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자 료 모 음

력사학학회 독도문제와 관련한 글 발표

(평양 8월1일발 조선중앙통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회는 독도문제와 관련하여 7월 31일 글을 발표하였다.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그 누구도 침범할수 없는 조선의 신성한 령토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되살아 난 군국주의망령들이 령토팽창야망에 들떠 미쳐 날뛰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의 신성불가침의 령토인 독도를 빼앗아 내려고 갖은 권모술수를 다해 온 일본반동들은 오늘 독도침탈책동을 그 어느때보다 로골적으로 감행하고 있으며 그들의 해외팽창야망은 무모한 단계에로 치닫고 있다.일본반동들은 최근 8년동안에만도 일본국회와 시마네현의회에서 무려 150여차에 걸쳐 독도문제를 론의하였으며 일본외무성은 독도를 일본고유의 령토라고 밝힌 <2000년외교청서>라는것까지 내돌리였고 지난 2월 일본 시마네현 지사 스미따라는 자는 현의회에서 <다께시마(독도)는 력사적으로 보나 국제법에 비추어 보나 일본의 고유한 령토>라고 떠벌이였다.
지어 그들은 무력에 의한 <죽도(독도)탈취>설까지 고창하면서 <자위대>무력을 동원하여 독도침탈을 위한 상륙훈련까지 감행하였다.

력사적으로 일본통치배들이 들고 나온 <죽도령유권>이란 그 어떤 타당한 근거도 없는 파렴치한 날조이고 외곡이며 억지였다.지금까지 알려 진 조선과 일본의 옛 문헌들에 독도를 일본의 령토로 규정한것은 없고 오히려 그것이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확증해 주는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늘도 저들에게 불리한것은 <의문스럽다>,<편자의 오해>라고 부정해 나서면서 파산된지 오랜 낡은 넉두리를 되뇌이고 있다.40여년간의 악독한 식민지통치로 조선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재난과 불행을 들씌운 일본이 자기의 죄악에 찬 과거에 대하여 성실히 사죄하고 보상할 대신 침략적인 <죽도령유권>을 운운하는것은 우리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에 대한 란폭한 침해이며 인류량심과 정의에 대한 참을수 없는 우롱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는 이런 실정에서 독도가 력사적으로 조선의 불가분의 령토임을 다시한번 론술하고 일본의 독도침탈죄행을 단죄하며 일본반동들의 파렴치한 력사외곡행위를 규탄하고저 이 글을 낸다.

1.독도는 력사적으로 조선의 불가분리의 령토

우리 나라의 독도령유는 근 1,500년의 오랜 력사를 가지고 있다.
독도를 맨 처음 발견하고 대대로 개척경영한 나라는 조선이며 그것을 국토에 편입하고 독도령유를 내외에 선포한 첫 국가도 조선이였다.
독도는 자연지리적으로나 인간의 경제생활령역에서 그리고 국가법적지위에서 력대적으로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간주되여 왔다.고려때에 와서 우산도라고 불리웠고 리조 중기,후기에 오면서 삼봉도,가지도,독도 등으로 불리우게 되였다.울릉도는 무릉,우릉 등 여러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독도는 2개의 큰 봉우리 바위섬(동도,서도)과 하나의 작은 봉우리 바위섬으로 이루어 져 있으며 섬은 전부 암초여서 나무 한그루 샘 하나 없다.따라서 사람이 정착하여 살수 없으나 중요한 어장이 있어 어로기가 되면 울릉도주민들이 이 섬에 건너 와 풍막을 치고 고기잡이를 하였다.
독도는 또한 맑은 날이면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바라보이는 위치에 있으므로 울릉도주민들은 자연히 독도를 울릉도에 붙어 있는 섬으로 생각하였으며 력대 왕조들도 항상 두 섬의 일을 함께 론하며 기록에 남기였다.

<고려사>에서 <우산,무릉은 본래 두개의 섬으로서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아 청명한 날이면 바라볼수 있다.>(권58 지리3 울진현)라고 하여 우산도와 무릉도가 서로 다른 두 섬이면서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두 섬을 함께 론하면서 그 섬들이 강원도 울진현에 속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바라보이는 독도가 그의 부속섬으로 간주되는것은 여러모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기에 울릉군수 심흥택은 1906년 3월 29일 일제의 독도강탈책동에 대한 보고서에서 <본군소속 독도>라고 명기하였으며 전라도의 애국지사 황현도 <매천야록>에서 <독도는 예로부터 울릉도에 속해 있었다.>고 쓰고 있다.(권5 광무 10년 4월)
당시 인민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1696년 동래 어민 안룡복이 송도에 기여 든 왜인들에게 <송도는 곧 우산도이며 우산도 역시 우리의 땅>(<숙종실록> 권30 22년 9월 무인)이라고 한 사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이렇듯 독도는 예로부터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간주되여 왔다.

독도가 조선의 령토로서 울릉도의 부속섬이라는데 대해서는 일본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즉 1870년 5월 일본외무성 성원들인 사다,모리야마,사이또 등이 제출한 조선에 대한 조사보고서에 <송도(독도)는 죽도(울릉도)의 린도>라고 하였고 1878년 12월 외무성 기록국장 와다나베와 공신국장 다나베 등의 의견서에서도 걎일본에서 송도라고 부르는 섬은 조선의 울릉도의 속도걌라고 지적하고 있다.이 사실은 독도가 법적으로나 관습상에서 울릉도의 속도로 간주되여 왔다는것을 말해 준다.

우리 나라의 독도령유는 시기에 따라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령유의 첫 시기는 6세기 초 우산국(우산도와 울릉도)을 정벌하고 복속시켜 조공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민족적동질성을 강화하여 온 시기이며 둘째 시기는 12세기 고려 중엽(인종-의종)이후 정부에서 관리들을 섬에 파견하여 섬을 직접 통치경영하던 시기이다.이 무렵에 우산국은 고려의 울진현소속으로 개편되고 본토주민들이 이주하여 섬을 충실히 개척하여 갔다.셋째 시기는 15세기 초 리조정부가 소극적인 <공도(섬을 비우는것)정책>을 실시하여 왜인들의 침범이 잦던 시기이며 넷째 시기는 19세기 말에 정부가 다시 적극적인 개척정책을 실시하고 독도를 울도군 부속섬으로 편입시킨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기까지이다.
독도는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통치에서 벗어 나면서 본토와 함께 다시 조선의 령유로 되였다.

6세기 초엽 울릉도에는 조선계통이주민들이 세운 우산국이라는 소국이 있었다.
우산국은 울릉도를 기본령역으로 하면서 독도까지 함께 지배하고 있었다.<증보문헌비고>에서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우산이 모두 우산국의 땅이며 우산은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즉 독도-인용자)이다.>라고 하여 우산국의 통치지역이 오늘의 울릉도와 독도를 포괄하고 있었음을 명백히 밝혀 주고 있다.
이 우산국은 중세 우리 나라 3국의 하나였던 신라에 의하여 512년 (지증왕 13년)에 통합되였다.<삼국사기>에 의하면 하슬라주 군주였던 이사부가 우산국사람들이 우직하여 힘으로는 굴복시킬수 없다고 하여 꾀를 써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복속시켰다고 한다.

신라에 귀속된 우산국은 그후 대대로 신라에 토산물을 보내면서 신라와의 복속관계를 유지하였다.
고려시기에도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변함 없는 우리의 령토였다.
고려왕조에 대한 우산국의 조공은 신라에 이어 계속되였으며 두 섬은 울진현에 소속되여 본토와 긴밀한 련계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 태조때 섬사람들이 공물을 보내온데 대하여 왕건은 그들에게 벼슬과 작위를 주었으며 1018년에 우산국이 동북녀진인들의 침입으로 농사를 망치게 되자 고려정부는 농기구를 보내주었고 다음해인 1019년에는 녀진인들의 침해로 륙지로 피난 온 사람들을 다시 섬으로 돌려 보내여 섬을 비우지 않도록 하였다.하지만 녀진인들의 로략질이 계속되여 륙지로 넘어 오는 사람들이 늘어 나자 1022년에는 그들을 례주(영덕)지방에 안착시키고 식량과 생활밑천을 보장해 주는 한편 영원히 본토의 군현민으로 편입시키기로 하였다.(<고려사> 권1 태조 13년 8월 무오,권4 현종 9년 11월 병인,10년 7월 기묘,13년 7월 병자,권58 울진현,<증보문헌비고> 권31)이것은 우산국민이 동족이였다는것을 말해 주며 우산국이 고려의 주권밑에 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그후에도 고려정부는 울릉도(독도도 포함하여)에 대한 주권행사를 계속하였다.

1141년 명주도 감창사 리양실을 울릉도에 보내여 진귀한 토산물을 가져 오도록 하였으며 1157년에도 울릉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개척하려는 의도로 명주 감창 김유립을 파견하여 울릉도를 조사하여 <다시 현에 편입>시키려고 하였다.
당시 페허로 된 촌락에 석불,석탑,철종 등이 남아 있은 사실은 본토의 문화가 섬에 깊이 침투보급되였다는것을 보여 준다.
최충헌집권시기(12세기 말-13세기 초)에는 륙지의 인민들을 이주시키는 조치를 취하였지만 사나운 풍랑에 배가 자주 뒤집히고 많은 인명피해를 내게 되여 중단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12세기 중엽경에 우산국이 조락되고 고려왕조가 울릉도일대를 직접 통치하게 되였다는것을 말한다.(<고려사> 권17 인종 19년 7월 기해,권18 의종 11년 5월 병자,<증보문헌비고> 권31)
그후 1273년에 대장군 강위보를 울릉도 석목사로 임명하여 재목원천을 탐사하게 하려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 지는것은 고려 말에도 울릉도가 독도와 함께 우리 인민에 의하여 계속 개척,리용되였음을 말해 준다.

리조시기에 들어 와서도 울릉도,독도는 의연히 강원도 울진현에 소속된 조선의 불가분의 령토였다.다만 봉건정부의 령유정책에 다소 변화가 있었을뿐인데 그것이 곧 섬을 비워 두는 <공도정책>이였다.
리조정부가 <공도정책>을 추구하게 된 주요한 원인은 고려 중엽이후 악랄하게 감행되고 있는 왜구의 침입과 봉건국가의 부역,조세부담을 피하여 섬으로 이주해 가는 주민이 많아 진 사정과 관련되여 있었다.
리조정부는 본토에 침입한 왜구들에 대하여 강경한 소탕전을 벌리는 동시에 울릉도에 대해서는 관리들을 보내여 섬주민을 소환하는 소극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정부는 1416년에 전 만호 김린우를 <무릉등처(울릉도,독도-인용자)안무사>로 파견하여 <류랑민>들을 데려 오도록 하였다.그후 봉건정부의 관리들속에서 섬주민들을 소환시키지 말고 식량과 농기구를 보장해 주면서 안착시키자는 의견이 제기되였지만 결국에는 섬을 비워 두기로 락착되고 말았다.(<태종실록> 권33 17년 2월 을축)

<공도정책>은 세종시기에도 계속 시행되여 1425년과 1438년 두차례에 걸쳐 86명의 남녀주민이 륙지로 송환되였다.(<세종실록> 권30 7년 10월 을유,권82 20년 7월 무술)이리하여 울릉도에는 점차적으로 사람이 상주하지 않게 되였다.
그러나 봉건정부는 <울릉등처>에 대한 주권행사를 계속하였다.
정부는 며채에 한번씩 수토관(조사관)을 파견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순찰하고 섬의 상태를 조사하였으며 수토관들은 토산물을 가져다 왕에게 바치였다.

15세기이후 실시된 봉건국가의 <공도정책>은 당시의 조성된 환경에서 왜구의 침략과 략탈로부터 섬주민들을 보호하며 령해섬들을 관리하기 위한 소극적인 방어책이긴 하였지만 결코 령유권의 포기는 아니였다.<공도정책>의 실시 그자체가 곧 령유권행사의 구체적인 표현이였다.
하지만 봉건정부의 이러한 소극적인 령유정책은 왜인들이 울릉도와 독도에 발 붙일수 있는 틈을 주었으며 <탈환>놀음을 벌리게 한 화단으로 되였다.왜인들은 섬이 비워 있는 틈을 타서 울릉도에 침입하여 해적행위를 일 삼게 되였으며 17세기 전반기에 와서는 울릉도를 일본섬인듯이 주장하는데까지 이르렀다.당시 그들은 울릉도를 죽도(다께시마),독도를 송도(마쯔시마)라고 제멋대로 이름을 붙여 부르고 1615년에는 교활하게도 <의죽도>(울릉도)를 탐측하려 한다고 하면서 2척의 배를 보내여 왔다.

이에 대하여 리조정부에서는 동래부사 박경업을 파견하여 일본이 말하는 <이른바 의죽도란 실은 우리 나라의 울릉도>이다.이것은 지리지에 명백히 밝혀 져 있거니와 울릉도가 신라,고려이래로 우리 나라의 령역이라는것을 모를바 아닐터인즉 감히 남의 땅을 넘겨다 보며 타고 앉으려 하니 무슨 고약한 마음인가고 규탄하였다.그러면서 <공도정책>이 결코 <타인(외국인)이 함부로 들어 와 사는것을 허용한것이 아님>을 선언하고 일본이 <우리 나라와 왕래하는 길은 오직 하나>,쯔시마-부산 문호만이며 그밖의 길로 오가는것은 <일체 해적선으로 취급>한다는것을 엄중히 경고함으로써 왜인들에게 울릉도에 대한 우리의 령유권을 확인시키였다.(<증보문헌비고> 권31 여지고 19)
이때 독도문제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으나 울릉도의 부속섬인 조건에서 자연히 함께 타결된것으로 볼수 있다.
그것은 그후 17세기 말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 싸운 동래 어민 안룡복의 투쟁자료를 통하여 잘 알수 있다.
1693년(숙종 19년) 호끼번주와의 1차담판을 통하여 울릉도가 조선의 섬이라는것을 인정시키고 <관백(에도막부의 쇼궁-인용자)>의 서계까지 받아 낸 안룡복은 그후 울릉도,독도문제가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1696년(숙종 22년)에 또다시 울릉도로 건너 갔다.그때 그는 비법적으로 울릉도에 침입한 왜인들이 송도에서 산다는 말을 듣고 <송도는 곧 우산도이며 우산도 역시 우리의 땅>이라고 하여 그들을 울릉도와 독도에서 모두 쫓아 낸 다음 오끼도를 거쳐 호끼번으로 가서 호끼번주와 두번째로 담판하였다.
안룡복은 이때 자기를 <울릉,우산 량도감세장>이라고 칭하고 이전에 울릉도,독도가 우리의 령토라는것을 일본이 인정하고 <관백>의 서계까지 내준데 대하여 상기시키면서 일본의 침범행위가 근절되지 않고 있는데 대하여 엄중히 항의하였다.이 엄연한 력사적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던 호끼번주는 두 섬에 대한 조선의 령유권을 다시금 인정하였으며 울릉도와 독도에 침범하였던 왜인 15명을 붙잡아 처벌하는 조치도 취하였다.(<숙종실록> 권30 22년 9월 무인)

죽도(울릉도)를 일본의 령토로 만들려는 왜인들의 책동에 대하여 리조정부는 령의정 남구만 등의 주장에 따라 강경한 외교공세를 벌리였다.
1693년 안룡복이 송환된후 개시된 외교공세는 주로 쯔시마도주를 대상으로 전개되였으나 1696년 1월에는 에도막부로 하여금 <죽도와 그밖의 한 섬(송도)>이 조선령토임을 공식확인하고 두 섬에 대한 왜인들의 침범을 엄금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리조정부는 또한 1697년 4월 령의정 류상운의 제의에 따라 순시제도를 재확정한후 3년에 1차씩 두 섬에 대한 순시를 강화하여 왜인들의 침범을 엄하게 단속하면서 주권행사를 중단하지 않았다.
하기에 명치유신후에도 일본정부는 독도의 조선령유를 계속 인정하 지 않을수 없었다.1878년 8월에 일본정부의 관리들이 나가사끼현의 시모무라와 지바현의 사이또가 정부에 <송도개척원>을 제기하였을 때 독도가 조선의 령토라는 리유로 그 청원을 기각한 사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이에 대하여 외무성의 공신국장 다나베는 다음과 같이 썼다.
<송도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명명한 섬이름으로서 실은 조선 울릉도에 속한 우산도이다.울릉도의 조선에 속함은 구정부시기에 갈등을 일으켜 문서왕복끝에 영구히 우리 소유로 하지 않겠다고 약정하였다.이것은 량국의 력사에 올라 있다.이제 리유없이 사람을 파견하여 순시한다는것은 남의 보물을 탐내는것과 같다.하물며 린접국경을 침범함에 있어서랴.>(<송도지의>)

이렇듯 리조정부는 <공도정책>을 실시하던 시기에도 울릉도,독도에 대한 령유권을 변함없이 행사하였으며 독도는 의연히 우산도로 불리우면서 울릉도와 함께 우리의 령역에 속해 있었다.이것은 <공도정책>이 결코 이 두 섬에 대한 주권포기가 아니였으며 독도는 무인도였어도 결코 주인 없는 <무주도>가 아니였음을 말해 준다.
리조정부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450여년간의 소극적인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개척정책을 실시한것은 1880년대 초부터였다.<안룡복사건>후 한동안 잠잠해 있던 왜인들은 명치유신이후 광란적으로 고창된 <정한론>에 편승하여 또다시 울릉도에 눈독을 들이게 되였다.그러한 가운데 1881년 5월 7명의 왜인이 울릉도에 침범하여 도벌행위를 하다가 정기적으로 울릉도를 순찰하던 리조정부의 수토관에 의하여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리조정부는 이 사건이 발생하자 곧 일본정부에 항의문을 보내는 한편 현지조사를 위하여 부호군 리규원을 울릉도검찰사로 하는 102명의 현지조사단을 1882년 4월 울릉도로 출발시키였다.리규원의 조사보고에 의하면 당시 울릉도에는 140명의 조선사람들외에 비법적으로 78명의 일본인들이 와 있었는데 그들은 <일본국의 송도>라는 표말까지 세워 놓고 있었다고 한다.(<일성록> 리태왕 신사년 5월 22일,<일본외교문서> 제14권,<울릉도 검찰일기>)이것은 두 정부간의 협약에 대한 파렴치한 배반이며 란폭한 도발이였다.사태의 엄중성을 깨달은 리조정부는 1882년 6월 일본정부에 다시 항의하는 한편 울릉도개척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웠다.그 주요내용을 보면 륙지의 인민들을 섬으로 이주시켜 농경지를 개척하며 울릉도의 행정관으로서 도장을 임명파견한다는것 등이였다.(<승정원개수일기> 광서 8년 8월 20일)그후 1883년 3월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을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사로 임명함으로써 리조정부는 울릉도개척사업에 한층 박차를 가하게 되였으며 당시 비법체류하고 있던 254명의 일본인들도 모두 철수시켰다.

정부의 적극적인 울릉도개척정책에 의하여 종래의 섬주민에 대한 강제쇄환정책,<공도정책>은 역전되여 본토 륙지주민들을 섬으로 이주시키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벌어 졌으며 섬을 개간하고 섬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사업도 공식적으로 진행되였다.리조정부의 내부관리 우용정의 보고에 의하면 1900년에 울릉도주민이 400여호에 1,700여명으로 대폭 늘어 났고 경작지는 7,700마지기(두락)로 확장되여 밀,보리와 콩,감자 등을 재배하였으며(<신동아> 2000년 5월호 <독도>)울릉도의 자랑인 우량목재들도 대대적으로 채벌되였다.
울릉도가 적극적으로 개척되면서 그 부속섬인 독도에 대한 관리와 리용,령유권도 더욱 공고해 졌다.울릉도주민들은 어로기가 되면 자연히 독도에 밀려 가 물개를 비롯한 그밖의 희귀한 물고기들을 잡았다.

1904년 11월 일본군함 <쯔시마>호가 독도를 측량하고 제출한 보고서에서 <매해 여름이 되면 울릉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섬에 건너 와서는 섬우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부근에서 어업에 종사한다>고 한것은 독도가 근대에 와서도 확고하게 울릉도의 부속섬으로서 우리 인민들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리용되고 있었다는것을 실증해 준다.
이처럼 독도를 먼저 발견하고 경영한것도 조선이였으며 그 섬을 조선의 행정구역안에 편입시키고 내외에 먼저 공포한 나라도 조선이였다.<삼국사기>와 <고려사>,<리조실록> 등 국가적인 정사들에 엄연히 우산국이래 우산도,삼봉도(1476년),가지도(1794년),독도(1881년이후) 등으로 기록되여 오면서 공식적으로 끊임없이 경영되여 왔으며 <여지지>와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 등 력대 지리서들과 력사문헌들에 우산도(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항상 강원도 울진현 섬조항에 나란히 명기된 사실은 독도가 신라이래로 조선의 령토였으며 고려때부터는 울진현에 편입되여 온 조선령토로 간주되여 왔다는것을 말해 준다.

특히 이 문헌들이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국가에 의한 관찬이라는것을 념두에 둘 때,또 그 문헌들이 일본과 중국에도 전래되여 그 나라들의 대조선외교사업의 중요한 기초적문헌으로 리용되였다는 사실 그리고 중요하게는 당시에 근대적인 국제법이 나올수 없었고 그것이 제정된 후에도 아직은 널리 알려 져 있지 않았던 조건에서 우의 문헌기록들은 명백히 대외적으로 국가의 공식문건의 성격을 띠며 국가적의지의 표시로 되는것이다.그런것만큼 국제법에서 말하는 령토권인정의 기본요건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당시의 력사적조건에 맞게 갖추어 졌다는것을 말한다.

그러나 리조정부는 1900년에 이르러 당시 알려 진 국제법체제의 요구에 맞게 독도의 령유권을 재확인하기 위하여 10월25일 칙령 제41호를 공포하여 독도에 대한 령유권을 재삼 명백히 선포하였다.그 주요조항은 다음과 같다.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할것
제1조.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야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야 관제중에 편입하고 군등(급)은 5등으로 할사
제2조. 군청...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죽서-인용자),석도(독도-인용자)를 관할할사 ...
제6조.본령은 반포일부터 시행할사
 광무 4년 10월 25일>
이 칙령 제41호는 정부신문인 <관보> 제1716호,광무 4년(1900년) 10월 27일부로 세계에 정식공포되였다.

석도는 돌섬의 한자표기이다.울릉도에 전라도이주민이 다수였는데 전라도사투리에서 돌을 독이라고 부른데서 독도는 돌섬을 한자음으로 표기한것이고 석도는 그 뜻을 한자로 적은것이다.
이리하여 칙령 제41호로써 신라이래 줄곧 조선의 령역으로 되여 온 독도는 다시금 온 세계에 자기의 소속을 명백히 선언하게 되였으며 근대 국제법의 요구에 맞게 조선의 령토임이 재확인되게 되였다.

2.독도에 대한 일본의 침범,강탈책동
독도는 신라때부터 조선령토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고 조선의 력대 왕조들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경영되여 왔으나 일본은 그것을 빼앗아 저들의 령토로 만들려고 집요하게 책동하였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령토침탈책동은 고려 후반기 왜구들의 울릉도침략으로부터 시작되였다.1379년에 왜구들이 울릉도에 침범하여 15일간이나 체류하면서 우리의 섬주민들을 살륙하고 재물을 략탈하였으며 임진왜란때에도 이곳에 침입하여 섬을 페허로 만들었다.이때에 물론 울릉도에 린접한 독도가 왜구들의 유린으로부터 제외될수 없었으리라는것은 명백하다.그러나 아직은 령토야망은 표면화되지 않았고 다만 울릉도와 독도의 섬 및 바다자원략탈을 기본으로 한 침략이였다.

령토를 빼앗아 보려는 책동은 17세기(광해군,숙종년간)부터 표면화되였는데 이 시기 침탈책동의 특징은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령유를 인정한 기초우에서 경영의 간판을 내걸고 장차 유리한 기회에 울릉도와 독도를 완전히 빼앗기 위한 터전을 닦아 나간데 있었다. 울릉도를 침탈하려는 책동은 1614년에 쯔시마도주가 <의죽도(울릉도)>의 일본령유를 주장해 나서는것으로부터 표면화되였다.이에 대하여 동래부사 윤수겸(그후에는 박경업)은 일본인들이 말하는 <의죽도>란 조선의 울릉도이며 따라서 그 섬에 드나드는 왜인을 해적으로 다스릴것임을 경고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일본은 일본인들이 울릉도와 독도에 드나드는것을 <월경죄>로 다스리는척 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리조정부의 <공도정책>을 악용하여 조선순시관에게 발각되지 않는 한 묵인하고 뒤에서 종용하는 량면정책을 실시하였다.일본 호끼번의 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이 에도막부로부터 <도해면허장>을 얻어 가지고 일본어부들을 울릉도,독도수역에 보내군 한것은 그 실례로 된다.(<도해면허장>이란 금지구역의 바다를 다닐수 있다는 허가장이지 남의 나라 땅을 드나들수 있다는 허가장이 아니며 그것을 발급한 자체가 울릉도수역에로의 출입이 공식적으로는 금지되고 있었다는 증거로 된다.)

1618년 호끼번의 오다니,무라가와가 막부의 승인밑에 인슈 즉 이나바번으로부터 죽도도해면허를 얻어 가지고 그후 70여년간 해마다 울릉도근해에 와서 어로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의 이 비법행위는 1692년에 조선인어부들에게 발각되여 저지되였으며 다음해에는 안룡복,박어둔을 비롯한 동래,울산어민들 40여명의 집단적항의에 의해 침입자들이 완전히 쫓겨 났다.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울릉도,독도를 빼앗으려는 령토적야망을 로골적으로 드러내 놓았다.

쯔시마도주 소 요시노부는 도망치는 왜선을 뒤쫓아 일본의 오끼섬과 호끼번에까지 가서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령유를 인정한 종전의 약속을 지킬것을 요구하여 싸운 안룡복과 박어둔을 구류압송해 보내면서 <귀국어민들이 본국(일본)의 죽도(울릉도)에 배를 타고> 왔기때문에 2명을 체포하여 보낸다는 글을 례조에 전해 왔으며(<증보문헌비고> 권31 여지고19) 동시에 죽도(울릉도)령유에 관한 교섭을 진행할것을 제기하였다.1694년에는 다찌바나를 보내여 조선사람들이 <일본의 죽도(울릉도)>에 함부로 와서 고기잡이를 하니 들어 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이것은 왜인들이 울릉도를 죽도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빼앗을 간계를 꾸미고 있다는것을 보여 주었다.
이에 대하여 소심한 관리들은 제2의 임진왜란이 일어 날가봐 신중하게 처리할것을 제기하였으나 령중추부사 남구만은 숙종왕에게 섬을 비워 두었다고 하여 <어찌 선대임금때부터 내려 오는 강토를 남에게 줄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왜놈의 교활한 간계에 단호히 대처할것을 제기하였다.

당시 사관은 이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철하게 평가하였다.
<왜인이 말하는 죽도는 바로 우리 나라의 울릉도로서 울릉이라는 명칭은 신라와 고려의 력사책과 중국사람들의 문집에도 나타나 있으니 그 유래가 아주 오래다.그 섬에서 대가 많이 나므로 죽도라는 이름도 있지만 실은 한 섬에 대한 두가지 이름이다.왜인이 울릉도라는 이름을 감추고 단지 죽도에서 고기잡이를 한다고 핑게하는것은 우리 나라로부터 그것을 허락한다는 회답을 받게 되면 그것을 증거로 삼아 섬을 차지하려는 꾀를 실현해 보려는것이였다.>(<숙종실록> 권26 숙종20년 2월 계유)
왜인들의 울릉도침탈책동은 그후 쯔시마도주가 죽고 새 도주가 에도에 가서 관백(쇼궁)에게 <죽도는 조선에 가까우니 호상 다투어서는 안된다>고 권고한후 한풀 꺾이였다가 결국 리조정부의 완강한 태도에 의하여 1696년 1월 에도정부가 <죽도와 그밖의 한 섬(독도)>이 조선의 땅이라는것을 인정하고 일본인들의 울릉도수역에로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리게 되였고 1698년에는 울릉도와 죽도가 <1도 2명(한섬의 두 이름)>이라는것을 인정하였으며 1699년에 문서교환이 완료됨으로써 일단 중지되였다.

쌍방은 그후 이 섬들에 나드는 왜인들을 <침범죄(월경죄)>로 다스리기로 약정하였으나 <공도정책>의 여파를 탄 개별적왜인들의 비법적인 출입과 그 수역에서의 어로는 계속되였다.왜인들은 순시제도의 공간을 리용하여 떼를 지어 밀려 왔다가는 쫓겨 나고 쫓겨 났다가는 또다시 밀려 오군 하였다.
19세기 후반기에 <정한론>이 대두하고 명치정부의 해외침략이 정책화되면서 독도에 대한 침탈책동은 점차 로골화되고 큰 규모에서 감행되였으며 리조정부가 1882년에 적극적인 독도개척정책으로 이행한 다음에도 일본인들의 위법행동은 그치지 않았다.
1900년에 우용정의 울릉도순찰시 144명의 일본인들이 11척의 배를 정박해 놓고 울릉도에 잠입하여 비법적인 자원략탈을 일 삼고 있었다.그들은 철수할것을 요구하는 울릉도주민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할 대신 칼을 휘두르며 반항하였으며 우리측의 정당한 요구에 대하여 자기들은 도감의 묵인하에 상업무역을 하고 있다고 항변해 나섰다.

로일전쟁시기에 일제는 비법적으로 독도에 해군의 망루(감시탑)를 설치했고 북부조선-울릉도-독도-일본본토에 이르는 해저전선을 부설했으며 일본의 도고함대는 독도에 의거하여 부근해양에서 로씨야원정함대를 격파하였다.이 사실을 당시 리조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일본정부도 아직은 이 로골적인 배신행위에 대하여 숨기고 있었다.
이 시기에도 일본은 독도에 대한 침략행위를 계속하였다.
그것은 나까이 기요자부로의 유명한 <독도임대청원>사실이 잘 말해 준다.
시마네현의 어업기업가인 나까이는 독도수역의 물개포획독점권을 얻기 위하여 1904년 9월에 농상무성에 <리양꼬섬(독도)차용에 관한 청원>을 제출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독도를 10년 기한으로 차용하여 물개잡이독점권을 가질수 있도록 구한국정부와 교섭해 줄것을 제기하였다.농상무성과 외무,내무성의 관리들은 그것이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알고 있었던것만큼 그 섬의 차용가능성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하면서 외면하였으나 유독 해군성만이 그에 흥미를 갖고 정부에 제출하였다고 한다.독도가 엄연히 조선의 령토이고 울릉도의 부속섬인 조건에서 이 문제는 오직 리조정부와의 협상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수 있었던것이다.나까이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1923년 7월 시마네현교육회에서 발행한 <시마네현지>에서는 <...나까이는 이 섬(독도)을 조선령토로 생각하고 상경하여 농상무성에 설명하여 동 정부(리조정부)에 임대청원을 하려고 하였다.>고 쓰고 있으며 1933년 2월에 간행된 <오끼도지>에서도 <나까이는 리양꼬섬(독도)을 조선령토로 믿고 있었으며 동 정부(리조정부)에 임대청원을 하기로 결심하였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그런데 일본반동들은 지난 날 이에 대하여 <편자의 오해>라는 구차스러운 변명을 늘어 놓았다)나까이자신도 후에 <독도가 울릉도에 속한 한국의 령유라고 생각했다>고 명백히 밝히고 바로 그때문에 <상경하여 농상무성을 통해 한국정부에 차용청원>을 내려고 하였다고 증언하였다.(1910년에 쓴 나까이의 <리력서>,1906년에 출판한 <력사지리> 8권 6호)일본정부 역시 그러한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기때문에 나까이의 제의가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수 있다고 판단하고 한달이 넘도록 교섭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해군성이 주동이 되여 이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된것은 당시 조선이 일본의 군사적침략의 대상으로 되고 있던 조건에서 잘되면 이 기회에 독도를 강점하여 해외침략의 기지로 삼을수 있으며 또 그런 가능성도 있다고 타산하였기때문이였다.그것은 나까이가 독도에서 물개잡이를 한 사실이 독도에 대한 일본의 령유권을 주장할수 있는 주요한 근거로 될수 있으며 독도가 조선령토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 무인도인 반면에 17세기이후 일본인들이 <송도>라고 한 자료가 남아 있는 사실 그리고 그 어느 제국주의렬강도 독도에 대한 령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있을뿐아니라 보다 중요하게는 섬의 령유국인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고 있던 당시의 환경으로 하여 항의를 제기할수 없을것이라는것 등이였다.해군의 이러한 약삭바른 타산에 의하여 그처럼 랭대를 받던 나까이의 독도임대청원은 일본해군의 적극적인 지지와 비호를 받게 되였으며 결국 나까이의 청원은 1904년 9월 29일 <리양꼬섬(독도)령토편입 및 임대청원>이라는 표제를 달고 내무,외무,농상무 3성 대신에게 제출되게 되였다.즉 나까이의 본래의 목적인 리조정부에 대한 독도임대의 교섭이 일본정부에 의한 령토편입문제로 전환,확대되였던것이다.일본내각은 이 무렵 리조정부에 무력으로 <보호조약>(1905년 11월에 날조한 <을사5조약>)을 강요할 계책을 거듭 토의하던 때였으므로 이 기회에 독도를 강점하는것도 상책이라고 생각하게 되였던것이며 이로부터 1905년 1월 28일에는 각의에서 끝내 독도의 시마네현편입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횡포를 감행하게 되였다.

이 내각회의 결정이라는것은 다음과 같다.
<이 무인도는 타국이 이를 점유했다고 인정할 형적이 없다>.그러므로 오끼도사의 소관으로 함이 <무리 없는것으로 사고>하여 나까이의 <청의대로 각의결정이 성립되였음을 인정한다.>
참으로 이것은 안하무인격인 독단이며 무단적이고 독존적인 사무라이식행위였다.
독도를 조선이 력대적으로 령유하고 있었다는 <형적>은 일본에도 많이 있었거니와 바로 이 각의결정에 앞선 1900년 10월에 이미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로써 독도의 조선령유로 재확인하고 관보로 세계각국에 알리였던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국이 점유했다고 인정할 형적이 없다>고 하면서 <무리 없는것으로 사고>하여 <결정이 성립되였음을 인정한다>고 하는것은 실로 언어도단이다.
이 강도적인 각의결정에 따라 시마네현청은 2월 22일부로 된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라는것을 조작하여 <북위 37도 9분 30초,동경 131도 55분,오끼섬으로부터 서북 85마일에 있는 도서를 죽도라고 칭하고 오늘부터 본현 소속 오끼도사의 소관으로 정하였다>고 <공포>하였다.
실로 <시마네현 고시>라는것은 몇명의 모략군들이 뒤고방에서 만들어 낸 완전한 날조품이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하루아침에 천수백년동안 조선이 령유경영하여 온 독도를 <일본령토>라고 규정하고는 그것이 국제법에서 제정된 <무주지 선점>절차와 요구에 맞는것이라고 우기였다.

이렇듯 독도의 강탈은 완전한 모략이고 음모이며 철두철미 불법무도한 강도행위였다.300여년전에 령의정 남구만이 규탄한 <교활한 왜인의 심사>는 이때에도 여전하였다.
독도는 일본각의결정이나 <시마네현 고시>에 의하여 일본령토로 편입된것이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는 일제의 조선강점으로 하여 전 조선반도 및 그에 부속된 다른 섬들과 함께 일제에 병탄되였으며 따라서 일제의 패망과 함께 까히라,포츠담 등 국제협정과 련합국최고사령부지령 제677호에 의하여 스스로 본래 주인에게 귀속되게 되였다.
이로써 독도를 침탈하려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악랄한 책동은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3.일본반동들의 <독도령유권>주장은 령토팽창열에 들뜬 자들의 랑설
독도를 빼앗아 내려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책동이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되살아 난 일본군국주의자들은 또다시 <독도문제>를 들고 나와 독도의 <일본령유>를 주장하고 있으며 독도를 <탈환>해야 한다고 하면서 소란을 피우고 있다.
독도의 령유권을 주장하는 일본반동들의 주장은 전혀 무근거한 망설이며 실패를 거듭한 령토팽창주의자들의 푸념에 불과하다.그것은 일본군국주의의 침략적본성이 변하지 않았다는것을 보여 주는 뚜렷한 증거이기도 하다.일본의 정객들은 독도가 <력사적으로 일본의 고유한 령토>이며 <예로부터 일본의 령유권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문서와 고지도가 있다>고 하지만 기실 그것은 <일본여지로정전도>나 <죽도도설>따위의 몇개 사찬지도,지리서에 불과하고 그밖의 모든것은 오히려 조선의 령유권을 확증해 주는것들이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조선의 력대문헌과 지도는 어느것이나 다 독도를 우리의 령토라고 했지 일본의 령토라고 한것은 단 한건도 없다.
<삼국사기>와 <고려사>,<리조실록> 등 정부가 편찬한 국가정사와 정부의 백과사전이기도 한 <증보문헌비고>에 독도를 우산도,삼봉도,가지도 등으로 불러 강원도 울진현 소속섬으로 명기하였으며 관찬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도로써 우산도와 울릉도를 나란히 조선령토로 그려 넣었다.1900년에 대한제국이 독도를 <울도군 소속도>로 명백히 재천명하고 정부기관지인 <관보>로 세계에 공포한것은 이런 력사전통에 기초한것이였다.

그뿐아니라 일본의 력대기본문헌들과 권위 있는 지도들도 모두 독도를 일본의것이라고 한것이 아니라 조선의 부속섬이라고 하고 있다.
앞서 본바와 같이 1690년대에 리조정부와 일본 쯔시마도주,에도막부사이에 벌어 진 울릉도령유문제를 둘러 싼 론전끝에 결국 에도막부와 쯔시마도주가 <죽도와 그밖의 한섬(독도)>의 조선령유를 인정하고 그 섬으로의 일본인들의 도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것은 그 한 실례이다.

막부가 전복되고 명치정부가 수립된 후 일본정부는 울릉도와 함께 독도의 조선령유를 재삼 명백히 규정하였다.명치유신 다음해인 1869년 12월 일본의 외무성은 사다,모리야마,사이또 등 3명의 외무성일군을 조선에 보내여 실태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조선사정을 실지 탐지>하고 제출한 보고서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의 마지막부분에서 <죽도(울릉도),송도(독도)가 조선의 부속으로 되여 있는 경위>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고하였는데 결국 그것을 부정하는 결론은 내리지 않았다.(<일본외교문서> 권3)
이 보고서는 일본외무성의 정식파견원들의 공식문건이다.이들 3명의 공식파견대표들은 이렇듯 한결같이 독도가 울릉도의 <린도>이며 울릉도와 함께 조선의 령토임을 인정하고 있다.1877년에 일본 내무성은 두 섬에 대한 5개월간의 재조사결과를 정부의 최고장관인 태정관에게 보고하였는데 태정관 이와꾸라 도모미는 그에 기초하여 3월 20일 <죽도(울릉도)와 그밖의 한 섬(송도 즉 독도)은 본방(일본)과 관계 없는것으로 알것>이라는 지령을 내무성에 하달하였으며 내무성은 4월 9일에 그것을 시마네현에 내려 보내였다.(<일본국립공문서관> 소장자료)

이 지령은 곧 일본명치정부가 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일본과는 관계없는 조선의 령토로 인정한 국가공문서이며 내무성과 시마네현에 두 섬을 일본지경에서 제외시키라고 지령한 정부의 결정서이다.아직 일본정부가 독도의 조선령유권을 인정한 문헌으로서 이보다 더 유력한것은 없으며 일본측 문헌에 이것을 부정하는 문헌도 없다.
일본의 옛 지도를 들추어 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독도박물관에서 복사한 일본의 조선관계 옛 지도들을 보면 모두 한결같이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조선령토에 포함시키고 있다.

임진왜란때 조선침략을 위하여 구끼 요시다까 등이 도요또미의 명령에 따라 작성한 <조선국지리도>의 <8도총도>와 강원도부분지도에 우산도와 울릉도가 나란히 강원도 앞바다에 명기되여 있다.이것은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식 명칭으로 표기한 최초의 지도이다.
다음 일본의 지도제작대가로 알려 져 있는 하야시 시헤이가 1785년경에 <삼국통람도설>의 조선과 일본 및 중국동북지방을 그린 부록지도를 보면 죽도(울릉도)와 그옆에 작은 섬(독도)을 명기하고 조선본토와 같은 노란색으로 채색했으며(일본은 쯔시마와 함께 회색)그옆에 <조선의것>이라고 덧써놓았다.이것은 당시 일본학계에서도 독도를 조선의 령토로 인정하고 있었다는것을 보여 준다.

1876년에 일본해군수로부가 로씨야함대 <파라다>호가 작성한 지도를 작전용으로 재발행한 <조선동해안도>에도 울릉도와 독도 등 부속섬들이 자세히 그려 져 있는데 특히 독도는 따로 그림으로 그려 넣었다.
1882년 기무라가 제작한 <동판조선국전도>도 일본은 적색으로 표시했으나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는 조선본토와 같은 연한 회색으로 표시하여 그 섬들이 다같이 조선령토임을 밝히고 있다.
일본해군수로부에서 1883년에 처음 발간한 <환영수로지>에서도 <리앙쿠르드암>(독도)을 울릉도의 속도로 명시하였고 그후 1945년 6월에 발간된 <간이수로지>에 이르기까지 여러차례 발행한 수로지들에서 모두 독도를 조선령토의 구성부분으로 기록하여 놓았다.(1952년에 해상보안청에서 발행한 <조선반도연안수로지>에서부터 독도를 일본령토에 편입)

특히 히께무 셋꼬가 1930년에 낸 <일본해(조선동해)에 위치한 죽도에 관한 일선관계>에서는 <죽도(독도)와 울릉도는 현재 조선의 강원도에 소속되여 일본해가운데 있는데 조선령토의 경계에서는 최동단이다>라고 하였으며 1936년에 일본륙군참모본부 륙지측량부에서 제작한 <지도구역일람표>에서는 일본렬도와 조선반도사이에 있는 울릉도와 독도를 한구획으로 묶어 조선본토소속으로 표기하였다.이러한 사실들은 일제의 조선강점시기에도 독도가 실제상 시마네현에 소속되여 있지 않았다는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독도시마네현편입>이란 완전한 허위,모략이였다는것을 고발해 준다.
그밖에 독도를 조선령토로 인정하고 표기한 일본의 옛 문헌들과 지도는 얼마든지 더 들수 있다.

이렇듯 조선측 문헌들과 지도들은 물론 일본의 기본문헌자료들과 지도들도 모두 독도의 조선령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예로부터 일본의 령유권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문헌 또는 고지도가 있다>는 주장은 완전한 억지이며 령토팽창야망을 성사시켜 보려는 군국주의자들의 망발에 불과하다.
호끼번의 오다니,무라가와 두 가문이 죽도를 막부에서 빌려 경영했다는 주장도 력사의 외곡날조이다.앞에서 분석한것처럼 그들이 <도해면허장>을 발급 받은 사실이 결코 막부가 독도를 자기 령지로 간주했거나 그들이 독도를 막부로부터 임대하여 경영하였다는 증거로는 될수 없는것이다.나까이가 물개잡이를 위하여 대한제국정부로부터 독도차용을 허가 받으려고 한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다음으로 독도는 국제법적으로 보아도 <일본의 고유한 령토>라는 망설을 퍼뜨리고 있다.
그들의 이 주장은 국제법상에서 선점에 대한 령역획득이 실현되려면 우선 그 지역이 무주지여야 하며 다음은 령역획득의 국가적의사가 있고 또 그 의사를 대외적으로 공포하여야 하며 그 지역에서 실효적인 점유,경영이 있어야 한다는 조항을 걸고 들어 저들은 이 요건을 다 실현했으나 조선측은 점유에 대한 <국가적의지>도 표명한것이 없으며 효과적인 경영도 없을뿐아니라 <평온하고 계속적으로 점유>하고 있지 않았다는것이다.

이것 역시 터무니 없는 억지이며 적반하장격의 강도적론리이다.
앞에서 루차 강조하였거니와 독도는 무인도이지만 결코 무주도는 아니며 점유의 국가적의사는 장기간의 <공도정책>시기에도 왜인에게 루차 명백히 표명하였고 중국에도 우리 문헌을 통해 알려 져 있었다.특히 1900년에 칙령 제41호가 발표됨으로써 조선의 독도령유는 근대의 관례에 맞게 만국에 통고,재확인되였다.

그러나 일본은 어떻게 하였는가?
군국주의자들의 이 몰렴치한 주장은 주로 독도편입에 관한 각의결정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념두에 둔것인데 그 협잡문건은 고종의 칙령 제41호가 세계에 공포된지 5년후에 조작된것일뿐아니라 그것마저 국내외에 공포되지 않았다.
원래 국제법의 요구에 따르자면 무주지를 자기 령토에 편입할 때는 응당 그 땅과 린접한 나라들과의 사전협의,조회를 요망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것이 관례로 되여 왔다. 일본자신도 오가사와라섬을 자기 령유로 할 때 미국,영국 등과 몇차례 협의했고 유럽 12개 나라들에 이 섬에 대한 일본의 관리를 통보하였다고 한다.그런데 독도의 경우에는 그것이 무주지가 아니다.또한 일본은 그 주인인 대한제국정부에 사전협의는 커녕 사후통보도 하지 않았다.뿐만아니라 각의결정내용은 공포되지도 않았으며 이 중대사를 한갖 지방관보인 현보에 게재하고 지방신문인 <산잉신붕>(1905.2.24)에 자그마하게 보도했다고 한다.(<신동아> 2000년 5월호 <독도>)그러나 독도박물관 관장이 조사한데 의하면 일본이 1898년 7월에 오가사와라의 무인도 미나미도리섬의 도꾜부소속을 결정했을 때 도꾜부고시를 <요미우리신붕>과 <미야꼬신붕> 등 중앙신문에 게재했지만 독도편입만은 일본의 104개 신문중 단 1개 신문에도 게재하지 않았다고 한다.<시마네현 고시> 제40호의 게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마네현 도서관에 <독도편입>에 관한 고시원본을 찾으니 도서관으로부터 유감스럽게도 그 호수는 <루락되여 있다>는 회답을 받았다고 한다.

실태는 바로 이러하다.
<독도편입>에 관한 <고시>란 사실상 완전한 유령인것이다.정부의 지령에 따라 급히 만들어 낸 협잡문건은 다만 몇명의 관리들이 열람한것으로 그쳤던것이다.
일본정부는 도꾜에 있는 구한국대표부에도 통보하지 않았으며 재일조선인은 물론 일본국민들과 지식인들,지어 부산주재 일본령사조차도 그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 이 사실은 <각의결정>이요,<시마네현 고시>요 하는것들이 국내외에 공시하기 위한것이 아니라 후날에 증거를 남겨 두기 위하여 몇명의 사기한들이 모여 앉아 꾸며 낸 한갖 문서형식놀음에 불과하며 철두철미 허위날조로 일관된 협잡행위였다는것을 여실히 말해 준다.

원래 국가기관이나 지방관청의 결정을 소속현민들에게 알려 줄 사명을 가진 현 고시로 령토편입과 같은 국제적성격을 띤 국가중대사를 공시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거니와 그 <고시>조차도 고시되지 못하고 감추어 졌다.그러니 <정식으로 국제법에 기초한 령토편입수속을 밟았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으로 된다.
일제가 왜 독도강제편입에 대해서만 비공개로 하였는가? 그 리유는 자명하다.그것은 그들이 독도가 조선고유의 령토임을 알고 있었기때문이며 조선에 그 사실이 알려 지면 강한 항의를 불러 일으키게 될것이고 렬강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로일전쟁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리라는것을 타산하였기때문이였다.더우기 일본관리들은 일본이 곧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것을 위해 일본군대가 한성(서울)을 강점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때문에 비법적인 독도강점공포를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한것이다.한마디로 말하여 짜놓은 시간표에 맞추어 렬차를 내몰려는것이였다.바로 그렇기때문에 그로부터 1년 1개월이 지난 1906년 3월 28일 즉 <을사5조약>을 날조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지 4개월이 지난 뒤 다시말하여 독도강탈에 대하여 어느 나라도 항변할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시기를 택하여 비로소 일제는 오끼도사일행을 독도에 보내여 현지를 시찰케 하고 귀로에 울도군수 심흥택을 방문하여 <독도가 일본령지로 되였으므로 시찰차 섬에 왔다>는것을 알리였다.이것은 국제관례에 심히 어긋나는 무도한 행위였다.이런 국사는 응당 국제관례에 따라 정부사이에 협의하고 통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지방관을 보내여 울도군수에게 통보하였다.(울릉군청보관자료 심흥택의 보고부본?<.

울도군수 심흥택은 <본군소속인 독도>를 일제가 불법침탈한 사실을 강원도관찰사에게 보고했으며 그것은 한달이 지난 4월 29일에 중앙정부에 보고되였다.그의 보고를 받은 내무대신 리지용,참정대신 박제순 등 <을사5적>의 무리들까지도 일본의 강도행위가 하도 도수를 넘은데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독도를 일본의 속지로 칭함은 필경 무리한 일이니...매우 아연하다>,<독도령지설은 완전한 무근>이라고 항변하였다.(<신동아> 2000년 5월호 <독도>)<황성신문>,<대한매일신문> 등 서울신문들은 일제히 이 소식을 전하면서 일제의 강도적독도침탈행위에 강렬한 항의를 표시했으며 황현을 비롯한 지식인들도 일본이 독도를 자기 령지라고 하는것은 완전한 억지라고 규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반동들이 독도가 <국제법에 기초한 령토편입수속을 밟아 시마네현에 편입되였다>고 하면서 <다른 나라에서 이론이 없었다>든지 지어 일본이 <을사보호조약>이후에야 조선의 외교사무를 감독지휘하게 되였으므로 <진실로 한국이 죽도에 대하여 력사적 및 행정적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면 일본정부에 항의하는것을 방해하지 않았을것>이라고 하는것은 실로 파렴치한 넉두리이다.렬국이나 조선정부에서 이 소식을 알아야 지지하든지 항의하든지 자기 립장을 표명할수 있을것이 아니겠는가.그런데 로일전쟁에서 로씨야를 이겼고 <가쯔라-타프트협정>으로 미국의 입을 틀어 막은후 <을사5조약>을 날조하고 조선을 지배하게 된 다음해에야 <독도편입>을 조선의 지방관리에게 통보하였으니 어느 렬강이 이론을 제기하며 자주권을 잃은 리조정부가 어떻게 항의할수 있었겠는가.일본군국주의자들이란 바로 이렇게 파렴치한 사기한들이다?

다음 조선의 독도령유가 <평온하고 계속적으로> 이루어 지지 못하고 있는 <분쟁문제>라고 하는 주장은 더욱 황당하기 그지 없는 망설이다.
이 말의 뜻은 일본이 <독도령유권>을 주장하는 한 독도는 의연히 분쟁지역으로 된다는것이며 따라서 국제법적으로 조선의 독도령유권은 확립되였다고 볼수 없다는것이다.
이 주장이야말로 독도를 기어코 영구강탈하려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의 검은 배속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폭언이다.그들의 론리대로 만일 우리가 쯔시마령유권(쯔시마섬은 본래 신라의 령토였으나 고려말기 왜구들이 쳐들어 와 타고 앉았다)을 주장한다면 일본은 그 섬을 분쟁지역으로 인정하고 령유권을 포기할 의지를 표명하여야 하는데 과연 일본당국자들이 이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그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것이다.그들에게는 다른 속심이 있는것이다.일본당국자들은 <거짓말도 방법이다>라는 일본속담을 좌우명으로 삼고 기회 있을 때마다 <독도문제>를 들고 나와 백번이고 천번이고 거짓말을 하여 억지를 부린다면 사람들에게 그것을 진실로 믿게 할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때가 오면 1954년도에 시도했던것처럼 독도령유권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수 있을것이라고 타산하고 있다.만일 이 계획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독도에 <본적>을 부쳐 놓은 유령이주민(현재는 6호 7명)들을 앞세우고 무력행사에 넘어 가려 하고 있다.일본 <자위대>가 벌린 광란적인 <독도상륙접수연습>이 이것을 뚜렷이 증시해 주고 있다.

일본반동들,되살아 난 군국주의망령들은 어찌하여 이처럼 악착스럽게 <독도문제>를 들고 나서는것인가?
그들의 목적은 명백하다.
일본반동들의 전략적계획은 첫 단계에는 독도지역의 경제적리권과 관리권을 장악하는것이며 그다음 단계에는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 내여 독도를 기점으로 한 200마일의 독점적경제전관수역을 설정하고 이 지역의 경제리권을 독점하려는것이다.나아가서는 그곳을 군사기지로 전변시켜 로일전쟁때처럼 북방침략에 효과적으로 써 먹으려 하고 있다.그곳을 현대전쟁의 요구에 맞는 다목적의 최신군사기지로 전변시켜 우리 나라에 대한 재침야망을 실현하는데 리용하려는것은 일본반동들이 추구하는 주되는 정치군사적목적이다.

바로 이러한 음흉한 전략계획을 품고 있기에 일본반동들의 독도침탈책동은 계획적이고 고의적이며 그처럼 철면피하고 교활한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지난 날의 죄악에 대하여 성근하게 사죄하고 새 출발을 해야 할 오늘에 와서까지 있지도 않는 <독도문제>를 들고 나와 갖은 궤변을 늘어 놓으면서 재침책동을 집요하게 벌리는것을 절대로 허용할수 없다.일본반동들은 자주의 대하로 사품쳐 가는 현 시대의 흐름을 똑바로 보고 시대의 발전에 역행하는 정치난쟁이의 가소로운 망동을 당장 중지하여야 하며 범죄적인 령토팽창야망을 버리고 조선민족의 독도령유권을 인정하여야 한다.

 오늘의 조선민족은 어제 날의 조선민족이 아니다.
우리는 일본이 력사적으로 조선인민에게 끼친 죄행을 잊지 않고 있으며 피값을 천백배로 받아 내고야 말 결의에 차 있다.
력사에 살면서 력사를 잊는것은 파멸의 길이다.
독도를 빼앗아 재침의 길을 열어 보려는 시대착오적인 망상은 7천만 조선민족의 일치한 항거에 부딪쳐 반드시 파탄되고야 말것이다.
독도는 영원히 조선의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 주체90(2001)년 7월 31일


♣통일단결은 범민련의 생명

올해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 반통일세력의 폭압속에서도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굴함 없이 싸워 온지 1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돌이켜 보면 범민련이 걸어 온 10년의 역사는 단결과 분열, 기쁨과 눈물, 실패와 성공의 우여곡절 속에서도 애국의 대오를 지켜 내고 통일운동사에 자기의 뚜렷한 자국을 남겨 놓은 자랑찬 승리의 역사였다.

반통일세력의 끊임없는 탄압과 간교한 분열파괴책동속에서도 오직 범민련만이 통일애국의 깃발을 고수하고 휘날리며 투쟁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범민련 모든 성원들이 애국의 신념으로 대오 의 단결을 위해 힘차게 투쟁해 온 결과이다.
특히 범민련 남측본부의 전체 성원들은 반통일집단이 야만적인 탄압과 교활한 파괴책동, 개량과 변절의 유혹 속에서도 자기의 원칙을 지켜 10년 동안 범민련을 지켜 왔으며 광범한 대중단체들과 의 연대연합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힘차게 벌여왔다.

범민련 공동사무국은 남측본부와 같이 통일애국에 충실한 대오를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 기고 있으며 범민련의 각 지역본부들에 뜨거운 경의를 표시한다.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이 실현되게 될 21세기에 우리 범민련이 더욱 큰 승리를 위해 비약할 수 있 는 기본담보는 바로 범민련의 각 지역본부들이 애국대오의 통일단결을 더 한층 굳게 다져 나가는 데 있다.

통일단결은 불패의 힘의 원천이며 범민련의 생명이다.
단결과 단합을 떠나서는 조국통일투쟁에 대하여 우리 애국대오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다. 민족대단결의 모체인 우리 범민련이 대오의 단합과 단결을 굳건히 다져 나갈 때 다른 운동단체들 과의 대단결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옳게 이끌어 나갈 수 있으며 통일운동에서 자랑찬 승리자로 될 수 있다.

오늘 범민련에 대한 반통일세력의 파괴암해책동이 극도에 이르고 특히 남측본부에 대한 분열주 의자들의 조직파괴 모략책동이 전례 없이 교활하고 악랄하게 감행되고 있는 조건에서 범민련 남 측본부를 더욱 굳건히 지키고 다져 나가는 것은 절실한 문제로 나서고 있다.
범민련 남측본부를 비롯한 각 지역본부들이 대오를 굳건히 다져 나가는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성 원들이 범민련조직과 그의 활동에 대한 옳은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범민련은 하나의 사상과 주의 주장을 가진 준비된 성원들이 <전위조직>, <전위당>과 같은 성격 의 조직이 아니라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 위업을 실현하는데 이해관계를 가지는 광범한 각계각층 이 하나로 뭉친 통일운동연합체이다.
범민련은 사상과 주의주장이 달라도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그와 연합하 여 공동행동을 벌이며 비록 통일운동을 함께 벌여 나가는 과정에 결함이 있어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진보시키면서 연대 연합해 나가는 가장 폭넓은 운동단체이다. 민족대단결을 자기의 본성으로, 기본사명으로 하고 있으며 광범한 대중에게 열려 있는 통일운동연합체라는데 우리 범민 련조직의 참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범민련의 각 지역본부들은 범민련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가지도록 하며 주의주장이 다르 거나 차이점들이 있다고 하여 함께 손잡고 나가야 할 성원들을 배척하는 현상을 철저히 극복하여 야 한다.

범민련 대오의 단결을 강화하는데서 중요한 것은 범민련이 벌이는 민족대단결운동에 대한 인식을 통일시키는 것이다.
민족대단결운동은 애국애족의 기치와 자주, 민주, 통일의 대의를 중심으로 통일운동을 벌이는 단 체라면 다소 문제점이 있다 하더라도 보조를 같이 해 나가면서 연대연합을 실현하는 운동이다. 통일운동에서 단합과 단결을 선차적 요구로 들고 진정으로 애국애족하고 통일을 바라는 단체라면 민족주의 단체이건, 종교단체이건, 시민단체이건 우선 단결하고 보조를 같이 하여야 한다.
<대중성>과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원칙을 어기고 반통일분자들과 손을 잡아서도 안되지만 다 른 운동단체들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차이점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거부하여도 안 된다. 범민련의 원칙적인 주장들을 내세우면서도 정세변화와 일반대중들의 절실한 이해관계에 부합되는 적중한 당면 주장들을 적극 들고 나가며 그 실현을 위해서는 다른 운동단체들과의 연대연합을 강화하여 야 한다.
남측본부를 비롯한 각 지역본부들은 범민련이 벌이는 민족대단결운동에 대한 통일 된 인식을 가 지고 보다 열린 자세를 가지고 통일애국역량의 단결을 강화하여야 한다.

범민련대오의 단결을 악화시키는 암적 존재는 분파적 행동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교훈은 통일운동대열 안에 분파적 행동을 근절하지 않고서는 대오의 존재에 대하여 통일운동의 승리에 대하여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범민련의 각 지역본부들은 대오의 단결을 강화하고 분파적 행위를 없애는 문제를 통일운동의 운 명과 승패를 좌우하는 사활적인 문제로 여기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여 나가야 한다.
범민련 각 지역본부들이 대오의 통일단결을 더욱 강화하자면 대오 안에서 민주주의를 발양하고 집체적 협의를 강화하여야 한다.
범민련은 말 그대로 각 당, 각파 각계각층의 통일운동가들의 연합으로 이루어 진 조직이며 공동으 로 합작하는 원칙에서 활동하는 조직이다.
그러므로 통일운동을 함께 벌여 나가는 범민련 대오 안에 그 어떤 특권과 독선도 허용될 수 없다. 대오 안에서 특권과 독선적인 경향이 나타나면 단결에 금이 가고 나아가서 대오의 단결이 위태롭 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공동행동을 벌여 나가는 통일운동대오 안에서 백해무익하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대 오를 분열시켜 반통일부자들을 도와 주는 <이적행위>로밖에 달리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통일운동 을 벌임에 있어서 대오 안에서 모든 것을 허심탄회하게 내놓고 원칙적 입장에서 부정과 긍정을 가려 가면서 공명정대하게 협의하고 결정하는 원칙에서 운동하여야 한다.

범민련의 각 지역본부 일군들은 또한 사업 방법과 작풍을 끊임없이 개선하여야 한다. 우리 범민련 의 일군들은 인간중의 참 인간을 지향하고 모든 시련 속에서도 서로 도와 주고 이끌어 주는 참된 인간관계를 창조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범민련 각 지역본부 일군들은 편협하지 말아야 한다.
통일운동을 함께 벌이는 사람들 사이에 서로 귀중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며 연대하고 협조하는 참된 인간관계를 이룰 때 대오의 통일단결은 더욱 굳건해 지게 될 것이다.
범민련을 지켜낸 오랜 선배들을 종영하고 내세워 주며 선배들은 후배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통일 운동을 적극 뒷받침해 주어 참된 운동가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지금 온 겨레는 민족대단결의 기수인 범민련을 지켜보고 있으며 범민련의 기치아래 단합하여 거 족적인 통일행진을 벌여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남과 북, 해외의 범민련조직들이 대오의 통일단 결을 생명과 같이 여기고 굳게 합친다면 21세기 범민련은 더욱 강력한 투쟁대오로 강화되게 될 것이며 민족대단결의 견인차로서의 자기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 나가게 될 것이다.

남과 북, 해외의 모든 동포들은 애국적인 통일운동조직이며 민족단합의 구심체인 범민련을 귀중히 여기고 그 기치아래 굳게 뭉쳐 역사의 소명이며 시대의 부름인 조국통일위업을 앞당기기 위하여 더욱 힘차게 분발해 나가자!

2000년 5월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공동사무국

(자료출처: 범민련 북측본부 기관지 {민족대단결} 투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