후보가 없더라도 선거는 진행되어야 하는데 이를 무시하였을 뿐 아니라 경쟁후보도 강제적으로 사퇴시키는 불법적 폭거를 감행하였다. 이승만은 같은 선거구에 등록한 다른 입후보자인 최능진을 테러하여 입후보를 그만두게 하였으며, 내무부장관이 된 유치영은 400만원으로, 장면은 1,600만원으로 선거권자들을 매수하여 당선되었다.
선거를 반대하는 민중들을 폭력과 테러로 탄압한 데서 그 불법성과 폭력성은 극에 달했다. 미국과 이승만을 비롯한 매국세력들은 청년들과 부랑자들로 테러단체를 조직하여 민중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곤봉과 몽둥이등을 들고 나다니면서 선거 반대를 주장하거나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곤봉세례와 몽둥이세례를 안겨주었으며 이를 말리는 사람들에게도 폭력을 행하고 연행하였다. 미군정의 암묵적 동의와 직접적 지시로 진행된 테러로 선거는 공포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선거직후 모든 민주적 정당과 사회단체가 "공포와 불안 속에서 강요당한 금번 선거는 무효화되어야 하며, 그러한 불법선거에 의해 조작된 단독정부 역시 승인할 수 없다"고 선언하여 그 불법성과 폭력성을 만천하에 공개하였다.


이렇듯 진행된 매국적인 단선은 민중들에 의해 완전히 파탄되었다. 미군정하의 선거위원회 발표에 의하면 대구, 함양 등을 비롯한 경상남북도는 전체 유권자의 10∼30%만이 강압에 못이겨 선거에 참여하였고, 전국의 선거구 중 30여 개의 선거구는 투표가 진행된 지 10여 일이 지나도록 투표결과가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과 사대매국세력은 온갖 불법과 폭력 속에서 그나마도 제대로 치러지지 않은 5·10단선을 '자유분위기에서 진행된 총선거'라며 합법성을 날조하고, 5월 31일 마침내 친일 친미사대분자들로 득실대는 매국적 반동국회인 이른바 '제헌국회'를 조작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우리 민족민중은 단선이후에도 통일정부 수립을 포기하지 않고 조국의 자주적인 통일을 위해 투쟁하였다.
48년 4월에 이어 다시 한번 남북연석회의가 소집되어 48년 6월 29일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가 개최되었다. 회의에서는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전체 민족민중의 의사를 대표하는 합법적인 통일적 중앙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민족분열정책과 신식민주의정책을 폭로하고 규탄하였다. 또한 회의에서는 강압적으로 실시된 단독선거의 무효를 선언한 다음 전조선의 선거를 실시하고 이에 기초하여 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하고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2차 연석회의의 결정에 따라 우리 민족민중은 단독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미군의 즉각적인 철수와 이승만 타도의 구호를 들고 투쟁하였다. 또한 전체 민족민중의 의사를 대표하는 통일적 중앙정부를 내오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고 이를 위해 투쟁하였다.

한편, 제헌국회는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한 뒤 헌법 기초작업에 들어가 7월 17일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 헌법에 기초하여 국회에서는 투표도 없이 자동당선된 이승만이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8월 15일 마침내 단독정부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단독정부 수립이 선포되자마자 미국은 계획대로 '단독정부 수립이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하면서 유엔총회에 강요하여 단독정부를 '조선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부당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유엔에 의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은 미국과 그 거수동맹국들만의 인정을 받은 정부가 탄생했음을 알리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애국적 민족민중은 그 누구도 단독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부 수립이후에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사대매국세력에 의해 단독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자주적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우리 민족민중의 의지와 열망은 좌절당하게 되었고, 이남은 미국의 신식민주의 지배체제하에서 자주권을 상실한 채 또다시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며, 우리 민족민중은 분단의 모순을 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5. 나오며

이상에서 우리는 분단이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또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한 그 분단에 저항한 세력은 또 누구였는지, 어떻게 저항하고 투쟁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분단의 주범과 그들이 저지른 만행과 죄악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분단시대, 분단조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당연한 사상감정이다. 더 나아가 분단의 원흉이며 지금도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세력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통일조국을 염원하는 우리 민족민중의 당연하고도 의연한 임무이자 과제이다.
분단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서 다시금 분노하는 것은 분단의 원흉에 맞서 투쟁하는 우리 민족민중에 지금도 들씌워지는 족쇄들이다.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애쓰는 통일애국세력에게 법적, 제도적 족쇄와 폭압이 쏟아지고 있는 지금, 우리 민족민중이 피의 항쟁과 고귀한 희생을 치르면서 투쟁하였던 통일애국의 길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바로 분단의 역사, 매국의 역사, 예속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의 원인과 그 형성과정을 살펴보면서 분단의 주범이 과연 누구였는지를 명확히 인식하면서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교훈은 제국주의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환상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겪으며 제국주의적 지배에 대해 분노해왔던 우리 민족민중은 국제민주진영의 일원으로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에 대해 그 제국주의적 본성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민족의 자주와 통일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을 해방초기 한때나마 가졌었다. 그러나 그 사소한 기대와 환상이 적극적인 반미, 반제 투쟁의 예각을 무디게 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의 음모를 조기에 파악하고 이를 저지·파탄시키지 못함으로써 미국의 음모가 한반도에서 관철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분단이라는 민족전체의 고통을 통해 뼈져리게 깨닫게 하였다.
그 분단의 주범이 지금도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에서 미국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조국통일을 위해 가장 먼저 가져야 될 자세와 태도라 하겠다.


두 번째 교훈은 민족대단결만이 우리 민족이 살길이라는 점이다.
제국주의의 민족분열정책으로 인해 해방정국에서 우리 민족민중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흔들렸으며 이에 사대매국세력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게 되었다.
일제 패망후 경각에 달한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사대매국세력은 미국의 분열정책에 적극 동조하여 민족내부를 갈라놓고자 획책하였으며, 미국은 이들을 통해 분열정책을 관철시키고 있었다. 민족이 단결하지 못하고 있을 때 미국은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남내부도 갈라놓았다. 단결된 역량인 이북이 하나의 목소리를 낸 반면, 이남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함으로 하여 미제의 단선, 단정음모를 저지,파탄시킬 수 없었으며, 결국 분단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온 민족이 거족적으로 단결할 때만이 우리 민족민중이 살아갈 수 있으며 민족의 자주도, 통일도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따라서 거족적 단결로 미국의 식민지배를 거부하고 전국적 차원에서 민족의 자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 교훈은 자기의 운명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주체성에 대한 자각이다.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야만 한다는 진리를 분단의 형성과정에서 절실히 느낄 수 있다. 민족민중의 자주적 길은 미국도, 소련도, 중국도, 영국도 아닌 우리 민족민중의 힘에 의해서만 개척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다른 나라에 기대서는 자기 민족과 민중의 이해와 요구가 관철될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었다. 또한 침략과 약탈을 본성으로 하는 제국주의에 우리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는 미제를 등에 업고 민족의 운명을 유린한 사대매국세력에게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주체성에 대한 자각, 즉 변혁은 매개 나라 민중이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역사가 주는 산 교훈이며 이후 우리가 지녀야할 원칙이라고 하겠다.
미국의 이남 강점으로 시작된 분단이 어느덧 반세기를 훌쩍 넘어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민족의 절박한 과제이다. 분단이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상황에서 또 다시 민족의 운명을 외세에 좌우당할 수 없다. 따라서 통일만은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실현해야만 할 것이다.


끝으로, 분단을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점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먼저, 해방 후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을 바라보는 데서 나타나는 잘못된 시각이다.
어떤 사람들은 해방 후 미국의 대한정책이 국무부와 미군정청(맥아더 사령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제대로 일관성있게 진행되지 못했다고 바라보면서 한반도 남단의 식민지화는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정책이 아니며 분단 또한 우연적 산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한 주장이 있는데 미국의 대한정책이 미국내 매파와 비둘기파의 갈등에 따라 변화할 수 있으며, 실제로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경향들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합당하지 못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미국은 루즈벨트가 신탁통치를 제안했던 그 순간부터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기도하고 있었으며, 해방 이후 그들에게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남만이라도 점령하려 획책하였다. 비록 미국무부와 현지 통치세력인 미군정청간의 일시적 혼란(이남에서의 좌우합작을 둘러싼 이견)은 있었을 지 모르나 한반도남단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보인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정책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즉, 한반도 남단을 식민지화하는데서 강경하게 전개할 것인가, 아니면 좀 합리적인 외피를 덧씌울 것인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일시적인 부분정책의 차이를 확대하여 미국의 대한반도 식민지화 기도를 우연적 산물로 규정하는 것은 미국의 침략적 본성을 외면하거나 인위적으로 덮어두려는 반동적 견해라 하겠다.

또한 분단의 원인을 체제간의 대립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분단이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소련과 미국의 대립으로 인해 생긴 체제대립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체제간의 대립을 분단의 원인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45년 이후의 우리 민족민중의 자주적 민족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데서 나타나는 잘못된 시각이다.
물론 해방 후 우리 민족 내부에도 좌-우의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좌우의 대립은 오히려 애국과 매국의 대립, 자주와 예속에의 대립, 통일과 분열의 대립을 희석시키고 체제대결로 몰아가려는 미국과 사대매국세력의 의도적 조작이었다. 한반도를 대소 전진기지로 삼으려고 했던 미국은 한반도 내에 친미반공정부를 조작하기 위해 기도하는 한편, 민족을 이간질시키는 민족분열정책을 획책하였다. 이러한 민족분열정책에 휘말려 좌익과 우익의 대립, 찬반탁 탁치논쟁이 있었지만, 결국 여기서도 대립의 기본축은 민족의 자주권을 실현하려는 우리 민족과 이를 짓밟고 한반도에 자신들의 패권을 추구하려는 미국과의 대립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우리 민족민중이 이념과 사상의 차이를 넘어 하나로 단결하여 미국의 단선, 단정 수립 음모에 맞서 투쟁한 것은 분단이 결코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과 미국과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 또한 해방 정국에서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주동적으로 광복과 민족독립국가 건설을 준비해왔던 우리 민족의 노력을 외세가 간섭하고 방해하지 않았다면 우리 민족은 자주적인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되는 대립은 소련과 미국의 대립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외세와 외세의 개입을 반대하는 우리 민족사이의 대립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분단을 체제간의 대립으로 바라보는 것은 모든 사회현상을 계급대립의 측면에서 바라보려고 하는 데서 나온 잘못된 시각으로서 민족모순마저도 계급모순으로 환원시켜 바라보려는 그릇된 견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