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자료 모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검열단 진상공개장(1)

미국과 리명박역적패당이 날조한 《천안》호사건은 민족사상 초유의 특대형모략극

조선서해에서 남조선괴뢰해군의 《천안》호침몰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7개월이 지나갔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미제와 리명박역적패당은 때를 만난듯이 그것을 우리와 억지로 련계시키면서 일찌기 류례없는 반공화국대결광풍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천안》호사건의 《북 개입설》을 날조극, 모략극으로 락인하고 사태의 진상을 끝까지 밝힐 의지를 내외에 선포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검열단의 현지조사제안은 그에 따른것이였다.

사건의 흑막이 드러나는데 불안을 느낀 미제와 리명박역적패당은 우리 국방위원회 검열단의 현지조사를 한사코 막아나서면서 서둘러 《민군합동조사단》의 그 무슨 《조사결과》라는것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것이 온통 의혹투성이로 몰리우게 되자 최근에는 새로운 날조품인 《최종보고서》라는것까지 발표하여 만사람의 비난과 조소를 자아내고있다.
그리고는 우리 나라 주변해상에서 그 무슨 《무력시위형》련합해상훈련이라는것을 련속 벌리는 동시에 국제무대에서 반공화국제재소동에 광분하였다.

원래 우리는 국방위원회 검열단의 현지조사를 마친 후 침몰사건의 진상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정당당하게 세상에 공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제와 역적패당이 우리 국방위원회 검열단의 현지조사는 물론 사건현장에서 수거했다는 모든 물증들을 판문점에 내다놓고 공동으로 조사평가하자는 우리의 아량있는 제안까지 거부하고있는이상 지금까지 제기된 자료에 근거하여 이 사건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날조극, 모략극인가 하는것을 1차적으로 세상에 공개하기로 하였다.

1. 스스로 《북 어뢰》가 아님을 인정한 알루미니움합금어뢰쪼각

미제와 리명박역적패당의 《조사단》은 《천안》호가 침몰된 백령도수역에서 건져냈다는 어뢰쪼각이 알루미니움합금쪼각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것이 《북 어뢰》라고 보는 물증이고 함선을 공격한 《북의 소행》으로 되는 근거라고 여론에 공개하였다.

우리를 너무나 잘 아는것처럼 떠드는 미제와 역적패당이 이 어뢰쪼각을 두고 지금까지 어떻게 놀아대는가를 우리 군대와 인민은 침묵속에 주시해보면서 일단 수거했다는 어뢰쪼각을 현지에 나가 직접 확인하고 할 말을 하리라고 인내를 발휘하였다.
그러나 현지에서 직접 확인할수 없게 된 지금은 서슴없이 진상을 까밝히려고 한다.

다른 나라 해군처럼 우리 해군도 어뢰를 가지고있다. 그것도 세상이 알지 못하는 상상밖의 강한 타격력을 가진 어뢰를 보유하고있다는것을 우리는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어뢰는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알루미니움합금이 아닌 우리의 로동계급이 만든 강철합금재료로 만든 주체식어뢰이다.

원래 우리는 우리 해군의 어뢰강철합금편을 미제와 역적패당에게 넘겨주어 대조해보라고 할 작정이였다.
그들스스로가 《천안》호사건의 《북 어뢰공격설》이 날조극, 모략극이라는것을 인정하도록 만들려고 계획했던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우리 주체어뢰의 강철합금편을 미제와 역적패당에게 직접 넘겨줄 용의가 있다.
결국 미제와 역적패당은 지금까지 알루미니움합금어뢰쪼각이 《북 어뢰의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스스로 《북 어뢰공격설》을 부정한것으로 된다.

우리는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이 《천안》호침몰사건과 관련하여 발표한 여러건의 《조사보고서》를 비롯한 반공화국모략각본들의 허위성과 흑막을 더 파헤치려고 한다.

2. 강도적인 날조품 어뢰추진체

미국과 리명박역적패당이 《천안》호사건의 《북 개입설》을 립증하는 결정적물증의 하나로 내놓은것이 바로 어뢰추진체이다.
이 어뢰추진체의 출처부터 의문이다.

첨단탐지수단을 장비한 수십척의 함선들이 50여일동안이나 찾아내지 못한것을 민간어선이 문득 나타나 고기그물로 건져냈다고 떠든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것이고 TV로 보도한 어뢰추진체가 그후 《조사단》이 공개한것과 달랐던것이다.

당시 어선이 건져올린 어뢰추진체에는 은박종이가 붙어있었다는데 지난 5월 20일 괴뢰조사단이 내놓은 1. 5m크기의 어뢰추진체에는 그런것이 없었다.

의혹은 여기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초기 《조사단》은 《천안》호선체에서 HMX, RDX, TNT폭약성분이 검출됐다고 하였다.
그런데 함선침몰에 리용됐다는 어뢰의 추진체에서는 그 어떤 미세한 폭약성분도 검출되지 않았다는 자료가 제기되였다. 화약에 의한 폭발기능을 수행하는 어뢰에서 더우기 1 400t급의 함선을 두동강냈다는 어뢰추진체에서 그 어떤 화약성분도 검출되지 않았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급해맞은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은 어뢰추진체가 염도가 짙은 바다속에 장시간 있었기때문에 폭약성분이 바다물에 녹아버려 검출할수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같은 수역에서 동일한 시간동안 바다속에 수장되여있은 함선선체에서 화약성분이 발견됐다고 이미 발표한 조건에서 그 변명이 통할수 없다.

3. 세계를 우롱한 어뢰설계도

가관은 역적패당이 어뢰추진체를 《북의것》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여론에 공개한 어뢰설계도가 의문투성이라는 사실이 드러난것이다.

당시 괴뢰들은 그 무슨 《합동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함선을 공격한 어뢰추진체가 《북의것》이라는 주장의 신빙성을 보여주기 위해 북에서 만들었다는 《CHT-02D》 어뢰설계도라는것을 회견장에 버젓이 내걸었다. 그리고는 어뢰설계도의 설명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보증한다.》는 문구가 명기되여있기때문에 이 어뢰추진체가 북에서 제작한것이 분명하다고 우겨댔다.

그러나 실지 설계도에는 그런 문구가 아닌 일본어가 적혀있었다는것이 판명되였으며 설계도상의 어뢰모터는 직4각형이지만 회견장에 내놓은 실지 어뢰추진체 모터는 류선형이라는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저들의 서툰 모략이 탄로나게 되자 괴뢰들은 《북 어뢰추진체》라는것을 립증해보이기 위해 《동일한 어뢰의 설계도》가 아닌 다른 어뢰설계도면을 내걸고 설명했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 설계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하는것은 괴뢰들이 공개한 《합동조사결과보고서》에서도 우리가 《해외로 수출할 목적으로 배포한 어뢰소개자료의 설계도》라고 하였는가 하면 《정보분석분과로부터 《CHT-02D》 어뢰의 이미지(화상)를 제공》받았다고 하였으며 바로 그 밑에서는 우리 《콤퓨터글을 프린터(인쇄기)로 출력하는 과정》을 언급하여 콤퓨터파일임을 시사하기도 하였다는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어뢰설계도가 인쇄물인지, 이미지(화상)인지, 콤퓨터파일인지조차도 불확실하다는것을 반증해준다.

괴뢰들이 어뢰추진체를 어떻게 하나 《북의것》으로 몰아붙여보려고 어뢰설계도를 여러차례 은밀히 바꾸어 내놓았다는것도 폭로된 사실이다.
이것은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이 《북 어뢰공격》의 결정적증거로 내놓은 어뢰추진체가 세계를 우롱한 한갖 날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말해준다.

4. 무식의 결정체 《1번》글씨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은 어뢰추진체에 씌여져있는 《1번》글씨도 결정적물증으로 들고나왔다.
우리 군수공업부문에서는 어떤 부속품이나 기재를 만들 때 필요한 수자를 펜으로 쓰지 않고 새기고있으며 그 경우에도 《번》이 아닌 《호》를 붙인다. 한마디로 《1번》표기는 우리의 통상적표기방식이 아니다.

게다가 어뢰공격에 의해 함선이 침몰되였다면 폭발을 일으킨 어뢰탄두는 물론 추진체자체도 폭발당시 발생하는 고온, 고압으로 심한 균형파괴를 초래하기마련이다. 따라서 《1번》글씨가 방금 써놓은것처럼 생생하게 존재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또한 괴뢰조사단이 공개한 어뢰의 추진체후부와 방향키를 보면 외부가 심하게 부식되였음을 알수 있다.
사용하기전의 어뢰는 부식을 막기 위해 페인트(칠감)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폭발시 발생하는 고열로 타서 없어지며 폭발후 남은 잔해는 바다물에 의해 부식된다.

그러면 어뢰에 칠해놓은 페인트는 몇℃가 되여야 타버리는가 하는것이다.
해당 과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가장 높은 열에 견딜수 있는 실리콘, 세라믹스계렬의페인트의 끓음점은 760℃이고 보통 유성페인트의 끓음점은 350~500℃라고 한다.

만약 괴뢰조사단의 주장대로 함선공격에 250㎏의 폭약량이 작용했다고 가상하는 경우 그때 발생될 에네르기량에 비추어보면 폭발직후 어뢰의 추진체후부의 온도는 적어도 325℃, 높게 잡으면 1 000℃이상 올라갈수 있다.

어뢰중에서도 가장 뒤부분에 있는 외부방향키도 부식되여있었다는것을 놓고볼 때 어뢰의 내부는 이보다 높은 고열상태였을것이며 《1번》이라고 쓰인 추진체후부의 내부도 325~1 000℃의 열을 받았을것이다.

그런데 《1번》글씨는 페인트가 아니라 마지크같은것으로 씌여졌다. 지금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마지크에 사용되는 잉크는 크실렌, 톨루엔, 알콜로 이루어져있다. 매 성분의 끓음점은 138. 5℃(크실렌), 110. 6℃(톨루엔), 78. 4℃(알콜)라고 한다. 따라서 추진체후부에 300℃의 열만 가해졌더라도 잉크는 완전히 타없어졌을것이다.

외부페인트가 탔다면 마지크로 씌여진 《1번》글씨도 타버려야 했고 그 《1번》글씨가 남아있다면 외부페인트도 남아있어야 한다. 이것은 과학이다.

그러나 고열에 견딜수 있는 외부페인트는 타버렸고 저온에도 타는 내부잉크는 남아있는 이러한 불일치는 입이 열개라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만약 북이 조립목적으로 《1번》이라는 글을 써놓았다면 왜 어뢰추진체의 다른 부분에는 그런 글이 없는지 상식적으로 리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1번》이라는 글은 《북의것》을 밝히기는커녕 음모군들의 과학적빈곤과 무식만을 드러내보인것이다.

한 해상전문가가 현지수역에서의 직접실험을 통하여 글자가 적힌 표면이 다른 부위보다 생생하게 밝은것은 새로 글씨를 써놓기 위해 연마지로 밀었으며 글을 쓴 다음에는 바다물에 들어가지 않았기때문이라는것을 과학적으로 립증해보이고 미국과 카나다의 대학교수들이 《1번》글씨의 잉크를 정밀분석한끝에 남조선에서 사용되는것으로 공식확증해보인것은 모략가들을 헤여나올수 없는 곤경에 몰아넣은것으로 된다.

남조선의 곳곳에서 《거리에 다니는 파란색 <1번>뻐스는 북의 대남침투용》, 《경기장에 나선 파란색 <1번> 모두 이북선수》, 《<1번>글씨체와 같은 필체인 조카애도 이북간첩?》 등의 야유와 조소의 낱말이 아직까지 류행되고있는것은 《1번》증거가 얼마나 황당무계한가를 그대로 실증해준다.

5. 강압에 의한 허위진술 《물기둥설》

함선침몰사건발생초기 전문가들은 그 원인에 대하여 《좌초설》과 《자연피로파괴설》, 《기뢰폭발설》, 《함선탄약고폭발설》 등 나름대로의 주장과 견해를 내놓았다.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은 어떻게 하나 이러한 주장들을 묵살해버리고 《북의 어뢰공격》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물기둥설》을 내놓았다.

함선침몰사건이 어뢰공격에 의한것이라면 물기둥발생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때문에 《물기둥설》은 이번 사건원인을 해명하는데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사건발생직후 함선에 탔던 성원들이나 주변해역 근무성원들의 진술을 분석하면 물기둥을 목격했다는 증언은 하나도 없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백령도의 한 감시병이 나타나 물기둥을 보았다고 진술하였다고 한다. 그는 《쿵》하는 소리를 듣고 해상전방 약 4㎞, 방위각 270°를 쳐다보니 하얀색섬광이 보였다가 없어졌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그가 한 진술을 근무위치에서 대입해보면 함선침몰위치와는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키는것이며 그것도 물기둥이 아니라 《하얀색섬광》을 보았다는것이 전부이다.

《천안》호의 생존자 58명가운데 사건발생당시 어뢰에 피격됐을 때 나타나는 물기둥, 섬광, 화염 등을 보았다고 진술한 사람은 한명도 없다. 사망자들을 X선촬영 등의 방법으로 검사한 결과 파편이나 화상에 의한 부상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골절, 열창 등이 있었을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종합적으로 외상, 질식에 의한 사망가능성은 희박하고 정황상 익사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괴뢰조사단이 《물기둥설》을 안받침하기 위해 실례로 든 좌현견시병의 얼굴에 물방울이 튀였다는것과 함선에 물이 많이 고여있었다는 점은 오히려 하나의 조소거리로 될뿐이다.
《천안》호의 한 생존사병은 《당시 저는 우현견시<감시>를 맡고있었습니다. 제가 봤을 때는 물기둥같은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라고 증언하여 괴뢰들의 《물기둥설》을 전면 반박하였다.
이것은 《물기둥설》이 함선침몰원인을 《북의 어뢰공격》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괴뢰군상층부가 앞뒤가 맞지 않게 강압적으로 조작한것이라는것을 보여주고있다.

6. 소경의 주장 《ㄷ자형침투경로》

《천안》호사건이 우리의 어뢰공격에 의한것이라는것을 확증하기 위해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은 현지수역에 대한 북 잠수함의 《ㄷ자형침투경로》라는것을 내놓았다.

원래 사건초기 미국과 남조선괴뢰군당국은 사건을 전후하여 우리 군대의 이상동향은 전혀 없었다고 장담하였다.
그러던것이 《조사결과》발표라는데서는 조선서해 우리 해군의 모기지에서 사건발생 2~3일전에 일부 소형잠수함들과 이를 지원하는 모선이 기지를 리탈하였다가 2~3일후에 복귀한것으로 확인되였다고 떠들어댔다.

문제는 괴뢰들이 떠드는 우리 해군의 그 모기지라는데에 단 한척의 소형잠수함은커녕 그 비슷한 그림자도 없다는것이다.
괴뢰들은 바로 그 모기지에서 어뢰를 실은 우리 잠수함이 서쪽 공해상으로 나갔다가 남쪽으로 꺾어 다시 동쪽으로 기동하여 백령도근해까지 《ㄷ자형》으로 침투했다고 하였다.

아무리 거짓을 꾸며도 분수가 있어야 한다.
그를 립증할수 있는 정확한 자료를 요구하는 여론앞에 괴뢰들은 초기에 우리 잠수함동향정보와 관련하여 저들의 군정보수준이 드러나기때문에 확인해줄수 없다고 무작정 우겨대다가 여론의 요구를 더이상 외면할수 없게 되자 나중에는 불리한 날씨의 영향으로 영상질이 불량하여 내놓을수 없다고 하였다.

바꾸어말하면 영상질불량으로 아무런 동향도 장악하지 못했다는것을 자인한것이다.
잠수함식별은 《한》미련합정보에 의한 관측자료를 토대로 이루어지며 24시간 해당지역에 대한 미국의 최첨단정보위성의 관측이 해상도 1m이하의 정밀한 영상자료에 기초하기때문에 신뢰도가 대단히 높다고 자칭하던 괴뢰들이 유독 사건발생을 전후하여 1~2일전에 《영상질불량》때문에 정확한 관측결과를 내놓을수 없다고 하면서 그 무슨 《ㄷ자형침투경로》를 떠드는것은 완전한 추상이다.

사건발생을 전후한 며칠동안 날씨가 관측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측불가》에 밀어붙이는것은 우리 잠수함침투에 관한 저들의 모략극을 《검은 상자》에 매몰해버리기 위한 자작극에 불과함을 폭로해줄뿐이다.

7. 과학적부정을 당한 알루미니움흡착물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은 어뢰폭발로 인한 함선침몰의 과학적증거로 선체 및 어뢰부품의 흡착물질분석이라는것도 내놓았다. 그러면서 어뢰추진체에 붙어있는 다량의 흰색분말과 선체 여러곳에서 발견한 흡착물질의 성분이 같기때문에 함선침몰원인이 어뢰공격에 의한것으로 단정지을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 공화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권위있는 물리학자들의 정밀분석결과에 의해 전면배격당하였다.
괴뢰조사단은 어뢰폭발체에 들어가는 알루미니움이 폭발과 랭각을 거치면서 비결정질알루미니움산화물로 바뀌였고 이 비결정질산화물은 에네르기분광기에서 알루미니움으로 인식되지만 X선회절기분석에서는 알루미니움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과 카나다를 비롯한 여러 나라 물리학자들은 폭발과 랭각에 의해 알루미니움이 100% 비결정질알루미니움산화물로 변하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반박하였으며 알루미니움이 100% 산화될 확률은 0%에 가깝고 그 산화된 알루미니움이 모두 비결정질로 될 확률 또한 0%에 가깝다고 설명하였다. 특히 괴뢰조사단이 주장한 선체와 어뢰추진체의 흡착물질은 폭발로 생성된 비결정질알루미니움산화물과는 달리 상온이나 저온에서 생성되는 물질이므로 폭발과 같은 고온에서는 생성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들은 이 사실을 과학적으로 립증하기 위해 X선회절법, 에네르기분광법, 적외선분광법, 전자현미경관찰, 레이자분광법 등의 방법으로 흡착물질을 분석검증한데 이어 직접 실험을 진행하였으며 괴뢰조사단에 공개실험을 제안하기까지 하였다.

우리 공화국의 물리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표명하였다.
이 제안에 응하지 못하던 괴뢰들은 최초검사에서 비결정질산화알루미니움만 검출되고 결정질산화알루미니움을 발견하지 못한것은 극소량이 검출되였기때문이라고 변명하는것으로써 저들이 내놓았던 과학적자료와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였다.

괴뢰들이 이번 조사결과중 가장 과학적인것이라고 한 선체와 어뢰의 모의폭발실험, 흡착물결과분석은 결국 알루미니움이 폭발로 인해 100% 비결정질산화물로 바뀔수 없다는 과학적사실조차 모른채 억지론리로 조사결과를 합리화하려 했다는것만을 드러낸것으로 된다.

8. 멀쩡한 좌현스크류와 형광등

괴뢰들은 《천안》호침몰사건을 우리와 련계시키기 위해 각계각층 사람들을 괴뢰해군 2함대 기지에 초청하여 돌아보게 하는 놀음을 벌려놓았다. 그런데 그것이 더 큰 우환거리로 되였다.

인양해놓은 함선을 돌아보던 사람들은 괴뢰들의 설명에 리해보다 더 큰 의혹만을 가지게 되였다. 그것은 수중비접촉폭발이 함선좌현에서 발생했는데 좌현스크류는 멀쩡해있고 반대로 우현스크류가 심하게 변형되여있으며 선체가 두동강난 부위에 설치되여있는 형광등도 생생하게 존재해있은 사실이다.

목격자들이 폭발면에 접해있는 형광등은 그대로 생생하고 함선만 두동강내는 초정밀타격어뢰는 난생처음 접했다고 야유하면서 이 형광등이야말로 어뢰폭발도 견디여낸 《마술형광등》, 《방탄형광등》이므로 특허를 받아야 한다고 신랄하게 조소할만도 하였다.

사실 스크류변형은 《천안》호 좌초설의 핵심론거로 되고있다. 따라서 이 기초적의문점을 해명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지만 괴뢰들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하였다.

론난이 확대되자 괴뢰국방부는 스크류변형분석결과를 얼버무렸으며 해군함정의 형광등은 충격에 적응되게 만들어진것이라고 하면서 《천안》호선체가 절단된다고 해서 유리형광등이 깨져야 한다는 리유는 없다는 터무니없는 궤변만을 늘어놓았다.

멀쩡한 좌현스크류와 형광등은 《천안》호침몰이 《북 어뢰공격》에 의한것이였다는 미국과 괴뢰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결정적증거물로 되였다.

9. 발표된 증거는 좌초증거

이번에 가장 큰 론난을 빚어낸것은 《천안》호의 침몰원인이 어뢰공격이냐 좌초냐 하는것이였다.
괴뢰들은 《천안》호침몰원인을 어뢰공격으로 몰아가기 위해 외부에 차단하였던 함수와 함미를 언론에 공개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천안》호관련자료들이 모두 좌초를 확실히 립증해줄뿐이라고 하면서 《합동조사단》이 원인분석에서 결정적실수를 저질렀다고 주장하였다.

우선 침몰된《천안》호함수가 발견된것은 백령도와 대청도사이로서 암초가 많은 곳이다.
또한 함미좌현안전기 바깥쪽의 찢어진 부분과 안전기좌측의 굴곡, 선체나 안전기 등의 골격부분을 따라 심하게 긁힌 자리는 암초나 모래바닥에 선체가 문질러졌을 때 생겨나는것이다.
어뢰공격에 의한 손상이라면 함선이 부분적으로 찢어질리가 없고 녹이 쓸 리유가 없다는것이다.

좌초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함미 우측프로펠러가 모두 휘였음에도 불구하고 안전기가 멀쩡한것과 관련하여 만약 수축과 팽창을 일으키는 비접촉성수중폭발(버블제트)에 의해 침몰되였다면 안전기는 부러지든가 날아나든가 했어야 하였다고 하면서 이는 합리적의심이라고 주장하였다.

괴뢰들은 이러한 합리적의심을 두고 《괴담》으로, 《리적행위》로 몰아대면서 치졸한 색갈론적처분으로 리성적대처를 막아나서려 하였다.
그러나 진실을 가리울수 없었다.

《조사단》의 발표대로 어뢰가 《천안》호 근접거리에서 폭발했다면 어뢰파편이 선체에 무수히 박혀있어야 했으나 그것을 찾아볼수 없었고 승선장병들속에서 어뢰공격의 경우 발생하는 고막파렬이나 관절파렬 등이 발견되지도 않았으며 죽은 물고기 등도 떠오르지 않았다. 괴뢰국방부가 공개한 열영상감시기재 《TOD》영상과 《조사단》이 제시한 좌표, 괴뢰해군 전술지휘자동화체계의 좌표 등을 분석한 결과 《천안》호는 《조사단》이 발표한 침몰사건발생시간이후에도 계속 서북쪽으로 기동하고있는것으로 되여있다. 만약 《천안》호가 어뢰폭발로 절단된 후에도 조류를 거슬러 이동하였다는것은 《어뢰공격침몰》을 부정하는것으로 된다. 생존자들이 《꽝》하는 소리와 《퉁》하는 중간소리를 내며 선체가 무엇에 부딪치면서 함선이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으며 기름타는 냄새가 났다고 증언한것은 좌초현상을 증명해주는것으로 되였다.

내외전문가들이 함선침몰해역에서 수집하였다고 하는 어뢰추진동력장치와 선체의 변형상태, 관련자들의 진술내용, 부상자상태 및 시체검사, 지진파 및 공중음파분석, 수중폭발모의실험, 백령도근해의 조류분석, 폭약성분분석, 수집된 어뢰부분품 등을 종합적으로 놓고볼 때 근거리비접촉수중폭발이 없었으며 어뢰추진체와 《천안》호의 파손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어뢰가 《북의것》이라는 증거도 없다는것을 립증할수 있다고 주장하고있는것은 우연한것이 아니다.

10. 자취를 감춘 미공개영상자료

괴뢰들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TNT 250㎏의 어뢰 《CHT-02D》는 《천안》호의 가스타빈실로부터 좌현 3m, 수심 6~9m에서 폭발해 《충격파와 버블제트효과》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천안》호가 두동강난것으로 되여있다.
특히 《천안》호에 가장 직접적인 손상을 가져온 《충격파》는 초당 8 000m의 속도로 선체에 충격을 가했다는것이다.

괴뢰들의 발표대로 어뢰가 선체와 3m가량의 거리에서 이와 같은 위력한 충격파를 냈다면 함선선체는 이로 인하여 1. 1초이면 완전히 절단된다.
실제로 괴뢰국방연구소가 지난 2004년에 실시한 중어뢰의 《수중비접촉폭발》시험동영상을 보면 TNT 185㎏ 《백상어》어뢰는 폭발한지 1초도 안되여 선체를 완전히 두동강냈다고 한다.

또 폭발뒤 10여초가 지나 수십m가량 치솟은 물기둥이 사라진뒤 함수와 함미가 수십m나 떨어져있었고 폭발뒤 30여초가 지나면 해수면에서 선체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아볼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상어》어뢰보다 훨씬 강한 TNT 250㎏ 정도의 폭발력을 가진 《CHT-02D》어뢰에 피격된 《천안》호는 30초정도에서 완전히 침수되던가 아니면 함수와 함미가 완전히 분리되여있어야 할것이였다.

지금까지도 침몰함선의 항적일지와 음파탐지기내역공개를 거부하고있는 괴뢰국방부가 마지못해 공개한 《천안》호침몰사고지점에 대한 TOD(열영상관측장비) 동영상자료에는 유독 함선폭발과 선체분리순간의 장면들만 빠져있다.

그러면 함선침몰원인의 결정적증거로 될수 있는 선체분리순간의 동영상자료는 어디에 자취를 감추었는가.
사건발생초기 괴뢰국방부는 폭발이 일어나기전 《천안》호의 정상기동장면과 폭발후 이미 분리된 함수와 함미장면 그리고 함수침몰장면들을 공개하면서 함수와 함미가 분리되는 가장 중요한 순간을 기록한 TOD동영상만은 없다고 우겨대다가 여론의 질타에 떠밀려 결국 두차례나 추가영상을 공개하지 않으면 안되는 추태를 보였다. 그때마다 그것은 더큰 의혹의 불씨로 되였다.

괴뢰들이 추가보충하여 내놓은 TOD영상은 함선폭발후 32초부터 40초사이의 동영상자료이다.
이 8초간의 새 동영상을 보면 《천안》호의 함수와 함미가 완전히 분리된것이 아니라 함선의 굴뚝이 여전히 검은 점으로 보이고 백령도쪽을 향하여 우현으로 기울어져있다.

괴뢰들자신이 주장한 과학적실험이나 일반적상식을 보아도 《천안》호가 어뢰에 의하여 침몰되였다면 폭발직후 32초가 지난 뒤의 모습은 수면우에 보이지 말아야 한다.

바빠맞은 괴뢰국방부는 《TOD포커스(초점)를 저배률인 3배률로 놓고 관측한 상태여서 흐릿하게 찍혔다.》느니, 《이미 함체가 두동강난 상태이나 해상도가 낮아 구별되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변명하였다.

처음에는 군사기밀이요 뭐요 하면서 숨겨오다가 세번에 걸쳐 말바꾸기를 한 결과마저도 어뢰공격이 아닌것으로 판명되였으니 미공개영상자료가 무엇때문에 자취를 감추게 되였는가 하는것은 불보듯 뻔하다.

11. 몰상식한 부식기간측정놀음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이 내놓은 《조사결과》라는것의 허황성은 어뢰추진체의 부식기간측정놀음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중간조사보고서》발표당시 괴뢰들은 어뢰추진체금속의 재질과 부식층을 측정하는 과정에 재질과 부식층차이의 편차가 굉장히 커 정확한 부식기간을 측정할수 없었다고 하면서 《조사단》성원들이 육안검사로 이 정도면 1~2개월정도 부식된 상태와 류사한것으로 평가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금속의 부식기간측정을 과연 육안검사로밖에 할수 없겠는가 하는것이다.
이에 대해 남조선의 한 해상전문가의 실험결과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는 《천안》호의 부식상태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염분과 조류 등이 침몰수역과 류사한 수역에 가열한 알루미니움과 불수강, 철쪼각을 수장해놓았다가 건져냈다고 한다.

결과를 보면 어뢰추진체에 쓴 녹처럼 심하게 녹이 쓸지 않았으며 특히 알루미니움은 하얀 흡착물질이 일부 생겨났지만 가열됐던 부위는 검게 뭉개져있었다. 이는 괴뢰조사단이 공개한 어뢰추진체 프로펠러의 흡착물질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것이였다.

철쪼박인 경우에도 검은 녹이 쓸어있었지만 검은 녹을 닦아낸 뒤 공기중에 놓아두자 검게 쓴 녹이 노랗게 변하였다고 한다. 이것 또한 어뢰추진체의 굴대가 빨갛게 녹이 쓸어있었던것과 비교되는것으로 추진체의 녹이 훨씬 많이 쓸어있다는것을 보여준다.

불수강역시 일부 검게 변한것은 있지만 별다른 부식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합동조사단》이 북의 어뢰공격을 립증하기 위해 보여준 어뢰추진체는 터무니없이 녹이 많이 쓸어있었다고 하면서 적어도 물속에서 4~5년 있었고 물밖에 나와서도 상당기간 있었던것이라고 평을 내리였다.

로씨야의 조사결과에도 《천안》호선체의 녹상태와 《1번》어뢰추진체의 녹상태를 과학적으로 분석비교해보았을 때 어뢰추진체는 6개월이상 바다물속에 수장되여있은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이 둘은 서로 련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괴뢰조사단이 발표한 《최종보고서》부록에는 어뢰에서 채취한 흡착물질이 폭발의 결과로 생긴 산화알루미니움이 아니라 반대로 수산화알루미니움(부식에 의한 녹)임을 증명하는 《EDS(에네르기분광분석)》자료가 실려있었다.

해외전문가들은 흡착물질을 200℃에서 열처리했을 때 나타나는 에네르기분광자료가 중간조사발표때는 없었으나 《최종보고서》에는 들어가있다면서 《흡착물질에 대한 실험결과는 수산화알루미니움을 열처리실험할 때 나타나는것과 동일한것이여서 흡착물질이 폭발의 결과때문이라는 <최종보고서>의 결론과는 배치된다.》고 일치하게 지적하였다.

그들은 기만과 허위로 가득찬 《최종보고서》에 이런 자료가 실린것은 일부 량심있는 학자들이 실험결과를 남겨놓은것으로 해석된다고 리해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결국 괴뢰들은 과학적기술검사가 아닌 《육안검사》라는 단순추정을 통해 저들의 조사가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허술하게 진행되였는가를 스스로 드러내보였으며 《천안》호침몰사건의 《북 개입설》이 철저한 날조극이라는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12. 조소를 자아낸 침몰모의실험

《천안》호침몰원인을 우리와 련계시키기 위해 괴뢰들은 어뢰폭발에 의한 침몰을 립증시키기 위한 침몰모의실험을 벌려놓았다고 한다.
이 모의실험이 괴뢰들의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를 뒤집어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괴뢰들은 애초 어뢰의 폭발력을 우리의 중어뢰 《CHT-02D》의 TNT 250㎏ 정도라고 발표하고 이에 근거하여 조사결과를 제시하였다.
실지 괴뢰들이 공개한 이른바 《1번어뢰》의 제원에도 폭약량은 250㎏으로 규정되여있었다. 문제로 되는것은 이러한 폭약량에 의한 폭발력으로는 《천안》호침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뢰에는 TNT보다 더 강력한 고성능폭약이 함께 사용된다.
어뢰전문가들은 어뢰폭발력이 통상적인 TNT폭발물보다 1. 4~2배가량 더 크다고 보고있다. 이렇게 놓고보면 《1번어뢰》의 폭발력은 TNT 350~500㎏에 이르게 된다.

괴뢰들도 어뢰의 폭약이 단순히 TNT로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라는 점을 뒤늦게 시인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어뢰의 폭발력을 TNT 360㎏으로 높여 수중폭발모의실험을 다시 진행하였다. 그래야 《천안》호의 기관실과 선체바닥을 비롯하여 파괴모습이 실제에 가깝게 재현되기때문이였다.

모의실험결과는 《천안》호침몰사고당시 나타난 여러 현상을 부정하였다.
당시 포착된 지진파와 공중음파에 나타난 폭발규모가 TNT 140~260㎏이라는 점을 부정하게 되면 괴뢰들이 제시한 충격과 열의 발생, 물기둥의 높이, 승조원들의 부상정도, 《1번》글씨의 잔존가능성, 침몰함선의 선체와 내부화약고 어디에도 어뢰폭발에 의한 충격파흔적이 없는것 등 폭발력에 기초한 모든 쟁점들을 다 부정하는것으로 된다.

《조사단》의 한 성원이 이 모의실험과 관련하여 《2개월정도 열심히 고치고 모델을 좀 수정보완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실토한것은 전적인 짜맞추기식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결국 괴뢰들이 《천안》호침몰을 우리 어뢰에 의한것으로 조작해보려고 안깐힘을 쓴것이 저들의 조사결과를 부정하는 역작용을 가져온것이다.

13. 불량기소장으로 된 《최종보고서》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은 지난 5월 20일 발표한 《중간보고서》가 내외여론의 랭대와 배격을 면치 못하게 되자 그동안 제기되였던 각종 의혹들을 해소한다고 하면서 100여일이 훨씬 지난 9월 13일 《최종보고서》라는것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최종보고서》는 오히려 의혹만을 더 증폭시켰으며 역적패당의 의혹해소공약이 빈말에 불과했다는것만을 보여주었다.
천안》호침몰사고요인을 중점적으로 분석했던 1차발표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일정별조사활동 등 조사과정과 조사내용, 분석자료를 수록하는것으로 그치였으며 그나마 물끓듯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 해명이 잘 안되는 부분은 아예 다 빼버렸다.

그도 그럴것이 사건의혹의 핵심인 《북 어뢰공격설》의 근거로 현장에서 수집했다는 어뢰추진체를 물증으로 또다시 제시했으나 이 추진체가 《북의것》이라는 직접적증거를 내놓지 못하였으며 《1번》글씨나 《어뢰설계도》 등도 기존의 주장만 되풀이했던것이다.

남조선출판보도물들은 《모두 간접적증거일뿐》인 이런 부실한 《최종보고서》를 누가 믿겠는가고 개탄하면서 그렇게 많은 전문가들을 초청해다가 많은 기일을 소비하여 조사를 벌리고도 침몰원인에 대한 완벽한 증거를 확보하기는커녕 의문점만 확대, 재생산한것만큼 남조선주민의 70%이상이 《당국이 정치적목적이나 책임회피를 위해 의도적으로 진실을 외곡한게 아니냐는 의혹》을 품고있고 나머지도 불신하거나 반신반의하는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지적하였다. 실제로 지금 남조선의 정계, 사회계, 과학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이를 규탄하는 긴급토론회를 열고 그 진상을 끝까지 밝히려는 용의를 표시하고있다.

유일하게 《천안》호사건을 현지에서 조사하였던 로씨야의 조사단이 함선침몰과 관련하여 《북의 어뢰공격으로 판단할 아무러한 근거도 찾을수 없었다.》고 실토한 사실, 합동조사에 참가하였던 스웨리예조사단이 《북 소형잠수정의 소행》이라는 립장을 공식보류한것,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사건조사결과에 의문점을 제시하면서 사건재조사를 주장해나서고있는 사실 등은 결코 우연하지 않다.

로씨야, 도이췰란드, 중국,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 언론들이 남조선당국이 발표한 《<천안>호사건 최종보고서》야말로 하나의 특대형사기문서라고 단죄하면서 퍼붓는 비난의 불소나기앞에 급해맞은 모략가들은 수많은 의혹 등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의혹 및 쟁점사항을 만화에 다 수록했으니 보면 될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하였다.

나노그람수준까지 검출해내는 현시대에 《검출능력의 한계》를 떠든것은 결국 허위로 진리를 누를수 없다는것을 자인한것으로 되며 과학기술적해명을 한갖 만화로 대치한것은 음모군들의 모략이 그만큼 유치하다는것을 립증하는것으로 될뿐이다.

리명박역적패당은 숱한 사병들의 목숨을 동족대결의 제물로 바치면서 조작한 《천안》호사건을 통하여 희세의 민족반역자, 악랄한 동족대결분자, 추악한 친미사대매국노로서의 흉악한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놓았다.

미국은 보잘것없는 주구를 반공화국모략극날조에로 내몰아 만천하에 저들이 이 분야에서 둘도 없는 《연출가》임을 스스로 확인시켰으며 극동지역, 동북아시아의 전략적리익을 크게 챙기는 사기행위를 또다시 저질렀다.

미국과 역적패당이 내놓은 《천안》호사건조사결과의 허위성을 보여주는 자료는 부지기수이다.
미국과 역적패당이 《천안》호사건을 떠들어대면서 반공화국대결소동에 광분하면 할수록 우리는 2차, 3차로 계속 날조극, 모략극의 정체를 까밝히게 될것이다.
민족사상 초유의 특대형모략극을 날조한 미국과 리명박역적패당은 시대와 력사의 준엄한 철추를 면치 못하게 될것이다.

주체99(2010)년 11월 2일
평 양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결성19돌을 맞아 -대단결로 도약하자

오늘 우리는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분투해 온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결성19돌을 맞았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지난 19년의 간고한 역사에 대해 한없는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기치를 더 높이 들고 더 빠른 단결의 걸음으로 격동하는 정세를 앞서 헤쳐 나갈 것이다.

범민련의 역사는 “투쟁으로 시작하고 투쟁으로 전진”해 왔다.

남측은 4.19함성, 5.18봉기, 6월항쟁으로 투쟁의 정점을 만들며, 북측은 반제자주의 아성을 부단히 쌓으며, 해외동포들은 독재정권의 온갖 방해공작과 탄압을 물리치고 분단사상 처음으로 “전 민족 차원”의 “상설적인 연합전선체”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결성하였다. 범민련 19년의 역사도 남측사상 가장 많은 구속과 희생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투쟁으로 승리”할 연대기에 본격 접어들었다.

2012년 해는 7천만 겨레가 주시할 뿐 아니라 세계가 주시하는 연대로 되었다. 남측은 2012년을 정치적 대전환의 해로 만들기 위해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본 궤도에 올려놓으려는 강력한 투쟁의지를 모으고 있다.
또한 2012년 해를 결승선 삼은 북측의 강성대국건설을 향한 대고조 열풍과 남북해외의 응원이 숨가쁘게 어울려지고 있다.
세계진보민중들은 우리의 조국통일 여정이 세계의 자주, 평화, 친선에 또 어떤 긍정적인 파장을 일으킬 것인가 잔뜩 주목하고 더 큰 지지와 함께 자기나라에서 반제전선을 완강히 추동하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 민족끼리’ 열풍이 민족과 세계의 평화와 진보를 불러일으키는 태풍의 눈으로 되었으며 노쇠한 미제국주의와 사대매국세력들은 안절부절하고 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는 반드시 대단결로 도약의 발판을 확고히 다져 자주통일 승리의 기틀을 마련할 것이다.

승리의 원천 ‘우리 민족끼리’ 기치를 높이 들고 범민련 3자연대 역사와 대단결 전통을 더욱 견결히 하고 더욱 겨레의 것으로 하며 더욱 빛내 나갈 것이며 기층 속으로 더욱 깊게 뿌리 내릴 것이다. 진보진영의 통큰 단결로 광범한 민중을 결속시켜 반MB공동투쟁을 적극 벌여 나갈 것이다. 6.15공동선언 발표 10돌이 대단결을 더욱 공고히 하고 위력을 떨치는 계기가 되도록 의의있게 준비해 나갈 것이다.

범민련 출범의 뜨거운 열정과 6.15공동선언의 환희를 승리의 힘으로 재차 불러일으켜야 하며 범민련 전진과 6.15공동선언 이행 상에 발휘된 모든 지혜도 다 집중시켜야 한다. 범민련 20돌이 되는 내년까지 범민련 20년 역사에 아로새겨있는 모든 흔적들을 겨레와 함께 성과적으로 되새겨야 하며 겨레의 ‘우리 민족끼리’ 혼을 조국통일 3대 헌장탑처럼 구체화하고 대단결, 총궐기의 위용을 우뚝 일으켜 세워야 한다.

범민련 남측본부 전 성원들은 “투쟁으로 시작하고 투쟁으로 전진한” 범민련의 역사를 “투쟁으로 승리”하는 내일의 주인공이 되자.

전체 민중들은 대단결로 승리와 패배의 악순환을 과감히 끊어내고 2009년에 이어 2010년에도 한나라당에게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안기자.
‘우리 민족끼리’ 힘은 백전백승의 보검이며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승리는 확정적이다. ‘우리 민족끼리’ 기치 높이 들고 범민련운동으로 조국의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가자.

2009년 11월 20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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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단결위업을 힘있게 추동해온 범민련

오늘 우리 겨레는 6. 15공동선언과 10. 4선언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자주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고있는 시기에 전민족적인 통일운동조직체인 조국통일범민족련합(범민련)결성 19돐을 뜻깊게 맞이하고있다.

주체79(1990)년 11월 20일 해내외 온 겨레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속에 결성된 범민련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실현하는것을 사명으로 하고 해내외의 각계 통일운동단체들과 광범한 동포들을 하나로 묶어세워 자주통일위업실현에로 고무추동하는 범민족적인 통일애국운동조직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조국통일범민족련합의 결성은 조국통일의 주체적력량을 강화하고 조국통일운동을 보다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는데서 이룩된 중요한 성과이다.》

범민련의 결성은 전민족적규모에서 통일의 주체적력량을 강화하고 북과 남, 해외에서 분산적으로 진행되여오던 통일운동을 하나의 조직적인 기반우에서 거족적으로 강화발전시켜나가는데서 획기적의의를 가지는 커다란 사변이였다. 범민련이 결성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조국통일의 위력한 담보로 되는 민족의 대단결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적거점을 가지게 되였으며 조국통일운동은 전일적인 통일운동조직의 주도하에 전민족적인 범위에서 목적의식적으로 활발하게 발전해나갈수 있게 되였다.

범민련은 결성후 지난 19년동안 민족적화해와 단합을 실현하고 조국통일운동을 강화발전시키기 위한 길에서 실로 커다란 성과들을 이룩하였다.

범민련은 북과 남, 해외의 우리 동포들이 사는 모든 곳들에 지역본부와 지부 등 정연한 조직체계를 갖춘 통일운동조직으로, 각계각층 동포들을 폭넓게 망라하고있는 대중단체로 장성강화되였으며 조국통일3대헌장과 민족대단결5대방침의 기치를 높이 들고 온 겨레를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하면서 자기의 사명과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여왔다.

《우리 민족끼리》를 근본리념으로 하는 6. 15통일시대가 펼쳐진것은 범민련의 활동을 한단계 강화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범민련은 력사적인 6. 15공동선언과 10. 4선언의 정당성과 생활력, 그 리행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해설선전하고 그 관철에로 해내외 온 겨레를 힘있게 불러일으켰다. 특히 북남선언들을 부정하면서 그 리행을 가로막는 반통일세력의 책동을 걸음걸음 폭로단죄하고 조국통일운동을 더욱 활성화해나갔다.

6. 15와 8. 15를 계기로 북과 남, 해외에서 다양한 형식의 통일축전행사들이 진행되고 해내외의 3자련대가 강화되였으며 조국통일운동이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 녀성 등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전민족적인 운동으로 확대발전한것은 민족대단결의 모체로서의 범민련의 역할을 떠나 생각할수 없다.

참으로 범민련이 걸어온 지난 19년간의 로정은 반통일세력의 도전을 물리치고 통일을 지향하는 해내외 모든 동포들을 하나로 묶어세우면서 조국통일의 주체를 강화하고 통일애국운동을 전민족적범위에로 강화발전시킴으로써 민족대단결의 긍지로운 력사를 창조해온 보람찬 투쟁의 길이였다.

범민련의 결성과 그가 이룩한 자랑찬 성과는 조국통일과 민족대단결을 필생의 위업으로 내세우시고 그 실현을 위해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모든것을 다 바쳐오신 위대한 수령님의 헌신의 로고와 심혈, 수령님의 조국통일위업을 빛나게 계승해나가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탁월한 령도를 떠나 생각할수 없다.

나라가 분렬된 첫 시기에 벌써 하나의 조선로선을 내놓으시고 민족대단결사상을 천명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시기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탁월한 령도가 있었기에 우리 민족은 뚜렷한 목표와 방향, 신심과 용기를 가지고 자주통일운동을 힘있게 벌려올수 있었으며 마침내는 북과 남, 해외동포들을 망라한 범민족대회가 열리고 온 겨레의 통일의지를 대표하는 조국통일범민족련합이 탄생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통일유훈을 기어이 관철하실 철석의 의지를 안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력사적인 평양상봉들을 마련하시고 6. 15공동선언과 그 실천강령인 10. 4선언을 채택하여주심으로써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을 위한 우리 민족의 투쟁의 획기적전환기를 열어놓으시였다. 하기에 오늘 전체 조선민족은 민족자주통일위업의 빛나는 력사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승리적으로 이끌어오신 민족의 태양이시며 조국통일의 구성이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 가장 숭고한 경의와 최대의 감사를 삼가 드리고있다.

현시기 범민련앞에는 민족공동의 자주통일대강인 6. 15공동선언과 10. 4선언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반통일세력의 악랄한 도전을 짓부시면서 민족의 단합을 적극 실현하고 조국통일운동을 끊임없이 강화발전시켜나가야 할 영예롭고도 무거운 과업이 나서고있다.

전민족적범위에서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고 공고히 하는것은 범민련앞에 나서고있는 기본과업이다. 범민련은 조성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자기의 조직을 더욱 튼튼히 꾸리고 북과 남, 해외의 각계 통일운동단체들사이의 래왕과 접촉, 대화와 련대, 련합을 백방으로 강화하여야 한다. 이미 거둔 성과에 토대하여 자주와 애국을 지향하는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기업가, 종교인 등 각계각층의 광범한 동포들을 조국통일운동대오에 튼튼히 묶어세워야 한다.

6. 15공동선언과 10. 4선언을 고수, 리행하기 위한 투쟁을 더욱 힘있게 벌려야 한다. 범민련은 6. 15공동선언과 10. 4선언의 정당성과 생활력을 해내외 각계각층 동포들에게 깊이있게 해설선전하고 그 관철에로 힘있게 불러일으켜야 한다.

반통일세력의 동족대결, 북침전쟁도발책동을 폭로단죄하여야 한다. 범민련은 자주통일운동의 기수답게 6. 15공동선언과 10. 4선언을 반대하면서 북남관계발전을 가로막고 조선반도의 군사적대결을 격화시키는 외세와 그에 추종하는 남조선반통일세력의 책동을 단죄규탄하는 투쟁을 보다 대중화, 조직화, 적극화하여야 한다.

온 민족의 신뢰를 받는 범민련의 성스러운 통일애국위업은 언제나 필승불패이다.
해내외 우리 겨레의 기대와 적극적인 지지성원밑에 6. 15공동선언과 10. 4선언의 기치를 높이 들고 대단결, 조국통일의 길로 힘차게 전진하는 범민련의 애국위업은 반드시 승리할것이다.


국가보안법 철폐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의 이적단체규정 철회를 위한 법률소견서 요약

- 범민련 이적단체 규정 철회를 위한 법률지원단

< 소견서 구성 >

0.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남측본부 규정 철회에 대한 법률 소견서의 목적
1. 법원의 범민련 남측본부에 대한 이적단체 규정
2. 국가보안법은 위헌무효의 법률이다.
3. 범민련의 노선과 그에 기초한 활동과 관련하여
1) 연방제통일방안에 대하여
2) 주한미군 및 핵무기 철수 주장에 관하여
3) 평화협정 체결 등의 주장과 관련하여
4)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에 대하여
5) 국가의 존립?안전 및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위험성 판단과 관련하여
4. 범민련 남측본부는 조국통일을 위해 애쓰는 애국애족단체이다
1) 범민련의 결성과 그 위상에 대하여
2) 6.15공동선언과 범민련
3) 범민련 남측본부는 이적단체가 아니라 애국애족단체이다 .
5. 결


0.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남측본부 규정 철회에 대한 법률 소견서의 목적

국가권력이나 법이 공평정대하지 못하거나 어느 특정한 세력을 뒷받침하거나 혹은 위해하는데 악용된다면 그 사회는 민주주의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얼마전 국제인권단체인 국제엠네스티에서 한국의 인권상황을 개탄하며 대선후보들에게 국가보안법 폐지, 양심수 문제 등을 거론한 일은 국제적인 망신이었으며 대한민국 인권과 민주주의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범민련 남측본부에 들씌여진 이적단체라는 굴레도 마찬가지입니다. 범민련은 분단역사 최초로 남북해외의 광범위한 단체와 인사들이 모여 결성을 준비하였으며 오로지 통일을 위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서슬퍼런 군부독재의 시절, 정권의 유지를 위한 부당하게 내려졌던 ‘이적단체’의 굴레는 세월이 지나 남북 정상이 화해와 악수를 한 지금에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통일은 어느 특정한 계층이나 정치적 집단의 것이 아닌 우리 민족 전체의 숭고한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누구를 배제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범민련에 들씌여진 잘못된 이적규정을 철회하는 것은 이땅 인권과 민주주의의 발전이 증거로 될 것이며 진정한 통일을 위한 초석이 됩니다.
이에 법적인 검토를 진행하여 범민련 남측본부에 적용되는 이적단체 규정에 대한 부당함과 근거를 제시하는 바입니다.

1. 법원의 범민련 남측본부에 대한 이적단체 규정

범민련 남측본부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는 별개의 반국가단체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지령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서 그 궁극적인 목적은 반국가단체가 지향하는 목적에 동조하여 국가를 변란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두고 있다 할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 남측본부는 통일의 모색과 북한과의 접촉에 있어 일관된 조율과 신중한 정책추진이 필요한 현재의 실정 하에서 강령의 일부로서 북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외국군 철수, 핵무기 철수,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제반 악법의 철폐 등을 채택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이적단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대법원 97.5.16. 선고 96도2696 판결).

또한 법원은 범민련해외본부도 이적단체로 보고 있으며(대법원 96.12.23. 선고 96도2673 판결), “북한과 연계를 갖고 있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제6차 범민족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선전?선동하고, 연방제 통일방안, 주한미군철수, 국가보안법철폐, 평화협정체결 등의 내용이 담은 유인물은 이적표현물”이라고(대법원 97.2.28. 선고 96도1817 판결) 보아 연방제 통일방안의 주장 등이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보는 근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국가보안법은 위헌무효의 법률이다.

1) 헌법은 대한민국은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통일을 지향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겨레의 반쪽이자 평화통일의 상대방인 북을 적으로 보고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북과의 접촉과 왕래, 대화와 교류를 일체 차단하며 북에서 하는 일에 대하여는 설혹 그것이 남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도 비방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함으로써 민족통일을 가로막고 분단을 영구화하며, 민족 내부에 증오의 씨를 뿌리고 자유로운 통일논의와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원천봉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반통일악법이다.

2) 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하여 제정된 법률이라고 한다(국가보안법 제1조 제1항).
만약 국가가 본래의 조직원리나 표방한 목표를 저버리고 일부 집단들의 자의적 이해를 실현하는 도구로 변하여 스스로 헌법질서를 유린하고 국민들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등의 일탈 현상을 일상화한다면 국민들의 그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과 반민주적 시책에 대한 시정요구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3) 국가보안법은 또한 규정 전반에서 불명확함과 모호함으로 일관해 죄형법정주의를 위반하여 위헌인 점이 드러난 법률이지만 특히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여 그 구성원의 가입행위와 활동을 처벌하는 근거조항인 제7조는 가장 심각하게 남용된 독소조항이다.
위 조항에 사용된 여러 문언들은 그 개념이 모호하고 그 개념에 의해 포섭되는 가벌적 행위유형이 불명확하여 결국 법집행기관의 자의에 모든 것이 맡겨져 왔고, 더욱이 법원은 그러한 자의적 법집행에 대하여 적절한 제한을 가하기는 커녕 유권적 판단으로 법집행의 무단성과 임의성을 메워주어 왔다.

4) 국가보안법은 차별적이고 편파적인 법적용을 일삼아 왔다. 대통령 등 정부인사들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1989년 같은 시기에 방북하였던 임수경과 박철언에 대해 한 사람에게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던 사례가 대표적이며, 최근에는 2001. 8. 15. 평양에서 개최되었던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였던 사람들 중 범민련 구성원이나 통일연대에 소속된 인사들에 대해서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처벌하였던 경우도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5)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질서로 천명하고, 그에 따라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사상의 자유, 학문, 예술의 자유 등을 우월적 지위에 있는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어 국민의 다양한 정치, 사상적 견해의 소지와 활동이 보장되는 다당제와 정치적 다원주의가 국가기본질서로 인정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국가보안법은 아예 일정한 사상, 정치적 경향에 대해 범죄시하는 편향된 시각과 입장을 제정목적과 운용임무로 표방한 법률로서 우리 헌법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법률이다. 국가보안법은 정치적으로 불편부당하여야 할 공공기관들인 경찰, 검찰, 법원으로 하여금 일정한 정치적 판단을 가진 국민을 범죄시하여 법적용을 하도록 만드는 내재적 불구성을 가진 위헌적 법률로서 당장 폐지되어야 한다.

3. 범민련의 노선과 그에 기초한 활동과 관련하여

법원은 위에서 본대로 범민련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도 북이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방안, 주한미군철수, 국가보안법철폐, 평화협정체결 등의 주장에 동조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이적단체가 된다고 판단하였으나, 이 판단도 채증법칙을 위배하여 사실을 오인한 그릇된 것이다.

1) 연방제통일방안에 대하여
6.15공동선언에서도, 남북은 “남의 연합제 안과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밝히면서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합의하였는데, 이를 통하여서도 남과 북이 자주적?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길은 상호 제도를 인정하는 전제 하에서의 통일을 모색하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확인된 것이라 할 것이다.

6.15공동선언이 나오기 전에도 연방제통일방안과 관련하여, 노태우 정부는 북측의 통일방안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거나, 고려연방제에 대해서도 북과 협의할 것이며, 통일방안의 수정을 거론하면서 북한의 연방제에 대한 수용가능성을 시사했던 사실이 있는바, 우리 정부도 연방제 및 북의 통일방안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 사실만을 놓고 보더라도 범민련이 주장했던 통일방안이 북의 방안에 동조한 이적행위라고 비난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2) 주한미군 및 핵무기 철수 주장에 관하여.
최근의 많은 여론조사 결과는 우리 국민의 대미, 대북 인식에서 과거의 반공냉전적 태도로부터 벗어나는 결정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론조사 구체결과는 법률소견서 참조)
여론조사의 결과들을 미루어볼 때 이제 반미자주화는 시대의 대세요 국민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고, 본질적으로는 국민들이 과거의 무조건적인 대미추종적 태도에서 벗어나 미국의 입장과 태도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려 대하겠다는 성숙한 자주적 면모를 보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국민들의 태도 변화는 범민련이 주장해 왔던 바 주한미군 철수, 핵무기 철거를 통한 한반도 평화의 정착과 평화통일 실현이라는 목표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이러한 주장은 더 이상 일부 운동권의 주장이 아닌 국민들의 보편적인 주장이자 요구라는 점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평화협정 체결 등의 주장과 관련하여
법원은 심지어 범민련에서 내건 군비축소 정책 마저 북의 노선에 동조한 이적행위로 보고 있다(대법원 97.7.16. 선고 97도985 판결). 하루빨리 군사적 대치상태를 해결하고 군비감축을 통해 평화 실현의 돌파구를 열자는 의견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매우 긴요한 주장이라 할 것이며, 그것이 남북 누구에게나 실질적인 이익이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더욱이 남과 북은 1991. 12. 13. 서명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서 “남북이 불가침의 이행과 보장을 위하여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하며,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는 다른 군사문제와 아울러 대량살상무기와 공격능력의 제거를 비롯한 단계적 군축 실현문제, 검증문제 등 군사적 신뢰 조성과 군축을 실현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런 점에서 범민련의 군비축소 주장에 대한 법원의 이적성 판단은 그 기준의 합리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북미 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한반도에서 긴장 상태를 풀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사활적인 것이며, 나아가 동북아는 물론 세계의 평화 정착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것이다. 남북 간의 전쟁 위험을 더는 방치하지 말아야 하고 다시는 전쟁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막중한 과제이다.
그런데도 우리 법원은 범민련의 북미 평화협정의 체결 주장이 북의 주장과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당부도 따지지 않은 채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낙인찍고 있는 것인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4)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에 대하여
범민련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북의 주장과 같은 것이라 하여 이적단체로 낙인찍는 이유가 되는 것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라 할 것이다.
헌법을 포함한 법률의 제?개정 및 폐지에 대해 의견을 표시하는 행위는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에 속하며, 국가보안법 철폐 주장 자체를 제한하는 것은 언론 출판에 관한 허가나 검열을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 주장을 이적행위로 인정하는 것은 도저히 인정될 수 없는 그릇된 판단이다.

5) 국가의 존립?안전 및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위험성 판단과 관련하여
원래 국민들에게는 자기의 책임으로 체제를 비판하고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국민들은 특히 국가의 구성과 작용원리에 대하여 근본적 성찰을 통해 비판할 수 있고, 그 사회와 국가의 구성과 기능에서의 이상현상이 발견되면 자유롭게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의 장이 마련된 위에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 사이에 또는 개인 간에 또 이념과 정책을 달리하는 조직 간에 상호비판을 거치고 제시된 대안에 관하여 국민들의 선택을 구하는 방식이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서 인정되고 전지구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제도로 채택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원리이며 그러한 원리를 담보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3권분립의 원칙, 정당설립의 자유 등이 보장되며 사상, 학문,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이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로 하여금 분단 및 민족문제에 관해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 자체를 봉쇄하며, 민족의 화해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필수적 전제인 민족 간의 접촉과 내왕, 교류와 협력을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와 대안을 형성할 기회와, 그에 기한 정치사회적 노력을 기울일 기회를 빼앗는다는 점에서도 위헌성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4. 범민련 남측본부는 조국통일을 위해 애쓰는 애국애족단체이다

1) 범민련의 결성과 그 위상에 대하여

범민련은 90. 8. 15. 판문점에서 열린 제1차 범민족대회의 공동결의를 출발점으로 결성활동이 본격화되었고, 90. 12. 16.에는 해외본부가, 91. 1. 23.에는 남측본부 준비위원회가, 91. 1. 25.에는 북측본부가 결성되었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91년에 30여 사회단체와 정당이 함께 한 가운데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고, 95. 2. 25.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첫 범민족대회에서 발표된 공동결의에서 남, 북, 해외는 한 목소리로 통일을 위한 평화, 남북 사이의 자유왕래와 전면개방, 조국통일3대원칙에 기초한 연방제 통일, 폭넓은 통일 대화를 이룩할 것을 천명하였다. 범민련은 이념과 체제를 내건 민족 내부의 대결과 경쟁을 배제하고 오로지 전 민족이 하나로 뭉쳐 하나의 통일국가를 이룩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을 목적으로 결성된 통일운동조직인 것이다.

범민련의 결성으로 분단 이후 반세기동안 남, 북, 해외의 각 지역에서 고립 분산적으로 통일운동을 벌여오던 모든 통일지향세력이 하나로 결속되었고, 각계 각층을 망라하는 거족적인 통일운동 조직을 통하여 통일 과정에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전체 민족의 의사와 요구에 맞게 합리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6.15공동선언과 범민련
6.15공동선언은 남과 북, 양 정부의 최고책임자가 온 겨레를 대신하여 전체 민족의 이익에 맞게 화해와 통일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역사적인 합의이다. 6.15공동선언은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는 자주원칙을 다시 한 번 내외에 천명하고,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 사이의 공통성을 인정하고 그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여 통일방안 합의의 기초를 마련하는 역사적 쾌거를 이루었다. 남북정상회담과 이어진 6.15공동선언의 합의는 그동안 오해와 불신, 대결과 경쟁으로 얼룩졌던 남북관계를 일거에 화해와 단합의 방향으로 변화시켰고, 온 겨레 속에서 신뢰와 단결의 기운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6.15공동선언은 자주통일의 이정표로 되었고, 거족적 통일운동의 시대가 새롭게 펼쳐졌다.

이에 범민련은 6.15공동선언의 실현에 통일의 첩경이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해내외의 모든 통일운동단체들, 개별 인사들과 단결하여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을 지지하고 이행하는 데로 온 겨레를 더욱 힘차게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2001. 9. 18. 기존의 강령과 규약을 6.15공동선언의 정신과 원칙, 내용에 맞추어 개정하게 되었고, 활동방식에서도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얻기 위하여 보다 더 합리적이고 유연한 국민정서에 맞는 모습으로의 변화를 꾀하였다.

3) 범민련 남측본부는 이적단체가 아니라 애국애족단체이다.
범민련은 2001년 9월 18일 강령?규약 개정을 통하여 자신의 활동 목적과 원칙 등을 집약한 강령과 조직 구성의 목적과 원칙을 명기한 규약에서 범민련이 민족대단결을 바탕으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가는 조직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였으며, 특히 6.15공동선언 이후 변화된 정세와 시대의 추세를 감안하고 국민의 정서와 요구에 맞게 온 겨레가 열렬히 지지한 6.15공동선언의 내용을 전면적으로 반영하는 방향으로 기존의 강령과 규약을 손질하였다. 그렇다면 지난 시기 범민련을 이적단체라고 규정한 것도 부당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 부당성이 더욱 뚜렷해졌다고 할 것이다.

남측 당국의 최고책임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합의하고 서명한 조약에 준하는 법적 효과를 지닌 공동선언의 내용을 좇아 활동을 벌여나가는 조직에 대하여 이적단체란 허물을 들씌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6?15공동선언 자체를 이적표현물로 볼 수 없는 한 그 선언을 자기의 존재와 활동의 유일무이한 장전으로 인정하고 운영되는 조직에 대해 이적단체라는 딱지를 붙일 수는 없는 것이다.
범민련은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과 6.15공동선언 정신에 따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범민족적인 통일국가를 창립하기 위하여 남북 사이의 다방면적인 교류와 협력, 대화와 접촉을 통해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추구하는 등 평화적이고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민간통일운동 단체이다.

범민련은 남과 북 어느 일방의 이익이 아니라 남과 북 7천만 온 겨레의 공동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애국애족단체이며,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넘어 남과 북, 해외에 거주하는 모든 동포가 대단결하는 거족적 통일운동조직이다. 범민련은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추종하는 조직이 아니며 우리 민족이라면 그가 어느 곳에서 살던 어디에 소속되어 있든 하나로 힘을 합쳐 오로지 겨레의 단합과 통일을 위하여 이익이 되는 사업만을 하도록 요구하고 실천하는 순수한 통일운동단체이다. 분열되어 있는 쌍방이 화해하고 단합하여야 통일이 되는 것인 만큼 상대방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통일사업의 기초이고, 헤어져 있는 겨레가 서로 만나고 오가야 통일이 되는 것이기에 남과 북, 해외의 모든 동포가 하나의 조직으로 뭉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통일운동조직의 당연한 전제이다. 그런데 민족의 분열을 치유하고 온 겨레가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숙원인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남과 북, 해외의 동포들이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어 한 민족으로서 하나로 뭉쳐 모든 것을 다바쳐 일하는 애국애족단체에 대하여 누가 누구를 추종하고 동조한다는 둥 어느 한 쪽의 체제를 변란하려는 목적을 가졌다는 둥 하는 근거없는 이유를 대며 이적단체라는 딱지를 붙여 그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야말로 누구에게도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민족을 배반하는 이적행위라 할 것이다.

5. 결

이상으로 살펴본 바 범민련 남측본부에 대한 이적단체 규정은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시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판단되며 이적단체 규정은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이는 바이다.
법원은 범민련 남측본부에 대한 이적규정을 하루빨리 철회함으로써 범민련 남측본부가 민족의 첫째 과제인 통일조국 건설의 길에서 더욱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상 범민련 남측본부 이적단체 규정 철회에 대한 법률소견서.

법률지원단장 : 변호사 변정수
초고 : 변호사 심재환
참여 : 법률지원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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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에 대한 이적단체 규정에 관하여

-범민련 합법화를 위한 범사회인대책위원회 법률지원단

<법원의 범민련 남측본부에 대한 이적단체 규정>

법원은 북이 “대한민국을 와해시키기 위해 선전?선동활동의 일환으로 내세우고 있는 대남적화통일노선”을 추구하고 있다고 판단하고(대법원 99.12.28. 선고 99도4027 판결), “북한이 우리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음이 분명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북한 당국자의 명칭을 쓰면서 남북동포 간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통일을 논의하기 위한 정상회담을 제의하고 7?4남북공동성명과 7?7선언 등 대북 관련 개방정책 선언이 있었으며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였고 남?북한 총리들이 남북 사이의 화해?불가침 및 교류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하였다는 등의 사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북한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대법원 96.12.23. 선고 96도2673 판결 등)고 규정한 전제 하에, 범민련 남측본부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는 별개의 반국가단체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지령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서 그 궁극적인 목적은 반국가단체가 지향하는 목적에 동조하여 국가를 변란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두고 있다 할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 남측본부는 통일의 모색과 북한과의 접촉에 있어 일관된 조율과 신중한 정책추진이 필요한 현재의 실정 하에서 강령의 일부로서 북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외국군 철수, 핵무기 철수,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제반 악법의 철폐 등을 채택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이적단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대법원 97.5.16. 선고 96도2696 판결). 또한 법원은 범민련해외본부도 이적단체로 보고 있으며(대법원 96.12.23. 선고 96도2673 판결), “북한과 연계를 갖고 있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제6차 범민족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선전?선동하고, 연방제 통일방안, 주한미군철수, 국가보안법철폐, 평화협정체결 등의 내용이 담은 유인물은 이적표현물”이라고(대법원 97.2.28. 선고 96도1817 판결) 보아 연방제 통일방안의 주장 등이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보는 근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법원의 이러한 판단은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만나 6.15공동선언에 합의하고 내외에 공포한 이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범민련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보는 판단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하여 인정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이며 불합리한 오류로서 시정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위헌무효의 법률이다>

법원은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여 그 구성과 활동을 처벌하고 있으나 폐지되어야 할 위헌무효의 법률을 적용하는 것은 인정될 수 없다.

1. 헌법은 대한민국은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통일을 지향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겨레의 반쪽이자 평화통일의 상대방인 북을 적으로 보고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북과의 접촉과 왕래, 대화와 교류를 일체 차단하며 북에서 하는 일에 대하여는 설혹 그것이 남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도 비방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함으로써 민족통일을 가로막고 분단을 영구화하며, 민족 내부에 증오의 씨를 뿌리고 자유로운 통일논의와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원천봉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반통일악법이다. 국가보안법의 적용에 의해 온 겨레의 간절한 분단극복의 소망, 민족의 화해와 단합, 부강한 통일조국을 향한 일치된 의지는 철저히 짓밟혀왔다. 국가보안법은 민족을 이간하여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분단과 증오의 법제요, 통일을 소망하는 일체의 사상과 행동을 처벌하는 냉전과 독재의 법제이다. 헌법의 평화통일 이념에 따라 통일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북을 방문하고 돌아와도, 북측 인사와 만나고 대화해도, 북측과 합의하고 실천해도 그 모든 것이 조국통일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는 도외시한 채 오로지 적을 돕고 남을 해친 범죄행위로 보아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은 평화통일조항에 위배되는 위헌적 법률인 것은 물론 조국애와 민족애, 인간애를 핵심으로 하는 인간의 도덕과 양심, 정의관념이라는 자연법원리에 반하는 원천적으로 무효인 법률이다.

2. 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하여 제정된 법률이라고 한다(국가보안법 제1조 제1항). 그러나 위와 같은 규정이 타당한 것으로 인정되려면, 국가 자체가 전 국민의 지지와 동의를 받아 수립되고, 민주주의 국가의 운영원칙에 따라 활동하여야 하며 국가의 존립 목적이자 그 활동의 궁극목표인 국민의 생존 및 자유, 행복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현실이 되어야 한다. 만약 국가가 본래의 조직원리나 표방한 목표를 저버리고 일부 집단들의 자의적 이해를 실현하는 도구로 변하여 스스로 헌법질서를 유린하고 국민들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등의 일탈 현상을 일상화한다면 국민들의 그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과 반민주적 시책에 대한 시정요구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이 때에는 국가권력이 동원하는 국가 보위 목적의 제도와 기구는 사실은 국민의 기본권을 탄압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유린하는 반국민적 도구로, 실질적 의미에서의 반국가적 수단으로 전락한다. 실제 우리에게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운용되어 온 역사는 헌법질서의 기본인 자유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국민의 생존과 자유를 폐허로 만들어 온 비극사였다. 국가보안법 적용의 주체는 자유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독재권력으로서 그 집권이 바로 자유민주주의를 말살한 위에서 이루어지고, 그 집권 기간 내내 국민의 생존과 자유가 유린되고 온 나라에 공포와 무권리, 빈궁과 폭압이 난무하는 인권의 폐허장이 연출되었던 것은 역사적 현실이었다. 국가보안법이 지킨 것은 국가의 안전이 아니라 수구냉전세력을 필두로 한 일부 특권 집단의 안전과 이익이요, 무너진 것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절대다수 국민들의 생존권과 기본권, 정치적 자유와 행복이었다. 국가보안법은 그 표방한 목표를 스스로 위배하는 반민주적, 반인권적 악법으로서 헌법에 위배되는 법률이다. 그런데도 법원이 국가보안법의 위 조항을 근거로 국가보안법이 정당한 목적을 가진 합헌적 법률이라고 인정하는 것은(대법원 96.12.23. 선고 96도2673 판결) 국가보안법의 탄생배경, 적용현실 등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도외시한 부당한 판단이다.

3. 국가보안법은 또한 규정 전반에서 불명확함과 모호함으로 일관해 죄형법정주의를 위반하여 위헌인 점이 드러난 법률이지만 특히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여 그 구성원의 가입행위와 활동을 처벌하는 근거조항인 제7조는 가장 심각하게 남용된 독소조항이다. 위 조항에 사용된 여러 문언들은 그 개념이 모호하고 그 개념에 의해 포섭되는 가벌적 행위유형이 불명확하여 결국 법집행기관의 자의에 모든 것이 맡겨져 왔고, 더욱이 법원은 그러한 자의적 법집행에 대하여 적절한 제한을 가하기는 커녕 유권적 판단으로 법집행의 무단성과 임의성을 메워주어 왔다. 국가보안법은 위와 같은 치명적 약점을 보완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행위했을 때 처벌한다는 주관적 요건을 덧붙였으나 법원은 그에 대해서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지 않고 추정에 의해 요건 성립을 손쉽게 긍정함으로써 위 요건을 있으나마나한 장식물로 전락시켜 법적용의 남용과 자의를 제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국가보안법은 죄형법정주의라는 근대형법의 보편적 원리를 난도질한 도깨비 방망이가 되어 예나제나 통일애국인사들과 국민들을 자의적 처벌의 제물로 삼아 통일로 향하는 민족의 진로를 막아나서는 악법 중 악법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4. 국가보안법은 또한 동일한 내용의 행위에 대하여도 정부에 대하여 비판적이거나 반대편의 입장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적용되고, 정부에 대하여 협조적이거나 같은편의 입장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 극히 편파적인 적용양상을 보여왔다. 대통령 등 정부인사들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1989년 같은 시기에 방북하였던 임수경과 박철언에 대해 한 사람에게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던 사례가 대표적이며, 최근에는 2001. 8. 15. 평양에서 개최되었던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였던 사람들 중 범민련 구성원이나 통일연대에 소속된 인사들에 대해서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처벌하였던 경우도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이 법이 아니라 흉기이며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수단인 점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법적용에서의 선별과 편파성은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해치는 것이며 결국 국가보안법은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면에서도 위헌적 법률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5.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질서로 천명하고, 그에 따라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사상의 자유, 학문, 예술의 자유 등을 우월적 지위에 있는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어 국민의 다양한 정치, 사상적 견해의 소지와 활동이 보장되는 다당제와 정치적 다원주의가 국가기본질서로 인정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국가보안법은 아예 일정한 사상, 정치적 경향에 대해 범죄시하는 편향된 시각과 입장을 제정목적과 운용임무로 표방한 법률로서 우리 헌법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법률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바로 진보적 사상과 행동은 물론 다양한 사상이념을 포용하여 자신의 일부로 삼는다는 데 근본적 특징이 있는 정치적 제도로서, 위와 같이 자유민주주의의 근본특징을 부정하는 정치적 집단과 국가는 극우독재집단이나 국가로 규정하게 된다. 세계적으로는 독일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체제,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 등이 그 예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의 유신체제, 전두환의 폭압체제등이 그 사례가 된다. 국가보안법은 정치적으로 불편부당하여야 할 공공기관들인 경찰, 검찰, 법원으로 하여금 일정한 정치적 판단을 가진 국민을 범죄시하여 법적용을 하도록 만드는 내재적 불구성을 가진 위헌적 법률로서 당장 폐지되어야 한다.

6. 위에서도 지적하였듯이 국가보안법의 적용현실에서 두드러진 것은 그것이 수구냉전세력이나 독재세력의 국민탄압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고 유신잔당의 퇴진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부르짖던 무고한 국민들을 살해한 죄 등으로 중형으로 처단된 전두환, 노태우 일파는 아무런 정치적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살인반란집단이요 수구냉전세력으로서 국민들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탄압할 때 가장 즐겨써먹던 수법이 민주통일인사들과 국민들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나 국가의 존립,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좌익사범이라고 선전하고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처벌하는 것이었다. 총칼로 자유민주주의를 유린한 장본인들이 말살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하여 싸우는 세력을 좌익세력, 반체제인사, 반국가사범으로 몰아붙여 국민을 속이고 정권유지를 꾀했던 것이다. 그 때 국가보안법은 살인반란집단, 수구냉전세력들이 잔인무도한 인권탄압과 반민주적 폭압을 일삼으며, 거액의 부정축재를 자행하고 헌법질서를 유린하는 행위는 보호하고 반란집단의 폭압에 맞서 싸우는 국민들의 정의로운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제도로 작용하였고, 지금도 당시 반란집단의 편에 서있는 인사들에 의해 그 존속의 가치와 유지가 고창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보안법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제도적으로 구현하여 국민들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생존권쟁취운동, 인권운동을 탄압하는 가장 유력한 도구로 기능해 왔던 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하고 폐지되기 전까지는 그 적용을 막아 실질적으로 사문화시켜야 할 악법인 것이다.

<북의 반국가단체성, 북의 통일노선>

법원은 북이 대남적화통일노선을 추구하는 반국가단체란 판단을 전제로 하여 범민련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규정하여 처벌하고 있으나, 위와 같은 판단은 그 기초사실에 대한 오인에 근거한 것으로서 철회되어야 할 것이다.

1. 북은 반국가단체가 아니다
북이 국가보안법 제2조 소정의 반국가단체에 해당한다는 논리를 전제로 범민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는바, 북한이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가 아니라 한반도 이북을 통치하고 있는 정식의 국가라고 보아야 한다. 북은 일정한 주민과 영역, 독립성, 확고한 통치조직을 갖춘 정치적 통일체로서 이미 다수의 국가들로부터 승인을 받고, 유엔에도 국가의 자격으로 가입한 상태이므로 대한민국의 승인 여부와 관계없이 국제법상 국가이며, 이 점에 관해서는 법원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을 하였고, 그로써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하나의 주권국가로 승인을 받았으며”라고 하면서 인정하고 있다(대법원 99.12.28. 선고 99도4027 판결). 또한 북이 대한민국의 국가본질이나 사회성격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판단을 하고, 비판을 한다고 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의 단체라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남이 북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이유로 각종의 문제를 지적한다고 하여 북을 변란할 목적으로 비판한다고 할 수 없는 소이와 똑같은 것이다.

오히려 북은 헌법상 평화통일의 동반자요, 우리 겨레의 절반이지 말살해야 할 적이 아니다. 실제로도 우리 정부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에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에 합의한 이래로 북한을 사실상의 국가로, 평화통일의 상대방으로 인정하여 왔다. 1991. 12. 13. 채택되고 1992. 2. 19. 발효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에서는 그 제1조에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명시하는 등 북의 체제를 인정하고 남북이 대등한 당사자임을 선언하였고, 특히 위 합의서에 서명함에 있어 ‘대한민국 국무총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총리’라는 직위를 사용함으로써 상호 민족 내부의 특수한 관계라고 하면서도 그 전제로서 쌍방이 국가임을 인정하고, 북과 평화통일의 동반자로서 협력해야 할 각종의 실천적 조치들을 명기하였다. 2000. 6. 13.부터 15.까지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을 한 뒤 ‘6.15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그 서명자로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을 표기하였는데, 이 사실에 비추어보더라도 우리 정부가 북을 반국가단체가 아닌 정식의 정치적 실체를 가진 국가로 인정하고, 쌍방이 평화통일의 실천적 동반자관계임을 명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정상이 6.15공동선언에 합의함으로써 실제로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확고한 기초를 만들어낸 이후 남북관계가 기존의 불신과 대립 상태를 벗어나 신뢰와 단합의 방향으로 획기적으로 전환?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법원 등 국가기관이 여전히 낡은 대북관을 고수하고 국가보안법의 구태의연한 적용을 고집하는 것은 남북의 화해?교류?협력을 저해할 뿐아니라 전민족적 과제인 평화통일의 달성을 향하여 불붙은 겨레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이다.

2. 북이 적화통일노선을 추구한다고 할 수 없다
법원은 북의 대남정책의 목표가 적화통일이라고 단정하고 있는바, 북이 남의 자유민주체제를 전복하고 흡수하여 자신의 사회주의 체제로 동화시키는 통일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함에 있어 법원은 “북한이 대남적화통일을 기본목표로 설정하고......있음은 공지의 사실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인정에 반드시 증거를 요하지 아니한다”고 보고 있지만(대법원 93.9.28. 선고 93도1730 판결), 이 것은 일정한 정치적 견해를 사실로 오인한 그릇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북이 실행하는 통일정책의 기본 골격은 남북이 합의하여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발표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과 1993.경 발표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및 1980. 조선노동당 제6차 전당대회에서 밝힌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일컫는다고 하는 ‘조국통일3대헌장’(이하 3대헌장)에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 사망 뒤 통일정책을 그대로 계승할 것을 천명하고 실행하고 있어 현재도 위 3대헌장의 내용이 북한의 통일정책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점은 1998. 9. 5. 개정된 북의 헌법 제9조에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다”고 명시되어 있는 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북이 상정하는 통일의 원칙과 방법, 그 실현 방안 등은 바로 3대헌장에 집약되어 있으므로 3대헌장의 내용을 살펴 보면 북한의 통일정책의 실체에 대해 알 수 있다.

‘조국통일 3대원칙’이란, “첫째로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통일을 실현하여야 하며, 둘째로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을 실현하여야 하며, 셋째로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대단결을 도모하는 원칙에서 통일을 실현하여야 한다”는 3가지 원칙을 말하는 것인데, 위 조국통일 3대원칙은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전문에 명시되어 그 정당성이 재확인되고, 온 민족이 동의한 통일의 대원칙으로 인정된 바 있다. 위 3대 원칙에는 남한을 흡수하여 사회주의로 통일하겠다는 내용은 발견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남에서도 거부감없이 북과 위 원칙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이며, 오히려 위 원칙에서 말하는 민족대단결은 사상, 이념, 제도의 차이가 있다 하여 서로 대립하면 통일은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그 차이를 뛰어 넘어 단결하여야 한다는 내용으로서 결국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어느 한 쪽의 제도를 서로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이라는 것은, 1993. 4. 6. 북의 김일성 주석이 발표한 것으로, 그 전문에는 “근 반세기에 걸치는 분단과 대결의 역사를 끝장내고 조국을 통일하는 것은 온 민족의 한결같은 요구이며 의지이다.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전 민족이 대단결하여야 한다.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사람이라면 북에 있건 남에 있건 해외에 있건, 공산주의자이건 민족주의자이건, 무산자이건 유산자이건, 무신론자이건 유신론자이건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하여야 하며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 나가야 한다.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여 모두 다 나라의 통일과 통일된 조국의 융성번영을 위하여 특색있는 기여를 함으로써 민족분열을 끝장내고 통일된 7천만 겨레의 존엄과 영예를 세계에 떨쳐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 전문의 내용은 통일을 위해서는 사상이나 종교, 재산 유무, 계급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적대하지 말고 그 차이를 뛰어 넘어 단결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사회주의 통일을 할 것을 목표로 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없다. 또 위 강령의 제3항을 보면 “공존ㆍ공영ㆍ공리를 도모하고 조국통일위업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단결하여야 한다. 북과 남은 서로 다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 침해하지 말고 함께 진보와 번영을 누려가야 한다. 지역적ㆍ계급적 이익에 앞서 전 민족의 이익을 도모하여야 하며 모든 노력을 조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하는데 기울여야 한다”고 하고, 제5항을 보면 “북침과 남침, 승공과 적화의 위구를 다같이 가시고 서로 신뢰하고 단합하여야 한다. 북과 남은 서로 상대방을 위협하지 말아야 하며 침략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 상대방에게 자기의 제도를 강요하려 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을 흡수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있는바, 북은 자본주의 방식의 통일이든 사회주의 방식의 통일이든 어느 한 제도로의 통일을 명백히 반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7항을 보면 “개인과 단체가 소유한 물질적ㆍ정신적 재부를 보호하여야 하며 그것을 민족대단결을 도모하는데 이롭게 이용하는 것을 장려하여야 한다. 통일되기 전에는 물론 통일된 후에도 국가적 소유, 협동적 소유,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개인 또는 단체의 자본과 재산, 외국자본과의 공동이권을 보호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통일 후 자본주의 제도의 유지를 명시하여 북이 사회주의 통일을 추구하고 있다는 의심을 불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가 있다고 하여 반목과 대결을 거듭할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전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민족적 단합을 이룰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은 연방제 방식의 통일방안인데, 연방제라는 것은 그 개념 자체에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제도가 엄존하는 현실에서 어느 한 쪽의 체제에 다른 한 쪽의 체제가 흡수 내지는 편입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 존속한다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위 ‘연방제 통일방안’의 기본 이념과 요지가 전체 내용의 전반부에 나오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해방 후 오늘까지 북과 남에는 오랜 기간 서로 다른 제도가 존재하여 왔으며 거기에서는 서로 다른 사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족적 단합을 이룩하고 조국 통일을 실현하려면 어느 한 쪽의 사상과 제도를 절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북과 남이 제각기 자기의 사상과 제도를 절대화하거나 그것을 상대방에 강요하려 한다면 불가피적으로 대결과 충돌을 가져오게 되며 그렇게 되면 도리어 분렬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전 민족이 한결같이 조국통일을 지상의 과제로 인정하고 있는 이상, 사상과 제도의 차이가 통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이 살 수 있으며 하나의 통일국가 안에 서로 다른 사회제도가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제도를 결코 남조선에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민족의 단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복종시킬 것입니다.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위에서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를 내오고, 그 밑에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 지역자치제를 실시하는 연방공화국을 창립하여 조국을 통일할 것을 주장합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일관되게 적화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은 남을 타도하거나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통일의 당사자로서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 연방제 방안에 의해 창설되는 연방국가의 시정방침 제1항에 보면 “연방 정부는 북과 남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나라 안의 두 지역과 두 제도, 여러 당파와 계급, 계층의 이익을 다 같이 보장하는 공정한 정책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하여 역시 남, 북을 공평하게 취급하여 남, 북의 사상과 제도의 차이에 따라 있을 수 있는 반목과 대결을 없애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못박고 있다. 또한 위 시정방침 제3항에는 경제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북과 남 사이의 경제적 합작과 교류는 북과 남의 서로 다른 경제 제도와 기업체들의 다양한 경제 활동을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연방 정부는 북과 남에 있는 국가 소유와 협동 단체 소유, 사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를 다같이 인정하고 보호하여야 하며 자본가들의 소유와 기업 활동에 대해서도 독점과 매판 행위를 추구하지 않고 민족 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한에서는 그것을 제한하거나 침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경제적 측면에서도 자본주의적 소유와 제도의 지속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놓고 보면 북이 위 연방제 통일방안 실현의 선결 조건으로서 국가보안법과 폭압기구의 철폐, 북미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현재 남북의 교류와 왕래, 협력을 가로막고,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 실현을 방해하고 있는 각종의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고쳐야 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 그것을 통하여 ‘적화통일’을 달성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상 살펴본 북의 각종 통일 정책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적화통일’은 연방제방식의 통일과 본성과 원리에서도 맞지 않고, 현실적 실현 과정도 전혀 다르다. 결국 법원이 북의 통일노선과 방안을 놓고 ‘적화통일’책략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북의 통일정책을 집대성한 3대헌장을 놓고 보면 근거 없는 주관적인 판단임이 드러난다.

위에서 본대로 법원은 북의 통일노선과 정책이 ‘적화통일’임을 공지의 사실로 인정하고 있으나, 위 인정사실은 증거를 통해 인정되어야 할 것이지 편향된 정치적 경향을 가지고 있는 일부 특정 세력의 인식을 공지의 사실인 양 인정해서는 아니 된다. 그 판단자료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북에서 발행한 통일노선과 정책에 관한 기본 문헌들이 될 것이다. 물론 그 문헌들에 대해서는 문언 그대로 인정할 수 없고, 그 문언의 내용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자료와 의견을 종합, 참작하여 최종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북의 정책을 담은 원 자료들을 무시하고 북의 정책에 대한 판단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법원은 그러한 기본적인 확인 절차, 즉 증거판단 절차를 생략한 채 북의 통일노선이 적화통일전략이라는 일방적인 견해를 엄격한 증명의 법리에 의하여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채용하는 오류를 범하여 사실을 오인하고 더 나아가 실제와 동떨어진 허구를 공지의 사실로 인정하는 기본적인 잘못을 범하였다고 할 수 있다.

<범민련의 노선과 그에 기초한 활동과 관련하여>

법원은 위에서 본대로 범민련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도 북이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방안, 주한미군철수, 국가보안법철폐, 평화협정체결 등의 주장에 동조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이적단체가 된다고 판단하였으나, 이 판단도 채증법칙을 위배하여 사실을 오인한 그릇된 것이다.

1. 연방제통일방안에 대하여
위에서 상세하게 본대로 북이 ‘적화통일’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북이 내놓은 통일 정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그 취지에 찬동한다고 하여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위태롭게 된다는 논리는 아무런 근거없는 주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6.15공동선언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북이 제안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남이 제안한 연합제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러한 방향에서 통일을 이룩할 것을 합의한 데 대해 북의 적화통일전략이나 이른바 통일전선전술에 말려들었다고 비난하는 일부의 주장도 또한 전혀 근거없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범민련이 기존에 ‘연방제통일’을 통일방안으로 주장하였던 것은 물론, 더욱이 2001. 9. 18.경 강령을 개정하여 6.15공동선언에서 합의한 통일실현의 방향을 기조로 하여 활동한 것을 놓고, 북의 적화통일노선에 동조하는 행위로,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나 국가의 존립?안전에 위해가 되는 행위로 비난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없는 매도에 불과한 것이다.

어떠한 주장의 옳고 그름은 그 내용적 합리성과 타당성에 의하여 판단하여야 하는 것이지 어떤 다른 주체의 주장과 유사한지 여부에 의하여 결정될 수는 없는 것이고, 북이 주장한 것이라 하여 그 내용의 옳고 그름도 따져 보지 않은 채 무조건 백안시하며, 북이 내놓은 주장에 찬동하거나 그 기조가 비슷하다고 하여 그것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인지 여부를 따져 보지도 않은 채 북의 주장에 맹종하는 것이고, 국가안보에 유해로운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통일방안은 제도의 차이를 놓고 어떠한 입장과 실천적 방책을 취하는가에 따라 흡수통일방안이냐 아니면 연방제통일방안이냐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인데, 흡수통일방안은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라는 하나의 제도로 통합되는 형태의 통일방안을 말하는 것이고 연방제 방안은 현존하는 두 제도를 그대로 두고 하나의 통일국가를 세우는 통일방안을 말하는 것으로, 그 명칭이 어찌되었든 하나의 체제와 제도로 동화시키는 통일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흡수통일방안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민족은 그 이념과 체제를 전혀 달리하는 두 개의 사회로 나누어진 이래 50년 이상 상호 단절된 상태에서 각자 나름대로의 발전의 길을 걸어와 굳어져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어느 한쪽이 자신의 이념과 체제를 포기하고 다른쪽의 이념과 체제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느 한쪽이 자신의 이념과 체제로 다른 쪽을 동화시키는 통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무력에 의한 정복이 있을 뿐인데, 그것은 갈라진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추구하는 통일의 본성에 반할 뿐아니라 현대전의 가공할 파괴력에 비추어 구성원 대부분의 생존 자체를 파멸시킬 재앙을 초래하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망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은 무엇보다도 무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남북 쌍방이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존중하는 토대 위에서 민족대단결을 꾀하는, 즉 연방제통일방식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다. 6.15공동선언에서도, 남북은 “남의 연합제 안과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밝히면서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합의하였는데, 이를 통하여서도 남과 북이 자주적?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길은 상호 제도를 인정하는 전제 하에서의 통일을 모색하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확인된 것이라 할 것이다. 6.15공동선언이 나오기 전에도 연방제통일방안과 관련하여, 노태우 정부는 북측의 통일방안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거나, 고려연방제에 대해서도 북과 협의할 것이며, 통일방안의 수정을 거론하면서 북한의 연방제에 대한 수용가능성을 시사했던 사실이 있는바, 우리 정부도 연방제 및 북의 통일방안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 사실만을 놓고 보더라도 범민련이 주장했던 통일방안이 북의 방안에 동조한 이적행위라고 비난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지나간 90년대의 역사를 통해 구체적 현실을 살펴보아도 기존에는 통일에 대해 극히 소극적인 입장에 서왔던 남이 전형적인 자본주의제도로의 흡수통일인 독일통일이 이루어진 뒤 그에 고무되어 북을 흡수하여 통일하려는 목적 하에 각종의 연구와 시책을 전개한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은 90년대에 사회주의권의 붕괴, 미국을 필두로 한 패권주의의 압박, 각종의 자연재해 등을 원인으로 초해된 지속된 위기를 헤쳐왔던 것이고, 남은 북이 붕괴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그에 대비한 흡수통일 시나리오에 기초한 정책을 시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최근의 역사적 현실을 살펴보아도 북이 적화통일 전략을 수행하고 남이 그에 대해 방어를 하였다는 평가는 완전히 흑백을 전도한 논리가 된다.

2. 주한미군 및 핵무기 철수 주장에 관하여
7.4공동성명이나 6.15공동선언에서 민족자주의 원칙이 통일문제를 해결하는데 무엇보다도 앞서는 원칙으로 제시되고 온 민족에게 크게 환영받고 있는 이유는 민족분열이 발생하고 지금까지도 통일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근본원인이 미국을 위시한 외세의 개입과 방해에 있다는 정확한 역사적 인식에 기초하여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정세를 놓고 보더라도 미국이 북에 대해 핵전쟁위협을 가하고 6.15공동선언의 실현을 반대하는 정책 등을 강행하는 모습을 통해 미국이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평화를 위협하며, 남북이 화해하고 단합하며 통일로 전진하는 데 장애가 되는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고 그러한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은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공정한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취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또 미국이 주한미군을 지렛대로 하여 한국 정부의 건설과정과 내정운영에 심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왔던 사실, 군 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실, 한국경제건설과 운용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던 사실, 학술과 예술, 교육과 풍속에 이르기까지 미국식 문화가 횡행하는 사실 등을 보고, 미국이 한국에 대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라는 인식을 가지거나 나아가 한미관계가 지배와 예속 관계에 있다고 파악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다. 주한미군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주한미군은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하여 파견된 첨병일 뿐이지 결코 남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십자군이 아니다. 주한미군은 불평등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기초하여 일방적이고 우월한 지위에서 각종의 특혜를 누리며 군림하고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기초로 한국을 극동의 군사기지로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애국적 주장이며 정책적 대안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제는 모두 사실로 밝혀졌듯이 최소한 수백기가 넘게 배치되고 그 실전사용이 전적으로 미군의 판단에 맡겨져 있는 상황에서 민족의 공멸을 초래할 핵전쟁을 방지하자는 의도에서 했던 핵무기철수 주장을 북이 하는 주장과 같은 것이라고 하여 이적행위로 의율하는 것도 누구도 납득시킬 수 없는 횡포에 가까운 형사재판권의 남용이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주장의 당부에 관해서는 인식의 과학성과 실천적 유의미성에 대한 논쟁을 통해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합리적 태도이지, 그러한 입장이 북한의 입장과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내용에 대한 천착없이 좌경이니 용공이니 딱지를 붙이는 태도는 결국 사상, 학문, 정치활동의 자유 등을 원천적으로 부인하는 태도로서 자유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범민련이 민족자주를 이 땅에 평화를 불러오고 통일을 이룩하는 데에서 지켜나가야 할 확고한 원칙으로 삼고,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을 근저에서 비판하며 주한미군의 철수 등의 주장을 내놓은 것은 평화와 통일을 갈구하는 민족의 요청을 받든 백번천번 지당한 주장이라 못 볼 바 아니다.

최근의 많은 여론조사 결과는 우리 국민의 대미, 대북 인식에서 과거의 반공냉전적 태도로부터 벗어나는 결정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2002. 4. 11. 통일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대다수가 현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지지하면서(73.5%), 차기정부에서도 대북 화해협력정책의 기조는 유지되어야 한다고(82.6%) 응답한 것으로 나타나, 대북정책 전반에 대한 국민적 지지기반이 확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2001년에 실시된 6?15선언 1주년 기념 중앙일보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리 국민은 당시 남북관계가 교착국면에 빠진 원인이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66.5%) 가 높았다. 시사저널이 2002. 2. 23.에 긴급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2002. 2. 19. 주한 미국상공회의소를 점거한 한총련 대학생들의 소행에 대해 응답자의 47.1%가 “공감한다”고 답하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반 테러 전쟁에 대해서도 “대체로 반대한다”와 “전적으로 반대한다”를 모두 합쳐 71.4%가 반대 의사를 표시했으며, 부시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 대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려 62.9%로 미국의 대북 정책에 대해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였고, 또한 용산기지 내 미군 아파트 건립 문제에 대해 “반대”가 76.4%로 “찬성” 18.9%를 압도했고, 미국 정부의 최고위급 인사들까지 판촉에 나섰던 F15기에 대해 “구입 반대” 답변이 63. 7%를 기록하였으며, 같은 해 6월 한겨레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무려 국민들의 89.2%가 한반도 안보문제와 관련해 우리와 미국의 의견이 다를 때 미국의 의견을 따르는 데 대해 반대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제 반미자주화는 시대의 대세요 국민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고, 본질적으로는 국민들이 과거의 무조건적인 대미추종적 태도에서 벗어나 미국의 입장과 태도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려 대하겠다는 성숙한 자주적 면모를 보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국민들의 태도 변화는 범민련이 주장해 왔던 바 주한미군 철수, 핵무기 철거를 통한 한반도 평화의 정작과 평화통일 실현이라는 목표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법원은 이러한 국민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처벌하려 할 것인지 묻고 싶을 뿐이다.

3. 평화협정 체결 등의 주장과 관련하여
법원은 심지어 범민련에서 내건 군비축소 정책 마저 북의 노선에 동조한 이적행위로 보고 있다(대법원 97.7.16. 선고 97도985 판결). 법원의 이적성 판단이 얼마나 맹목적인가를 이처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도 드물 것이다. 하루빨리 군사적 대치상태를 해결하고 군비감축을 통해 평화 실현의 돌파구를 열자는 의견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매우 긴요한 주장이라 할 것이며, 그것이 남북 누구에게나 실질적인 이익이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그런데 법원에서는 범민련이 내건 군비축소론에 대해서는 그 내용의 정당성 여부에 관계없이 북이 주장하는 논리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이적성 있는 주장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법원은 ‘군비축소’가 남측에 해롭다는 판단이요, 그 역인 ‘군비확장’노선이 옳다는 결론인데, 이 것은 한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정착시켜 전쟁위기를 해소해야 할 필요성을 생각할 때 허용해서는 안될 남북 모두에게 독이 되는 주장이다. 법원의 이러한 판단은 북이 주장하는 것이면 무조건 반대해야 적법성을 얻게 되는 국가보안법의 내재적 모순을 바로 보지 못하고 형식적 법치주의에 사로잡혀 맹종한 결과 빚어진 희극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남과 북은 1991. 12. 13. 서명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서 “남북이 불가침의 이행과 보장을 위하여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하며,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는 다른 군사문제와 아울러 대량살상무기와 공격능력의 제거를 비롯한 단계적 군축 실현문제, 검증문제 등 군사적 신뢰 조성과 군축을 실현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렇다면 명백히 남과 북은 ‘군비축소’방안에 대하여 합의하였다는 것인데, 남은 북의 적화통일전략에 놀아나 위와 같은 합의에 이르렀다는 것이며, 합의에 이른 정부 당국은 이적행위를 하였다는 것인가. 이런 점에서 범민련의 군비축소 주장에 대한 법원의 이적성 판단은 그 기준의 합리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북미 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북미 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현재 정전상태가 지속되는 데 따른 불안한 정세가 해소되고, 새로운 평화를 굳건하게 할 각종 조치의 시행으로 이어져 한반도에는 평화가 깃들고 더욱 굳건한 평화체제가 정착되게 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한반도에는 남과 북 사이에 또 북과 미국 사이에 군사적 대치 상태가 오래 지속됨에 따라 긴장 상태가 격화되고 전쟁 위험이 한반도 상에 늘 떠돌고 있는 현실이다. 한반도에서 긴장 상태를 풀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사활적인 것이며, 나아가 동북아는 물론 세계의 평화 정착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것이다. 남북 간의 전쟁 위험을 더는 방치하지 말아야 하고 다시는 전쟁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막중한 과제이다. 정전협정은 어디까지나 전쟁의 정지에 관한 협정으로서 오랜 기간이 지나면서 현실에 맞지 않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정전협정에서 예정한 평화보장책이 실제로 합의되지 못하는 등 그것으로서는 항구적이고 굳건한 평화를 담보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북미가 정전협정의 체약 상대방이고 실제 당사자이므로 당사자 간의 해결을 분명히 하고, 남북 간에는 다른 방식으로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면 남이 한반도의 평화보장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소외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미국이 만일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평화협정을 마다할 이유는 없는 것이며, 남도 미국이 북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체제가 정착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 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법원은 범민련의 북미 평화협정의 체결 주장이 북의 주장과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당부도 따지지 않은 채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낙인찍고 있는 것인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4.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에 대하여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보안법은 가장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폐지되어야 할 헌법과 자연법적 정의에 위배되는 악법으로서 범민련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북의 주장과 같은 것이라 하여 이적단체로 낙인찍는 이유가 되는 것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라 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보호자로 자처하나 사실은 자유민주주의의 적인 국가보안법, 인권을 유린하고 통일을 방해하는 대표적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는 주장이야말로 국가의 존립, 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주장이지 어떻게 그 반대가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같은 범민련이 내세웠던 목표를 달성하면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내세우나 사실상은 외세의존과 권위주의적 통치와 비민주적 상황을 온존시키고, 분단현실을 고착하고 합리화하는 구각을 탈피시켜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체제가 그 실질에서 명실상부하게 되며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의 진정한 복지가 달성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현실에 대한 가장 올바른 인식이 어떠한 것인가에 따라 우리 사회의 발전방향에 관한 범민련의 노선의 정당성 여부, 실질적 위법성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지 일부 사람의 정치적 편견에 의하여, 또는 노선의 내용이 북한의 대남전략전술과 비슷한 것인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헌법을 포함한 법률의 제?개정 및 폐지에 대해 의견을 표시하는 행위는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에 속하며, 국가보안법 철폐 주장 자체를 제한하는 것은 언론 출판에 관한 허가나 검열을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 주장을 이적행위로 인정하는 것은 도저히 인정될 수 없는 그릇된 판단이다.

5. 국가의 존립.안전 및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위험성 판단과 관련하여
원래 국민들에게는 자기의 책임으로 체제를 비판하고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국민들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일인이자 국가구성원으로서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일정한 의무를 부담할 뿐 아니라 권리도 가지고 있다. 국민들은 특히 국가의 구성과 작용원리에 대하여 근본적 성찰을 통해 비판할 수 있고, 그 사회와 국가의 구성과 기능에서의 이상현상이 발견되면 자유롭게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원칙들에 대해서는 근대민주주의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원칙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바,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의 장이 마련된 위에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 사이에 또는 개인 간에 또 이념과 정책을 달리하는 조직 간에 상호비판을 거치고 제시된 대안에 관하여 국민들의 선택을 구하는 방식이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서 인정되고 전지구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제도로 채택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원리이며 그러한 원리를 담보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3권분립의 원칙, 정당설립의 자유 등이 보장되며 사상, 학문,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이 인정되고 있다. 폭력적인 방법으로 기존 질서와 보편적인 제도를 무너뜨리는 반칙을 하지 않도록 엄격한 규제를 하는 이외에는 무엇이든 국민의 기본적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 자유로운 토론과 대안의 제시가 인정되는 것은 국민주권원리상 당연한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정치적 선택에 의하여 구성되는 일정한 목적과 원리, 기능을 가진 실체이지 실체와 유리된 절대가치를 가지는 조직이 아니다. 또 국가와 사회는 실제 현실에서 자기의 목적과 기능이 국리민복에 위해가 되는 요소가 발견되면 그를 시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국민의 비판과 시정요구의 자유를 빼앗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고, 그러한 기본권 제한의 요소가 있는 사회나 국가는 민주주의사회라고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로 하여금 분단 및 민족문제에 관해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 자체를 봉쇄하며, 민족의 화해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필수적 전제인 민족 간의 접촉과 내왕, 교류와 협력을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와 대안을 형성할 기회와, 그에 기한 정치사회적 노력을 기울일 기회를 빼앗는다는 점에서도 위헌성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이야말로 이적성, 체제위험성의 허울 아래 국민의 체제비판권, 대안제출권, 체제선택권 등을 근본적으로 봉쇄하는 반국가적, 반국민적 법률인 것이다. 실제 우리 사회의 역사적 경험은 체제에 대한 비판을 봉쇄했던 역대 정권이 대다수 국민들의 정치적 권리를 말살하고 일부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며 숱한 인권유린, 생존권말살정책을 펴왔던 극우냉전세력, 군사폭압세력의 도구였음을 뚜렷이 확증해 주고 있다. 당시 국민들은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며 체제의 이상현상을 치유할 방책을 제시하고 새로운 질서와 제도를 제안하였다고 하여 좌익용공사범, 반국가사범으로 몰리고, 처벌받았으며, 각종의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하였다. 그 때 사용되었던 도구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반공반북사상이요 극우냉전논리였고, 법제도적으로는 국가보안법이 대표적이었다. 바로 국가보안법이 활개침으로써 국가의 존립과 안전이 허물어지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유린되었던 것이니, 그렇다면 위험한 것은 국민들의 기본권 행사인 비판과 대안 제시가 아니라 바로 국가보안법이라 할 것이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조국통일을 위해 애쓰는 애국애족단체이다>

1. 범민련의 결성과 그 위상에 대하여

범민련은 90. 8. 15. 판문점에서 열린 제1차 범민족대회의 공동결의를 출발점으로 결성활동이 본격화되었고, 90. 12. 16.에는 해외본부가, 91. 1. 23.에는 남측본부 준비위원회가, 91. 1. 25.에는 북측본부가 결성되었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91년에 30여 사회단체와 정당이 함께 한 가운데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고, 95. 2. 25.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첫 범민족대회에서 발표된 공동결의에서 남, 북, 해외는 한 목소리로 통일을 위한 평화, 남북 사이의 자유왕래와 전면개방, 조국통일3대원칙에 기초한 연방제 통일, 폭넓은 통일 대화를 이룩할 것을 천명하였고, 범민련은 연방제 통일방식에 의한 범민족통일국가의 건설, 외세간섭 배격 및 민족자주성의 확립, 외국군대의 철수, 남북상호군축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강령을 내걸었다. 범민련은 이념과 체제를 내건 민족 내부의 대결과 경쟁을 배제하고 오로지 전 민족이 하나로 뭉쳐 하나의 통일국가를 이룩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을 목적으로 결성된 통일운동조직인 것이다.

범민련의 결성으로 분단 이후 반세기동안 남, 북, 해외의 각 지역에서 고립 분산적으로 통일운동을 벌여오던 모든 통일지향세력이 하나로 결속되었고, 각계 각층을 망라하는 거족적인 통일운동 조직을 통하여 통일 과정에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전체 민족의 의사와 요구에 맞게 합리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6.15공동선언과 범민련
6.15공동선언은 남과 북, 양 정부의 최고책임자가 온 겨레를 대신하여 전체 민족의 이익에 맞게 화해와 통일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역사적인 합의이다. 6.15공동선언은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는 자주원칙을 다시 한 번 내외에 천명하고,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 사이의 공통성을 인정하고 그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여 통일방안 합의의 기초를 마련하는 역사적 쾌거를 이루었다. 남북정상회담과 이어진 6.15공동선언의 합의는 그동안 오해와 불신, 대결과 경쟁으로 얼룩졌던 남북관계를 일거에 화해와 단합의 방향으로 변화시켰고, 온 겨레 속에서 신뢰와 단결의 기운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6.15공동선언은 자주통일의 이정표로 되었고, 거족적 통일운동의 시대가 새롭게 펼쳐졌다. 온 겨레가 통일성업의 주인이 되어 한목소리로 통일을 주장하고 한 몸이 되어 통일로 달려나가는 현실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에 범민련은 6.15공동선언의 실현에 통일의 첩경이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해내외의 모든 통일운동단체들, 개별 인사들과 단결하여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을 지지하고 이행하는 데로 온 겨레를 더욱 힘차게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2001. 9. 18. 기존의 강령과 규약을 6.15공동선언의 정신과 원칙, 내용에 맞추어 개정하게 되었고, 활동방식에서도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얻기 위하여 보다 더 합리적이고 유연한 국민정서에 맞는 모습으로의 변화를 꾀하였다. 범민련의 강령?규약의 개정과 활동방식에서의 변화 노력은 몇 마디의 자구의 수정과 겉옷만 갈아입는 피상적 분장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통일을 가장 순조롭고 빨리 실현할 수 있는 근본방도가 뚜렷이 명시되어 있는 6.15공동선언의 거대한 의의를 통찰한 기초 위에서 기존의 범민련 활동의 근본지침을 6.15공동선언의 정신과 내용에 맞게 계승?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3. 범민련 남측본부는 이적단체가 아니라 애국애족단체이다
우선 개정 강령의 전문에는 우리 민족이 단일한 민족성과 유구한 민족문화를 지켜온 단일민족으로서, 7천만 겨레의 의지를 모아 가까운 앞날에 나라의 자주적 통일을 이룩할 것을 천명하면서 새로운 통일시대의 이정표인 6.15공동선언의 기치 아래 대단결할 것을 호소하여 민족의 강력한 통일의지를 담았다. 개정 강령은 제1항에서 범민련 활동의 총목표를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과 6.15공동선언 정신에 따라 범민족적인 통일국가를 수립할 것으로 고쳤고, 제2항에서 범민련 활동의 원칙에 대해 애국애족의 정신에서 민족적 존엄과 긍지를 확고히 지켜나가며 민족자주와 대단결의 기치를 들고 조국통일에 매진할 것을 천명하였다. 또한 개정 강령은 범민련의 과업에 대하여 제3항에서 과거 민족 자주의 내용으로 외국군대 철수 등 구체적으로 내건 과업을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반대하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총괄적 규정으로, 제4항에서 기존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의 공통점을 인정하고 이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을 지향해 나가는 내용으로, 제5항과 제6항에서 남북 사이의 다방면적인 교류와 협력, 대화와 접촉을 통해 민족적 화해와 단합, 공리와 공영을 도모하고 분열로 인해 발생한 남과 북 사이의 인도주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고치는 등 전반적으로 6.15공동선언의 정신과 내용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정리하였다.

개정 규약은 제3조에서 범민련의 활동지침을 조국통일 3대헌장에서 범민련은 조국통일 3대원칙과 6.15공동선언을 활동의 지침으로 삼는 것으로 고쳤고, 조직기구로서의 범민족대회 관련 조항을 삭제하였다.

이 번 강령.규약 개정을 통하여 범민련은 자신의 활동 목적과 원칙 등을 집약한 강령과 조직 구성의 목적과 원칙을 명기한 규약에서 범민련이 민족대단결을 바탕으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가는 조직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였으며, 특히 6.15공동선언 이후 변화된 정세와 시대의 추세를 감안하고 국민의 정서와 요구에 맞게 온 겨레가 열렬히 지지한 6.15공동선언의 내용을 전면적으로 반영하는 방향으로 기존의 강령과 규약을 손질하였다. 그렇다면 지난 시기 범민련을 이적단체라고 규정한 것도 부당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 부당성이 더욱 뚜렷해졌다고 할 것이다. 남측 당국의 최고책임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합의하고 서명한 조약에 준하는 법적 효과를 지닌 공동선언의 내용을 좇아 활동을 벌여나가는 조직에 대하여 이적단체란 허물을 들씌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6.15공동선언 자체를 이적표현물로 볼 수 없는 한 그 선언을 자기의 존재와 활동의 유일무이한 장전으로 인정하고 운영되는 조직에 대해 이적단체라는 딱지를 붙일 수는 없는 것이다.

범민련은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과 6.15공동선언 정신에 따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범민족적인 통일국가를 창립하기 위하여 남북 사이의 다방면적인 교류와 협력, 대화와 접촉을 통해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추구하는 등 평화적이고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민간통일운동 단체이다. 범민련은 남과 북 어느 일방의 이익이 아니라 남과 북 7천만 온 겨레의 공동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애국애족단체이며,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넘어 남과 북, 해외에 거주하는 모든 동포가 대단결하는 거족적 통일운동조직이다. 범민련은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추종하는 조직이 아니며 우리 민족이라면 그가 어느 곳에서 살던 어디에 소속되어 있든 하나로 힘을 합쳐 오로지 겨레의 단합과 통일을 위하여 이익이 되는 사업만을 하도록 요구하고 실천하는 순수한 통일운동단체이다. 분열되어 있는 쌍방이 화해하고 단합하여야 통일이 되는 것인 만큼 상대방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통일사업의 기초이고, 헤어져 있는 겨레가 서로 만나고 오가야 통일이 되는 것이기에 남과 북, 해외의 모든 동포가 하나의 조직으로 뭉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통일운동조직의 당연한 전제이다. 그런데 민족의 분열을 치유하고 온 겨레가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숙원인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남과 북, 해외의 동포들이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어 한 민족으로서 하나로 뭉쳐 모든 것을 다바쳐 일하는 애국애족단체에 대하여 누가 누구를 추종하고 동조한다는 둥 어느 한 쪽의 체제를 변란하려는 목적을 가졌다는 둥 하는 근거없는 이유를 대며 이적단체라는 딱지를 붙여 그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야말로 누구에게도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민족을 배반하는 이적행위라 할 것이다. 법원은 민족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깊이 살펴 어느모로 보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는 범민련 남측본부에 대한 이적규정을 하루빨리 철회함으로써 범민련 남측본부가 민족의 첫째 과제인 통일조국 건설의 길에서 더욱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불패의 위력을 지닌 주체의 사회주의국가이다

당보《로동신문》과 정부기관지《민주조선》에 준 담화 주체97(2008)년 9월 5일

(평양 10월 10일발 조선중앙통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불후의 고전적 로작《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불패의 위력을 지닌 주체의 사회주의국가이다》를 발표하시였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당의 선군혁명 령도 밑에 조국번영의 일대 전성기를 열어나가는 력사적인 시기에 영광스러운 김일성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60돐을 맞이합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우리 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시고 영원한 국가주석이십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 밑에 공화국이 창건됨으로써 우리 조국과 인민의 운명개척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주체적인 국가건설사상과 로숙하고 세련된 령도에 의하여 우리 공화국은 력사에 있어본적이 없는 진정한 인민의 나라로, 주체의 사회주의조국으로 건설되고 강화 발전되였으며 세기적으로 억압받고 천대받던 우리 인민은 공화국의 품속에서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당당한 권리를 행사하며 참다운 삶의 보람과 행복을 누리게 되였습니다. 날로 더욱 아름답게 변모되는 조국산천과 드넓은 전야들, 온 나라의 도시와 농촌, 거리와 마을들에도 철벽같이 다져진 조국의 방선과 전연초소들, 수많은 공장, 기업소와 경제문화시설들, 기념비적창조물들에도 우리 수령님의 위대하고 성스러운 령도의 자욱이 빛나게 새겨져있으며 우리 인민들이 세대와 세기를 이어 누려오는 가장 존엄 있고 긍지 높고 행복한 생활의 갈피갈피에는 수령님의 자애로운 어버이사랑과 하늘같은 은덕이 뜨겁게 깃들어있습니다.

공화국창건 60돐을 맞이하는 우리 당원들과 군인들과 인민들은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한생을 바치신 우리 수령님의 위대한 혁명력사와 불멸의 혁명업적을 숭엄한 마음으로 깊이 되새겨보며 어버이수령님께 최대의 감사와 최상의 영광을 드리고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쌓아올리신 불멸의 업적은 우리 조국과 혁명의 만년초석이며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과 주체혁명위업의 계승완성을 위한 확고한 토대로 됩니다.

우리 당은 위대한 수령님을 주체의 태양으로 높이 모시고 수령님의 국가건설사상과 업적을 계승발전시켜 선군시대 부강조국건설의 진군길,우리 혁명의 새로운 승리의 길을 열어나가고있습니다. 우리 당의 선군혁명령도와 선군장정에 의하여 우리 공화국은 필승불패의 정치군사적위력을 지닌 주체의 사회주의강국으로 거연히 솟아올라 그 권위와 위용을 높이 떨치고있습니다. 오늘 우리 당원들과 군인들과 인민들은 당의 부름따라 뜻깊은 올해를 조국청사에 아로새겨질 력사적전환의 해로 빛내이며 선군의 기치높이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과 주체혁명위업을 승리적으로 완성해나갈 확고한 결의에 넘쳐있습니다.

1

우리 공화국의 60년 력사는 위대한 수령,위대한 당의 령도밑에 혁명의 폭풍을 헤치며 조국의 독립과 영예를 수호하고 부강 번영하는 사회주의조국을 일떠세운 위대한 투쟁과 승리의 력사,위대한 창조와 변혁의 력사입니다.

우리 공화국은 건국의 기초축성과 국가건설의 초창기부터 사회주의강성대국을 건설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력사적 기간 제국주의침략세력과의 첨예한 대결속에서 류례없는 난관과 시련을 헤치며 승리와 영광의 한길로 전진하여왔습니다. 새 조국,새 사회건설을 위한 우리의 투쟁은 만난시련을 뚫고나가는 준엄하고 간고한 투쟁이였지만 우리 조국은 반제자주위업,사회주의위업수행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이 길에서 력사의 기적을 창조하며 불멸의 위대한 업적과 고귀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공화국의 60년 력사가 찬연히 빛나는것이며 오늘 사회주의 우리 조국,선군조선이 자주의 성새,사회주의의 보루로 그 권위와 위용을 높이 떨치고있는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혁명투쟁은 우리 공화국창건의 기본토대를 마련하고 사회주의국가건설의 시원을 열어놓은 력사적인 혁명투쟁이였습니다.
항일혁명투쟁은 우리나라를 무력으로 강점한 일제침략자들을 쳐부시고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성스러운 애국투쟁이였으며 발톱까지 무장한 일제침략군대와의 가장 치렬한 반일혁명전쟁이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를 반대하는 20성상의 피어린 투쟁으로 항일대전을 승리에로 이끄시여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실현하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항일혁명투쟁의 불길속에서 인민정권건설로선을 내놓으시고 정권건설의 귀중한 경험을 창조하시였으며 조국과 혁명의 만년재보인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마련하시였습니다.

해방된 조국땅에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우리 당과 인민의 투쟁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서 진행되였습니다. 미제의 남조선강점으로 국토가 량단되고 안팎의 제국주의반동세력들은 새 조국건설을 위한 우리 당과 인민의 투쟁을 가로막아보려고 각 방면으로 악랄하게 책동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된 조선인민의 드높은 애국열의와 모든 애국력량을 조직발동하여 제국주의반동들의 책동을 짓부시면서 북반부에 항일혁명전통을 계승한 인민정권과 정규적인 혁명무력을 건설하고 제반 민주개혁을 실시하시여 자주독립국가건설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시였으며 이에 기초하여 우리 공화국을 창건하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공화국의 정권기관들을 강화하고 인민적인 국가사회제도를 공고발전시키며 국가건설의 모든 분야에서 그 우월성과 생활력을 높이 발양시키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습니다.

미제의 무력침공을 반대하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은 청소한 우리 공화국에 있어서 가장 준엄한 첫 시련이였으며 나라와 민족의 생사존망을 판가리하는 격렬한 싸움이였습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우리 공화국을 요람기에 없애버리려고 저들의 방대한 침략무력과 15개 추종국가들의 무력까지 동원하여 현대적군사장비와 온갖 전쟁수단들을 다 투입하면서 미쳐날뛰였으나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하고야말았습니다.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따라 우리 군대와 인민은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 전선과 후방에서 무비의 대중적영웅주의를 발휘하여 희생적으로 투쟁함으로써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미제의 침략무력을 타승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영예롭게 수호하였으며 피압박인민들의 반제민족해방투쟁을 고무하고 세계평화를 수호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조국해방전쟁에서의 력사적 승리는 우리 공화국의 불패의 위력과 국가사회제도의 공고성,우리 군대와 인민의 필승의 신념과 불요불굴의 투지를 힘있게 과시하였으며 자기 운명을 자기 손에 틀어쥐고 당과 수령의 두리에 굳게 뭉친 인민은 그 어떤 힘으로도 정복할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었습니다. 미제국주의의《강대성》에 대한 신화를 깨뜨리고 세계전쟁력사에서 처음으로 미제에게 참패를 안긴 전승업적으로 하여 우리 공화국은 영웅의 나라로, 우리 군대와 인민은 영웅적군대, 영웅적 인민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치게 되였습니다.

주체의 조국, 우리 조선은 강대한 제국주의침략세력과의 군사적 대결에서 뿐아니라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혁명, 사회주의건설에서도 기적을 창조하고 혁신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잿더미 우에서 령으로부터 시작하여 혁명과 건설에서 세기적 변혁을 이룩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세련된 령도밑에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몇해사이에 전후복구건설을 끝내고 농업협동화와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우리 식으로 그 어떤 편향도 없이 가장 빛나게 완성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 따라 우리 인민은 남이 한걸음 걸을 때 열걸음, 백걸음 내달리는 기세로 천리마대진군을 벌려 사회주의건설에서 류례없는 혁명적대고조를 일으켰습니다. 세기적으로 뒤떨어졌던 우리 나라는 사회주의를 위한 창조와 건설의 거창한 투쟁을 통하여 가장 우월하고 위력한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나라로, 자주, 자립, 자위의 사회주의강국으로 일떠섰으며 세계가 칭송하는 천리마조선, 사회주의모범의 나라로 불리우게 되였습니다.

주체혁명의 새시대, 선군시대는 우리 조국과 혁명의 력사에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주체혁명의 새시대, 선군시대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상과 령도, 위업을 이어나가는 주체혁명위업의 위대한 계승의 시대이며 우리 조국과 혁명발전의 새로운 높은 단계입니다.
우리 당은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일찍부터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당의 최고강령으로 내세우고 당, 국가, 군건설의 기본로선으로 튼튼히 틀어쥐고나갔습니다. 우리 당은 당과 국가, 군대를 위대한 수령님의 당, 수령님의 국가, 수령님의 군대로 건설하고 강화발전시키며 사람도 사회도 자연도 수령님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의 요구대로 개조하고 변혁해나가기 위하여 모든 힘을 집중하였으며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하는 위업수행의 튼튼한 토대를 닦아놓았습니다.

지난 세기 90년대에 이르러 정세는 급변하였으며 우리 조국과 혁명은 력사에 류례 없는 엄혹한 난관과 시련에 부닥치게 되였습니다.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은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붕괴된 것을 기화로 하여《사회주의의 종말》에 대하여 떠벌이면서 사회주의기치를 변함없이 높이 들고 나아가는 우리 공화국에 공격의 화살을 집중하였습니다.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의 반공화국, 반사회주의책동으로 하여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과 생존권이 엄중한 위험에 처하게 되였으며 우리 나라는 사회주의와 제국주의의 가장 치렬한 대결장으로 되고 우리 인민은 자주적 인민으로 사느냐 또다시 식민지노예가 되느냐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였습니다.

우리 당은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선군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불패의 정치군사적 위력으로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의 반공화국, 반사회주의책동을 걸음마다 짓부시면서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과 우리의 사회주의를 영예롭게 수호하였습니다. 크지 않은 우리나라가 단독으로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반동들과 싸워 나라와 민족, 사회주의를 수호한 것은 세계사적의의를 가지는 위대한 승리입니다. 세계 이르는 곳마다에서 강권과 전횡을 부리는 미제국주의의 침략책동을 제압분쇄하고 미제와의 총포성이 없는 정치군사적 대결에서 련전련승하여온 우리의 선군혁명업적은 말그대로 기적의 기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수호전의 준엄한 시련 속에서도 우리는 정치와 군사,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일대 변혁을 이룩하였습니다. 당의 선군혁명령도에 의하여 우리 나라는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의 지위에 당당히 올라섰으며 강성대국건설의 진격로를 열고 혁명과 건설에서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오늘 우리 공화국은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과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한 근본담보를 확고히 마련하였으며 사회주의경제강국을 일떠세우는 선군혁명총진군을 다그쳐나가고 있습니다.

선군으로 승리하며 위용떨치는 사회주의조선은 자주성을 지향하는 세계인민들의 희망의 등대로,승리의 기치로 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과 우리 당의 령도밑에 공화국이 걸어온 60년 력사는 우리 인민에게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며 필승의 신념을 더욱 굳게 하여줍니다. 우리 군대와 인민은 주체의 사회주의조국을 목숨보다 더 귀중히 여기고 끝없이 사랑하며 내 나라, 내 조국을 끝까지 지키고 빛내이기 위하여 더욱더 힘차게 투쟁하고 있습니다.

2

위대한 수령, 위대한 당이 위대한 나라를 일떠세웁니다. 수령이 위대하고 당이 위대하면 작고 뒤떨어진 나라도 발전된 나라로, 권위있는 강국으로 될수 있습니다.
당과 수령의 위대성은 곧 사상과 령도의 위대성입니다. 우리 공화국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시하신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하고 우리 당의 령도밑에 주체사상을 국가건설과 국가활동에 전면적으로 구현해나가기에 불패의 위력을 지닌 주체의 사회주의강국으로 일떠서게 되였습니다.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은 사람중심의 세계관이고 자주의 사상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 나라와 민족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는 길을 과학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지도사상입니다. 위대한 주체사상을 국가건설과 국가활동에 구현하고 있는 우리 공화국은 인민을 하늘처럼 내세우는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나라이고 주체성과 민족성이 강한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며 선군의 위력으로 그 어떤 대적도 물리치고 온갖 난관과 시련을 뚫고나가는 불패의 사회주의강국입니다.

우리 공화국은 인민대중을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내세우고 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진정한 인민의 나라,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국가입니다.
인민대중은 사회력사의 주체이지만 그 지위와 역할은 어느 사회, 어느 나라에서나 같은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좌우명으로 삼으신 이민위천의 사상을 구현하고 있는 우리 공화국에서와 같이 인민대중의 지위와 역할을 최상의 높이에서 보장해주는 나라는 력사에 일찌기 없었습니다. 이민위천의 사상에는 인민대중을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힘있는 존재로 내세우며 인민을 위하여 성실히 복무하고 인민대중에 의거하여 모든 것을 풀어나갈데 대한 숭고한 애민정신이 담겨져있습니다.

이민위천은 우리 당 국가건설의 근본리념이며 모든 로선과 정책의 기초이고 국가활동의 출발점입니다. 우리 공화국의 사회주의적국가사회제도도 사회주의헌법을 비롯한 국가의 법들도 당과 국가의 모든 로선과 정책, 모든 활동도 철두철미 인민대중의 자주적 권리와 리익을 옹호보장하기 위한것으로 일관되여있습니다. 사회주의의 기초는 인민이고 인민의 리익을 첫자리에 내세우는 우리의 정치는 참다운 사회주의정치이며 인민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믿음의 정치, 숭고한 인덕정치입니다. 우리 당과 공화국정권의 로선과 정책은 어느 것이나 다 인민대중의 의사와 요구를 반영한 것이며 인민대중의 자각적인 열의와 투쟁에 의하여 성과적으로 관철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민들의 복리증진을 당과 국가활동의 최고원칙으로 내세우고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이라는 구호를 국가활동에 철저히 구현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도 인민의 리익을 침해하거나 인민우에 군림하여 세도를 쓰고 관료주의를 부리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민대중을 가장 귀중한 존재로 내세우고 국호도 군대와 보안기관의 이름도 기념비적창조물들의 명칭과 여러 가지 명예칭호도 인민이라는 말과 결부하여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 국가, 우리 제도, 우리 정치의 인민적인 성격을 뚜렷이 상징하는 것입니다.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조국의 품속에서 우리 인민들은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주인으로서의 보람있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며 주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해나가고있습니다. 우리 인민들은 누구나 다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주권행사와 국가관리에 참가하며 일정한 정치조직에 망라되여 값높은 정치생활을 하고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국가가 인민생활을 책임지고 보살펴주고 있으며 전체 인민이 무료교육제와 무상치료제, 여러 가지 인민적인 시책에 의하여 마음껏 배우고 건강을 증진하며 혁명적이고 랑만에 넘친 문화정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당과 국가는 모든것이 부족하고 어려운 조건에서도 인민생활에 일차적인 관심을 돌리고 인민들의 생활을 안정 향상시키기 위하여 모든 력량을 집중하고 있으며 가까운 앞날에 우리 인민들이 세상에 부러운 것없이 잘살게 하기 위하여 사회주의경제강국건설을 더욱 힘있게 다그쳐 나가고 있습니다. 공화국의 품속에서 우리 인민이 누리는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활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존엄 높고 보람차고 행복한 참다운 인간생활입니다.

우리 당과 우리 공화국은 인민들을 사랑과 믿음으로 이끌어주고 보살펴주며 그들의 운명을 지켜주는 가장 친근한 어머니당이고 어머니조국이며 당과 조국의 품은 인민들의 참다운 삶과 행복의 요람으로 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민들은 영광의 나날에나 준엄한 시련의 나날에나 변함없이 우리 당과 공화국정권을 믿고 따르며 당의 두리에 굳게 뭉쳐 내 나라, 내 조국을 목숨바쳐 지키고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하여 영웅적으로 투쟁하여왔습니다.

온 사회의 일심단결은 인민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천품으로 지니신 우리 수령님과 수령님의 사상과 뜻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우리 당의 령도에 의하여 사회주의 우리 조국에서만 빛나게 실현된 더없이 고귀한 국가건설 업적이며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볼수 없는 우리 사회의 자랑스러운 참모습입니다. 당과 수령은 인민을 끝없이 사랑하고 보살펴주며 인민들은 당과 수령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충성으로 받드는 바로 이러한 혁명적동지애의 관계, 끊을수 없는 혈연적 관계에 기초하여 그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서도 수령, 당, 대중의 일심단결이 형성 발전되였으며 온 사회가 서로 돕고 이끌어주는 화목한 하나의 대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심단결은 혁명의 수뇌부를 중심으로 전당, 전군, 전민이 하나의 사상과 신념, 동지적 사랑과 혁명적 의리에 기초하여 철통같이 뭉친 일심단결로 새로운 높이에서 더욱 강화되였으며 이 위대한 단결은 그 어떤 힘으로도 깨뜨릴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심단결은 우리나라 사회주의제도의 공고성과 사회적 안정의 근본담보이고 사회주의조국의 불패의 위력의 무한대한 원천이며 혁명의 승리적전진과 부강번영의 강유력한 추동력입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위대한 당의 두리에 천만군민이 굳게 뭉친 우리의 일심단결을 제일 두려워하며 그것을 허물어보려고 온갖 책동을 다하고 있습니다. 미제와 그 추종세력들이 계속 군사적 침략책동에 매달리는 한편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간판을 들고 우리를 어째보려고 하는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국주의반동들이 들고 나오는 《인권옹호》요,《민주주의》요 하는것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간섭과 지배주의적 책동을 가리우기 위한 궤변이며 인민의 조국인 우리 공화국, 일심단결의 우리 사회에 대하여 그런 허망한 궤변으로 비방중상하려드는것은 언어도단이며 우리 인민들의 한결같은 격분을 자아낼뿐 추호도 용납될수 없습니다.

인민대중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뢰, 열렬한 사랑을 받는 위대한 인민의 나라,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는 온갖 풍파를 헤치며 그 숭고한 영상과 위용을 끝없이 빛내여나갈것입니다.
우리 공화국은 국가건설과 국가활동에서 주체성을 확고히 견지하고 민족성을 적극 살려나가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입니다.

주체성과 민족성은 곧 자주성이며 나라와 민족, 인민대중의 생명입니다. 자주성을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은 나라와 민족을 단위로 하여 진행되는 것만큼 매개 나라의 혁명과 건설은 그 나라의 당과 정권, 인민대중이 주인이 되여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해나가야 합니다.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고 자주로선을 확고히 견지하여야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고 자주적 발전을 보장할수 있으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성과적으로 실현할수 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력사상 처음으로 주체성과 민족성, 자주 로선에 관한 독창적인 사상을 내놓으시고 조선혁명의 자주적발전의 길을 개척하시였으며 강철같은 신념과 의지, 세련된 령도로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의 원칙, 자주 로선을 일관하게 견지하도록 이끌어주시였습니다. 우리 당과 국가는 수령님의 국가건설사상을 받들어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며 자주 로선을 견지하는 것을 인민대중의 자주위업, 사회주의 위업수행의 근본원칙으로 내세우고 철저히 구현함으로써 우리 나라를 가장 권위 있고 존엄 높은 자주의 나라로,숭고한 애민,애족의 사회주의국가로 일떠세웠습니다.

우리는 국가건설과 국가활동,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우리의 사상과 신념, 우리의 결심과 의지에 따라 우리나라의 실정과 우리 혁명의 리익에 맞게, 자력갱생의 원칙에서 자체의 힘으로, 우리 식으로 풀어나갔습니다. 우리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대외관계의 모든 분야에서 주체의 원칙, 자주적대를 확고히 세워 사대주의와 교조주의, 온갖 외세의존사상을 철저히 반대하고 제국주의반동들과 그 어떤 외세의 간섭과 압력도 단호히 배격하였으며 기성리론이나 기존공식에 구애됨이 없이, 그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 모든 것을 우리의 사상, 우리의 요구와 리익에 맞게 우리가 결심하고 마음먹은대로 당당히 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당은 일찌기《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라는 구호를 제시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주체이고 자주이고 자력갱생이며 여기에 우리의 존엄이 있고 긍지와 영예가 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적 립장에서 민족문제의 본질과 사회발전에서 민족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새롭게 과학적으로 밝히신데 기초하여 계급성과 민족성,사회주의와 민족의 운명을 밀접히 결합시킴으로써 혁명과 건설에서 계급성을 견지하면서 민족성을 잘 살려나가게 하시고 사회주의위업의 전진과 더불어 민족의 륭성번영을 이룩해나갈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였습니다.

우리 당과 국가는 민족문제에 관한 수령님의 주체적인 사상과 리론에 따라 혁명과 건설,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민족성을 귀중히 여기고 적극 살려나가고있습니다. 사람은 계급의 성원인 동시에 민족의 성원인것만큼 계급성과 함께 민족성을 가지며 계급적요구와 함께 민족적요구를 가지고있습니다. 민족성과 민족적요구를 무시하고 억제하면 광범한 인민대중과 모든 애국력량을 묶어세울수 없고 참다운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수 없으며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사회주의위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할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자랑스러운 민족입니다. 우리 인민의 민족성에는 민족의 슬기와 재능, 억센 기상과 애국정신, 우수한 민족문화전통이 체현되여있습니다. 우리 당과 국가는 우리 민족의 우수하고 아름다운 민족적 전통을 귀중히 여기고 잘 살려나가는 것을 중요한 정책으로 내세우고 철저히 관철하여왔습니다. 우리는 력사적으로 내려오는 민족의 우수성을 살리는 것과 함께 시대와 혁명이 전진하는데 따라 민족의 새로운 우수성을 창조하며 그에 기초하여 우리 수령, 우리 당이 제일이고 우리 사상,우리 제도가 제일이라는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으로 인민들을 교양하고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더욱 빛내여 나가고 있습니다.

주체의 사회주의위업은 로동계급을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위업인 동시에 나라와 민족의 자주성을 보장하고 민족의 륭성번영을 이룩해나가는 위업입니다. 우리 당과 국가는 사회주의건설을 힘있게 다그치면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빛내이고 민족번영의 새 력사를 창조하여왔습니다.

위대한 수령, 위대한 당의 령도밑에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성을 견지하고 민족성을 옳게 살려나감으로써 제국주의반동들의 그 어떤 간섭과 압력도 우리에게는 통할수 없었고 현대수정주의를 비롯한 온갖 기회주의사상조류도 우리 내부에 침습할수 없었으며 우리 인민들 속에서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 민족자주의식과 자존심이 비상히 높아지고 사회주의적애국주의정신이 더욱 높이 발양되게 되였습니다. 주체사상의 기치 밑에 강화 발전된 우리 공화국은 계급적 원칙, 혁명적 원칙을 철저히 구현한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나라인 동시에 주체성과 민족성이 강한 자주, 자립, 자위의 사회주의국가로, 온 민족의 참다운 조국으로 자랑떨치게 되였습니다. 주체의 사회주의 우리 조국은 세계적인 대정치파동 속에서도 끄떡없이 서있었으며 오늘도 래일도 자기 발전의 길,주체의 한길을 따라 승승장구해 나갈 것입니다.

지금 제국주의반동들은 주체의 조국,우리 공화국에 대하여 《페쇄》니 《고립》이니 하면서 비방중상하며 우리에게 《개혁》,《개방》을 먹이려고 부질없이 책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때 한번 나라의 문을 닫아맨 일이 없으며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 수십억 인민들과 서로 존중하며 좋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개혁에 대하여 말하더라도 우리는 벌써 수십년전에 낡은 사회제도를 혁명적으로 개조하였으며 온갖 낡고 뒤떨어진 것을 계속 혁신하면서 끊임없이 새것을 창조해나가고 있습니다. 실지에 있어서 우리 나라를 적대시하면서 봉쇄하는 것도 우리를 고립시키려드는 것도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이며 그들이 떠벌이는 《개혁》,《개방》도 우리 식 사회주의를 허물려는 침략와해책동입니다. 제국주의반동들의 이와 같은 책동은 우리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뿐 실패를 면할수 없습니다.

우리 공화국은 선군으로 위용떨치는 불패의 사회주의강국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과 우리 당의 혁명력사는 선군혁명령도의 력사이며 우리 조국과 혁명은 선군의 기치밑에 불패의 위력을 떨치며 승리와 영광의 길을 열어왔습니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선군으로 조국을 해방하시고 조국의 자주독립과 부강발전을 군사적으로 확고히 담보하시였습니다. 우리 당은 수령님의 선군사상과 로선을 받들어 일찍부터 당사업과 함께 군대사업을 기본으로 틀어쥐고 우리 혁명무력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강화하는데 힘을 집중하여 당의 선군혁명령도를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기 위한 튼튼한 토대를 닦았습니다.

오늘 우리 당이 펼치는 선군혁명로선, 선군정치는 군사를 제일국사로 내세우고 인민군대를 백방으로 강화하여 조국과 혁명, 사회주의를 보위하며 인민군대를 핵심으로, 주력으로 하여 혁명의 주체를 튼튼히 꾸리고 전반적 사회주의건설을 힘있게 밀고나가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혁명로선이며 사회주의기본정치방식입니다. 우리는 국가관리체계에서도 국방위원회의 권능을 높이고 국방위원회가 국방사업전반을 지도관리하는 체계를 세워 혁명과 건설의 모든 사업을 철저히 군사선행의 원칙에서 진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의 선군정치는 주체사상에 뿌리를 두고 주체의 혁명원리와 전략전술, 주체의 령도 방법과 령도 예술을 전면적으로 구현하고 집대성하고 있는 것으로 하여 우리 조국과 혁명의 백전백승의 기치로, 혁명과 건설의 만능의 보검으로 되고 있습니다.

국력에서 제일국력은 군사력입니다. 우리의 반제반미투쟁은 정치와 군사, 경제와 사상문화의 모든 전선에서 치렬하게 벌어지지만 여기에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기본전선은 반제군사전선입니다. 제국주의침략세력과의 대결은 본질에 있어서 힘의 대결이며 제국주의자들에게는 힘만이 통할수 있습니다. 자체의 힘, 강한 자위적군사력이 없이는 제국주의와 싸워이길수 없으며 당과 국가도 보위할수 없고 인민의 안전도 지킬수 없는 것이 오늘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 당은 선군혁명령도, 선군정치로 인민군대를 명실공히 당과 수령의 군대로, 무적의 혁명무력으로 강화 발전시켰습니다. 인민군대 안에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 최고사령관의 령군체계와 혁명적군풍이 확고히 서고 최고사령관으로부터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전군이 혁명적동지애에 기초하여 혼연일체를 이루게 되였습니다. 전체 인민군장병들이 사상의 강자, 신념의 강자로, 우리 식의 전략전술을 소유하고 현대적 군사장비를 그쯘히 갖춘 무적필승의 무장력으로 자라났습니다. 우리의 주체적인 국방공업은 위력한 현대적 무기와 군사장비, 군사수단들을 다 만들어내게 되였으며 온 사회에 군사를 중시하는 기풍이 확립되여 전민 무장화와 전국요새화가 더 높은 수준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선군정치로 하여 우리 공화국은 제국주의반동들의 온갖 도전과 고립 압살책동을 제압분쇄하고 필승불패의 군사적 위력을 만천하에 과시하였으며 사회주의 우리 조국, 선군조선은 그 어떤 침략세력도 감히 범접할수 없는 세계적인 군사강국으로 우뚝 솟아올랐습니다.

당의 선군혁명령도, 선군정치에 의하여 우리 공화국의 정치사상진지가 반석같이 다져졌으며 경제문화전선에서 대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선군의 길에서 우리 군대와 인민은 혁명적군인정신과 투쟁기풍으로 사상도 투쟁기풍도 하나가 되여 천만군민의 대단결을 빛나게 실현하였으며 조국과 혁명의 정치사상적 위력은 비할바 없이 더욱 강화되였습니다. 당의 선군령도 밑에 군대와 인민이 일심동체가 되여 사회주의건설의 모든 사업을 혁명적으로, 전투적으로 벌림으로써 조국강토를 일신하는 대자연개조사업이 진행되고 수많은 기념비적창조물들이 일떠섰으며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선군시대 문화예술의 새로운 전성기가 펼쳐졌습니다.

선군정치에 기초한 우리의 조국통일정책과 민족공동의 노력에 의하여 6.15북남공동선언과 10.4선언이 채택 공포됨으로써 조국통일의 전환적국면이 열리게 되였습니다. 북과 남,해외에서 온 민족의 자주통일기운이 전례 없이 높아졌으며 조국통일운동은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따라 거족적인 운동으로 확대 발전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전쟁정책을 반대하고 나라와 민족의 자주성을 옹호하는 우리의 선군정치는 세계진보적 인민들 속에서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세계평화와 인류의 자주위업에 적극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선군정치와 우리의 자주적인 대외정책으로 하여 국제무대에서 우리 공화국의 권위와 영향력이 전례 없이 높아지고 대외관계가 급속히 확대 발전되였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우리 수령님과 당의 령도밑에 불패의 위력을 지닌 주체의 사회주의국가로 건설되고 강화 발전되였으며 력사의 온갖 도전을 물리치고 세계를 경탄케 하는 위대한 승리와 위대한 변혁을 이룩하였습니다. 영광스러운 김일성조국, 주체와 선군으로 빛나는 사회주의조선은 우리 인민들이 위대한 어머니조국으로 열렬히 사랑하고 높이 받들며 수천만 우리 동포들이 온 민족의 긍지와 영예로, 조국통일의 보루로 자랑스럽게 여기며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만사람의 마음을 끄는 위대한 사회주의나라로 위용을 떨치게 되였습니다.

   3

우리 공화국은 주체사상의 기치, 선군의 기치높이 혁명의 먼길을 걸어왔으나 우리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조국땅우에 륭성번영하는 사회주의강성대국을 일떠세워야 하며 온 민족의 대단결로 조국통일 위업을 실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성을 지향하는 모든 나라, 모든 진보적 인민들과 함께 세계평화를 수호하며 인류의 자주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여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필생의 념원에 따라 사회주의강성대국을 건설하는것은 우리 당과 국가가 시대와 혁명앞에 지닌 숭고한 임무입니다. 우리 당의 선군혁명 령도따라 전당, 전군, 전민이 승리의 신심높이 강성대국을 건설하기 위한 선군혁명총진군을 힘있게 다그쳐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조국의 정치사상진지를 더욱 튼튼히 다져나가야 합니다.
사회주의의 위력은 정치사상적위력이며 사회주의조국의 정치사상진지를 튼튼히 다지는것은 강성대국건설의 필수적요구입니다. 혁명과 건설이 심화발전되는데 맞게 사상사업을 진공적으로 벌려 우리 군대와 인민의 무한대한 정신력을 전면적으로 발양시키며 정치사상강국으로서의 사회주의조선의 위용을 더 높이 떨쳐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간부들과 당원들과 근로자들 속에서 주체사상교양, 선군사상교양을 더욱 강화하여 그들이 주체혁명의 새시대, 선군시대의 혁명전사답게 혁명적으로, 전투적으로 일하며 생활해나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계급교양, 혁명교양, 사회주의교양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교양사업을 깊이 있고 실효성 있게 벌려 간부들과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높은 계급의식과 혁명의식,사회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사회주의애국주의정신을 지니도록 하여야 합니다.

혁명대오의 일심단결을 더욱 철통같이 다져야 합니다. 우리의 일심단결의 근본핵은 혁명의 수뇌부입니다. 모든 간부들과 당원들, 군인들과 인민들이 투철한 수령결사옹위정신을 지니고 혁명의 수뇌부를 정치사상적으로, 목숨으로 결사옹위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전체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이 우리 당의 두리에 사상의지적으로, 도덕의리적으로 더욱 굳게 뭉치며 당의 사상과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어나가야 합니다.

일심단결이 혁명의 천하지대본이라면 민심은 일심단결의 천하지대본입니다. 민심을 틀어쥐고 사람과의 사업을 잘하여 우리 혁명대오의 일심단결을 끊임없이 강화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정치사상진지를 허물고 일심단결을 파괴하려는 적들의 책동에 경각성을 높이고 그에 단호히 대처해나가야 합니다.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의 사상문화적침투책동과 심리모략전을 짓부시기 위한 강한 투쟁을 벌리며 사상전의 도수를 높여 부르죠아사상과 생활풍조의 자그마한 요소도 우리 내부에 침습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선군의 기치높이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계속 큰 힘을 넣어야 합니다. 국방력은 선군조선의 자주권과 생존권이고 권위와 존엄이며 그 운명입니다. 국방력을 계속 강화하여야 조국과 인민의 안전을 지킬수 있고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을 군사적으로 확고히 담보할수 있습니다.

인민군대는 우리 혁명의 주력군이며 조국보위의 핵심력량입니다. 우리의 선군정치에서는 군사가 선차이고 인민군대를 강화하는것이 기본입니다.
인민군대를 강화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 안에 최고사령관의 유일적령도체계,최고사령관의 령군체계를 철저히 세우는것입니다. 전군이 최고사령관의 사상과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고 최고사령관과 운명을 같이하며 최고사령관의 명령, 지시에 따라 하나와 같이 움직이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 인민군대를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더욱 튼튼히 준비시켜야 합니다. 인민군대에서 당정치사업을 강화하여 모든 군인들이 당과 수령의 군대, 최고사령관의 군대로서의 정치사상적풍모를 철저히 갖추며 혁명적동지애에 기초한 관병일치의 미풍을 더 높이 발양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당의 령도 밑에 선군의 길에서 군대와 인민이 생사운명을 같이해나가며 군민대단결을 더욱 공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당의 훈련방침을 철저히 관철하여 모든 군인들을 우리 식의 전략전술과 전법을 소유하고 실전에서 능숙하게 활용해나가는 일당백의 싸움군으로 키우며 인민군대의 무장장비를 최신과학기술에 기초하여 끊임없이 현대화해나가야 합니다. 인민군장병들은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 앞에 지닌 임무의 중요성을 깊이 자각하고 조국의 방선을 철벽으로 지켜야 하며 사회주의건설에서 선도자적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온 사회에 군사를 중시하는 기풍을 세워 모든 사람들이 군사를 성실히 배우고 전당, 전국, 전민이 유사시에 대처할수 있는 준비를 철저히 갖추며 국방건설을 강화하여 온 나라를 철벽의 요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회주의경제건설을 힘있게 다그쳐 우리나라를 경제강국으로 일떠세워야 합니다.
현 시기 경제건설은 강성대국건설의 주공전선입니다. 경제건설을 다그쳐 우리 나라를 사회주의경제강국으로 일떠세워야 선군조선의 정치군사적 위력을 더욱 강화할수 있으며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인민생활을 획기적으로 높일수 있습니다. 우리가 위대한 수령님 탄생 100돐이 되는 2012년에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데 대한 웅대한 목표를 내세웠는데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경제건설에서 새로운 혁명적 전환을 일으켜 나라의 경제력을 강화하고 인민생활문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하여야 합니다. 전당, 전국, 전민이 떨쳐나서 경제건설을 다그치기 위한 총공격전을 벌려야 합니다.

경제건설에서 혁명적 전환을 일으키기 위하여서는 우리 당이 제시한 선군시대 경제건설 로선을 철저히 관철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당의 경제건설 로선의 요구대로 국방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며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켜 인민생활향상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와야 합니다. 인민경제의 선행부문, 기초공업부문을 앞세우는것은 국방공업과 경공업, 농업을 다같이 빨리 발전시키기 위한 관건적 고리입니다. 인민경제의 선행부문, 기초공업부문에 국가적인 힘을 집중하여 전력공업,석탄공업,금속공업,철도운수부문을 추켜세워 경제강국 건설의 넓은 진격로를 열어나가야 합니다. 당의 과학기술 중시로선을 철저히 관철하여 첨단과학기술분야를 개척하며 나라의 과학기술을 높은 수준에 올려세워야 합니다. 인민경제 모든 부문에서 정보산업시대의 요구에 맞게 최신과학기술에 기초하여 공장, 기업소들의 현대화를 적극적으로 밀고나가야 합니다.

사회주의경제관리를 개선강화하여야 합니다. 경제관리에서는 사회주의원칙을 확고히 지키고 집단주의적관리방법을 옳게 구현하여야 하며 국가의 중앙집권적,통일적지도를 강화하고 그에 기초하여 아래단위의 창발성을 높이 발양시키도록 하여야 합니다. 자력갱생의 원칙에서 모든 잠재력과 내부예비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동원리용하여 우리의 힘과 기술,우리의 자원으로 경제강국건설을 힘있게 다그쳐나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교육과 보건, 문학예술을 비롯한 사회주의문화건설의 모든 분야를 전면적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교육사업과 보건사업을 개선 강화하여 혁명인재들을 더 많이, 더 질적으로 키워내고 인민보건제도의 우월성을 높이 발양시키며 주체의 문학예술, 선군시대 문학예술을 더욱 개화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선군혁명총진군을 힘있게 다그쳐 이 땅우에 사회주의강성대국을 일떠세움으로써 수령님의 위업, 주체의 사회주의위업수행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하여야 합니다.

조국통일은 민족지상의 절박한 과업입니다. 유구한 세월 단일한 조선민족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온 우리 민족이 외세에 의하여 60여년이 되도록 북과 남으로 갈라져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조국을 통일하여 민족분렬의 비극의 력사를 끝장내고 조국과 민족의 통일적발전과 륭성번영의 길을 열어나가야 합니다. 조국의 자주통일을 실현하는데서 우리 민족이 들고나가야 할 기치는 6.15북남공동선언과 10.4선언입니다. 6.15북남공동선언과 10.4선언은 민족자주의 선언, 민족대단결의 선언이며 조국통일의 대강입니다. 력사적인 6.15북남공동선언과 10.4선언에 대한 립장과 태도는 북과 남의 화합과 대결, 통일과 분렬을 가르는 시금석입니다. 진정으로 조국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6.15북남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지지하고 성실히 리행해나가야 합니다. 북남공동선언들에서 밝힌 조국통일의 기본리념은《우리 민족끼리》의 리념이며 이것은 철저한 민족자주의 리념, 민족적 단합의 리념입니다.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는 민족자주의 원칙에서 민족적 단합을 이룩하고 반통일세력의 온갖 책동을 짓부시며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기어이 조국통일을 실현하여야 합니다.

나라의 대외관계를 확대발전시키며 세계의 자주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여야 합니다. 우리 공화국정권은 자주, 평화, 친선의 리념에 따라 격변하는 정세의 요구에 맞게 대외활동을 활발히 벌림으로써 우리 혁명의 지지자, 동정자 대렬을 늘이고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과 조국통일의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마련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성을 지향하는 모든 나라, 모든 진보적 인민들과의 친선단결을 강화하여 제국주의침략세력의 전쟁정책과 지배주의적 책동을 짓부시고 평화를 수호하며 세계의 자주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여야 합니다.

우리 당과 국가가 시대와 혁명 앞에 지닌 사명과 임무를 다하자면 공화국정권을 강화하고 그 역할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국가건설사상과 리론,우리 당의 선군시대 국가건설로선을 철저히 관철하여 공화국정권을 끊임없이 강화발전시켜야 합니다. 공화국정권은 당의 로선과 정책에 기초하여 우리의 국가사회제도를 공고발전시키고 혁명과 건설의 모든 사업을 힘있게 밀고나가야 합니다. 인민정권기관들과 일군들은 시대와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사업기풍과 사업방법을 더욱 개선하여 자기의 사명과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며 인민의 복무자로서의 본분을 다해나가야 합니다.

우리 당은 우리 사회에서 최고의 령도적 정치조직이며 당의 령도는 조국과 인민의 모든 승리의 기본담보입니다. 우리는 전당에 유일적 령도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의 통일단결을 더욱 굳게 다지며 당대렬을 조직사상적으로 튼튼히 꾸리고 당조직들의 기능과 역할을 높여 당의 조직력과 전투력, 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하여야 합니다. 혁명과 건설에 대한 당의 령도를 철저히 보장하여야 합니다. 온 사회에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를 튼튼히 세워 혁명과 건설의 모든 사업이 당의 로선과 정책에 기초하여,당의 사상과 의도에 맞게 진행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특히 당조직들은 인민정권기관들이 자기의 사명과 임무를 다하도록 정치적으로, 정책적으로 잘 이끌어주며 적극 밀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공화국은 주체혁명의 위대한 전취물이며 공화국정권은 혁명과 건설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공화국정권은 우리 당의 선군령도 밑에 혁명과 건설을 힘 있게 다그쳐 수령님의 위업, 주체혁명 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여야 합니다.

일본의 고베제강소주식회사에서 감행된 조선인강제
련행 및 강제로동범죄에 대한 진상조사보고서

일제가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강제련행 및 강제로동 범죄를 립증하는 자료와 문건, 증언자료들은 세기를 이어 오늘도 계속 발굴되고 있다.
조선 일본군《위안부》 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에서는 일제의 군사적강점시기에 강제련행되였던 조선인피해자들과 관련한 명단에 기입되여있는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을 찾기 위한 조사활동을 진행하는 과정에 일본의 고베제강소주식회사 본사공장에 강제련행되여 노예로동을 강요당한 피해자들을 찾아내고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 및 강제로동범죄의 일단을 자료적으로 립증한것과 관련하여 이 보고서를 발표한다.

1. 일본 고베제강소주식회사에 강제련행되였던 우리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경위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은 1972년부터 북남조선과 일본, 미국 등에서 해당 단체들과의 긴밀한 련계밑에 조사활동을 하는 과정에 일제의 군사적강점시기에 강제련행되였던 조선인피해자들과 관련한 42만 7 129명의 명단을 입수하였다.
이 명단에는 과거 일제가 강제 련행하였던 조선인 피해자들중 태평양전쟁발발을 전후하여《징용》,《징병》,《근로정신대》, 일본군《위안부》 등으로 끌려간 일부 피해자들이 포함되여 있으며《우끼시마마루》 침몰사건의 피해자들과 원자탄피해자들도 들어있다.
이들이 강제로 끌려간 지역을 보면 조선국내와 혹가이도,효고현,후꾸오까현,나가사끼현,사가현,히로시마현,아끼다현을 비롯하여 일본전역은 물론 중국과 필리핀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태평양상의 작은 섬들까지 포함되고 있다.

명단에는 피해자들의 이름과 난날, 본적지 및 련행장소, 사망날자 등이 일본어로 명기되여 있다.
조선 일본군《위안부》 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는 2003년 말에 이 명단을 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으로부터 넘겨받아 국내에 공개하였으며 2004년부터 이에 대한 번역사업을 한데 따라 각도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관계기관들의 방조를 받으면서 공화국북반부출신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을 찾아내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고있다.

일본도서《조선인강제련행조사의 기록》(효고편)에는《1946년 6월과 7월 일본 후생성 근무국은 제337호 <조선인로무자에 관한 조사의 건>이라는 통달을 지방장관(지사)들에게 보내여 전국의 근로처를 통하여 관하 공장,기업소들에서 전시중의 조선인로무자들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이에 의하여 당시 1만 3 477명의 조선사람들이 효고현에 있는 120여개의 공장,기업소들에 강제련행되였는데 그가운데서 413명의 조선사람들이 고베제강소주식회사 본사공장에 끌려가 노예로동을 강요당하였다고 기록되여있다.

우리는 조사과정에 고베제강소주식회사 본사공장에 끌려갔던 413명중 당시의 평안북도에서 강제련행된 사람이 140여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였다.
또한 이 명단 30권-1(효고현) 23페지의《우메모도 산떼이》라는 사람이 현재 평양시 중구역에 살고있는 홍찬정(1926년 4월 20일생)이고《가네다 메이규》와《시라가와 뵤소》라는 사람들이 량강도 김형직군에서 살다가 사망한 김명규(1922년 9월 10일생), 백병송(1926년 7월 13일생)이며 22페지의 《가네야마 세이고》라는 사람은 일본도서《조선인강제련행조사의 기록》(효고편)을 통하여 김성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일제의 강제련행과 고베제강소주식회사에서 감행된 강제로동범죄

일제에 의한 조선인랍치, 강제련행범죄는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단말마적으로 감행되였다.
광란적인 전쟁은 일본의 막대한 인적 및 물적자원의 소모를 초래하고 국내의 병력과 로동력을 고갈상태에 빠지게 하였는데 당시 자료에 의하면 일제는 1944년에만 하여도 206만 8 284명에 달하는 조선사람들을《징용》,《징병》으로 끌어가려고 획책하였다.(일본잡지 《전쟁책임연구》제51호 50페지)
이 잡지 제51호에는《조선에서 징용동원 대상으로 된 17살부터 40살사이의 남자인구는 390만 5 230명이므로 실질적으로 2명중 1명이라는 계산으로 된다. 1944년에만 하여도 17살부터 40살사이의 로동력인구의 약 50%에 달하는 사람들을 동원하려 하였던 것이다.》고 씌여져 있다.

일제는 침략전쟁에서 부족되는 로동력을 조선 사람들에 대한 랍치, 강제련행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일제는《모집》,《관알선》(정부알선)의 방법으로 강제련행을 대대적으로 감행하였으며 조선사람들에 대한 《징용》,《징병》을 완전히 의무화하였다.
일제의 강제련행은 회유와 기만, 체포와 랍치 등 육체적 및 정신적 강제를 결합한 수법으로 감행되였으며 고베제강소주식회사 본사공장에 끌려간 청장년들의 경우도 결코 례외가 될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피해자 김성호는 《1943년 11월 어느날 촌장이 보내여 면사무소에 갔더니 마에다 시게사부로라고 하는 왜놈 상급장교와 2명의 군인이 와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일본 고베제강소에 데려갈 인원을 모집하러 왔다고 하면서 거기에 가면 <징병>에 나가지 않아도 되니 일본에 가라고 거듭 내리먹이였다. 나는 뿌리치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우리 집안에 큰 화가 미칠것이 두려워 응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 왜놈들의 설득이란 한갖 형식에 불과하였지 실제로는 강제였다. 그해 11월말 일제는 후창군(당시)에서만도 100여명에 달하는 청장년들을 경찰소로 끌어갔다.》고 하였다.

일제는 조선에서 강제련행한 청장년들을 조선국내에서 일정한 견습과 훈련을 주어 일본으로 끌어갔다.
피해자 홍찬정은 40명의 청장년들과 함께 송림에 있던 겸이포제철소(당시)에 끌려가 약 1주일동안 작업현장에서 무보수 강제로동을 강요당하였다고 하면서《그후 왜놈들은 우리를 부산항으로 끌고가 관부련락선에 태웠다. 련락선에는 이미 1 000명정도의 조선사람들이 타고있었다. 시모노세끼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기차에 태워 고베제강소로 끌고갔다.》고 증언하였다.
피해자 김성호는 100여명의 청장년들과 함께 강원도의 륙군《련병소》에 끌려가 약 3개월간 군사훈련을 강요당하였다고 하면서 《일제는 1944년 3월초에 그곳 <련병소>에 와있던 1 000여명에 달하는 청장년들을 관부련락선에 태워 시모노세끼항까지 끌어갔다. 그들가운데서 500명은 규슈방면에, 나머지 500명은 간사이방면으로 끌고 갔으며 나를 포함하여 후창군에서 온 사람들은 고베제강소에 넘기였다.》고 하였다.

일제는 랍치, 련행한 조선청장년들을 강제수용소에 가두어넣고 노예적 규률을 적용하였으며 가혹한 로동강도와 로동시간을 강요하였다.
피해자 홍찬정은 《고베제강소에 도착한 우리들을 판자로 만든 합숙에 들이밀었다. 우리의 대렬 및 생활을 감시, 통제한 것은 나까무라라는 일본군 오장이였다. 다음날 나까무라는 아침 일찍 전원을 깨우고 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우리를 제강소로 끌고갔다.
나는 제강소에서 용해공으로 일하였는데 뜨거운 로앞에서 하루에 14시간~16시간씩 일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왜놈들은 조금이라도 일손이 더디거나 저들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덮어놓고 우리에게 폭행을 가하였다. 2년 남짓한 기간 이러한 노예생활이 매일 반복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고베제강소에서의 강제로동기간에 휴식은 일체 없었으며 외출은 철저히 금지되고 로임이란 한번도 손에 쥐여보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차례진 하루 식사량은 한줌밖에 안되는 콩밥이나 납작보리밥, 콩깨묵에 절인무우 몇점이 전부였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피해자 김성호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는 고베제강소에 끌고간 조선청년들을 매일 2교대제로 위험한 작업에로 내몰았으며 조선사람들은 아무런 로동안전시설이나 로동보호대책도 없는 무시무시한 고역장에서 혹사당하고 각종 사고와 고문, 미군의 공습 등으로 하여 죽기가 일쑤였다.
피해자 홍찬정은《어느날 나는 조선 사람들에게 못된 짓을 하는 오장 나까무라에게 된매를 안긴것으로 하여 헌병대감옥에 끌려가 8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고문 때문에 죽은 동료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 어디에도 이러한 사실이 밝혀진것이 없다.》고 하였다.
피해자 김성호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의 패망직전에 자기와 함께 일하던 25명의 동료들이 일본해군에 《징병》으로 끌려가 오끼나와 전선에서 전원이 무리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한 1945년에 들어와 고베지구에 대한 미군의 대공습으로 하여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희생되였다고 하면서 일제가 패망하였을 때에는 고향에서 함께 강제 련행되였던 100여명가운데서 5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상의 증언과 조사과정을 통하여 당시의 조선인강제련행 및 강제로동범죄에 일본군부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과 태평양전쟁말기에 감행된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범죄의 특징을 찾아볼수 있었다.
그것은 첫째로, 1938년의《국가총동원법》공포이후 일제가 조선사람들을 가장 많이 강제련행해갔던 곳이 주로 광산, 탄광이였다면 태평양전쟁말기에는 일본본토에서의 이른바 《결전》을 앞두고 국내의 군사기지건설장과 군수품제조공장들에 집중적으로 끌어간 것이며 둘째로, 일제가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한 초기에는 주로 남반부의 조선사람들을 강제징발해갔다면 태평양전쟁말기에는 북반부지역을 중심으로 많이 랍치, 련행해간 것이며 셋째로, 강제련행된 사람들이 인간이하의 노예로동과정에 각종 사고와 고문, 영양실조와 질병, 미군의 공습 등으로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희생자들의 유골이 일본땅에 마구 내버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조선인 강제련행 및 강제로동은 특대형 랍치행위, 중세기적인 노예로동

일제가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강제련행 및 강제로동범죄는 그 방법과 내용, 형식에 있어서 중세기적인 노예사냥,노예로동을 방불케 하는 특대형의 인권유린범죄로 된다.
조선인 강제련행 및 강제로동이라는 것은 일제가 19세기말부터 20세기중엽까지 조선에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 우리 나라를 군사적으로 강점한 기간 조선 사람들을 온갖 악랄한 방법으로 랍치, 징발하여 죽음의 침략전쟁터와 고역장들에 내몰아 전쟁노예, 로동노예, 성노예로 만든 행위의 총체라고 말할수 있다.

일제는 1894년에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인거류민을《보호》한다고 하면서 많은 병력을 우리나라에 들이밀어 청일전쟁을 일으켰는데 당시 청나라군대를 공격한다는 구실밑에 군수물자수송과 군사도로건설에조선사람들과 우마차를 강제적으로 동원시켰다.
 일제는 조선을 강탈하기 위하여 로일전쟁 기간에만도 수십만의 조선사람들을 군수품수송과 철도부설 등 공사장에 끌어가 무보수 강제로동을 강요하였다.
로일전쟁후 일제는 조선을 무력으로 강점하고 전대미문의 군사파쑈통치를 실시하면서 조선에서의 강제련행을 국가정책으로 내세우고 그 집행을 위한 국가기구와 악법들까지 동원하여 인적략탈에 더욱 광분하였다.

일제는 조선강점기간 무려 840만여명에 달하는 조선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랍치, 징발하여 침략전쟁터들과 고역장들에 총알받이,로동노예로 내몰았고 20만명의 조선녀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끌어가 가혹한 성폭행을 하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일제가 조선강점기간에 실시한 강제련행 방법가운데서 가장 전형적인 방법의 하나가 랍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기간에 진행된 피해자들에 대한 증언조사에서 이미 밝혀졌을뿐아니라 최근 년간에 입수된 일본정부와 기업들의 공식문건과 자료들에 의해서도 뚜렷이 립증되고있다.

일본도서《전시기식민지통치자료》제7권에는 일본내무성이 1944년에 조선에서 진행한 주민동향 및 읍, 면행정상황과 관련한 보고서가 편집되여있는데 여기에는《징용과는 별도로 다른 모든 방법에 의한 출동도 랍치와 같은 상태이다. 그것은 만약 사전에 이것을 알리면 모두 도망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간습격, 유괴 등 각종 방책을 취하여 인질적인 략탈,랍치를 하는 사례가 많아지고있는 것이다.》고 씌여져 있다.

또한 일본 도다건설회사가 발행한《사보》(1942년 9월 25일부)에는 1942년 8월 12일 일본 후생성에서 진행된 회의와 관련한 기사가 게재되였는데 여기에는《(조선)반도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랍치하여 주로 군관련 공장들에서 일을 시켰다.》,《어쨌든 강제적으로 끌어와 가혹한 로동을 강요하기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도주자가 나왔다.》고 기록되여있다.

《혹가이도와 조선인로동자-조선인강제련행실태보고서》(1999년 70페지)에는 일제가 1944년 5월에 조선에서 혹가이도에 100명을 강제련행해올데 대한 지시를 내린것과 관련하여 《…군청직원,경찰서 및 면 직원을 총동원하여 잠자는 곳을 습격하거나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리유에 관계없이 련행하는 등 상당히 무리한 방법을 취하여 22일의 출발날자에 겨우 맞추어 84명에 대하여 령장을 교부하고 수송시키는 사건이 있었음》이라고 서술되여 있다.
이외에도 일제가 우리 인민에게 감행한 강제련행이 사실상 랍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료와 문건들은 많다.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 및 강제로동범죄는 국제법에 위반되는 중대한 인권침해죄로서 일본정부는 마땅히 이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일본당국은 조선인 강제련행 및 강제로동을 비롯한 반인륜적 범죄의 력사에 대하여 옳바로 반성하고 사죄하며 배상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 죄악의 력사를 은페, 정당화하면서 저들의 과거범죄청산의무를 털어버리기 위해 오그랑수를 쓰고있다.

일본정부는 조선인 강제련행범죄, 랍치범행 등 반인륜적 범죄에 대하여《실정법상의 보상근거》와 《증거》가 없다고 우겨대고 있으며 특히 지난해 3월 윁남 하노이에서 진행된 조일관계정상화 실무그루빠회의에서 일제의 과거죄행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인정할수 없다고까지 공공연히 떠벌이였다.
강조하지 않을수 없는 것은 일본정부가 패망한지 반세기이상이 지난 오늘까지도 가장 큰 피해국인 우리 공화국과 피해자 및 유가족들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았고 한푼도 배상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반공화국, 반총련책동의 도수를 더욱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일본당국은 우리에 대한 과거청산은 안중에도 없이 더는 존재하지도 않는《랍치문제》를 계속 집요하게 들고 나와 6자회담 앞에 인위적인 난관을 조성해보려고 책동하고 있으며 그것을 구실로 우리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력을 보다 강화하고 있다.
또한 일제가 감행한 조선인 강제련행 범죄의 직접적 피해자들과 그 후손들의 민주주의적 민족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우리 공화국의 합법적해외공민단체인 총련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말살하기 위하여 광분하고있다.
조선인강제련행 및 강제로동문제는 그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의 정신적 및 육체적고통이 과거에 이어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하여 더는 미룰수 없는 초미의 인권문제, 인도주의적문제로 되고있다.

일본정부는 하루빨리 과거의 조선인강제련행 및 강제로동범죄에 대한 법적책임을 인정하고 살아있는 피해자들은 물론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에 대해서도 철저히 사죄하고 배상하여야 한다.
또한 일본정부는 강제련행범죄와 관련한 자료들과 문건들을 시급히 전면공개하고 그 진상을 책임적으로 밝혀야 하며 범인들을 찾아내여 국내외의 해당한 재판소들에서 형벌을 가해야 한다.
이와 함께 시대착오적인 반공화국, 반총련책동을 당장 걷어치우고 사회앞에 그리고 후대들에게 과거력사의 진실을 옳바로 알려주기 위한 교육사업을 진행하여 침략과 범죄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을 실천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것이다.

일본이 21세기에도 과거범죄를 숨기면 숨길수록 2중, 3중의 죄를 범하게 되며 그것은 후대들에게 더욱 무겁게 가해지게 될것이다.
조선 일본군《위안부》 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는 앞으로도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련대협의회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진보적 단체들과의 련대와 련합을 강화하여 일제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진상조사를 계속 심화시키고 그를 폭로단죄하며 우리 강제련행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의 피맺힌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갈 것이다.

조선 일본군《위안부》및 강제련행
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주체97(2008)년 3월 8일
평 양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북측본부 고발장

희세의 살인마 미제의 죄행을 단죄하여 로근리는 오늘도 분노에 떤다

미국은 이 세상에 생겨난 첫날부터 온갖 악행을 다 저질러온 가장 야만적이며 침략적인 나라이다. 세계의 량심은 오늘도 지난 조선전쟁시기 미제가 감행한 야수적살륙만행을 잊지 않고 있으며 그에 대한 저주와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5년전인 1950년 7월 26일 남조선의 충청북도 영동군 로근리에서 미제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민간인대학살만행은 양키들이야말로 인간증오사상이 골수에까지 꽉 들어찬 살인악마들이며 우리 민족과 인류의 극악한 원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이다.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 북측본부는 지난 조선전쟁시기 미제침략자들이 로근리에서 저지른 반인륜적인 인민대학살만행을 만천하에 발가놓기 위하여 이 고발장을 발표한다.

《귀신도 기가 막혀 통곡할 참극》

《귀신도 기가 막혀 통곡할 참극》,이것은 당시 미제의 로근리학살만행을 단죄하여 남조선출판물에 실린 글의 한 대목이다. 학살진상이 얼마나 몸서리치는 것이였으면 귀신에까지 비유하여 개탄하였겠는가.
조선전쟁 발발당시 미국방성에서 《당신을 환영한다》라는 제목아래 《아메리카의 미국병사들은 무자비하고 능숙한 살인자가 되여야 한다.》,《사민도 적군과 같이 대하여야 한다.》,《흰옷을 입은 놈들은 모조리 폭격하여 죽여야 한다.》는 살인교리를 담은 소책자를 조선전쟁에 내몬 미지상군과 공군부대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조선의 평화적주민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는 살인극을 벌리게 하였다는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군병사들은 곤충을 가지고 장난하는 총각애들처럼 우리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하였다.》,《이것은 그야말로 대학살이였다.》,《제2차세계대전에서 저지른 나치스행위를 릉가하는 야수적인 살인행위였다.》 이것은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로근리주민들과 학살만행자들인 미군병사들 그것을 현지에서 직접 목격한 미국 군법전문가들이 한 말이다.
미제의 로근리 민간인대학살만행은 그들의 증언과 함께 계속 발굴 확인되고 있는 사실자료들로 하여 더욱 확증되고있다. 1950년 7월 25일 저녁 미제1기갑사단 7련대는 대전으로부터 패주하던 길에 충청북도 영동군 주곡리일대에 이르렀다.
미제침략군은 주변의 마을사람들에게《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줄테니 모두 모이라》고 하고는 림계리를 비롯한 여러곳에서 이불짐을 이고 진채로 밀려온 피난민들까지 합쳐 강제로 끌고 경부선철길을 따라 다음날 아침 로근리에 도착시켜 대렬을 짧게 압축시킨 다음 몸수색을 하였다.
7월 26일 정오무렵 주민들이 철길우에 집결되였을 때 미군 통신병이 어디론가 무전련락을 한지 얼마후 정찰기 한대가 나타나 그들의 머리우를 몇바퀴 돌고갔다.
그후 곧 미군전투기 2대가 날아와 무작정 주민들의 머리우에 폭탄을 쏟아붓고 기총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철도레루가 엿가락처럼 휘고 사람들과 수레를 끌고가던 소의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하늘로 솟아올랐다. 철길우와 주변에는 순간에 100여명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갈팡질팡 헤덤벼치다가 2개의 기차굴속으로 뛰여들었다. 그러자 미제승냥이들은 좋은 먹이감이라도 만난듯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굴속에 대피한 사람들을 향해 앞뒤쪽 야산에서 기관총을 쏘아대다가 그것도 성차지 않아 기차굴 입구에까지 접근하여 미친듯이 사격하였다. 어두운 기차굴안은 영문도 모르고 생죽음을 당하는 수백명의 로인들과 여자들, 아이들의 비명소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고 굴바닥 배수로는 피도랑을 이루었다.

이렇게 시작된 살륙전은 7월 29일 오전까지 련 4일간이나 계속되였다.
미제살인귀들은 《부상병을 치료해준다》는 구실로 굴안에 들어와보고는 생존자들을 확인한 다음 또다시 기관총사격을 가하였다. 《어머니가 나를 안쪽으로 앉히고 바로 굴앞에 앉아계셨는데 온몸에 다섯군데나 총상을 입고 돌아가셨다.》,《난 한 미군병사를 보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어요. 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쳤으나 계속 사격을 가하더군요. 총알 하나가 내 허리를 뚫고 지나가 아이 가슴에 꽂혔어요.》,《…어머니는 하복부와 발목에 파편을 맞아 피투성이고 녀동생은 한쪽눈이 피범벅이 돼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지만 녀동생의 눈알이 빠져 데룽데룽 매달려 있더라구요. 할머니, 형님도 거기서 돌아가셨지요.》
살인현장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당시 15살,7살이였던 생존자들의 이 증언은 잔인무도한 미제살인마들에 대한 피타는 절규였다. 결국 미제야수들이 유인하여 끌어간 사람들중 400여명이나 생죽음을 당하고말았다.

로근리는 조선전쟁초기《닥치는 대로 죽이라. 설사 그대들 앞에 나타난 것이 어린이나 로인이라고 할지라도 손이 떨려서는 안된다. 죽이라. 그대들은 될수 있는대로 많은 조선사람들을 죽임으로써 미국시민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라.》고 줴친 남조선강점 미8군사령관 워커의 살인명령을 양키병사들이 어떻게 실천에 옮겼는가를 보여주는 증견자로 되였다.
하기에 1951년 5월 조선에서의 미제의 살륙만행을 현지에서 조사한 국제민주녀성련맹조사단의 한 성원은《히틀러도당이 만든 유럽의 오슈벵찜, 마이다네크, 마우트하우젠 등은… 사람들을 독가스로 죽이는 유명한 감옥이였다.그러나 미제가 조선에서 감행하고 있는 만행은 히틀러강도배의 그것보다 몇배나 더 참혹한 것이였다.》라고 저주하였다.

조직적이며 계획적인 대살륙전

미제의 로근리대학살만행은 공인된 국제법과 전쟁법규들을 란폭하게 짓밟은 철두철미 조직적이며 계획적인 반인륜적대범죄이다. 1949년 8월에 채택된 제네바협약 제3조 1항에는 전투행동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 특히 사민들에 대해서는 살인, 폭행, 학대, 고문, 인질로서의 억류 불법처형 등의 행위를 금지한다고 명백히 규제되여있다. 이런 국제법규가 채택된지 1년도 못되여 그것을 란폭하게 위반하면서 미제가 로근리에서 그토록 많은 민간인들을 한꺼번에 학살하였다는 것은 결코 그들이 말하는 그 어떤《우발적사건》이나 《오폭》에 의한 것이 아니였다.

근 50년간 흑막속에 묻혀있던 로근리대학살사건이 1999년 9월 29일 미국의 AP통신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자 미국은 뻔뻔스럽게도 《증거부족》,《불순한 주장》을 운운하면서 어떻게하나 사건의 진상을 음페하고 여론을 무마하며 사태의 책임에서 벗어나보려고 비렬하게 책동하였다.
미국 백악관대변인은《우리는 그동안 사건을 충분히 조사했으나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하였는가 하면 미국방성대변인은 《지난 50년 7월에 일어난 사건을 명확히 알수 있는 기록이 없다》고 줴쳤다.
또한 미륙군대변인은《륙군력사쎈터가 관련서류를 찾아보았으나 로근리량민학살주장을 뒤받침할만한 정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우겨댔으며 미국무성대변인은《그 보도를 보지 못했으며 처음 듣는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미륙군장관 칼데라는 2000년 12월 15일《로근리사건을 1년내내 조사한 결과 당시 미군이 민간인들에게 발포한 사실이 없고 상급부대사이에 명령이 있었다는 증거는 더구나 있을수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사건의 전모가 점차 드러나게 되자 미국은 전쟁중 민간인학살은《작전수행중 어쩔수 없이 일어난 일》이며 학살이 있었다면 그것은《훈련이 제대로 안된 일부 군인들에 의한 행위》라고 하며 꼬리를 사리려고 하였다.
한두사람도 아니고 수백명을 단 며칠사이에 무참히 학살하고도 그 죄를 덮어버릴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을것이다.
미국은 날조와 거짓선전을 늘어놓았지만 당시 로근리대학살만행에 직접 참가했던 저들의 병졸들까지 나서서 증언하는 통에 더는 어쩔수 없게 되였다. 당시 살인만행에 직접 참가한 미제1기갑사단 7련대 2대대 기관총수였던 노먼 틴클러는 미국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뒤늦게나마 그때 그 일을 증언하려고 나선 것은 량심 때문이다.》,《언젠가는 대가를 치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에 털어놓는다.》고 하였으며 다른 한 기관총수였던 유젠 헤쌜맨은《중화기중대장 맬보른 씨.챈들러대위가 상부와 무전통화후 기차굴 입구쪽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사격명령을 내렸는데 모두 쏴죽이라고 했다.》고 하면서《우리는 그들을 전멸시켰다.》고 실토하였다.
또한 당시 미제1기갑사단출신 병사 6명은 자기들이 로근리에서 민간인들을 사격하였다고 자백하였고 다른 6명도 대학살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으며 퇴역군인 패터슨은《이것은 그야말로 대학살이였다.》고 시인하였다. 한 대학생이 굴속에 들어온 미군병사에게《죽을 땐 죽더라도 한가지만 물어보자. 왜 죄없는 우리를 죽이는지 그 리유나 알고싶다》고 묻자 그 야수는 단마디로《상부의 명령》이라고 대답하였다.

미국의 AP통신은 미군의 공식문건들과 이전 미군병사들의 증언자료를 통하여 미륙군25사단 사령부가 당시 민간인들도《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내려 평화적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는것을 폭로하였다.
남조선에 조직된《로근리사건진상조사반》은 사건현장과 그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기술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미국이 1970년대 초에 벌써 지뢰탐지기와 류사한 기술기재들을 동원하여 사건현장을 샅샅이 뒤지면서 탄피와 파편쪼각 등 집단학살의 증거물들을 없애버렸다는 중대한 범죄적사실을 밝혀냈다고 공개하였다.
《로근리사건진상조사반》이 덧붙여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사건현장의 콩크리트구조물에서 아직도 박혀있는 50개의 탄알과 총탄자리 316개를 찾아냈으나 그 주변에 응당 있어야 할 탄피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진상이 공개되면서 미제야수들이 로근리민간인대학살의 범죄를 영원히 흑막속에 묻어두기 위해 이미전부터 계획적으로 짜고들어 증거인멸행위를 해왔다는 내외여론의 규탄과 단죄의 목소리는 더욱 커갔다.
이렇게 되자 최근 남조선당국도 로근리대학살이 처음부터 미국에 의해 감행된 조직적이며 계획적인 행위였다고 공식인정하는 문서를 발표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모든 사실은 로근리에서 저지른 미제침략군의 대량살륙행위는 사전에 면밀히 준비되여 감행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살인범죄로서 그 어떤 기만으로도 가리울 수 없으며 미국이 범죄의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수 없다는 것을 실증해주고 있다.

추악한《추모탑》건립놀음

미국의 력사는 한마디로 사기와 협잡,모략으로 일관되여있다. 미국양키들이야말로 남의 나라 땅에서 백주에 살인범죄를 저지르고도 돌아서서는《추모》요,《참배》요 하는것과 같은 짓을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뻐젓이 연출해내는 철면피한들이다.
미국이 로근리에 이른바《추모탑》이란것을 건립하는 놀음을 벌린것이 그 전형으로 되고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기념탑과 추모탑이 있지만 아직 가해자가 피해자를 추모하여 세운《탑》은 없다. 오직 인디안의 피와 수많은 타민족의 고혈로 살쪄온 미국식인종들만이그렇게 할수 있다.
더우기《탑》의《비문》에 사죄한다는 문구는 고사하고《로근리주민》,《량민학살》이라는 표현조차 없으며 지어 죽인 자와 죽은 사람의 이름도 없이 그저 죽은 사람을 《위로》한다는 어정쩡한 글을 새겨놓았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교활한 살인마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오늘도 로근리의 철다리와 차굴 근처의 콩크리트 구조물들에는 미제승냥이들이 쏘아댄 수백개의 총탄구멍이 그대로 생생히 남아있으며 억울하게 숨진 무고한 사람들의 유해가 계속 나오고있다. 미국이 《추모탑》건립과 같은 광대놀음을 벌리는 것은 결코 로근리희생자들의 령혼을 위로하자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살인마적정체를 가리우고 범죄의 책임에서 벗어나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은 억울하게 희생된 로근리사람들과 남조선인민들은 물론 우리 겨레에 대한 참을수 없는 모독이며 인륜도덕에 대한 우롱이다.
지금 격노한 남조선인민들이《추모탑》건립놀음은《로근리와 남녘민중에 대한 기만행위》이고 《미국의 책임을 흐려놓기 위한 또 하나의 정치적모략극》이며《추모탑》은《위령탑》이 아니라 미제의《살인기념탑》이라고 항의규탄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미제가 남조선에서 벌려놓고 있는 기만놀음은 비단 로근리《추모탑》건립뿐이 아니다. 《피의 목욕탕》이라고 불리우며 우리 민족에게 지울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겨놓은 5.18광주인민봉기자들에 대한 대학살은 미국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며칠 동안에만도 5,000여명의 무고한 학생,시민들의 생명을 앗아간 또 하나의 대살륙전이였다.

이미 알려진바와 같이 당시 백악관에서는 대통령과 국무,국방장관을 비롯한 미국정부의 우두머리들이 모여 광주인민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흉악한 살륙작전계획을 작성하였다. 그 지령에 따라 미제살인마들은《반항자들이 넋을 잃고 주저앉게 하는 묘책은 무자비한 진압》이라고 떠벌이며 살륙전을 적극 부추기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 극악한 범죄행위에 대하여 마땅히 시인하고 사죄할대신 망월동을 찾아 그 무슨 《명복》을 빌고《참배》하는 광대놀음을 벌려놓으면서 반파쑈민주화와 나라의 통일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5월의 항쟁거리에 떨쳐나섰다가 피흘리며 쓰러진 수많은 광주항쟁투사들과 남조선인민들을 우롱하고있다.
백주에 옷을 벗긴 녀성의 몸에 뼁끼칠을 하여 내쫓고 길가던 녀학생들을 장갑차로 무참히 깔아죽이고 사죄 한마디 없이 책임에서 벗어나보려고 《분향》이니,《위로》니 하는 사기극을 벌려놓은 자들도 바로 미제살인마들이다. 지금도 인천《자유공원》에는 조선침략전쟁의 원흉인 맥아더의 동상이 뻐젓이 서있다.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계획을 작성하고 그 실현을 위해 미극동군사령관의 모자를 쓰고 남조선에 기여든 맥아더는 1950년 《크리스마스》전까지 전조선을 완전히 점령하고 병사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전쟁미치광이였다. 이자는 《조선사람들을 짐승과 같이 생각하라. 짐승을 잡듯이 무자비하게 죽여야 한다》고 떠벌이였는가 하면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서울을 탈취하라. 거기에는 처녀들과 부녀들도 있다.3일간 이 도시는 너희들의것이 될것이다. 너희들은 서울의 처녀들과 부녀들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지껄이면서 양키병사들을 살륙만행에로 내몰았다.
이런 살인마의 동상을 인천땅에 세워놓고 그《치적》을 자랑하고 있는 미제야말로 가장 파렴치한 야만들인 것이다. 미국이 제아무리《추모탑》과《기념비》를 세우고《분향》하고《위령제》를 지내며《참배》한다고 하여 그에 속아넘어갈 우리 민족이 아니며 그런 오그랑수로 100여년동안 쌓이고 쌓인 겨레의 반미감정을 가라앉힐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처럼 어리석고 가소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피는 피로써 갚아야 한다.

로근리 민간인대학살은 미제침략자들이 지난 조선전쟁시기 우리 조국땅 이르는 곳마다에서 감행한 살륙만행의 한 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전쟁시기 인간증오사상으로 길들여진 미제침략군의 더러운 발길이 닿는 곳마다가 참혹하게 죽은 무고한 우리 인민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사실들이 그것을 웅변으로 확증해주고 있다. 미제침략자들은 1950년 7월 로근리에서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한데 이어 경상남도 창녕군에서만도 100여명을 단꺼번에 무참히 살해하고 남조선의 거창, 의령, 함양, 단양, 문경과 락동강 일대에서는 적수공권의 주민들을 끌어내여 집단적으로 학살하였으며 온갖 야수적인 방법으로 곳곳에서 대량살륙만행을 벌렸다.

당시 프랑스의 한 신문은 서울에서 미제살인귀들이 애국자들의 머리가죽을 벗겨 《기념》으로 나누어가지는 소름끼치는 행위를 한데 대해 《20세기의 최대의 만행은 미군이 조선에서 감행하였다.》고 전하였다.
남조선신문 《동아일보》에는 1951년 2월 거창군에서 감행한 미제의 살인만행을 폭로하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미군은 부락민 600여명을 피난가자고 하면서 박산골짜기에 끌고가 한곳에 세워놓았다. 그들은 기관총과 소총 등으로 무려 2시간동안 쏘아댔다. 젖먹이어린이들의 울음소리가 멎은 후에야 사격을 중지하고는 시체에 기름을 뿌려 불태워버렸다. 어린이들을 죽인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그 시체들을 따로 골라 매장해버렸는데 그후 해골을 골라내여보니 뼈다귀만도 19가마니였다.》
그야말로 짐승도 낯을 붉힐 귀축같은 야만행위였다.

이미 초보적으로 집계되여 공개된 자료에 의하더라도 조선전쟁시기 미제야수들은 남녘땅에서만도 평화적 주민들을 무려 124만여명이나 살륙하였다.
미제야수들의 인간도살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잔인한 것이였으면 조선전쟁당시 미국신문 《데일리 뉴스》 특파기자였던 케이즈 비치가 《지금은 조선사람으로 태여날 때가 아니다.》라고 썼겠는가.
미제살인마들의 천인공노할 죄행이 오늘도 남조선의 산과 골짜기, 갱도와 저수지들에서 계속 드러나 사람들의 경악을 자아내고있다.
지난 6월 26일에는 경상북도 례천군 산성리에서 미제침략군이 1951년 1월 9일에 저지른 살인만행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날 미10군단 사령관의《초토화작전》명령에 따라 미공군전투기 30여대가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폭탄들을 산성리일대에 투하하여 주민 130여명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혔다는 사실이 당시 미군병사의 증언과 미국의 한 문서보관소의 기밀문서를 통해 그 진상이 밝혀졌다.

미제가 조선전쟁시기 신천을 비롯한 공화국북반부지역에서 감행한 살인만행들은 만사람의 치를 떨게 하고있다. 산사람의 사지를 찢고 머리에 못을 박고 톱으로 목을 잘라 죽이는 등 전대미문의 살륙전으로 원한의 땅 신천에서만도 군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5,380여명의 인민들을 학살한 미제살인귀들의 야수성과 잔인성은 산천초목도 분노에 떨게 하고있다.
신천에서 감행한 미제야수들의 야만성에 대하여 1952년 3월 신천살륙 현장을 조사했던 국제민주법률가협회조사단은 《조선에서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범죄였다.》고 규탄하였다.
신천박물관을 참관한 스위스의 한 작가는 신천대학살을 직접 지휘한 미제두목의 죄행을 단죄하여 《 만약 우연히도 지금까지 네가 살아있다면 너는 도대체 잠을 이룰수 있는가. 너는 도대체 네 눈으로 짐승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가. 짐승의 눈과 살인흡혈귀 네 눈을 무엇으로 분간할 수 있단 말인가. 미제에게 멸망을!》이라고 절규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이 조선전쟁에서 학살한 평화적 주민들의 수는 초보적으로 집계한데 의하더라도 수백만명을 헤아리며 치떨리는 미군의 살륙만행을 립증하는 유골들이 오늘도 도처에서 계속 발굴되고있어 우리 인민의 가슴마다에 불구대천의 원쑤 미국양키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을 천백배로 더해주고있다.

우리 민족은 분렬의 장본인이며 우리 겨레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화근인 미제의 죄악을 결산하지 못한채 21세기의 다섯번째 해를 보내고 있다.
겨레의 피는 결코 물이 아니다.
로근리와 신천을 비롯한 이 땅에서 미제살인귀들에 의하여 무참히 죽어간 수많은 령혼들이 지금 복수를 부탁하며 온 겨레를 반미항전에로 부르고 있다.
존엄과 자주권을 목숨같이 귀중히 여기는 우리 인민은 또다시 침략의 칼을 벼리며 핵참화로 조선민족을 멸살시키려는 미제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천추만대를 두고 끝까지 피의 결산을 하고야 말 것이다.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는 원한품고 쓰러진 부모형제들의 복수를 위해 남조선에서 미제침략군을 철거시키기 위한 거족적인 투쟁에 한결 같이 떨쳐나서야 할 것이다.

위대한 선군으로 존엄높고 6.15공동선언의 기치 따라 민족공조로 통일강성대국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해나가는 오늘의 조선민족을 미국은 똑바로 보고 분별 있게 처신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기회에 정의와 진리, 평화와 인권을 귀중히 여기는 세계진보적 인민들이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성전과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우리 인민의 정당한 투쟁에 대한 련대성의 목소리를 더욱 높여주리라는 기대를 표명한다.

주체94(2005)년 7월 24일
평 양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공 동 백 서 (1 0 호)

남조선강점 미군은 침략과 략탈의 무리들이며 잔인무도한 살인마들이다. 이것은 미제침략군의 무제한한 만행을 《방지》한다는 미명하에 남조선과 미국사이에 이른바 《행정협정》이 체결되고 1967년 2월 9일에 발효된 이후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에서 감행한 야수적만행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는 굴욕적인 남조선과 미국사이의《행정협정》의 기만성을 폭로하면서 1967년 한해동안에 감행된 남조선강점 미군의 범죄행위를 재조사하고 그 일부를 공개한다.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살인, 폭행만행

2월 9일 전라북도 군산시 평화동 앞길에서 화물자동차를 몰고가던 미제침략군 운전사는 길가던 박재봉주민의 맏아들 박석진을 우정 들이받아 앞이발을 부러뜨리고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혔다. (《CBS》방송 1967. 2.11)
2월 16일 경기도 련천군 관인면 부곡리에서 미제침략군은 헌쇠붙이를 줏고있던 이곳 주민 10명에게 박격포사격을 가하여 8명을 현장에서 즉사시키고 최만복 등 2명의 주민에게는 심한 부상을 입혔다. 학살된 8명가운데는 새학년도 교과서값을 마련하려고 파철줏기에 나왔던 12살난 박정수소년도 있었다. (《합동통신》 1967. 2.17)
2월 18일 밤 《하야리야》부대 통신 A중대소속 미제침략군 13명은 부산시내 초량동에 있는 《서울빠》에서 맥주를 마신후 그곳 종업원 리영길을 밖으로 끌고나가 깡통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중상을 입혔으며 20일 미공군 6314보급중대 하사 콕스는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에 사는 엄경순주민의 집에 불을 질러놓고 달아나다가 지나가는 승용차를 잡아타고는 료금을 요구한다하여 운전사 김광복에게 도리여 폭행을 가하였다. (《부산일보》1967.2.21,《합동통신》1967.3.29)

3월 6일 대형화물자동차를 미친듯이 몰던 미제침략군 운전사는 서울시 영등포구에 있는 오류교앞에서 뻐스를 들이받아 운전사와 승객 10여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으며 이날 파주군 림진면 선유리에서 미제침략군 3명은 자기들을 태우고온 운전사 김종길이 료금을 요구한다 하여 그를 마구 때리였다.(《MBC》방송 1967. 3.6,《동화통신》1967. 3.8)
3월 14일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앞길에서 미제83경기대대소속 일등병 보나노를 비롯한 3명의 미제침략군은 조효용의 안해를 희롱하려다가 남편이 격분하여 항의하자 그를 집단구타하였다.(《경기매일신문》 1967.3.16)
3월 17일 미기갑련대의 땅크병은 부근에서 탄피를 줏고있던 경기도 련천군 련천면의 13살난 김재연소년을 권총으로 쏘아 중상을 입혔으며 21일 밤 대구시 봉덕동 앞길에서 미제침략군 3명은 길가던 3명의 로인에게 무턱대고 뭇매질을 하고는 부근에 있는 《파라다이스빠》라는 술집에 몰려들어가 종업원 김영숙녀성도 마구 때리는 야만적행위를 감행하였다.(《CBS》방송1967.3.19,《매일신문》 1967.3.23) 3월 25일 미제7사단 13공병대소속 화물자동차운전사 스빠크는 차를 마구 몰다가 경기도 포천군 청산면 소성리 앞길에서 손수레를 끌고가던 차재원과 리아무개청년을 들이받아 즉사시켰다. (《MBC》방송 1967.3.26)
4월 1일 미제침략군 병장 앨버트 씨리틀 패이지는 전라북도 김제군 황산면 황산리에서 김종업청년에게 폭행을 가하였으며 2일 미제8군사령부소속 자동차운전사 하사 케네디는 서울시 룡산구 리태원동 삼각지점에서 안전신호에 따라 길을 건너가던 남순길소년을 일부러 깔아 중태에 빠뜨렸다. (《전북일보》1967.4.26,《합동통신》1967. 4.3)
미제8군 대구지구장거리통신단소속 이등병들인 윌리피 섹톤과 제리엔 워시가 대구시 봉덕동의 한 식당에서 나오다가 주변의 한 집을 파괴하고 이 사실을 주인에게 알려주었다하여 리정자녀성을 구타한것 등 미제침략군은 경상북도에서만도 2월 9일부터 6월 10일까지 4개월사이에 48건의 범죄를 감행하였다.(《매일신문》1967.4.4,《령남일보》 1967. 6.24)
남조선인민들을 자동차로 깔아죽이는것쯤은 례사롭게 여기는 미제침략군은 4월 7일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 앞길에서 자전거를 타고가던 리창영청년을 찌차로 들이받았는가 하면 14일에는 대전방향의 도로에서 고속으로 몰던 차로 달구지를 들이받아 2명을 중태에 빠뜨리였으며 15일에는 충청남도 천안군 성환면 앞길에서 정재우어린이를,16일에는 경기도 평택에서 온양으로 가는 길가에서 3명의 어린이를 깔아 중상을 입히고 박정규어린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다.(《동양라지오방송》1967.4.8,《대전일보》1967.4.18)
4월 29일 자정무렵 미제침략군 상등병 위스는 서울시 룡산구 후암동 앞길에서 집으로 가는 조성일청년에게 시비를 걸어 행패를 부리다가 이를 말리는 그의 아버지, 어머니에게도 달려들어 매질을 하였다. 이날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연풍리에 사는 최정자, 김종원주민도 미제2사단 비행대대본부소속 상등병 죤슨의 폭행에 의해 중상을 입었다.(《동화통신》1967.4.29,《합동통신》1967.5.1)

미제침략군은 서울시에서만도 5월 1일에는 서대문구,4일에는 중구 도동,10일과 13일에는 영등포구 방화동 앞길에서 길가던 무고한 주민들을 자동차로 들이받아 심한 부상을 입히거나 죽이였다.(《동양라지오방송》1967.5.2,《합동통신》1967.5.5,《MBC》방송 1967.5.14)
5월 10일 미제2사단의 한 병사는 림진강부근에서 부대에 새로 배치된 남조선군병사 정익순청년을 리유없이 총으로 쏘아죽이였으며 13일 미제7사단소속 사병들은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 보산리앞길에서 동네부인들을 희롱하는 저들의 추악한 행위를 말린다하여 40여명의 이곳 주민들에게 집단폭행을 가하였다.(《MBC》방송 1967.5.14)

6월 14일 미제2사단 23련대 A중대소속 사병들은 부대부근에서 파철을 줏고있던 경기도 문산지역의 32명의 주민을 과녁삼아 총탄을 퍼부어 그 자리에서 모두 즉사시키는 집단살륙행위를 감행하였다.(《합동통신》1967.6.15)
6월 27일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림창야간중학교 1학년 학생 배재호가 미친듯이 달려오는 미군자동차에 무참히 깔려죽었는가 하면 29일에는 경기도 가평군 북면 리곡리 앞길에서 조객 30명을 태우고가던 화물차가 일부러 들이받는 미군용차에 의해 논판에 박히고 12명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동양라지오방송》 1967.6.27,《경기매일신문》 1967.6.30)
6월 30일 미제침략군 부산기지사령부소속 일등병들인 추엔 라고로와 토마스 아구르는 부산시 대창동에 있는 상점앞 큰길에서 갖은 추태를 부리며 돌아치다가 이를 말리는 상점주인과 종업원,주민에게 마구 발길질을 하여 심한 상처를 입혔다.(《동화통신》 1967.7.1)

7월 5일 미제침략군 일등병 브라운은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운천리에 있는 음식점종업원 윤경순을 리유없이 마구 때려 심한 타박상을 입히고 앞이발을 부러뜨렸으며 13일 미제침략군 판문점순찰대 일등병 죤은 찌차를 마구 몰고 달리다가 서울시 영등포구 동천동 앞길에서 자전거를 타고가던 박종몽청년을 깔아 중태에 빠뜨렸다.(《경기매일신문》1967.7.10, 《MBC》방송》1967.7.14)
이날 자정무렵 경기도 평택군 평성면 안정리에서 미제 728헌병대소속 제임스 스토펀을 비롯한 40여명의 미제침략군은 2명의 청년에게 시비를 걸다가 집단적으로 때렸는가 하면 주변에 있던 오인창주민에게도 뭇매질을 하여 중상을 입히고 살림집들에 돌을 마구 던져 유리창을 까부시는 행패질을 하였다. 모여든 마을사람들이 격분하여 항의하자 이들은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돌을 던져 20여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동아일보》 1967.7.14)
7월 23일 군용자동차를 몰고가던 미제8군 44포대소속 상등병 존 리반은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 복교리 앞길에서 길가던 리덕신주민에게 큰 각목을 던져 죽이였으며 30일 미군유도탄대대소속 일등병 패키를 비롯한 13명의 사병은 부대근처에 있는 음식점에 뛰여들어 술을 내라고 행패를 부리면서 물건들을 닥치는대로 들부셨으며 이를 제지시키는 주인 진정수와 종업원 림선혜, 리정자에게 집단폭행을 가하여 심한 상처를 입혔다.(《동아일보》 1967. 7.24, 8.1)

8월 15일에는 경기도 평택군 평택역 광장부근에서 미제침략군 통신대대소속 이등병 데이비스 테니스가 잠을 자고있는 68살난 늙은이를,22일에는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앞길에서 미제2사단소속 상등병 제임스가 길을 비켜서는 11살난 어린이를 군용차로 깔아죽였는가 하면 27일에는 미제41통신대대소속 상등병 개팔스 에스 카니숀 등 4명의 미제침략군이 경기도 의정부시 가릉 2동앞길에서 택시를 강압적으로 세운후 차를 마구 짓부시고 운전사 전상섭에게 폭행을 가하는 광기를 부리였다.(《경기매일신문》1967.8.16, 8.24,8.28)

9월 10일 미제 6324헌병중대소속 일등병 로버트 테일러는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신장리의 미공군기지에서 4명의 남조선청년에게 무턱대고 권총을 쏘아 김병근청년을 즉사시켰으며 15일 미제8군본부중대소속 로버트 레코니와 제임스, 미제8군 38보충중대소속 죠셉은 부대정문앞길에서 자기들을 태우고 온 택시운전사 배중환에게 달려들어 뭇매질을 하여 중태에 빠뜨렸다.(《동양라지오방송》 1967.9.16, 《MBC》방송 1967.9.16)
9월 16일 술에 만취되여 돌아치던 미제2사단소속 제임스 엔디스는 서울시 중구 회현동 앞길에서 동덕녀자대학 1학년 최정순학생에게 권총을 마구 쏘아 치명상을 입히고 가까이에 있는 음식점에 달려들어서도 행패를 부리며 권총을 란사하였다. (《MBC》방송 1967. 9.18)
9월 18일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동 앞길에서 미제침략군 《캠프캐롤》부대소속 10여명이 유영수 등 4명의 고등학교 학생을 아무 까닭 없이 맥주병으로 때리고 칼로 찔렀으며 서울시 성동구 보진동 앞길에서는 미제8군 65의무단소속 스티본과 레이몬드가 장대규청년에게 생트집을 걸며 때리다가 이를 말리는 최은자녀성에게 달려들어 목을 누르고 발로 차서 중상을 입혔다.(《대구방송》 1967. 9.19)

10월 4일 미제침략군 자동차운전사가 서울시 영등포구 본동 앞길에서 4살난 리은영어린이를 차로 고의적으로 깔아죽이고 시체를 10여m나 끌고갔으며 12일 경기도 시홍군 의왕면 왕곡리 앞길에서는 길가던 김상순녀성과 그가 업고있던 3살난 배복미어린이가, 서울시 성동구 명일동의 큰길가에서는 이곳 주민들인 리옥순, 서두연녀성이, 15일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 앞길에서는 3살난 윤경자어린이가 미군용차에 억울하게 깔려죽었다.(《한국일보》 1967.10.5,《동양라지오방송》1967. 10.12,《경기매일신문》 1967. 10.17)
특히 11월 5일 미제541공병대소속 미제침략군은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을리 앞길에서 군용차로 길가는 사람들을 이리 저리 쫓아가며 마구 들이받아 박천수를 비롯한 7명의 주민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20일에는 미제침략군 상등병 토마스가 서울시 성북구 송천동 앞길에서 이런 야수적인 자동차놀음으로 16살난 소년을 무참히 죽이였다.(《동아일보》 1967.11.6,《한국일보》1967.11.21)

12월 18일 미제침략군 8명은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 보산리 도로에서 박창희와 그의 동생을 까닭없이 구두발로 마구 차서 치명상을 입혀놓고는 그 마을의 김씨할머니의 집 개를 때리려다 이를 말리는 할머니까지 뭇매질로 실신시켰으며 곁에 있던 윤아무개주민에게도 달려들어 구타하는 광기를 부리였다.(《경기매일신문》1967.12.22)

남조선녀성들에 대한 릉욕, 살인, 폭행만행

2월 9일 밤 11시경 미제2사단 23련대 3대대소속 병장 헥태아스는 경기도 파주군 림진면 선유리 선화양장점에 뛰여들어 김정자녀성을 릉욕하려다가 그가 항거하자 마구 때리고 집에 불을 질러놓고 달아났으며 10일 경기도 의정부 계릉2동 앞길에서는 송명자녀성이,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연풍리에서는 김현숙녀성이 릉욕하려고 달려들었다가 거절당한 미제침략군의 화풀이에 의해 온 몸이 찢기우고 중태에 빠졌다.(《동양통신》1967.2.10, 2.11)
2월 21일 저녁 7시 30분경 미제7사단 73땅크대대소속 상등병 칼슈은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에 사는 안성희녀성을 강간하려다가 실현할수 없게 되자 칼로 그의 몸을 찔러 치명상을 입혔고 밤 10시 30분경 미제8군 27부대소속 상등병 헬리트는 서울시 룡산구 리태원동거리에서 리정희녀성을 리유없이 마구 때려 심한 상처를 입혔다.(《동양라지오방송》1967.2.22, 2.24)
2월 23일 밤 미제7사단소속 상등병 윌리암외 1명은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에서 무고한 김희숙녀성의 얼굴과 배를 발로 마구 차고 때려 실신시켰으며 미공군보급중대에 근무하는 상사 로헤사 챠월은 전라북도 군산시 영화동의 김수정녀성의 집에 달려들어 릉욕하려다가 거절당하자 그의 머리태를 잡아끌며 폭행을 가하다가 가장집물들을 마구 짓부시고 달아났다.(《동양라지오방송》 1967.2.24,《CBS》방송 1967. 2.25)

3월 5일 밤 11시경 미제702대대소속 병장 아담스 세미는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에 사는 정순임녀성의 집에 달려들어 14살난 김정임소녀를 릉욕하고 달아났다.(《동화통신》1967.3.10)
3월 12일 밤 10시경 미제71포병단 2미싸일대대소속 이등병 토미엘 비트슈 등 6명의 미제침략군은 경기도 김포군 김포읍 북변리에 사는 김영애녀성을 강제로 부대막사안에 끌고들어가 륜간하고 옷을 빼앗은 다음 그것도 성차지 않아 그를 부대밖으로 끌고나가 폭행을 가하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합동통신》1967. 3.27)
3월 17일 밤 11시 30분경 미제침략군 《하야리야》부대 142헌병중대 일등병 벨빌은 부산시 범4동에 사는 김이분녀성을 릉욕하려다가 거절당하자 폭행을 가하여 치명상을 입혔다.
3월 21일 미제침략군《캠프캐롤》 B중대소속 일등병 윌리암스 삭슨은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한 녀성을 리유없이 랍치하여 감금하고 깨진 맥주병을 가지고 그의 목을 마구 찔러 심한 상처를 입혔다.(《동아일보》 1967. 3.22)

4월 2일 미제8군 304통신대소속 일등병 맥커 브로이기는 박혜경녀성의 집에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조르며 릉욕하려다가 반항하자 집가구들을 까부셨으며 6월 18일 저녁 미제555경비탄약중대소속 상등병 허프 제임스 에이는 충청남도 천원군 성환면에 사는 려덕우녀성의 집에 뛰여들어 수욕을 채우려다가 거절당하자 그를 마구 때리고 달아났다.(《합동통신》1967.4.3, 《동화통신》1967.6.20)

8월 16일 밤 미제8군소속 미제침략군은 서울시 룡산구 리태원동에 사는 박경숙, 박현숙 두 녀성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남산숲속으로 끌고가 릉욕하였다.( 《MBC》방송 1967. 8.17)
9월 11일 미제30병기중대소속 상등병 레이몬드 벨라스키즈와 이등병 윌리 페이지는 서울에 사는 윤정숙녀성을 부대안에 끌고들어가 륜간하고 심한 상처까지 입혔다.(《동화통신》1967. 9.12)

10월 21일 미제1군단사령부소속 병장 샤무엘 유니스는 술을 마시고 경기도 포천군 청산면 백의리에서 송지룡녀성의 집에 뛰여들어 겁탈한후 흔적을 없앨 목적으로 그의 목을 조르고 방에 불까지 질러놓고 달아났다.(《동아일보》1967.10.27)
10월 26일 찰스 토마스라는 미제침략군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구봉리 앞길에서 길을 가던 김미화녀성을 찌차로 따라가며 희롱하다가 깔아죽였으며 11월 5일 미제7사단 31련대 2대대 본부중대소속 일등병 유진 테일러는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 보산리에 사는 김춘자녀성의 집에 뛰여들어 겁탈하려다가 반항에 부닥치게 되자 임신 4개월인 그를 발가벗기고 목을 졸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야수적만행을 감행하였다. (《한국일보》1967.10.27,《동아일보》1967.11.6)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재산, 재물략탈 파괴만행

2월 22일 미제8군 835병기련대소속 일등병들인 챨스와 로스는 서울시 한강로 1가에 사는 리아무개녀성의 집에 뛰여들어 칼로 위협하여 돈을 강탈하고 옆방에 있던 다른 녀성에게도 달려들어 같은 방법으로 1,000원의 돈을 빼앗아가지고 달아났다.( 《MBC》방송 1967. 2.25)
2월 24일 미제침략군 4명은 동두천읍에 있는 《럭키상회》에 달려들어 유리창들을 닥치는대로 짓부셨으며 이를 제지시키려는 집주인 리유근 등 3명의 주민을 마구 때려 얼굴과 팔에 심한 상처를 입혔다.(《동양라지오방송》1967.2.24)

7월 2일 미제1군단소속 하사 고구라네를 비롯한 3명의 미제침략군은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벽제리 앞도로에서 군용자동차를 미친듯이 몰고가다가 대낮에 리영복주민의 집을 들이받아 완전히 허물어뜨림으로써 45만원에 해당하는 손해를 입혔다.(《경기매일신문》1967.7.3)
8월 21일 미제침략군 병장 닐피는 대구시 봉덕동에 사는 윤미숙녀성의 집에 뛰여들어 돈을 내라고 강요하다가 거절당하자 마구 때려 중상을 입히고도 성차지 않아 살림도구들을 짓부시고 달아났다.(《합동통신》1967.8.22)
9월 3일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한 음식점에 뛰여든 미제침략군 3명은 저들을 잘 대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아무 죄도 없는 강명순녀성을 마구 때려 심한 상처를 입힌후 돈을 빼앗아갔다.(《합동통신》 1967. 9.4)

9월 15일 미제2공군 2수송대대소속 일등병 그린은 박종구주민이 2,700원의 빚을 독촉한다고 하여 20여명의 미제침략군을 끌고와 칼로 그의 배를 찔러 중태에 빠뜨렸으며 같은 날 미제8군 76공병대대 B중대소속 중위 로날드 더블유 라일은 리상렬주민으로부터 25만 4,000원의 빚을 지고도 물지 않은채 미국으로 도망치다가 비행장에서 그와 만나게 되자 2층대합실에서 그를 내리던져 중상을 입히는 만행을 감행하였다.(《합동통신》 1967. 9.15, 9.16)

10월 5일 경기도 평택군 오성면에서 미제55경비중대소속 상등병 메이크 미델은 오세용녀성의 집에 뛰여들어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분풀이로 집에 불을 질러 많은 재산손실을 보게 하였다.(《동양라지오방송》 1967. 10.6)
11월 1일 미제침략군 상등병 엘만 제이 프랭크는 뻐스를 몰고 서울시 성동구 마장동 앞길에서 달리다가 뒤따라오던 택시가 앞질러가는데 화가 난다고 하여 그 차앞을 가로막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유리창을 들부시고 운전사 리윤세를 마구 때려 중상을 입혔다.(《동양라지오방송》 1967.11.1)

이상의 사실들은 미국의 예속밑에 있는 남조선에서는 법도 도덕도 안중에 없는 살인과 략탈의 원흉 미제침략군의 범죄적인 만행을 그 어떤 법률로써도 억제할수 없다는것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끊임없이 감행되여온 미제침략군의 불법무도한 살인략탈행위는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미제침략자들의 살인마적본성은 절대로 변할수 없으며 남조선에서 미군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남조선인민들이 언제가도 편할 날이 없고 민족의 안녕과 나라의 통일도 실현할수 없다는것을 미국의 남조선강점 근 60년의 피의 력사가 뚜렷이 실증해주고있다. 북과 남,해외의 온 민족은 우리 민족의 온갖 불행과 고통의 화근인 미제침략군을 남조선에서 당장 철수시키고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애국애족적인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할 것이다.

주체93(2004)년 12월 10일
평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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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공 동 백 서 (9)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을 강점한 때로부터 5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945년 9월 8일, 백수십년 전부터 조선에 대한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미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하자 때를 만난 듯이 그 무슨《일본군무장해제》라는 미명하에《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녘땅에 기여들었다. 바로 이날부터 반만년의 오랜 세월 단일민족으로 화목하게 살아온 조선인민은 분렬이라는 참을 수 없는 민족적불행과 고통 속에서 살아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였으며 침략자 미제의 횡포 무도한 만행에 의해 남조선에서는 어느 하루, 어느 한 순간도 인민들의 피가 흐르지 않은 때가 없었다.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는 우리 조국의 남녘땅에서 저질러온 미제침략군의 피비린 야수적 만행들이 날이 갈수록 새롭게 드러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1965년∼1966년 기간의 죄행들을 다시 묶어 이 공동백서를 발표한다.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살인, 폭행만행

- 1965년

1월 15일 미친듯이 자동차를 몰고가던 미제침략군은 전라남도 옥구군 림피면 보석리 보석교에서 지나가던 두 녀성을 차로 들이받아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으며 2월 7일 소흑산도 북서방 20mile 해상에서 항해하던 미국상선은 그곳에서 어로작업중인 30t급 려수부용수산회사소속《제13부용》호를 보자 배머리를 우정 돌려 들이받아 침몰시켜 선원 10명을 바다에 빠져죽게 하였다.(《전주방송》1965.1.15, 《동양통신》 1965.2.8)

3월 28일 미제1기갑사단소속 상등병 테리서와 일등병 아이세스더는 경기도 파주군 림진면 법원리의 한 식당에서 행패를 부리던끝에 두번이나 최루탄까지 터뜨려 사람들에게 부상을 입히고 식당을 수라장으로 만들어놓고 달아났으며 5월 1일 미국침략군 죤슨은 서울시 서대문구 순화동에서 택시를 불러 타고 가다가 료금을 가지고 시비를 걸던 끝에 택시를 파괴하고 운전사를 마구 때렸는가 하면 이 사실을 취재하려는 기자에게까지 달려들어 주먹으로 얼굴을 치며 목을 조르는 만행을 감행하였다.(《대한일보》 1965.3.30, 《동아일보》1965.5.3)

5월 12일 남조선미국《공지합동훈련》을 벌리던 미제침략군《F_105》전투기 조종사는 밭에서 일하는 주민들에게 로케트탄을 퍼부어 리해영을 즉사시키고 리원수를 비롯한 3명의 주민들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5월 27일 미제1기갑사단 9련대 1수색대대 B중대에서 보초를 서고있던 미제침략군은 병영주변을 지나가던 김수명주민에게 사격을 가하여 중태에 빠지게 하였다. (《경향신문》1965.5.18, 5.28)

6월 25일 미제7사단 헌병대소속 병장 프래븐, 하사 보일, 말스코는 순찰을 다가 까닭 없이 동두천읍 보산리에 살고 있는 오지영주민을 마구 구타하였으며 이를 말리는 마을주민 리중석까지도 권총으로 위협하여 헌병대로 끌고가 1시간 30분 동안이나 달라붙어 찬물을 끼얹고 뭇매질을 하여 실신시키는 범죄행위를 감행하였다.(《서울방송》1965.6.29)

7월 4일 미제44포병대 4유도탄대대소속 일등병 파슨스와 알리온은 군용자동차를 타고 전라북도 옥구군 옥산면 사정리 앞도로를 지나가다가 권옥환주민에게 고무올가미를 던져 목을 졸라맨후 10m나 질질 끌고가는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였으며 7월 9일 미제8군 보급창소속 미제침략군 운전사는 서울시 서대문구 돈암동 앞길에서 65살난 김인덕로인을 보고도 그냥 찌차를 내몰아 무참하게 깔아죽였다.(《한국일보》1965.7.6, 《한국문화방송》1965.7.10)

7월 12일 미제2사단 B중대 698교역처소속 미제침략군 5명은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동원리에 사는 리순혜녀성의 집을 비롯한 이곳 주민들의 살림집에 뛰여들어 욕질을 해대고 행패를 부리던 나머지 가장집물들을 들부시고 사람들을 구두발로 마구 차고 때리는 폭행을 감행하였다. 이날 찌차를 타고가던 미제2사단 2헌병대소속 미제침략군도 길가던 한 주민의 머리를 유리병으로 때리고 달아났다.(《서울방송》1965.7.13)

7월 14일 미제2사단 39련대 C중대소속 4보초병은 감시초소로 돌아오는 괴뢰군사병에게 마구 사격을 가하여 죽이였는가 하면 8월 17일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미제침략군은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충청남도 천안시 원성동 큰길에서 자전거를 타고가던 리경옥녀성을 들이받아 현장에서 즉사시켰으며 8월 23일 미제침략군 통신부대소속 자동차운전사는 충청남도 아산군 령인면 아산리의 길가에서 놀고있던 3살난 박치영어린이를 깔아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동양통신》 1965.7.14, 《대전일보》1965.8.19, 8.25)

9월 4일 미제침략군 3명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동에서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허을석청년에게 달려들어 리유없이 마구 때리고 행패를 부리다가 나중에 높이 5m되는 벼랑밑으로 떨어뜨려 중상을 입혔으며 9월 19일 미제2사단 37련대 2대대소속 상등병 블르윌리는 술을 처마시고 란잡하게 노는 저들의 행위를 비난하였다고 하여 부대 로무자를 마구 때려죽였다.(《한국일보》1965.9.7,《동아방송》1965.10.6)

자동차로 사람잡이 하는 것을 하나의 쾌락으로 여기고 있는 미제침략군은 9월 29일에는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서정리앞길에서 길가던 리종상로인을, 10월 29일에는 서울시 룡산구의 도로상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전용순을 차로 들이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으며 11월 8일에는 경기도 소사읍 앞길에서 자동차로 려객뻐스를 들이받아 20여명의 승객에게 중경상을 입히고 11월 30일에는 서울시내에서 대형자동차로 김영태주민을 깔아 즉사시키고 달아났다. (《경기매일신문》 1965.10.1, 《동아방송》1965.10.29, 12.1, 《동화통신》1965.11.9)

12월 8일 미제7사단 32련대 2대대 보초병 4명은 부대에 고용된 로무자 박석기 등 3명이 작업을 마치고 나오는 것을《도적》이라는 루명을 씌워 막사로 끌고 가서 권총자루와 주먹으로 마구 때려 상처를 입혔으며 같은날 경기도 화성군 상공에서 폭격연습을 하던 오산주둔 미공군 비행기 조종사는 해변가에서 굴을 따던 리영자녀성에게 목표삼아 폭탄을 퍼부어 즉사시키는 야만적인 행위를 감행하였다.(《동양통신》1965.12.9, 12.11)

- 1966년
1월 6일 경기도 오산에 있는 공군기지의 미제침략군은 자기 부대에 고용된 강모라는 로동자를 《도적》으로 몰아 권총으로 쏘아 죽이였으며 2월 5일 미제2사단 공병대대 대대장 샌더즈와 헌병 참모부 차장 렉스포드의 지휘하에 32명의 미제침략군은 부당해고에 반발하여 파업을 하려던 이 부대 로무자 800여명에게 최루탄을 발사하고 총창으로 찔러 그중 최만복을 비롯한 8명의 로동자들에게 심한 중상을 입혔다.(《한국일보》 1966.2.6)   2월 13일 순찰비행을 하던 미제침략군 직승기 순찰대는 경기도 파주군 림진강 부근에서 쇠붙이를 줏고있던 7명의 이곳 주민들에게 마구 총질하여 강아무개주민의 오른쪽다리에 관통상을 입혔으며 2월 18일《캠프캐롤》본부 중대소속 하사 윌슨은 경상북도 왜관읍 석전동에서 정남옥의 목을 조르고 200m구간을 끌고다니며 마구 때려 중태에 빠뜨렸다.(《동아방송》1966.2.14,《령남일보》1966.3.22)

3월 14일 K55오산미공군기지 소속 미제침략군은 이 기지 제3호 건물부근에서 길가던 경기도 수원시의 최현기를 총으로 쏘았으며 3월 20일 미제2사단 9련대 2대대 C중대소속 보초병 병장 바니초는 이 중대 철조망바깥에서 깡통을 줏고있던 경기도 파주군에 사는 림숙하소년을 권총으로 쏘아 중상을 입혔다.(《동아방송》 1966.3.14, 3.21) 4월 30일 경기도 부평에 주둔하고있는 미제침략군 4명은 거리에서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다가 그들이 피해 달아나자 그곳을 지나가던 인천시에 사는 김순복청년에게 달려들어 칼로 그의 얼굴과 머리를 사정없이 찔러 중태에 빠뜨렸으며 5월 11일 미제38미싸일려단소속 상등병 디는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안양리에서 차를 미친듯이 몰다가 길옆에 피해 서있던 주민을 들이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다.(《동아방송》1966.5.1, 5.11)

6월 1일 미제침략군 화물선 선원 쵸조르락은 부산시 초량동에서 손칼로 정태조의 앞가슴을 찔러 중태에 빠뜨린 다음 도주하려다가 손방우청년이 따라오자 그의 옆구리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으며 6월 29일 미제7사단 31련대 1대대소속 미제침략군 상등병 소프린은 동두천에서 부대 철조망부근을 지나가던 강철훈주민에게 무턱대고 권총을 쏘아 중상을 입혔다.(《마산일보》 1966.6.3,《동아일보》 1966.6.30)

남조선녀성들에 대한 릉욕, 살인폭행 만행

- 1965년

-1월 13일 밤 미제 168의무대소속 대위 죠지 브라이어와 운전사 소트로이트 맥브라이드는 경기도 의정부시내《아리랑》음식점앞에서 임신 6개월의 김수미녀성을 찌차에 싣고 남방리부대 앞산까지 끌고가 벌거 벗긴뒤 그를 권총으로 위협하고 마구 구타하여 락태시켰으며 그후 저들의 죄행이 폭로되자 2월 13일 1시 30분경 또다시 그 녀성의 집에 복면을 쓰고 나타나 변소에서 나오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가위로 머리를 깎아버린 다음 어깨와 가슴 등 온 몸에 무수한 상처를 입히고 달아나는 야수적인 만행을 감행하였다. (《한국일보》1965.2.27)

2월 22일 저녁 7시경 미제침략군 상등병 헤리 모로스는 전라북도 군산시 영화동에 사는 석아무개녀성을 릉욕하려다가 반항한다 하여 그를 때려 중상을 입혔으며 4월 11일 저녁 8시 30분경 미제44공병대소속 중사 월리암은 경상북도 왜관읍 석전동에 사는 14살난 김경옥소녀를 랍치하여 집에서 약 500m떨어져있는 과수원으로 끌고가 목을 조르고 릉욕하였다.(《전주방송》 1965.2.23,《서울신문》1965.4.14)

5월 2일 오후 갱도경비를 서던 미제1기병사단 5련대 C중대소속 일등병 플레이지즈는 파주군에 사는 김미숙녀성이 빚받으러 오자 그에게 달려들어 수욕을 채우려다가 그가 응하지 않는다고 하여 《M-14》소총으로 그의 이마를 쏘아 치명상을 입혔다.(《조선일보》1965.5.4)

5월 15일 밤 10시경 미제침략군 헌병대소속 하사 카스탤로라는 왜관읍 석전동에 사는 김옥분녀성에게 폭행을 가하고 그의 살림도구들을 파괴해버렸으며 5월 16일 11시경 다시 그의 집에 뛰여들어 앓고있는 그의 귀에 맥주를 들이붓고 마구 때려 더 심한 상처를 입혔다. (《령남일보》1965.5.23)

6월 12일 밤 10시 30분경《터커》부대소속 하사 게로긴을 비롯한 미제침략군 3명은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대릉리에 있는 《고향다방》에서 술을 처마시고 행패를 부리다가 다방 녀주인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도망치던 도중 길가에서 놀던 이 마을 리영숙소녀를 돌로 때려 졸도시켰다.(《조선일보》1965.6.13)

8월 14일 밤 10시경 K6기지대 제728헌병대소속 20여명의 미제침략군은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대사리 산지골에서 10여명의 녀성들을 2대의 찌차에 강제로 실어 남산리 훈련장숲속에 끌고가 배순희를 비롯한 5명의 녀성들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집단폭행을 가한후 손발을 비틀고 라체촬영까지 하는 추악하고 변태적인 행위를 감행하였으며 10월 3일 저녁 7시 30분경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능답리 미제2오락장 앞길에서 미제침략군 병장 레머톤은 이곳에서 사는 박해림녀성이 추잡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하여 그를 때려죽이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동아일보》1965.8.18, 10.6)

10월 12일 밤 11시경 미제55비행대소속 병장 로렌스는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 앞길에서 길가던 서아무개녀성을 찌차에 강제로 태운후 끌고가 릉욕한 다음 라체로 길가에 버리고 달아났다.(《한국문화방송》 1965.10.13)

10월 17일 오후 6시경 미제5유도탄부대소속 일등병 렌지는 춘천시 소양로에 사는 김영희녀성의 집문을 부시고 방안에 뛰여들어 그가 저들이 조직한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고 하여 마구 때리다가 마당에 끌어내여 구두발로 허리, 머리 등을 닥치는대로 차고 나중에는 이 녀성의 량손을 비틀며 머리태를 틀어쥐고 벽에 머리를 짓쪼아 실신시켰으며 10월 21일밤 10시경 미제침략군 2명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 《캠프캐롤》 부대병영앞을 지나가는 리금선녀성에게 달려들어 추태를 부리다가 그가 필사적으로 반항하자 마구 때리고 발길로 차서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포악한 만행을 감행하였다.(《강원일보》1965.10.21, 《매일신문》1965.10.24》

10월 22일 밤 11시경 경상북도 대구시 봉덕동 2구에서 미제침략군 한명은 어린애를 업고가는 리은주녀성에게 달려들어 추태를 부리다가 그가 집으로 뛰여들어가자 그를 쫓아가던중 문간에서 맞다든 그의 아버지 리아무개의 목을 조르고 칼로 위협하며 30분나마 마을로 끌고돌아다니면서《처녀, 색시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였으며 나중에는 이 로인의 머리를 깎아버리고 중상을 입혔다.그리고도 성차지 않아 이자는 남편을 살리려고 뛰여나온 리로인의 안해 서아무개녀성의 손까지 칼로 찔러 상처를 입히는 만행을 감행하였다.(《매일신문》1965.10.24, 《대한일보》1965.10.25)

11월 6일 밤 12시경 미제2사단 23련대 3대대 하사 부커는 김영자녀성의 집에 뛰여들어 겁탈하려다가 그 녀성이 응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마구 때려 심한 상처를 입히였을뿐아니라 가구들도 파괴하였다.(《대한일보》1965.11.8)

11월 7일 저녁 미제7사단 79포대 일등병 죤슨은 파주군 림진면 선유리에서 김명애녀성이 자기의 추잡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고하여 마구 때린후 불을 질러 집을 태워버렸으며 12 월 8일 미제7사단 31련대소속 이등병 엘리노 페스는 동두천에 사는 신미경녀성을 희롱하다가 가위와 칼로 위협하면서 머리를 빡빡 깎아버린 다음 가산을 부시고 달아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대한일보》1965.11.8,《동아방송》1965.12.10)

-1966년
3월 2일 밤 9시 30분 부산제3부두 미제침략군 항만수송대소속 상사 레인쓰는 17살난 구두닦이소녀 리아무개를 시내 외딴 골목으로 끌고가 강간하고 달아났으며 5월 26일 밤 11시30분경 미제침략군 사병은 《애스컴》사령부앞길에서 녀성종업원 정순자를 희롱하려다가 반항하자 면도칼로 머리를 찔러 중상을 입혔다. (《마산일보》1966.3.16,《한국일보》1966.5.28)

7월 17일 오후 6시경 군산비행장소속 중사 로벨말 카벳트와 챨스 데이비스, 하사 칼시츠, 아르이스는 전라북도 군산시 영화동에서 박정숙, 송금자, 권미자 등의 녀성들을 릉욕하려다가 거절당하게 되자 그들에게 폭행을 가하여 심한 중상을 입혔고 8월 12일 밤 11시경 미공군 상등병 구린은 이 지역에서 김련실녀성을 강간하려다 항거에 부딪치자 그에게 폭행을 가하여 2대의 이발을 부러뜨리고 높이 2m의 계단에서 굴러떨어뜨리였으며 9월 8일 밤 9시경 미공군대위 로버트 래임버즈는 수욕을 채우지 못한 분풀이로 김남순녀성을 밖으로 끌고나가 앞가슴과 배를 발로 마구 차는 만행을 감행하였다.(《전북일보》1966.7.19, 8.16, 9.10)

11월 21일 밤 9시경 미제침략군 상등병 툼스 하머는 부대정문 앞길에서 경기도 양주군 이단면 보산리에 살고있는 전선맥녀성의 배를 무턱대고 칼로 찔러 중태에 빠뜨렸다.(《경기매일신문》 1966.11.22)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재산, 재물 략탈 파괴만행

-1965년

1월 17일 미제6314보급중대소속 미제침략군 3명은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지산리에서 김인상이 경영하는 상점에 뛰여들어 주인을 때리고 상품과 기물을 마구 부시는 등 8만 5,000여원의 손해를 입히고 달아났으며 1월 24일 인천시 항동부두앞 700m해상에서 미제침략군 선박은 배양석유회사소속 110t급 유조선 《제2진행》호의 곁을 과속으로 지나감으로써 심한 파도를 들씌워 배를 침몰시키고 1,000여개의 중유도람통이 바다물속에 빠지게 하였다. (《동아방송》1965.1.18, 1.25)

2월 13일 미제508통신대소속 상등병 마트는 찌차를 미친듯이 몰다가 영등포구 시흥동에 있는 점포를 들이받아 건물과 물건을 파괴하였다.(《서울방송》1965.2.14)

2월 20일 미제12련대 C중대소속 일등병 윌리암은 파주군 파평면 눌로리에 사는 김련화녀성의 집에 불을 질러 많은 재산피해를 입혔으며 3월 31일 미제1기병사단 제7련대소속 미제침략군 2명은 택시를 타고가던도중 운전사 리상봉의 목을 졸라 실신케 한후 그를 택시밖으로 밀쳐 던지고 택시를 몰고 달아났다.(《동화통신》 1965.2.22, 《경향신문》 1965.4.2)

5월 19일 미제침략군 여러명은 경상북도 왜관읍 석전동에 있는 한 양화점에 들어가 물건을 보관시키는것처럼 주인을 기만하고 몇분후에 다시 그 양화점에 달려들어 주인에게 《도적》의 루명을 씌우고 라지오와 기타 재물을 강탈하였으며 7월 15일 미제 304통신대 B중대소속 미킨스 등 3명의 미제침략군은 남산공원아래 광장에서 그곳에 있던 강리석에게 칼부림을 하여 중태에 빠뜨리고 지나가던 택시에 올라탄후에는 운전사를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힌후 택시를 빼앗아가지고 달아났다.(《매일신문》1965.5.23, 《서울방송》 1965.7.16)

9월 5일 미제침략군 3명은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대릉리에서 김회용녀성에게 리유없이 집단폭행을 가한후 손목시계를 빼앗아가지고 달아났으며 11월 7일 미제2사단 2대대소속 일등병 크리폴드 도브와 이등병 크레난 테니스트는 택시를 타고가다가 운전사 김영구의 목을 조르고 폭행을 가한후 차밖으로 그를 밀쳐 던진 다음 택시를 몰고 달아났다. (《동양통신》 1965.9.8, 《대한일보》 1965.11.8)

- 1966년
1월 15일 미제침략군 2명은 한봉학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가다가 파주군 파주면 만성리 앞길에서 불의에 맥주병으로 운전사를 때려 실신시킨 다음 차밖으로 떨어뜨리고 택시를 몰고 달아났다. 또한 1월 16일 미제7사단의 웰든상등병과 올슨일등병은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덕신금방》에 뛰여들어 행패를 부리다가 진렬해놓은 금반지를 빼앗아가지고 달아났으며 2월 4일 미제침략군 네이비스 죠스페외 2명은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지산리 로봉호의 집에 달려들어 권총과 단도로 위협하면서 많은 돈과 물건을 강탈하여가지고 달아났다.(《대전일보》1966.1.17,《매일신문》1966.2.8)

2월 15일 미제702병기대소속 일등병 월림은 파주군 주내면 연풍리에 있는 리동수의 집에 달려들어 창문과 벽 지어 구멍탄까지 깨버리는 등 많은 피해를 입혔으며 다시 《파주고양기자단》사무실에 뛰여들어 갖은 행패를 부려 많은 재산손실을 입혔다.같은날 통신대소속 미제침략군 사병들은 속초시내 《동대맥주홀》에서 술을 처마신 다음 녀성종업원이 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하여 렵총과 칼로 위협하면서 건물을 파괴하는 등 행패를 부리였다.(《인천신문》1966.2.24, 《강원일보》1966.2.28)

2월 27일 미제2사단 23보병련대 1대대 A중대소속의 한 미제침략군은 파주군 림진면 운천리의 초가집 2채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으며 2월 28일 미제침략군 운전사 병장 죤은 도로주변에 있는 살림집 2채를 차로 고의적으로 들이받아 파괴하였다.(《한국일보》1966.3.1,《중도일보》1966.3.4)

3월 3일 저녁 7시 30분경 미제7사단 2대대 10기갑중대소속 일등병 칼 리쳐드와 이등병 니첼 소렌슨은 서울시 중구 남산동 륙교밑에서 지나가는 승용차를 잡아타고 인적이 드문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삼정리 앞길에까지 와서 차를 멈추게 한 다음 운전사 송주용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돈을 내라》고 위협하면서 호주머니를 뒤져 현금 2,300원을 빼앗고 운전사를 차밖으로 밀쳐던졌다. 이자들은 다시 서울방면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가다가 밤 10시경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 2가 도림교 옆길에 이르러 운전사 정석정과 같이 타고가던 리종오를 위협하여 현금 6,200원을 강탈하였으며 3월 4일에도 택시를 타고 수원으로 가던 도중 차안에서 운전사 조만수를 위협하여 현금 500여원을 빼앗는 날강도적인 만행을 감행하였다.(《경향신문》1966.3.4)

3월 3일 남조선강원도 춘성군 신동면에 주둔하고있는 미제침략군 3명은 택시를 타고 목적지에 간후 료금을 내라고 요구하는 운전사 김철원을 집단구타하여 중태에 빠뜨리고 도망쳤으며 사건현장을 지나가던 다른 미제침략군 2명은 중태에 빠져있는 운전사에게서 현금 600원을 훔쳐가지고 달아났다.(《강원일보》 1966.3.5)

4월 3일 미제76땅크부대 2대대 2중대소속 일등병 패기는 파주군 천현면 웅담리에 있는 변아무개주민의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으며 4월 12일 새벽 미제침략군 이등병 모스터바는 강춘식의 집에 달려들어 돈을 훔치려다가 발각되자 손칼로 집주인을 위협하면서 방안에 있는 살림도구들을 파괴한후 집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동아방송》 1966.4.4,《중앙라지오방송》1966.4.12)

제반 사실들은 미제침략군이 있는 한 남조선인민들은 어느 한시도 불행과 고통, 비참한 죽음과 재난에서 벗어날수 없다는것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반미만이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지키는 길이다. 남조선의 각계층 인민들과 온 겨레는 반미성전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민족의 원쑤인 백년숙적 미제침략군을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정의의 애국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할 것이다.

주체93(2004)년 9월 7일
평 양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공 동 백 서 (8)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에서 감행하고있는 살인,강간,폭행 등 온갖 범죄적행위들은 동서고금의 력사에서 찾아볼수 없는 인권말살의 절정을 이루고있다.
남조선의 도처에서 벌어진 짐승도 낯을 붉힐 미제침략군의 귀축같은 만행은 광복직후와 전쟁시기에는 물론 전후에도 계속 이어졌으며 그 진상은 날이 가고 해가 바뀔수록 더욱더 드러나 사람들의 치솟는 분노와 격분을 자아내고있다.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는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한 침략자이며 살인악마인 미제침략군이 1963년~1964년사이에 남조선에서 감행한 범죄행위들중 일부를 묶어 이 공동백서를 발표한다.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살인, 폭행만행

   △ 1963년
1월 2일 밤 제1은행 청량리지점 앞길에서 미제8군소속 운전사는 차를 미친듯이 몰아 6살난 우명희소년을 차바퀴에 끼우게 한채 그대로 달아나 중상을 입혔으며 1월 11일 미군 여러명은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대릉리에 있는 로현동의 잡화상점에 달려들어 그를 폭행한후 돈궤짝을 강탈해갔다.(《대한일보》1963.1.3,《경향신문》 1963.1.12)

3월 16일 미제17련대소속 미군 1명은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에 사는 조영식청년을 아무 리유도 없이 총으로 쏘아 현장에서 즉사시켰으며 4월 20일 밤 미제7사단소속 미군 3명은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 보산리를 지나가다가 그곳에 사는 진현익의 집에 돌을 던져 가구들을 깨뜨린데 대해 진현익부부가 항의한다고하여 집단폭행을 가하였다.(《동아일보》 1963.3.18,《경향신문》1963.4.22)

4월 28일 밤 미제7사단 32련대 A중대소속 이등병 신스리외 3명의 미군은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 광암리에서 부대 로무자인 남조선 로동자를 길거리에서 집단구타하는데 대해 이 마을에 사는 산후 2개월된 유수동의 안해 김금옥이 말린다고하여 얼굴을 삽으로 찍어 중상을 입히는 만행을 거리낌없이 감행하였다.(《대한일보》 1963.4.30)

6월 5일 미제8군 21수송중대소속 운전사 상등병 메쿨은 서울역으로부터 영등포로 가는 도로상에서 차를 미친듯이 몰다가 윤남훈을 정면으로 들이받아 중상을 입히였으며 6월 16일 미제71병기단 장거리통신대소속 병장 로버트 앨은 충청남도 천안시 성황동 대정부락앞길에서 김학임녀성을 고의적으로 들이받아 머리에 중상을 입혔다.(《경향신문》 1963.6.6,《대전일보》 1963.6.19)

6월 18일 미제8군소속 65병참중대 운전사 이등병 크린 삼웰리는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에서 자전거를 타고가는 신승호를 깔아 즉사시켰다.(《경향신문》 1963.6.20)

7월 16일 서울시 성동구에 있는 골프장에서 미군 페레스라는 자는 골프놀이를 하다가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하여 골프장관계자인 신태화를 골프채로 때려 중상을 입혔다.(《동아방송》 1963.7.16)

7월 18일 밤 미제1기갑사단 련대본부 보초병인 일등병 하지스 제임스는 이 부대 앞길을 노래부르며 지나가는 김덕순과 그의 조카 리명덕에게 보초소옆을 지나간다는 구실로 총을 쏘아 중상을 입혔다. (《조선일보》 1963.7.23)

7월 27일밤 미제1기갑사단 9련대소속 미군은 부대근방에서 고철을 줏던 경기도 파주군 림진면에 사는 주민을 쏘아죽이였으며 8월 5일 오후 4시경에는 미제36공병단소속 상등병 리슨이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서 이곳 채석장부근을 지나가는 조선형을 자기들의 채석장에 들어왔다고 하면서 《M-1》총 7발을 쏘아 즉사시켰다.(《동아일보》 1963.8.6)

8월 10일 《미군사고문단》소속 찌차 201호 운전사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에서 이 마을에 사는 리순희녀성을 들이받아 즉사시켰으며 8월 29일 미군병기대소속 찌차운전사는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근처에서 리용분할머니를 들이받아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으며 9월 3일 미제7사단 2대대 32보병대소속 자동차운전사 이등병 그레인스는 서울시 중구 신당동에서 교통신호에 따라 길을 건너가던 김치광을 깔아죽였으며 9월 5일 미제8군방송국소속 찌차운전사 일등병 라와스키 미치엘피는 서울시 영등포구 오류동에 있는 다리에서 고광환과 김영식, 학생 김룡남을 들이받아 김영식을 현장에서 즉사시켰다.(《경향신문》 1963.8.13,《동아방송》 1963.9.4,《동아일보》 1963.9.6)

남조선인민들을 총으로 쏘아죽이는것쯤은 례상사로 여기고있는 미군은 9월 15일 3시 35분경 부대옆을 지나간다고하여 길가던 남조선청년 2명에게 권총을 쏘아 한사람을 즉사시켰으며 9월 16일 경기도 파주군에서는 길가던 김태이외 4명의 녀성들에게 《M-1》총을 쏘아 그중 김태이녀성을 즉사시키고 김금순녀성에게 중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다.(《동아방송》 1963.9.16,《조선일보》 1963.9.17)

10월 1일 미제8군병기창 519병기중대소속 쥬웬 팔은 경기도 화성군에서 내가에서 나물을 씻고있던 김순기녀성을 과녁삼고 렵총을 쏘아 심한 중상을 입혔으며 11월 10일 미제7군수기지사령부 의무관 중령 노리스와 소령 스미스는 제주시 도련동에 사는 변선길을 꿩사냥에 끌고가 꿩과 함께 렵총으로 쏘아죽이는 귀축같은 살인만행을 감행하였다.(《동아일보》 1963.10.2,《제주신보》1963.11.12)

11월 21일 경기도 련천군에 주둔하고있는 미군은 련천군 사격장에서 이곳 주민 유길섭외 14명의 주민들이 나무하러 마을 뒤산으로 올라간것을 보고 과녁삼아 포사격을 하여 유길섭을 비롯한 5명의 주민들을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으며 10명에게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혔다.(《경향신문》 1963. 11.22)

11월 30일 미제7사단 31포대 2중대소속 이등병 암스 제이 발미트는 길가는 김정자녀성외 2명의 주민에게 무턱대고 총을 발사하여 김정자녀성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12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 길산리에 둥지를 틀고있는 미군사병은 부대앞을 지나가는 4명의 주민들에게 총을 발사하여 그중 박덕신에게 관통상을 입혔다.(《경향신문》 1963.12.6,《경기매일신문》 1963.12.14)

12월 15일 밤 10시경 경상북도 포항시에 주둔한 미제44공병대 C중대소속 병장 반 후리크와 상등병 왈크리크는 술을 먹고 시내를 돌아치다가 길을 걸어가고있던 오원식을 무턱대고 마구 구타하여 머리와 허리에 타박상을 입혔을뿐아니라 그를 말리던 2명의 남녀주민에게도 폭행을 가하였다.(《동아일보》 1963.12.20)

   △ 1964년
1월 3일 부산시 중구 초량동에서 미군 헌병 2명과 해병 2명은 술집들을 싸다니며 술을 처먹은후 접대원들과 종업원들을 희롱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맥주병으로 후려치는 등 폭행을 가하고도 부족하여 미군헌병들을 동원하여 아무죄없는 그들을 잡아가게까지 하였다.
2월 4일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에서 미제7사단 31련대 A중대소속 카메론 로버트는 부대주변에서 깡통을 줏고있던 임신 9개월의 서명자녀성을 《도적》이라고 하면서 총으로 쏘아죽이였다.(도서 《로근리에서 매향리까지》 274페지)

2월 6일 미제1려단 유도탄부대 보초병은 토끼사냥을 하려고 산으로 가던 안재섭,김태영소년들에게 심심풀이로 총을 쏘아 안재섭소년을 현장에서 즉사시키고 김태영소년을 가슴에 관통상을 입혀 중태에 빠뜨렸다.(《동아방송》1964.2.6)

2월 9일 밤 11시 30분경 경기도 의정부시 가릉리에 주둔하고있는 미제51통신대대 이등병 알렌 더블유 허브는 부대부근을 지나가던 허창국 소년에게 렵총을 쏘아 배에 관통상을 입혔으며 2월 17일 미제1기갑사단 18공병대대소속 일등병 트로웨이 프랭크린은 황오성을 비롯한 3명의 청년들이 부대 철조망부근을 지나간다고 하여 권총을 마구 쏘아 그중 황오성을 즉사시켰고 2월 18일 미제7사단 13공병대소속 일등병 브렉스는 부대 사격장근처를 지나가는 리덕형에게 《M-14》자동소총을 쏘아 현장에서 숨지게 하였으며 같은날 미군헌병 한명은 경기도 오산에서 비행장주변을 지나가는 6명의 주민들에게 권총을 쏘아 그중 김기섭의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혔다.(《동아방송》 1964.2.10,2.17,2.19)

2월 23일 미제7사단소속 미군사병은 이 사단 사격장부근을 지나가던 김찬규,김동봉소년을 총으로 쏘아 현장에서 즉사시켰다.(《합동통신》1964.2.24) 3월 7일《미군사고문단》소속 운전사 상사 더그라스는 차를 미친듯이 몰고가다가 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길을 건너가던 장정우를 깔아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으며 4월 18일 사격훈련을 하고 돌아오던 미제8군 장거리 통신대소속 미군 캄민스 로버트는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삼산동 팔조령 산중턱에서 놀고있는 10살의 배경애소녀와 박재도소년을 보고도 그냥 차를 몰아 현장에서 즉사시켰다.(《동아방송》 1964.3.8,《대구매일신문》 1964.4.19)

4월 26일 미제8군 후방사령부소속 제이 엘 오닐 등 2명의 미군은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에 있는 화원유원지에서 아무 까닭없이 김수야주민을 마구 때려 심한 타박상을 입히고 사진기를 빼앗았으며 이를 말리는 주민들까지 구타하였다.(《령남일보》 1964.4.28)

5월 10일 미제44공병대 C중대소속 일등병 모로우는 경상북도 포항시 두호동에 있는 정우범의 집에 달려들어 행패를 부리다가 그의 안해 김순이 녀성이 말린다고하여 아래배를 발로 차고 무릎으로 가슴을 짓누르는 등 야수적폭행을 가하였다.(《령남일보》1964.5.13)

6월 6일 경기도 파주군 림진강가에 있는 미제658교육처 제3휴양소에서 보초를 서고있던 일등병 한슨은 부대식당 종업원 박건수가 정지신호를 받고 자기의 신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혔으며 이날 저녁 8시경 남조선강원도 춘천시 소양로3가에서 미제4유도탄기지 사령부소속 병장 맥과이어외 2명의 미군은 지나가는 박경남소년을 붙들고 희롱하던 끝에 그에게 뭇매질을 가하여 중상을 입혔으며 그를 말리던 남조선군사병 박상용도 집단구타하여 실신시켰다.(《한국일보》 1964. 6.7,《강원일보》 1964.6.13)

6월 21일 부산항 제3부두에 머무르고있던 미국선박 《싸인포오드》호 선원 고오도 페터는 작업하던 차동천로동자에게 당치도 않은 트집을 잡아 욕설을 퍼붓고 뺨을 후려갈기는 등 폭행을 가하다가 칼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 중상을 입혔다.(《부산일보》1964.6.22)

6월 28일 미제1기갑사단소속 6명의 미군은 경기도 파주군 림진면 선유리에서 우춘환의 집에 돌을 마구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을뿐아니라 다리목에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문산극장 종업원 김세정청년을 발길로 차서 높이 15m되는 다리밑으로 떨어뜨려 심한 부상을 입혔다. (《경기매일신문》 1964.7.2)

7월 9일 경기도 오산에 있는 미군은 부대옆을 지나가고있던 김재근소년에게 군견을 풀어놓아 물어뜯게 하여 중상을 입혔다. 남조선천지를 제세상처럼 싸다니면서 자동차로 사람들을 벌레처럼 깔아죽이는 천인공노할 살인만행을 서슴없이 감행하고있는 미군은 7월 12일 서울시 서대문구 118번지 앞길에서 허완어린이를 고의적으로 깔아 중상을 입혔으며 7월 30일에는 남조선강원도 원성군 소초면 장양리에서 그곳에 머무르고있던 뻐스를 들이받아 파손시키고 승객 진정희,리기용에게 중상을 입혔는가 하면 같은날 충청남도 조치원에서는 길을 건느던 안희애녀성이 미군트럭에 깔려 중상을 입었다.(《동아방송》 1964.7.13,《강원일보》 1964.8.2,《대전일보》 1964.7.31)

8월 7일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앞길에서 미제8군소속 운전사는 자동차로 지나가던 뻐스를 들이받아 거기에 타고있던 김금순녀성을 비롯한 5명에게 중경상을 입히고 8월 18일 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동 920번지 앞길에서 자전거를 타고가던 김상준소년을 화물자동차로 들이받아 심한 상처를 입혔다.(《동아방송》 1964.8.8,《서울방송》 1964.8.19)

8월 23일 미제8군수송대소속 운전사는 서울시 룡산구 한남동 앞길에서 자전거에 생선을 싣고가던 리재현을 뒤에서 차로 들이받아 중상을 입혔으며 9월 2일 서울시 영등포구 대방동 208번지 앞길에서는 미군운전사가 마주오던 버스를 정면으로 들이받아 승객들중 9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동아방송》 1964.8.23,9.2)

9월 7일 서울시 영등포구 신도림동 325번지 앞길에서 미제502첩보부대 운전사 안도스 토마스는 손수레를 끌고가던 주민을 깔아 그 자리에서 즉사시키고는 달아나다가 다리우에서 또다시 길을 걸어가던 구두닦이소년 리정정을 들이받아 중상을 입혔다.(《동아방송》 1964.9.8)

10월 6일 미제1기갑사단 8기갑련대 2대대 2중대 2소대소속 하사 호프맨은 부대에 고용된 황인덕로동자에게 생트집을 걸다가 도끼로 그의 얼굴을 찍어 길이 10㎝의 파렬상을 입혔으며 그 죄행이 알려지는것이 두려워 그를 부대에 이틀동안이나 감금하였다.(《대한일보》 1964.10.10)

10월 10일 경기도 문산에 주둔하고있는 미군부대 보초병은 철조망옆을 지나가던 전재준을 무턱대고 잡아들인후 군견훈련장으로 끌고가 개에게 온 몸을 참혹하게 뜯기우게 하였으며 10월 25일 전라북도 익산군 함라면 신목리에서 사냥을 하던 6명의 미군은 밭에서 일하고있는 권귀례녀성을 과녁삼아 총으로 쏘아 중상을 입혔다.(《조선일보》 1964.10.13,《동화통신》 1964.10.26)

11월 4일 서울시 한강로에서 미제 508부대소속 운전사는 어린애를 업고 길을 걸어가던 서길녀녀성을 고의적으로 깔아 심한 중상을 입히고 잔등에 업힌 어린이를 그자리에서 즉사시켰으며 11월 5일 미제304통신대소속 이등상사 헬리는 인천지구 미공병대 종업원 박균배 등 4명에게 닭알 2개를 훔쳤다는 터무니없는 루명을 들씌우고 폭행을 가하여 중상을 입혔다.(《조선일보》1964.11.4,《경향신문》 1964.11.9)

11월 7일 자동차를 몰고가던 미제8군 통신대소속 일등병 호터는 서울시 성동구 암사동 앞길에서 어린 형제를 깔아 동생 김구연은 현장에서 즉사시키고 형 김왕연에게는 중상을 입혔으며 11월 14일 미제7사단 127통신대대소속 미군은 서울시 성북구 수유동에서 자동차로 길가에서 놀고있던 박말자어린이를 고의적으로 깔아죽였다.(《조선일보》 1964. 11.8,《서울방송》 1964.11.14)

11월 20일 전라북도 옥구군 옥산면 당북리 산림동에서 오리사냥을 하던 군산공군기지소속 미군은 련못가에서 놀고있는 신덕철,김성원,신한철, 김권용 등을 사냥에 방해된다는 구실로 렵총을 쏘아 그들 모두에게 심한 전신파렬상을 입혔다.(《대한일보》 1964.11.21)

12월 2일 서울시 룡산구 한남동에서 자동차를 몰고가던 미군상사 오렌은 마주오던 오토바이를 고의적으로 들이받아 거기에 타고있던 리기만을 현장에서 즉사시켰으며 12월 6일 충청북도 보은군 내북면 창리주둔 미군부대소속 사병 흰스카외 4명의 미군은 청주시 북문로에 있는 《오비홀》에서 약 2,500원정도의 음식을 먹고도 대금지불을 요구한다고하여 종업원을 마구 때리고 달아났다.(《동아방송》 1964.12.2,《중도일보》 1964.12.8)

12월 21일 서울시 서대문구 교남동에서 대형자동차를 몰고가던 미군은 집으로 돌아가던 금화국민학교 1학년 고만식학생을 고의적으로 깔아죽였으며 12월 27일 경기도 시흥군 안양북쪽에 있는 미군기지안에서 경비를 서던 일등병 클레이 제트는 이 기지에서 일하는 로무자 박한규가 작업시간을 어겼다고 하여 렵총으로 그의 복부를 쏘아 치명상을 입혔다.(《동아방송》 1946.12.21,12.28)

남조선녀성들에 대한 릉욕, 살인, 폭행만행

△ 1963년
1월 3일 밤 11시 30분경 미제1기갑사단 8기갑련대 본부중대소속 미군은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장파리에 거주하고있는 정순자녀성의 집에 뛰여들어 그를 릉욕하려다가 반항하자 집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으며 1월 7일 밤 8시 20분경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연풍리에 사는 김옥희녀성의 집에 뛰여든 미군사병은 그를 릉욕하려다가 거절당하자 허리띠로 목을 졸라매고 면도칼로 팔과 앞가슴 등 10여곳을 마구 베여 상처를 입혀 실신시킨 다음 목걸이를 훔쳐가지고 달아났다.(《동아일보》 1963.1.8,《경기 매일신문》 1963.1.8)

2월 28일 밤 9시 30분경 미제75수송대소속 미군은 경기도 인천시 중앙동에 사는 임신 3개월의 장영희녀성의 방에 들어가 릉욕하려다가 거절당하자 그를 타고앉아 목을 조르고 얼굴과 가슴 등을 마구 때린후 높이 3m가량되는 계단에서 발길로 차서 굴러떨어뜨려 중태에 빠뜨렸다. (《경향신문》 1963.3.15)

3월 23일 밤 9시경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 보산리에서 미군사병 2명은 리애숙녀성을 릉욕하려다가 항거에 부딪쳐 목적을 달성할수 없게 되자 그의 가슴에 연막탄을 던져 심한 타박상과 화상을 입혔으며 3월 30일 오후 1시 15분경 미제89공병단소속 하사 데기러라는 자는 경기도 인천시 중앙동 2가 골목길에서 김아무개녀성을 아무 까닭없이 마구 때려 중상을 입히였다.(《경향신문》1963.3.25,4.17)

6월 2일 밤 미제1기갑사단 4련대 하사 죠지 제임스 더블유는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연풍리에 사는 배정순녀성에게 달려들어 수욕을 채우려다가 항거에 부딪치자 주먹과 구두발로 그를 마구 때리고 차서 앞이발 4개를 부러뜨리고 달아났으며 6월 30일 오후 5시경 일등병 데크 등 3명의 미군은 자기 언니를 찾아가고있는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사는 윤아무개처녀를 랍치하여 부대에 끌고가서 륜간하였다.(《조선일보》 1963.7.12)

△ 1964년
1월 8일 남조선강원도 춘천주둔 미제4유도탄부대소속 미군은 12살난 소녀를 강간하였으며 1월 15일 오후 5시경 미제44공병대 C중대소속 사병 커평외 한명의 미군은 건축자재를 싣고가던 도중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에서 처녀 김영자를 륜간하였다.(《합동통신》 1964.1.17)

2월 2일 7시경 미제7사단 32련대 본부중대 이등병 윌리암스 해랄드, 일등병 헌트로니시,상등병 모리스 알톤 등 3명의 미군은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 생연리 몰골부락에 사는 리화복녀성을 랍치하여 부대막사안에 끌고들어가 륜간한후 현금 3,750원까지 강탈하였으며 2월 8일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연풍리에서 복스라는 자는 리정자녀성을 유인하여 자기의 더러운 수욕을 채우려다가 그가 완강히 거절해나서자 마구 때려 얼굴과 상반신에 심한 타박상을 입혔다.(《동아일보》1964.2.3)

2월 10일 오후 4시경 서울시 룡산구 후암동에 있는 다방에서 미군 한명은 접대원 김아무개녀성을 강제로 껴안고 희롱하다가 이에 대해 손님들이 말린다고하여 그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리석구의 얼굴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으며 2월 29일 미군 5명은 서울시 중구 도동 1가에 사는 조아무개녀성의 집에 뛰여들어 이불과 거울을 훔쳐가지고 도망치다가 이를 제지시키려는 정연옥녀성을 맥주병으로 쳐서 치명상을 입혔다. (《합동통신》 1964.2.11,《한국일보》1964.3.1)

3월 6일 저녁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에 둥지를 틀고 있는 미제7사단 707병기중대소속 킬레 일등병은 광암리에 있는 김옥희녀성의 집에 달려들어 갖은 행패를 부리다가 그를 릉욕한후 그것도 부족하여 사정없이 폭행을 가하던 끝에 목을 졸라죽이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으며 7월 25일 저녁 8시경 미제7사단소속 미군 한명은 서울시의 《워커힐》유흥장에서 수욕을 채우려다가 실패하자 접대부녀성을 2층에서 내던지는 만행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한국문화방송》 1964.7.26)

8월 31일 밤 8시 30분경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에서 마스터에외 2명의 미군은 산원리에서 사는 처녀 정분희를 화물자동차에 강제로 싣고 옥구군 성산면 근처에 있는 절간으로 끌고가서 릉욕하였으며 11월 8일 밤 11시경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오세리에서 미공병대 제2통신대 소속 미군 레 더는 국행자녀성에게 추태를 부리다가 그가 항거하자 무지막지한 폭행을 가하였다.(《전주방송》1964.9.1,《경향신문》 1964.11.9)

12월 19일 밤 미군병장 페티프 메일로는 서울시 룡산구 후암동 264번지에 사는 변아무개녀성이 자기의 추잡한 요구에 불응한다고하여 옷과 탁상시계를 빼앗고 그에게 끓는 물을 퍼붓는 야수적만행을 감행하였다. (《동아일보》 1964.12.28)

제반 사실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남조선땅에서 저지른 미제침략군의 만행은 극악한 살인마들만이 할수 있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이다.
남조선인민들과 온 민족은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에서 저지른 천추에 용납못할 만행을 천백배로 복수할것이며 미제의 반인륜적죄악들을 결산하기 위한 반미성전에 적극 떨쳐나설것이다.

주체93(2004)년 6월 26일
평 양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공 동 백 서 (7)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에 기여든 때로부터 근 60년동안 미군의 귀축같은 만행에 의하여 이 땅에는 어느 하루도 피눈물이 흐르지 않은 날이 없었다. 미제는 저들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어떻게하나 세월의 흑막속에 감추어보려고 어리석게 책동하고있지만 우리 인민은 이를 절대로 잊지않을것이며 대를 두고 사죄와 보상을 받아내고 천백배로 복수하고야말것이다.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 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는 남조선강점 미제침략군의 범죄가운데서 1962년 한해동안에 저지른 범죄들중 일부를 묶어 이 공동백서를 발표한다.

1.남조선인민들에 대한 살인,폭행만행

미제침략군은 1월 2일 경기도 장단군 진동면 하포리에서 산에 나무하러간 파주군의 김부성과 강정수를(《한국일보》 1962.2.11), 림진강얼음우에서 낚시질을 하고있던 한 주민을 렵총을 쏘아 중상을 입혔다.(《동양통신》 1962.1.2)
1월 3일 대전시내에 주둔하고있는 미제7군수사령부 장거리통신대대 C중대소속 중사 바비 에취 윈담과 어얼 제이 환함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옥각리에서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무것도 잡지 못한 분풀이로 정류소에서 뻐스를 기다리고있는 남조선군사병 김영유에게 렵총을 발사하여 쓰러뜨리고 달아났다.(《동아일보》 1962.1.5) 1월 6일 미제1기갑사단 8련대 D중대소속 하사 토니외 수십명의 미제침략군은 경기도 장단군 진동면 하포리에서 산에 나무하러온 40여명의 파주군 주민들에게 렵총과 《M-1》총을 쏘아 그중 황광길을 즉사시키고 류기용은 중상을 입혀 10일후에 죽게 하였으며 여러명에게는 부상을 입혔다.(《한국일보》 1962.2.11)
이것이 당시 남조선인민들의 격분을 자아냈던 《파주나무군사살사건》이다.

이날 충청북도 옥천읍에서도 미제침략군이 길가던 사람들에게 렵총을 쏘아 그중 한명에게 치명상을 입혔다.(《합동통신》 1962.1.6)
1월 12일 경기도 련천군 련천면에 있는 미군사격장에서 포사격연습을 하던 미제침략군이 땅크포를 미친듯이 아무데나 쏘아대여 이 지역주민 2명이 사살되였으며(《동양통신》 1962.3.5) 미제7사단 사격장에서는 사격연습을 하고있던 미제침략군이 나무하러 산에 올라가고있는 조옥순녀성을 발견하자 그에게 총부리를 돌려대여 쏘아죽이는 만행을 감행하였다.(《로동신문》 1962.2.7)
2월 9일 미제7보병사단 31보병련대의 보초병은 부근을 지나가는 한 청년에게 《M-1》총을 쏘아죽였으며(《동아일보》 1962.2.12) 2월15일에는 미제7사단본부소속 미제침략군 여러명이 부대주변을 지나가던 5명의 주민들에게 무턱대고 총을 마구 쏘아 양주군 이담면 생연리에서 사는 박윤태에게 중상을 입혔다.(《경향신문》 1962.2.17)
2월 23일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 신장리에 주둔한 미공군기지소속 미제침략군 4명은 공군기지근처를 지나가는 서기규주민에게 《절도》라는구실을 붙여 군견을 추기여 물어뜯게 하고 집단폭행을 가하여 중상을 입혔다.(《경기매일신문》 1962.3.4)
3월 4일 미제침략군 2명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 덕산리 입구에서 집으로 가던 김재권에게 달려들어 마구 때려 치명상을 입힌 다음 정신을 잃은 그를 하수도구멍에 처넣고 달아났다.(《경향신문》 1962.3.6)
3월 5일 미제7사단이 주둔하고있는 경기도 동두천에서 미제침략군 한명은 길가던 리기용의 얼굴과 몸을 리유없이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였으며(《경향신문》 1962.3.8) 경기도 련천군에 있는 미제침략군사격장에서는 포사격연습을 하면서 주민지대에 포탄을 마구 쏘아 안선걸청년이 즉사하였다.(《동양통신》 1962.3.5)

3월 16일 서울시 룡산구 앞길에서 미제침략군은 교통신호에 따라 길을 건너가고있던 임신 4개월의 조정구녀성을 승용차로 들이받아 중상을 입혔다.(《한국일보》 1962.3.17)
3월 17일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본정리 산기슭에서 오리사냥을 하던 미제8군 평택비행장 《앤소클럽》책임자 중사 죤 부러치는 사냥을 구경하던 김완수소년에게 고의적으로 렵총을 발사하여 중태에 빠뜨렸다.(《경향신문》 1962.6.9)
3월 18일 미제침략군은 서울시 을지로에서는 길을 건느던 현태룡로인을,서대문구에서는 김경숙소녀를 차로 깔아 중상을 입혔는가 하면(《한국일보》 1962.3.19)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로현리에서는 남진보소년을 찌차로 깔아 무참히 죽이였다.(《로동신문》 1962.5.3)

3월 27일에도 서울시 성북구 수유동에서 고속으로 뻐스를 몰고가던 미제침략군 스미스가 길가에서 놀고있던 유재환소년을 고의적으로 깔아죽이고 달아났다.(《동아일보》 1962.3.28)
4월 1일 미제침략군은 전라북도 옥구군 성산면 봉산동 뒤산으로 녀성 3명을 강제로 끌고가다가 그를 발견하고 따라오는 주변주민들인 조서언과 문진예에게 총을 쏘아 관통상을 입혔다.(《동아일보》 1962.4.4)
4월 4일 미제13병참대대소속 미제침략군 3명은 공연한 시비를 걸다가 저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하여 전찬수, 강심권, 설기용을 17시간이나 감금하고 몽둥이와 쇠고랑으로 마구 때리는 악랄한 폭행을 감행하였다.(《대한매일》 1962.4.18)
같은날 파주군 광탄면 신산리 부락근처에서 야전훈련을 하던 미제침략군은 주민부락에 마구 사격을 하여 윤헌구를 비롯한 4명의 주민들에게 부상을 입혔다.(《한국일보》 1962.4.4)
4월 5일 미제1기갑사단소속 이등병 콜로 모란을 비롯한 3명의 미제침략군은 파주군 림진면 선유리에 사는 김남협의 집에 달려들어 그를 무턱대고 때려 중상을 입혔다.(《경향신문》 1962.6.9) 4월 12일 서울시 중구 동자동 앞도로에서 미제7군수기지사령부소속 미제침략군 죠셉 나샨은 자동차를 몰고가다가 《국민학교》 2학년생인 최윤희를 깔아죽이였다.(《동아일보》 1962.4.13)
4월 26일 미제침략군 3명은 파주군 림진면에서 개천다리를 건너가고있던 서울시 성북구 송천동에 사는 김상후와 엄정식을 아무 리유없이 때려 그들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였다.(《경향신문》 1962.6.9)

5월 1일 미제1기갑사단 4련대소속 미제침략군 자동차운전사는 고속으로 차를 몰고가다가 파주군에서 고장난 뻐스를 수리하고있던 운전사 안성호를 들이받아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경향신문》 1962.6.9)
5월 6일 미유도탄사령부 226통신대대소속 하워드 거든은 서울시 동작동에서 리창식,김봉현과 언쟁을 하다가 나중에 단도로 찔러 리창식은 죽이고 김봉현은 사경에 처하게 하였다.(《경향신문》 1962.8.1)
5월 19일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에 주둔하고있는 미제침략군 오산비행기지소속 헌병 한명은 그 지역에서 사는 황남선주민을 아무런 리유없이 몽둥이로 마구 때려 전신타박상을 입힌후 군견을 추기여 피투성이가 되게 하였다.(《한국일보》 1962.6.7)
5월 20일 미제1기갑사단 131통신대대소속 A중대 사병 웬 링은 부대 로무자 엄세준이 자기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하여 총으로 쏘아죽이는 만행을 꺼리낌없이 감행하였다.(《부산일보》 1962.5.30)
5월 23일 미제7유도탄부대 제2포대대 C중대소속 병장들인 하지스,바트,스레이링,상등병 월리암스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남양 3리에 사는 박재호,온정순부부가 자기들을 불손하게 대한다는 트집을 걸면서 마구 때려 치명상을 입혔다.(《동아일보》 1962.5.24)
5월 25일 미제침략군 사병 스덴져는 파주군 월룽면에서 부대에 신문을 배달하고 돌아가는 리희원소년에게 군견을 내몰아 중상을 입혔으며(《동아일보》 1962.5.27) 미제519병기창 192대대소속 자동차운전사는 서울시 영등포구 본동 뻐스정류소앞에서 뻐스를 기다리던 정연태주민을 깔아 현장에서 즉사시켰다.(《동아일보》 1962.5.26)
5월 29일 미제1기갑사단 제4전투단 C중대소속 중위 토마스 엘 윌드,데이비드 더블유 스웬슨을 비롯하여 여러명의 미제침략군은 로무자 리일용을 리유없이 발가벗기고 몽둥이로 때렸으며 전주대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찬물까지 끼얹으며 연거퍼 매질하여 빈사상태에 빠지게 하였다.(《조선일보》 1962.6.2)
5월 30일 오산의 미제침략군 공군기지근처에서 기지소속 헌병 페터슨은 아무 죄도 없는 심덕선농민에게 군견을 풀어놓아 30여곳을 물어뜯게 하였으며 개가 전신라체된 그를 마을사람들이 보는 앞을 질질 끌고 다니게하는 악귀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경향신문》 1962.6.8)
이런 몸서리치는 만행을 감행하고도 미제침략군 야수는 너털웃음을 지었으며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6월 1일 미제7사단본부중대 연유저장고부근에서 미제침략군 4명은 나무를 줏고있던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생연리에 사는 리관해외 한명을 무턱대고 잡아다가 구타하여 중상을 입힌후 옷을 발가벗긴채 길거리에 내쫓았으며(《동양통신》 1962.6.4) 6월 2일 미제1기갑사단소속 일등병 부리지스 호스톤 리을외 한명의 미제침략군은 파주군 천현면 법원리 도로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김종권외 2명의 주민을 아무 까닭없이 마구 때려 타박상을 입히고 달아났다.(《한국일보》 1962.6.4)
같은날 파주에 있는 미군부대옆에서 파철을 줏고있던 리길용을 7~8명의 미제침략군이 《도적》이라고 하면서 쇠바줄로 그의 목을 매여 끌고 부대에 들어가서는 완전히 발가벗긴 다음 그옆에 있는 전주대에 거꾸로 매달아놓는 야만적행위를 감행하였다.(도서 《더 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 162페지)
6월 4일 미친듯이 찌차를 몰고가던 미제침략군 한명은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시장으로 가던 이곳 면사무소 로무자 남만청년을 심심풀이로 들이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다.(《경인일보》1962.6.4)
6월 5일 미제31포대대소속 미제침략군 3명은 파주군 파평면에 있는 김정권의 집에 달려들어 자기들을 공손히 맞아주지 않는다고 트집을 걸어 저녁식사를 하고있던 김정권외 2명을 마구 때려 중상을 입혔다.(《동아일보》 1962.6.8)
6월 7일 오후 미제1기갑사단 3수송대소속 운전사는 경기도 파주군 포리면 봉일천리에서 길옆에 서있던 김옥순소녀를 깔아뭉개여 죽이고 리해교,리애순소녀에게는 치명상을 입히였으며(《동화통신》 1962.6.7) 이날 미제침략군 일등병 후로브 케리는 파주군 파평면 눌로리 도로에서 손수현을 아무 리유없이 마구 때려 앞이발을 부러뜨리고 중상을 입힌후 달아났다.(《동양통신》 1962.6.8)
6월 21일 미제1군단소속 미제침략군은 경기도 련천군에 살고있는 임재민주민이 사격장에 접근하였다 하여 포탄을 쏘아 중상을 입혔다.(《동화통신》 1962.6.21)
6월 28일 미제침략군은 자동차를 몰고 질주하다가 의정부 읍내에서는 김복규소년을(《경향신문》 1962.6.30), 경기도 련천군 전곡면에서는 길가에서 놀던 전철소년을 깔아 즉사시켰다.(《경향신문》 1962.6.29)
차바퀴로 사람잡이하는것을 하나의 쾌락으로 여기고있는 미제침략군의 이러한 만행은 7월 3일 파주군 천현면 법원리에서,7월 6일금촌리 앞길에서, 8월 18일 《공덕국민학교》앞길 등지에서 끊임없이계속되였다.
9월 30일 경기도 인천시 학익동에 주둔하고있는 미제침략군부대 F중대소속 일등병 제임스 더블유 웨스트우드는 부대옆을 지나가는 한명의 주민에게 총을 쏘아 관통상을 입혔다.(《경기매일신문》 1962.10.10)
11월 29일 미제1기갑사단 8련대소속 경비병은 림진강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근방에서 문산리에 사는 리길영을 《도적》이라는 터무니없는 구실을 붙여 총으로 쏘아 즉사시켰다.(《한국일보》 1962.12.5)

2.남조선녀성들에 대한 릉욕, 살인, 폭행만행

2월 2일 미제7병참사령부 대구기지 5구락부 책임자 중사 엘 에밀톤은 대구시 봉덕2구동에 사는 리영옥을 강간하고도 오히려 그를 《공갈죄》로 고소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민족일보》 1962.6.7)
2월 18일 미제1기갑사단 공병대소속 상병 윌리암 그리는 파주군 천현면 가야리에 있는 윤장식의 집에 달려들어 임신 5개월의 신영숙녀성을 릉욕한후 방문을 잠그고 구두발로 마구 차서 치명상을 입혀 류산시켰다.(《한국일보》 1962.2.22)
3월 3일 미제38려단 제7유도탄대대 본부중대소속 하사 오비티스에 피로스톤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 덕산리에서 최옥진녀성을 리유없이 마구 때려 중상을 입혔으며(《경향신문》 1962.3.8) 3월 17일 서울시 룡산구 룡산동에 사는 미국인 구레에는 자기 집에서 3년간 식모살이를 하던 송필남녀성의 방에 뛰여들어 강간하려 하다가 반항에 부딪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그를 마구 때려 전신에 타박상을 입혔다.(《경향신문》 1962.6.9)
4월 2일 전라북도 군산시 영화동 도로에서 미제침략군 한명은 길가는 정윤옥녀성을 희롱하다가 옆구리를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삼남일보》 1962.4.5)
4월 18일 미제1기갑사단 5련대 2대대 A중대소속 상등병 케트는 파주군 천현면 웅담리에 사는 강아무개녀성을 뒤산에 끌고가서 발길로 차고 때려 실신시키였다.(《동아일보》 1962.4.22)
5월 6일 더러운 수욕을 채우기 위해 인천시내의 골목들을 싸다니던 미제4통신대대소속 니칠슨은 인천시 부평동에 사는 리상숙녀성이 가게에서 물건을 사가지고 돌아가는것을 발견하자 그의 집에까지 쫓아들어가서 온갖 추잡한 행위를 다 하였다. 이자는 녀성의 완강한 항거로 수욕을 채울수 없게 되자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면서 마구 때리는 한편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졸라 그를 기절케하였다.(《로동신문》 1962.7.7)

5월 17일 미제833경기중대소속 일등병 죤슨은 충청남도 대덕군 장동리에서 류춘자녀성을 릉욕하고도 자기의 요구를 잘 들어주지 않았다 하여 허리와 목에 권총 2발을 쏘아 살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동화통신》 1962.5.17)
6월 4일 서울시 여의도 항공기지입구에서 여러명의 미제침략군은 고정희녀성을 근거도 없이 행동이 수상하다는 구실로 마구 차고 때려 얼굴과 전신에 중상을 입혔으며(《동양통신》 1962.6.7) 6월 6일 미제32포대대소속 중사 그랜드는 경기도 파주군 마산리에서 박정희녀성이 이미 약속한 청부업알선리행을 요구한다 하여 그를 구두발로 차고 짓밟아 치명상을 입혔다.(《동양통신》 1962.6.7)
6월 14일 경기도 시흥에 주둔하고있는 미탄약중대소속 미제침략군 한명은 황인환의 집에서 세방살이를 하고있는 전애란녀성의 방에 뛰여들어 그를 겁탈하려다가 항거에 부딪치자 수건으로 목을 졸라 의식을 잃게 하고 목에 부상을 입혔다.(《한국일보》 1962.6.15)
6월 23일 파주군 천현면 법원리에서 미제침략군 한명은 조영자녀성에게 생트집을 걸고 마구 때려 정신을 잃게 하였고(《로동신문》 1963.3.9)
6월 29일 미제55공군대대 B중대소속 미제침략군 한명은 경상북도 왜관읍 석전동에 거주하는 리순박녀성에게 무턱대고 달려들어 단도로 마구 찔러 심한 중상을 입혔으며(《동화통신》 1962.6.30) 7월 15일 서울시 룡산구 남영동에서 미제침략군 한명은 리아무개녀성의 집에 뛰여들어 그를 겁탈하려다가 항거에 부딪치자 마구 때린후 2층에서 내던져 전신에 타박상을 입히는 만행을 감행하였다.(《동아일보》 1962.7.16)
7월 20일 서울 외국인주택에 사는 미군속 스티월은 김옥자녀성을 희롱하던 끝에 나중에는 권총으로 살해하였다.(《국제신보》 1962.7.21)
8월 8일 미제1기갑사단 20포부대소속 미제침략군 한명은 파주군 대릉2리에 사는 김창봉의 집에 달려들어 그의 며느리와 다른 한명의 유부녀를 겁탈하려다가 이 만행을 목격하고 저지시키려는 김창봉의 안해 장명선녀성을 부엌으로 끌고가 마구 때려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조선일보》 1962.8.12)
8월 29일 부산항에 정박하고있는 미국선박의 선원 프란시스 스르비아는 강옥자녀성을 릉욕하려다가 거절당하자 단도로 마구 찔러 치명상을 입혔으며 그의 비명을 듣고 달려간 염춘희녀성도 마구 찔러 심한 중상을 입혔다.(《동화통신》 1962.8.30)

10월 19일 미제침략군 캐빈 매캐니는 서울시 서초동에서 강아무개녀성을 릉욕하고도 성차지않아 나중에는 때려죽이는 야수적만행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제1라지오》 1962.10.19)
제반사실들은 우리 민족의 피맺힌 원쑤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에 있는 한 언제가도 남조선인민들은 불행과 고통,치욕에서 벗어날수 없으며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도 지켜낼수 없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우리는 미제침략군에 의해 죄없이 흘린 우리 민족의 피값을 기어이 받아내고야 말 것이다.

주체93(2004)년 3월 31일
평 양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공 동 백 서 (6)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에서 저지른 살인과 략탈,파괴행위는 그 야수성과 잔인성에 있어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있다. 미군이 군사적강점의 전기간 남조선인민들에게 매일과 같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은 가장 악랄한 살인자,략탈자,파괴자로서의 미제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는 남조선강점 미군의 만행가운데서 1960년과 1961년 2년기간의 자료들을 재조사장악한 일부를 묶어 이 공동백서를 발표한다.

1.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살인폭행만행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미제침략군놈들의 살인폭행만행은 1960년대에 들어 와 더욱 야수적이고 렵기적인 방법으로 감행되였다.
- 1960년
2월 12일 밤 10시 30분경부터 13일까지 미제44공병부대 B중대소속 윌리암 제이 리 등 7명은 부산시 중앙동에 사는 공진수 외 6명을 부당하게 체포하여 부대에 끌고가 모두 발가벗긴후 깊은 구뎅이에 몰아 넣고 총탁과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리였으며 손목시계를 비롯하여 남조선돈 1만 2,000환과 옷,기타 물품을 전부 빼앗고 알몸뚱이로 부대밖으로 내쫓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당시 남조선인민들의 분노를 터치였던 《왜관린치사건》이다.(《세계일보》 1960.2.24)

이러한 폭행은 2월 26일 밤 같은 중대소속 4명의 미군에 의하여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왜관읍의 무고한 주민들에게 감행되였다.(《세계일보》 1960.3.13)
부산의 미제55보급부대에서는 물건이 없어졌다는 구실을 붙여 부대종업원 1,500명을 《신체수색》을 한 다음 옷을 벗긴 상태로 집에 돌려 보내는 비인간적만행을 감행하였다.(《로동신문》 1960.2.23)
2월 27일 미제7사단 3련대 2전투단 B중대 로즈 비 비손이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의 박영빈을 리유없이 카빈총으로 쏘아죽인것(《동아일보》 1960.2.29)을 비롯하여 4월에만도 20일에는 미제7사단 40땅크부대소속 상사 허만 제이 록웰이,25일에는 미제4유도탄사령부 19보병대대 C중대 일등병 로버트 엘 함엘이,29일에는 미제1기갑사단 8기갑련대 B중대 중사 에드와드 제이 노불이 길가던 사람들을 심심풀이로 쏘아죽이고 중상을 입히는 살인만행을 거리낌없이 감행하였다.

5월 1일 미제7보병사단 13공병대대소속 상등병 가르길드 죤슨은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부근에서 자기의 강간행위를 제지하였다고 하여 윤홍룡(28살)의 얼굴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 중상을 입혔다.(미제침략군신문《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스》 1960.5.6)
5월 15일 밤 10시경 미제9기갑련대 1수색대대 C중대소속 이등병 죤은 파주군 광탄면 방축리에 사는 리종훈에게 증명서를 보자고 하고는 조선어로 씌여졌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쏘아죽였으며(《경인일보》1960.5.18) 6월 5일 오후 5시경 미제1기갑사단 8공병대 일등병 리백 이 노알드는 길가는 최덕기(26살)녀성의 가슴과 하퇴부에 총을 쏘아 치명상을 입혔다.(《기호일보》1960.6.16)

6월 9일 오후 3시 5분경 차를 몰고 가던 미제728헌병대소속 운전사인 이등병 알란 씨 커티스는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앞도로에서 김현식(29살)청년이 차에 좀 태워달라고 했다하여 그를 카빈총으로 즉사시켰다.(《한국일보》 1960.6.10)
6월 16일 미제침략군 3명은 경기도 강화에서 남조선녀성을 강제릉욕하려다가 백광운(25살)이 제지시킴으로 하여 목적을 실현할수 없게 되자 그에게 집단폭행하여 심한 부상을 입혔다.(《기호일보》1960.6.17) 6월 30일 인천 미항만사령부소속 선박부대 중사 도마트는 자기 배의 로무자 리남종이 봉급이 적은데 대해 물어 본다고 하여 선장실로 끌고가 마구 때려 부상을 입혔다.(《경인일보》1960.7.1)

7월 16일 오후 6시경 미제7사단 32련대의 한 사병은 차를 몰고가다가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선암리 도로에서 지나가는 황길성(54살)농민의 모자를 잡아 채여 머리가 차체에 부딪쳐 죽게 하였다.(《한국경제신문》1960.7.19)
8월 31일 6시 30분경 김포비행장근방에서 미제61671부대의 헌병병장 와이트 썬브드는 부근의 주민 리영근(17살)과 최창기(23살)를 렵총으로 쏘아 중상을 입혔다.(《동아일보》 1960.9.2)
9월 3일 밤 12시경 미제97공병보급소소속 미제침략군 40여명은 인천시 산곡동부락에 불의에 달려들어 살림집을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리상구(28살),김애란(27살)주민을 칼로 찌르고 맥주병으로 때려 중태에 빠뜨리는 등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상을 입혀 지역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경기매일신문》 1960.9.7)

10월 29일 미해군사병 3명은 부산시 초량동에서 길가던 주민을 리유없이 때려 얼굴에 심한 부상을 입혔으며(《부산일보》 1960.10.30) 10월 31일 9시경 미제54공병대소속 일등병 팍스 외 30여명은 인천시 부평동에 있는 백마당구장에 달려들어 고세택(35살)을 비롯한 10여명을 무턱대고 집단폭행하여 중상을 입혔다.(《조선일보》 1960.11.2)
11월 9일 밤 10시경 미제침략군 하사 콜프스는 경기도 신흥군 동면에 사는 박순자녀성을 장난삼아 단도로 찔러 죽이려다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목을 졸라 빈사상태에 빠지게 하고는 달아 났다.(《경인일보》1960.11.14)
11월 13일 미제304통신대대소속 일등병 제임스 비 앤더스가 경기도 평택에서 리민형 외 2명에게 무턱대고 총질하여 중상을 입힌것 등 남조선강점 미제침략군이 아무 리유도 없이 길가던 사람을 렵총으로 쏘아 치명상을 입히고 심심하다고 하여 마구 총탄을 갈겨 무고한 사람들을 중상자로 만들었으며 시험삼아 사람을 쏘아죽이는 야수적만행은 11월과 12월에도 끊임없이 감행되였다.

- 1961년
1월 28일 미제1기갑사단 19포병련대소속 미제침략군 1명은 부대주변에서 길가는 소년들에게 총을 쏘아 한명을 즉사시키고 한명에게는 치명상을 입혔다.(《조선일보》 1961.2.23) 2월 7일 미제침략군 공군장교외 3명은 김포비행장에 취재온 기자 김근택을 부당한 리유로 사진기를 빼앗고 카빈총으로 위협하며 무려 1시간반동안 집단구타하여 중태에 빠뜨렸는가 하면 그의 옷까지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한국일보》1961.3.28, 《로동신문》1961.3.29)
2월 13일 일등병 켄랜 도날드가 충청남도 서산군 태안면 삭선리도로에서 화물차를 미친듯이 몰고 가다가 자전거를 타고가는 배수현(24살)을 깔아 두개골을 파렬시켜 즉사시킨것(《동아일보》1961.2.16) 등 미제침략군은 부산에서는 저들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다 하여 한 로동자를 기중기에 거꾸로 매단채 물속에 잠구고 경기도 평택에서는 기중기차로 길가던 6명의 주민들을 들이받아 모두 죽이는 만행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로동신문》 1961.2.16)

미제침략군은 남조선에서 자동차를 마구 몰아 무고한 주민들의 생명을 수없이 빼앗아갔다.
3월에만도 9일 12시경 경기도 룡인군 기흥면 신갈리 앞도로에서 길옆으로 걸어가던 9살난 손원자,엄영순소녀들을 깔아 죽이고 도주한것을(《한국일보》 1961.3.12) 비롯하여 미제침략군은 16일에는 창학리마을길가에서 놀고 있던 리학룡(4살)을 보고도 그대로 차를 몰아 치워죽이고 19일에는 서울의 밤거리를 고속질주하다가 길을 건느던 리영자(22살)녀성을 깔아 치명상을 입히는(《한국일보》 1961.3.20) 등 어린이,녀성들도 가림없이 무차별적인 자동차살인만행을 꺼리낌없이 감행하였다.

4월 27일 4시 15분경 미제침략군 헌병 제728부대소속 중사 스코드는 서울-부산행렬차가 경상남도 밀양군 삼랑진역에 도착하였을때 터무니 없는 트집을 잡아 기관사 리진춘(31살)에게 달려들어 곤봉으로 머리를 마구 때려 파렬상을 입히였고 렬차를 3시간이상 지연시켰다.(《경향신문》 1961.4.28)
5월 1일 밤 10시경 미제침략군 제16병기중대소속 일등병 리챠드 엘 벨과 대구지구 헌병대소속 일등병 비티는 대구시내 향촌동 앞도로에서 길가는 김순일(25살)에게 무작정 달려들어 단도로 그의 허리를 마구 찌르고 깨여진 맥주병으로 머리를 후려갈겨 치명상을 입혔다.(《령남일보》 1961.5.3)
5월 3일 미제1기갑사단 제12기갑련대 B중대소속 일등병 죠세프 브랜드는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덕천리에서 남흥우(27살)에게 맥주 2상자를 팔아먹으려고 흥정하다가 자기의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권총으로 그를 쏘아 즉사시켰다.(《산업경제신문》 1961.5.4)

남조선인민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미국식인종들의 이 치떨리는 살인마적본성은 5월 27일 미제581통신중대소속 일등병 죠지 이 웬제링이 자동차를 미친듯이 몰다가 길옆에서 놀고있던 오순이(5살)를 백주에 고의적으로 깔아죽이고(《서울일일신문》 1961.5.30) 6월 5일 미제44공병대소속 미군운전사가 칠곡군 왜관읍 삼청동도로주변에서 놀던 지영준(6살)을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로 들이받아 죽인데서도(《대구일보》 1961.6.7) 여실히 나타났다.
7월 5일 오전 미제1기갑사단 제8기갑련대소속 미제침략군1명이 부대부근을 지나가던 리길연(30살),김소연(23살), 김광진(22살)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혔는가(《경기매일신문》 1961.7.7) 하면 8일에는 오산공군기지의 미군 여러명이 오물적재장부근을 지나가던 10명의 주민들에게 총을 란사하여 중경상을 당하게 하였다.(《조선일보》 1961.7.11)

8월 20일 미제7보병사단에서는 자기들의 목욕탕바닥청소를 휘발유로 하도록 해놓고는 작업이 끝나기도전에 목욕실안에 있는 전기가열기에 스위치를 넣음으로써 폭발이 일어나 일하던 6명의 남조선로동자들중 2명이 타죽고 4명은 중화상을 입었다.(《로동신문》 1961.10.8)
8월 26일 미제7병참단소속 미군운전사가 대구시내 태평로 1가에서,31일 미제192병기대대 82병기중대소속 기술병 잭크 와이돈이 서울시 룡산에서,9월 7일 미제침략군 장거리통신대소속 미군운전사가 부산시내 범일동에서 길가던 녀성들을 차로 들이받아 중상을 입히고 도로옆을 걸어가던 무고한 사람들을 고의적으로 즉사시킨것을 비롯하여 살인만행은 매일과같이 감행되였다.

10월 12일 오후 4시경에도 미친듯이 차를 몰고 가던 미군운전사가 전라북도 옥구군의 한 도로에서 어린애를 업고 가는 김기배(69살)로인을 깔아 중상을 입혔는가 하면(《삼남일보》 1961.10.14) 12월 6일에는 미제1군단 51통신대대소속 운전사 안토니 모라노가 경기도 의정부에서 안무희(6살)를 장난삼아 차로 깔아죽이였다.(《서울일일신문》 1961.12.8)

2. 남조선녀성들에 대한 릉욕, 살인, 폭행만행

미제침략군은 남조선녀성들을 저들의 더러운 수욕을 채우기 위한 향락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로소를 막론하고 닥치는대로 강간,륜간하였으며그것도 성차지 않아 짐승도 낯을 붉힐 야만적인 폭행과 살인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1960년
1월 2일 미제7사단 40땅크대대 대위 토마스 에취 죤 메케네리는 사병들을 시켜 동두천에 사는 김순애(30살)와 김정자(22살) 녀성을 막사에 잡아들이고 그들의 머리를 몽땅 깎아 버렸으며 10여명의 미군이 달려들어 그들을 희롱하다가 거리에 내쫓는 만행을 감행하였다.(《한국일보》 1960.1.5)
이것이 바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동두천녀인삭발사건》이다. 1월 23일 밤 9시 30분경 미제7사단 10기갑련대 2대대 상병 홀리 페터앰은 룡산구 리태원동에 사는 백현자(23살)녀성을 서울남산의 숲속에서 단도로 위협하여 강간한 다음 남조선돈 5,000환까지 강탈해가지고 달아났다.(《산업경제신문》 1960.1.25)

3월 14일 부산시 기독교방송선교회 미국선교사 브이 알렉스빌스는 고용하고있는 김옥녀(25살)녀성을 퇴근시간에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하고는 동래구 거제동에 있는 수원지에 끌고 가 강간하였으며 12월 24일에도 부산시방송국 크리스마스모임에 참가하였다가 방송국직원 처녀를 부산진구 부전동호텔에 꾀여가 겁탈하는 만행을 또다시 감행하였다.(《동화통신》 1961.2.16)

4월 3일 미국 스테이 스마린기선회사의 《로빈모 부데이》호 선원 죤 아바다는 인천시에서 윤남순녀성을 릉욕하려다가 실패하자 그를 잔인하게 구타하여 부상을 입혔으며(《기호일보》 1960.4.6)
7월 20일 미제39보급소 중대장 윌리암은 고명순(26살)녀성을 차에 싣고 의정부 하금오리까지 와서 입을 틀어막은 다음 전신을 묶어놓고 구타릉욕한후 실신한 그 녀성을 차밖으로 내던지는 야수적만행을 감행하였다.(《경기매일신문》 1960.8.6)
7월 28일 밤 10시경 K55기지사령부 6314헌병대소속 상등병 레이는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 지산리도로에서 길가는 임신부 박정순(29살)녀성을 마구 때려 중상을 입히고 류산까지 하게 하였으며(《자유신문》1960.8.5)
10월 25일 밤 11시 30분경 미제728헌병대소속 헌병들은 서울시 룡산구 앞길에서 남편과 함께 집으로 가던 강복희녀성을 랍치하여 자동차에 싣고 도주하다가 차에서 떨어뜨려 죽였다.(《서울신문》 1960.10.26)
12월 11일 밤 한 미제침략군 사병은 인천시 십정동에 사는 김순갑의 집에 달려들어 그를 폭행하고 15살난 그의 딸 김옥애의 방에 침입하여 강간하려다가 부근사람들의 제지로 실현하지 못하자 그들을 구타하고 달아났다.(《동아일보》 1960.12.14)
12월 26일 미제728헌병대소속 일등병 구리레스는 인천시 부평동에서 리국자(21살)녀성을 붙들고 수욕을 채우려다가 실패하자 술병으로 마구 때렸으며 이를 제지시키려는 정경자(19살)녀성까지 때려 상처를 입혔다.(《경인일보》 1960.12.30)

- 1961년
1월 3일 오후 2시 30분경 미제침략군 하사 빈은 서울시 룡산구 후암동에 있는 홍아무개의 집에 달려들어 12살난 소녀를 강간할 목적으로 목을 졸라 실신시킨 다음 옷을 벗기다가 발각되였다.(《조선일보》 1961.1.4)
2월 2일 밤 미제침략군 55헌병중대 병장 윌리암 에취 태프트는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가릉리에서 표정순녀성을 리유 없이 마구 때려 치명상을 입혔다.(《한국일보》 1961.2.4)
2월 6일 1시 30분경 미제7사단 24련대소속 병장 레쓰고이라우는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광암리에 있는 김순덕의 집에 몰래 기여들어 최종석녀성을 롱락하려다가 항거에 부딪치자 집을 불태워버렸다.(《경인일보》 1961.2.12)
3월 31일 밤 8시 20분경 미제침략군 6명은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에 있는 장복욱의 집에 달려들어 유부녀를 롱락하려다가 실패하자 집과 살림도구들을 마구 들부신후 이웃집까지 파괴하고 도주하였다.(《민족일보》 1961.4.1)
4월 2일 2시 30분경 군산시에서 미공군 802공병대 C중대소속 하바드 웰링은 김제군에 사는 박광희(26살)녀성을 릉욕하려고 끌고가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리병희에게 저지당하자 그의 얼굴을 마구 때려 중상을 입혔다.(《삼남일보》 1961.4.4)
같은 날 1시경 미제침략군 1명은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가릉리에 있는 조종일(45살)의 집에 달려들어 하진옥(25살)녀성을 릉욕하려다가 거절당하자 그의 집을 불태워버렸다.(《경기매일신문》 1961.4.3)
5월 4일 밤 남조선 강원도 양양군 속초주둔 미제침략군 통신수색대 하사 졸스 이 뽈렌은 속초읍에 있는 황기호의 집에 달려들어 도경자(25살)녀성을 릉욕하려다가 그가 자기의 추악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 하여 강제로 발가벗긴 다음 손과 발을 묶고 목을 졸라매였으며 아래배를 마구 때려 죽였다.(《동아일보》 1961.5.14)
10월 1일 오후 1시 40분경 미제침략군 《하야리야》부대 야전병원소속 이등병 죤 레이리는 부산시 대상동에 있는 한 식당에서 김순옥녀성을 릉욕하려다가 그 녀성이 고함을 지르며 달아나자 단도로 목 오른쪽을 찔러 생명을 위독하게 하였다.(《조선일보》 1961.10.2,《로동신문》1961.11.15)
10월 7일 미제1기갑사단 8련대소속 병장 이반스는 파주군에서 박금자녀성을 희롱하려다가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하여 목을 졸라죽이는 야수적만행을 감행하였다.(《민족일보》 1962.6.7)

3.남조선인민들의 재산, 재물략탈파괴만행

남조선인민들의 재산과 재물을 략탈,파괴함에 있어서도 미군은 침략자로서의 자기의 날강도적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내놓았다.
- 1960년
2월 6일 밤 8시 30분경 미제침략군 한 공군사병은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에 있는 《대한무선라지오》상점에 달려들어 라지오 2대를 강탈하였다.(《세계일보》 1960.2.7)
2월 9일 밤 8시 30분경 미제침략군 3명은 최석정(28살)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는 료금을 낼대신 뒤골목까지 차를 강박하여 몰게 한 다음 운전사에게 집단폭행을 가하였으며 차유리를 파괴하고 달아났다.(《국제신보》 1960.2.12)
2월 24일 밤 11시 10분경 미제침략군 5명은 인천시 《소리사》상점에 침입하여 라지오 2대를 도적질해갔다.(《경인일보》 1960.2.26)
3월 12일 밤 미제7사단소속 일등병 지미 아르하렐은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리부근에서 5명의 사람들을 단도로 위협하여 금품을 강탈하였다.(《세계일보》 1960.3.15)
3월 16일 미제8군 30병기중대소속 미제침략군 사병들은 다리의 부하능력도 고려하지 않고 50t급 땅크를 실은 화물차를 몰고 서울시 영등포구의 구로교를 지나가다가 다리를 파괴하였으며 이때 택시까지 다리에서 떨어져 운전사 박창규 외 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련합신문》,《조선일보》 1960.3.17)
5월 14일 밤 11시 30분경 미제802부대소속 스미스 게리 외 5명의 미군은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오세리 네거리에서 지나가는 김석룡(31살)과 그의 친구의 얼굴에 맥주를 뿌린후 마구 때려 륵골을 부러뜨리고 실신시킨 다음 그들이 가지고있던 돈 111US딸라와 손목시계를 비롯한 금품을 강탈하였다.(《평화신문》 1960.5.25)
6월 13일 밤 10시경 미제침략군 3명은 남조선 강원도 춘천시의 한 뒤산길에서 그곳을 지나가는 법원급사 한규석(20살)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고 손목시계를 비롯한 소지품을 강탈하였다.(《강원일보》 1960.6.16)
9월 28일 밤 10시 50분경 미군수기지공병단소속 미제침략군 7명은 전라북도 김제군 황산면에서 시계수리업을 하고있는 정헌승(26살)의 집을 집단습격하고 그를 폭행하여 실신케 한후 손목시계와 회중시계 15개를 강탈하였다.(《삼남일보》 1960.9.30)
10월 6일 밤 9시 55분경 미제7사단 32련대 본부중대소속 이등병 프랭크 루박크와 아이라 케이는 택시를 타고가다가 서울시 성북구 종암동에 이르러 갑자기 운전사의 목을 조르고 마구 때린후 남조선돈 1만 2,000환을 강탈하고 달아났다.(《한국일보》 1960.10.7)
이러한 폭행강탈만행은 10월 15일 밤 미제1군단소속 2명의 미제침략군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의 도로에서도 감행되였다.(《한국일보》1960.10.17)
11월 1일 밤 10시 50분경 서울시 중구의 한 도로에서 택시를 탄 미제침략군 2명은 운전사를 돌로 때려 중상을 입힌 다음 그를 차에서 내던지고 택시를 몰고 달아났다.(《동아일보》,《경향신문》 1960.11.2)
12월 8일 밤 9시 10분경 미군해병 3명은 부산시 초량동에서 택시를 타고가서는 료금을 요구하는 운전사 강창준(35살)과 조수 김흥동(21살)을 쇠뭉치로 사정없이 때려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부산일보》 1960.12.9)
12월 25일 6시 30분경 미제7사단 34련대 본부중대소속 미제침략군 일등병은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도산리에 있는 박정호(56살)의 집에 불을 질러 약 80여만환의 피해를 입혔다.(《산업경제신문》 1960.12.30)

- 1961년
1월 3일 미제82야포대소속 미제침략군 3명은 택시를 타고가다가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무건리에 이르러 운전사를 집단구타하여 중태에 빠뜨린후 현금 6US딸라를 략취하였으며 자동차엔진까지 파괴하고 도주하였다.(《경인일보》 1961.1.7)
2월 17일 오후 6시 40분경에는 서울시 종로구 장사동 에서 택시를 탄 미제침략군 한명이 운전사 리근수(30살)를 흉기로 위협하여 남조선돈 6,500환과 손목시계를 강탈하였다.(《민국일보》 1961.2.18)
3월 13일 10시 5분경 미제728헌병대 C중대 이등병 에드 야푸 노피이스,단 헤덴은 서울시 동작동 뻐스정류소에서 택시를 탄후 룡산중학교 앞도로에 이르러 운전사 최창수를 목을 졸라 실신케한 다음 그를 차밖으로 내던지고 택시를 몰고 도주하였다.(《조선일보》 1961.3.14)
3월 15일 밤 9시 30분경 미제532부대소속 미제침략군 1명은 인천시 학익동의 한 집대문을 까부시고 달려들어 집안에 있던 심한섭(29살)외 4명에게 중상을 입히였으며 가장집물을 닥치는대로 파괴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경인일보》 1961.3.30)
8월 28일 미제침략군 제51통신대소속 일등병 해리 이 우드는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에 있는 한 상점에 들어가서 상품을 략탈하려다가 점원 박홍연에게 저지당하자 도리여 그를 폭행하여 중상을 입혔다.(《조선일보》 1961.8.30)

보는 바와 같이 미제는 우리 민족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재난만을 가져다 준 극악한 살인마,야만들이며 더러운 날강도들이다.
우리 민족은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에서 저지른 죄행에 대한 대가를 기어이 받아 내고야 말것이며 천백배로 복수할것이다.

주체92(2003)년 11월 21일
평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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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공동백서(5)

최근 남조선에서 과거에 있었던 전주교도소 수감자들에 대한 집단학살만행사실이 미국정부문서와 사진자료로 밝혀 지고 거창, 부산, 량산, 진영을 비롯한 각지에서 학살된 주민들의 유골과 그에 대한 현장증언자들이 나오는 등 조선전쟁을 전후하여 미제가 감행한 치떨리는 인민대학살만행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 조선인민은 물론 세계인민들의 커다란 분노와 격분을 자아내고 있다.

미제는 정전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조선에서 해마다 2,000건이상의 살인을 비롯한 각종 범죄를 감행하여 10만명이상의 무고한 주민들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힘으로써 체질화된 살인범, 야수로서의 본색은 물론 살인진범인으로서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냈다.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는 남조선에서 미제가 1957년부터 1959년까지의 기간에 저지른 만행자료중에서 그 일부를 묶어 이 공동백서를 발표한다.

1.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살인, 폭행만행

△ 1957년
1월 16일 인천시 룡현동에서 미제침략군 일등병 와이 팀 홈은 자기 집 문을 나서는 윤여금소녀에게 리유없이 《M-1》총을 쏘아 치명상을 입혔으며 (《인천신보》 1957. 1. 18) 미제 8208부대소속운전사 이등병 헨리는 2월 1일 몰고 가던 찌프차로 부산시 대교동의 자기 집에서 놀고 있는 10살의 박금자소녀를 깔아 죽이고 그의 집을 들이받아 파괴하고 달아났다.(《동아일보》 1957. 2. 7)

2월 17일 미제565부대 공병대대 54중대 하사 찰스 씨. 크라인(19살)은 인천시 산곡동에서 아무런 리유도 없이 리성근, 김영식소년을 카빈총으로 쏘아 리성근을 즉사시켰다.(《명인일보》 1957. 2. 21)

4월 12일 밤 9시 30분경 미제728헌병대소속 헌병상사 죤피 윌슨은 렬차호송임무를 수행하게 된 기회를 리용하여 리강식 외 여러사람에게 자기가 호송하여 가는 렬차를 습격하여 물자를 절취하도록 조직하고는 그 대가로 그들로부터 남조선돈 40만환과 100딸라를 받아 먹은 다음 그것이 탄로될 위험이 있게 되자 자기의 범행을 은페할 목적으로 《렬차습격강도》의 루명을 그들에게 들씌우려고 총을 쏘아 리강식을 즉사시키고 2명에게는 중상을 입혔다. 이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 진 《양주렬차깡패사건》이다. (《동아일보》 1957. 4. 19)

4월 25일 군산비행장에서 미제침략군 감시병은 비행장부근을 지나가는 린근주민들에게 군견을 풀어 놓아 물어 뜯게 하여 그중 홍순남(35살)에게 치명상을 입혔다.(《전북일보》 1957. 5. 2)

4월 27일 밤 8시 30분경 화물자동차를 타고 파주군 연풍리에 있는 하천부근을 지나가던 미제침략군 3명은 차에서 뛰여 내려 마주 오는 림창룡(35살), 리순봉(29살), 홍봉균(33살) 등을 리유없이 심히 구타하여 중상을 입히였으며 그것도 성차지 않아 그들을 4m높이의 다리에서 아래로 떨어뜨리고 달아났다.(《경향신문》 1957. 4. 30)

6월 28일 오후 3시경 미제침략군 헌병 1명은 문산역에서 차갈이작업을 하고 있는 기관조사 김량표에게 《차를 태워 달라》고 강요하다가 거절 당하자 카빈총으로 쏘아 중상을 입혔다.(《산업경제신문》 1957. 7. 7)

7월 6일 밤 8시 30분경 인천시 숭의동부근에서 송유관을 경비하던 인천항 미제침략군 경비대소속 일등병 로날드 이. 파세트는 송유관부근에서 철없이 놀고 있는 3살 난 김영호어린이를 《휘발유도적》이라고 하면서 카빈총으로 쏘아 죽였으며 (《한국일보》 1957. 7. 15, 《련합신문》 1957. 8. 11) 8월 25일 오후 4시 30분경 미제침략군 인천항 경비대소속 일등병 마틴 밀스는 인천시 룡현동저수지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여러명의 어린이들에게 돌을 던져 물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M-1》총을 쏘아 인천시 숭의동에 사는 조병길을 죽였다. (《동아일보》, 《인천신문》 1957. 8. 27)

9월 4일 미제 8192병참 송유관중대 소속 일등병 핸드 빌리 제이는 부산시 범전동앞 길가에서 군화를 수리하고 수리비를 요구한다 하여 구두닦이소년 한심(14살)을 카빈총으로 쏘아 죽이고 도망쳤다.(《련합신문》 1957. 9. 8, 《동아일보》 1957. 9. 14)

9월 15일 11시경 미제침략군 공군 일등병 캐롤 비. 테일리(26살)와 이등병 에드워드 티. 영은 군사비행장부근에서 풀을 베고 있는 강금순(17살)외 6명의 소녀들에게 카빈총을 쏘아 김영희소녀를 죽이고 강금순에게 중상을 입히는 만행을 감행하였다.(《한국일보》 1957. 9. 20)

10월 3일 미제24사단 주둔지역에서 미제침략군 상사 죠세프 이. 우딩 외 1명은 밭에서 일하고 있는 녀성을 총으로 쏘아 죽였으며 같은 날 8시 30분경에는 김천역구내에서 화물렬차를 경비하던 미제728부대 B중대소속 상사 레이몬드 엘. 베이리란이 학교로 가고 있는 금릉중학교 3학년생 송준원(16살)외 4명에게 무턱대고 총을 쏘아 송준원학생을 즉사시켰다. (《련합신문》 1957. 10. 5, 《대구매일신문》 1957. 12. 25)

미제침략군은 사냥을 하면서도 남조선사람들을 꿩이나 짐승처럼 여기고 총을 마구 쏘아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혔다.
10월 3일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률곡리 뒤산에서 꿩사냥을 하고 있던 미제24사단 34련대 3대대 K중대소속 이등중사 죠셉 이. 우딘(36살)외 1명은 도토리를 줏고 있던 김호의 (60살)녀성을 《꿩》이라고 하면서 렵총으로 쏘아 죽였으며(《인천신보》 1957. 10. 6) 10월 22일 오후 5시경 남조선 강원도 강릉근교에서 미제623전투공군사령부소속 중사 윌리암 콤맨은 꿩사냥을 하다가 부근에 있던 김창식(19살)을 《꿩》이라고 하면서 총을 쏘아 중상을 입혔다.(《서울신문》 1957. 10. 25)

10월 24일 11시경 남조선에 있는 미국대사관 경비병 미제침략군 중사 로버트 더불유. 윌코크(23살)는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도리리 뒤산에서 꿩사냥을 하다가 부근에서 놀고 있는 9살 난 정재경어린이를 총으로 쏘아 즉사시켰으며 11월 5일 12시경 미제74병기대대 34중대소속 미제침략군 2명은 김포군 대관면 대룽리부락 뒤산에서 사냥을 하면서 그 부근에 있던 최은행(18살)을 총으로 쏘아 중상을 입혔다.(《경인일보》 1957. 11. 7)

11월 24일 10시경 울산군 삼남면 하방부락 앞산에서 사냥을 하던 부산중앙부두소속 미제침략군대위 브레스 덴 죠오(군번호 01924524)외 5명은 그 근처에 있던 11살의 리학수소년에게 렵총을 쏘아 가슴과 다리, 어깨 등 7곳에 중상을 입혔다.(《한국일보》 1957. 11. 26, 《서울신문》 1957. 11. 27)

△ 1958년
2월 25일 인천시 부평 미제8군 항공기수리소 소장 소령 토마스지. 제임스의 지휘하에 대위 마빈이. 캠프와 상사 로버트 이.웨이든 사울은 구두닦이소년 김춘일(14살)을 아무 리유없이 자기들의 장교숙소에 감금하고 5~6시간에 걸쳐 곤봉과 가죽채찍으로 잔인하게 때리고 칼로 마구 찔렀는가 하면 뻰찌로 두 발톱과 머리칼을 잡아 뜯고 전기리발기로 그의 머리를 깎은후 머리와 얼굴에 골탄칠을 하고 나무상자에 넣어 못을 친 다음 직승기에 실어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미제1군단비행장에 날라다 버리는 귀축 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몸서리치는 《부평소년비행기짐짝사건》이다.(《동아일보》 1958. 3. 4, 《서울신문》 1958. 3. 5)

6월 2일 새벽2시경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눌로리에 있는 미제1기갑사단 12기갑부대소속 일등병 로렌스 더블유. 추라한은 부대철조망근처에서 류치선(20살)을 《도적》으로 몰아 카빈총으로 쏴죽였으며(《한국일보》 1958. 6. 3, 《서울신문》 1958. 6. 4) 9월 8일 오후 5시경 미제8군단 장거리통신대 C중대소속 운전사 일등병 픽크프 그리인은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청송리앞도로상에서 6살 난 권봉석을 자동차바퀴에 끼우게 한채 100m나 그대로 달려 즉사시켰다.(《산업경제신문》 1958. 9.13)

9월 26일 아침 미제7사단소속 자동차운전사 시오 드 엠. 네스(26살)는 의정부읍 축성령고개에서 아무 죄도 없는 인재남(36살), 로영관(26살), 김한옥에게 총질하여 인재남을 즉사시키고 로영관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한국일보》 1958. 9. 27) 11월 12일 미제1기갑사단 20포대대본부소속 일등병 하지스 챠이지는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법원리에 있는 세탁소부근에서 3명의 청년에게 카빈총을 쏘아 그중 권오원(25살)을 즉사시켰다.(《경향신문》 1958. 11. 14)

12월 14일 밤 11시 미제8군사령부 재무대소속 하사 챨스 피. 리엘(24살)과 병장 죤스 에스. 제이모스(20살)는 서울시 중구충무로 2가에 있는 《카네기홀》에서 출입구창문유리를 까부시는 란동을 부리다가 이를 말리려던 종업원을 구타하였을뿐아니라 밖에 나와서는 상아탑다방 앞길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주현식(19살)을 단도로 찔러 중상을 입혔으며 제이모스는 심진택(61살)을 칼로 찔러 현장에서 즉사시키는 흉악무도한 만행을 감행하였다.(《동아일보》 1958. 12. 15,《평화신문》, 《자유신문》 1958. 12. 16)

△ 1959년
1월 28일 미제1기갑사단 19보병련대 2곡사포대대소속 이등병 칼 비. 믹크는 심심풀이로 경기도 리천군에 살고 있는 김택내(18살)외 1명의 청년에게 련발사격을 가하여 한명을 죽이고 김택내에게는 중상을 입혔다.(《동아일보》 1959. 1. 29)

2월 8일 미제침략군 사자부대운전사 에노 소리는 서울시 영등포구에서 몰고 가던 자동차로 10살가량 되는 어린 소년을 깔아 즉사시킨후 시체까지 차에 싣고 달아났으며(《동아일보》 1959. 2. 9) 3월 30일 낮 1시경 미제8군소속 하사 제임스 마흠은 미제8군 서울지구사령부 권총사격장부근에서 사격후련을 구경하고 있던 심태명 외 3명의 소년들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심태명소년에게 중상을 입혔다.(《한국일보》, 《동아일보》 1959. 4. 1)

5월 10일 10시 5분경 충주시 목행리에 있는 남한강 상류에서 권총사격연습을 하고 있던 충주비료공장발전소 미국인기술자 죠지더불유. 크렌은 28m거리에 있는 송성학(26살)녀성을 과녁으로 삼고 권총을 쏘아 치명상을 입혔는가 하면(《서울신문》 1959. 5. 11) 5월 30일 오후 3시경 미제침략군 20여명은 경기도 양주군 로해면 도봉리에서 길 가던 사람들이 저들을 쳐다본다는 리유로 집단폭행을 감행하여 구회익(39살), 김종만(33살), 조재근(25살)에게 중상을 입히였다.(《한국일보》, 《동아일보》 1959. 5. 31)

6월 14일 9시 30분경 인천외항해상에 정박중이던 미수송선 《하와이안 후리시멘》호의 씨알이스 앤더슨(28살)은 공무집행으로 배에 올라 간 석정운에게 다짜고짜로 내려 가라고 호통을 치다가 나중에는 식칼로 그의 손목을 내리쳐 중상을 입혔다.(《인천신보》 1959. 6. 16)

7월 24일 4시 25분경 미제침략군 서울지구사령부소속 찌프차운전사 일등병 로버트 제이. 쉬미드린은 자동차 4대가 달릴수 있는 서울시 룡산구 삼각지대 대도로에서 손수레를 밀고 가는 김용남(50살)을 깔아 죽였다.(《동아일보》 1959. 7. 25)

8월 19일 아침 미제7사단 포병대 본부중대소속 상등병 벤톤 에어. 바틀러(23살)는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근방에서 박천태(16살)소년에게 총을 쏘아 치명상을 입히였으며 (《한국일보》 1959. 8. 20) 10월 2일 미제7보병사단 13공병대대 C중대소속 이등상사 와트랜드(24살)는 길 가는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동두천리에 사는 장동부(25살)외 5명을 향해 무턱대고 총을 쏘아 장동부에게 중상을 입혔다.

10월 31일 오후 5시 55분경 미제5공군 1314보급중대소속 일등병 마호니 에취. 엘(19살)은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 서정리에서 기중기차를 마구 몰다가 정봉헌(41살)의 집을 들이받아 집안에 있던 10살 난 김기성소년을 즉사시키고 박종환(31살)외 5명에게 중상을 입혔는가 하면(《경기일보》 1959. 11. 2) 11월 21일 오후 1시 50분경 경상남도 김해군 록산면 신양리 앞도로에서 찌프차를 미친듯이 몰고 가던 미제침략군 2명은 학교에서 돌아 오는 허금순(11살)과 최명자 두 녀학생을 들이받아 중상을 입힌후 실신상태인 그들을 길옆에 끌어다 던지고 달아났다.(《국제신보》 1959. 11. 22, 《한국경제신문》 1959. 11. 23)

2. 남조선녀성들에 대한 릉욕, 살인, 폭행만행

△ 1957년
1월 7일 오후 6시 30분경 미제침략군 하사 1명은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파주리에 거주하고 있는 리영숙(42살)에게 젊은 녀자를 내라고 강요하다가 거부 당하자 총으로 그의 복부를 쏘아 즉사시켰으며 (《인천신보》 1957. 1. 11) 3월 11일 오후 2시경 미제24사단 48야포대소속 미제침략군 윌리암 에취. 제임스 알레이(26살)는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식현리 앞개울에서 빨래하고 있는 리애돌(43살)과 최순희(59살) 두 녀인을 강간하려고 달려 들었으나 수욕을 채우지 못하게 되자 카빈총을 란사하여 리애돌을 살해하는 만행을 감해하였다.(《동아일보》 1957. 3. 13, 《인천신보》 1957. 3. 14)

4월 17일 밤 10시 파주군두내면 소재지에서 미제침략군 헌병 4명은 민가에 달려 들어 손영자와 리경자라는 두 처녀를 릉욕하려다가 그 마을에 사는 김기성(21살)청년이 말렸다 하여 그를 심히 구타하고 달아났다.(《비판신문》 1957. 4. 29)

4월 26일 미제8군사령부소속 미제침략군 하사 1명은 경기도 파주군 림진면 선유리 뒤산에서 송현숙(20살)녀성을 강간한 다음 때려 죽이였으며(《한국일보》 1957. 4. 29) 5월 16일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운천리에 주둔하고 있는 미제침략군 제17련대 3대대 본부중대 하사 토마스 이멘다 후티 외 1명은 자기들의 더러운 수욕을 채우기 위해 부대부근을 지나가는 변금순과 장영숙녀성에게 달려 들었으나 거절 당하자 그들을 36m높이의 벼랑에서 굴려 변금순을 즉사시키고 장영숙에게 부상을 입히였다.

5월 22일 김포군 고촌면에서 미해병대사령부소속 사병들은 술을 마시고 술집녀성들에게 달려 들어 강간하려다 목적을 달성할수 없게 되자 술집 주인부부와 손님 4명을 집단구타하였는가 하면(《인천신보》 1957. 5. 24) 8월 10일 밤 11시 30분경 미제3련대 보급대대소속 미제침략군 체알크 마크 외 1명은 서울시 중구 북창동에서 송순옥 외 3명의 녀성들을 릉욕하려다가 실패하자 그들을 마구 때려 중상을 입혔을뿐아니라 집유리창문을 닥치는대로 파괴하였다.(《자유신문》 1957. 8. 12)

10월 27일 밤 10시 30분경 서울시 중구 을지로 6가에 있는 《주한미경제조정관실》건물앞에서 미제침략군 이등병 부릭크 월 외 1명은 앞에서 걸어 가는 김순자녀성을 희롱하려고 달려 들었으나 그가 반항하자 마구 구타하여 오른쪽다리를 부러뜨렸으며(《동아일보》 1957. 10. 29) 12월 20일 저녁 8시경 미공군하사 엠손 로날은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미군구락부 앞길에서 길 가는 최길자(32살)외 한명의 녀성을 리유도 없이 구타하여 중상을 입히는 폭행을 감행하였다.(《산업경제신문》 1957. 12. 22)

△ 1958년
4월 1일 밤 8시 45분경 부산 제1부두에서 미제침략군 일등병 리챠드 티. 맥티니는 부근을 지나가는 17~18살가량의 소녀를 릉욕하고 카빈총으로 쏘아 즉사시켰다.(《동아일보》 1958. 4. 3)

5월 17일 미국선박 《빅토리》호 선원 1명은 부산시 초량동에서 박 아무개 녀성을 릉욕하려다가 거절 당하자 마구 구타한후 그의 집에 불을 질렀는가 하면(《한국경제신문》1958. 5. 19) 6월 9일 6시경 대전에 있는 《주한미군사고문단》대전파견대소속 미제침략군 하사 윌리암 지. 테프드(24살)는 대전시 중동에 거주하는 우순이(50살)녀성을 집근처에 끌고 가 야수적으로 강간한후 잔인하게 목을 졸라 죽였을뿐 아니라 다시 부근주민들이 류관향, 서명준, 공재윤의 집과 창고들에 불까지 지르고 달아났다. 그는 20일전에도 강간과 방화를 감행한바 있는 천인공노할 살인귀이다.(《동아일보》 1958. 6. 11, 《한국일보》 1958. 6. 12)

6월 17일 밤 9시경 미제6147부대소속 미제침략군 일등병 헤멘 아이벨은 김포군 송정리에 사는 장 아무개의 집에 달려 들어 김순수(24살)녀성을 릉욕한후 집에 불을 놓아 가장집물과 집이 다 타버리게 하였다.(《경인일보》 1958. 6. 20)

9월 17일 미제304통신대대 이등병 대럴 더블유. 그레이(23살)는 서울시 룡산구 후암동 룡산고등학교 앞도로상에서 지나가던 리용주(20살)처녀를 희롱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분풀이로 그의 복부를 단도로 찔러 증상을 입혔다.(《평화신문》 1958. 9. 20)

△ 1959년
남조선녀성들에 대한 미제침략군의 릉욕사건은 나날이 더 늘어 나 1959년 초의 첫 4개월동안에만도 100여건이나 된다.
1월 29일 오후 6시 30분경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 지산리 좌동뒤산에서 미제침략군 1명은 지산리에 거주하고 있는 김국자(28살)녀성을 유인하여 강간하고 단도로 머리와 얼굴을 마구 찔러 살해한 다음 금반지를 뽑아 가지고 도주하였다.(《한국일보》 1959. 1. 31)

2월 초순 충청북도 충주시 목행리 306번지에 사는 예리라는 미국인은 고용하고 있던 14살의 리정순소녀를 강간하여 심한 상처를 입히고 그를 17일간이나 감금하여 두었는가 하면 (《시사일보》 1959. 3. 11) 3월 18일 11시 30분경 양주군 이담면 광암리 미제7사단 34련대소속 미제침략군 하사 에이카는 부대정문앞을 지나가던 최경자(18살)녀성을 강제로 경비실로 끌고 들어 가 자기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는다고 하여 가위로 머리칼을 30cm가량 잘라 버리였다.(《한국일보》 1959. 3. 22)

3월 28일 밤 8시경 미제7사단소속 일등병은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의 산중에서 동두천리에 살고 있는 김춘자(34살)녀성을 칼로 협박하여 강간한후 그의 흉부를 마구 찔러 부상을 입혔다.(《인천신보》1959. 3. 31)

6월 7일 1시경 미제침략군 이등병 하라칼 아스칼(35살)은 서울시 룡산구 리태원동에서 15살의 소녀 김매자를 꾀여 서울시 중구 회현동에 끌고 가 강간하고 중상을 입힌후 도주하였으며 (《서울신문》 1959. 6. 8) 9월 8일 3시 30분경 미제7사단 31련대소속 이등병 기미엘 죤슨(20살)은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동두천리 창발부락에서 집으로 가는 리정순(32살)과 김남순(33살)녀성을 강간하려다가 항거에 부딪치자 삽으로 김남순을 내리쳐 중상을 입힌후 리정순을 다시 삽으로 때려 쓰러뜨리고 강간하는 야수적만행을 감행하였다.(《경인일보》 1959. 9. 10)

11월 14일 밤 8시경 미제 633공병중대소속 미제침략군 일등병 리챠드 엔. 아데네티(24살)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166번지에 사는 리소요(69살)로인의 집에 달려 들어 그를 마구 때린후 그의 딸(30살)을 강간하고 달아났다.(《동아일보》 1959. 11. 23)

12월 31일 밤 10시경 미제7사단 40땅크대대 2중대 중대장 대위 토마스 에취, 죤은 사병 2명을 시켜 병영철조망근처를 지나가던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가릉리 고등골에 거주하는 박화자(20살)와 동두천읍 생연리에 거주하는 윤순자(25살)녀성을 강압적으로 병영에 잡아 들여 창고에 몰아 넣게 하고는 가죽채찍으로 마구 때린 다음 그들의 옷을 벗기고 등과 하반신에 황색뼁끼칠을 하여 밤 11시 30분경에 부대밖으로 내쫓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의정부녀인뼁끼칠사건》이다. (《한국일보》 1960. 1. 19)

3. 남조선인민들의 재산과 재물에 대한 략탈, 파괴만행

△ 1957년
4월 22일 미제침략군 제24사단 헌병대원 80여명은 파주군 연풍리일대의 184세대를 포위하고 100여개의 점포와 주택을 불법수색하여 현금 7만환과 시가 약 1,000만여환에 해당하는 물품 2,324점을 강탈하였다.(《합동통신》 1957. 4. 22)

4월 14일 밤 10시 30분경 미제812보급중대 핼난데드와 크라이 클 등 3명은 경남영 1946호택시를 타고 가다가 부산시 대연동에 이르자 차를 멈추게 한 다음 갑자기 운전사 김종만(29살)에게 달려 들어 목을 졸라 매고 차밖으로 밀어 낸 다음 현금 3,000환과 택시를 빼앗아 가지고 달아 났다.(《동아일보》 1957. 4. 19)

4월 22일 오후 6시 30분경 미제24사단소속 미제침략군 7명은 파주군 림진면 선유리에서 윤재용이 경영하는 시계점에 달려 들어 진렬장유리를 들부신 다음 녀자용시계 3개와 남자용시계 8개를 강탈하였다.(《동아일보》 , 《련합신문》1957. 4. 25)

6월 23일 10시 15분경 부산시 수정동 78번지에 있는 미제침략군 송유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부근의 살림집 150여세대가 불에 타고 5살난 권정숙어린이를 비롯하여 37명이 죽고 30여명이 중화상을 당하였으며 2,000여명이 리재민으로 되였다. (《동아일보》 1957. 6. 25, 《국제신보》 1957. 6. 26)

8월 23일 밤 9시 30분경 송유관을 경비하던 K보안경비대소속 미제침략군 이등병 제임스 소니비(22살)와 론도로 바비 제이(18살)는 인천시 숭의동에 사는 왕명수(33살)의 상점에 달려 들어 《M-1》총과 총창으로 위협한 다음 5,000환과 많은 물품을 빼앗아 가졌다.(《인천신보》 1957. 8. 25)

10월 24일 경기도 파주군에 있는 미제1기갑사단 19련대 A중대소속 이등상사 베리케이 독가(31살)와 이등병 에벨로 아르. 쏘스만(25살)은 빈 깡통 10개에 밀가루를 넣어 《커피》라고 하면서 조신억(27살)에게 100딸라와 남조선돈 16만환을 받고 팔아 먹는 사기행위를 감행하였다.(《경향신문》 1957. 11. 9)

11월 3일 오후 인천수 부평지구 산동부락에서 미제침략군 2명은 길 가던 류경선(37살)을 살해한 다음 현금 5,200환을 가지고 달아 났다.(《경향신문》 1957. 11. 6)

△ 1958년
1월 10일 11시 40분경 미제침략군 1명은 부산시 범일동 미금당시계점에 달려 들어 백주에 시계를 강탈해 가지고 달아 나다가 주인 림상기가 뒤따라 오자 오히려 그를 마구 때려 머리와 허리에 중상을 입히였는가 하면(《국제신보》 1958. 1. 12) 4월 18일 밤 9시 30분경 장거리통신대소속 사병 네티월타 외 여러명의 미제침략군은 부산시 룡호동에서 엿장사 김관대(31살)의 엿 1,500환분을 먹은 다음 대금을 요구한다 하여 그를 마구 때리고 20m높이의 다리에서 떨어 뜨려 부상 당하게 하였다.(《산업경제신문》 1958. 4. 22)

5월 27일 밤 9시경 미제30병기중대소속 아렌(22살)외 1명은 서울시 롱산구 리태원동 앞도로상에서 길 가던 박경옥녀성에게 달려 들어 현금 6만환을 강탈하였다.(《동아일보》 1958. 5. 30)

△ 1959년
2월 18일 낮 1시경 미제508통신중대소속 미제침략군 일등병 베니스 엘. 토위디(19살)와 일등병 듀이 이. 오델(21살)은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료정을 찌프차로 들이 받아 문을 파괴한 다음 달려 들어 술과 녀성을 내라고 강요하다가 거절 당하자 종업원들을 구타하였는가 하면 그들의 이불까지 빼앗아 가지고 가다가 또다시 부근의 다른 상점에서 많은 금품을 강탈해 가는 략탈행위를 감행하였다.(《한국일보》 1959. 2. 19)

3월 8일 오후 5시 40분경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정류소에서 택시(서울영 352호)를 탄 미제침략군 3명은 문래동에 있는 미제570부대앞에 이르러 료금도 내지않고 내리다가 조수 강영길이 료금을 요구하자 단도로 그를 찔러 중상을 입히였으며 4월 3일 밤 8시 15분경 서울시 룡산구 한남동 도로상에서 전창로(43살)의 택시를 탄 미제침략군 일등병들인 워커, 쿠리, 이등병마틴은 운전사가 료금을 요구한다고 하여 마구 때리였을뿐아니라 도리여 현금 8,300환을 강탈하였다.(《한국일보》 1959. 4. 5)

4월 6일 저녁 미제침략군 서울 지구사령부소속 사병들인 로날드지. 스막크(19살), 로베트 이. 워커(23살), 토마스 에프, 웨일리(18살), 제임스 이. 쿨리(18살)는 서울역앞에서 택시(서울영4589호)를 타고 김포비행장으로 가다가 조용한 곳에서 운전사 류금세를 단도로 위협한후 목을 졸라 매고 그가 소지하였던 금품을 가지고 달아 났다.(《련합신문》, 《동아일보》 1959. 4. 7)

4월 9일 밤 11시경 미제침략군 304통신부대 일등병 어니알파카(23살), 아 더블유. 벨(19살), 빌리 할빈(19살), 상등병 죠세프 바릴로(18살)는 서울시 룡산구 갈월동 도로상에서 길가던 림희순과 임신 8개월인 그의 안해 박경자(22살)를 구타하고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금품을 강탈하였으며 이를 제지하려던 김영철을 발로 차서 하수도에 빠뜨려 중상을 입히였다.(《평화신문》 1959. 4. 11

5월 8일 오전 미공군 6175기지전대 제1파견대소속 일등병 제임스 브이. 데이비스(20살)와 레리 더블유. 컬멘(19살), 2등병 다니엘 지. 비라렐(23살)은 대구부근에서 상점에 달려 들어 닭알꾸레미를 빼앗은후 그것을 막으려는 주인 김용길(47살)을 마구 때리고 도망쳤다.(《한국일보》, 《동아일보》 1959. 5. 9)

5월 30일 밤 11시 30분경 미제1기갑사단소속 이등병 로버트디. 니콜(24살), 죠세프 발(19살), 케이 엔. 캐리(22살)는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20번지 앞도로상에서 리건상(33살)이 운전하는 찌프차를 저들의 차로 가로 막고 그에게 딸라를 내라고 협박하면서 마구 때리다가 8만환의 보증수표 한장과 현금 1,500환, 운전면허증 등을 강탈하였다.(《서울신문》 1959. 6. 1)

5월 31일 밤 11시경 미제침략군 화학품창고부대소속 병장 토마스 이. 메도우즈(28살) 외 3명은 문창식(31살)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는 료금을 요구하는 운전사를 단도로 찔러 죽이고 현금까지 가지고 달아 났다.(《인천신보》 1959. 6. 4)

6월 3일부터 9일까지의 기간에 서울시 중구 올지로에 있는 미극동지구공병대 헌병부장 소령 프란시스 폭스 등 미제침략군은 서울시 룡산구 후암동에 있는 정진숙녀성의 집을 여러차례 수색하고 물건들을 강탈하였으며 그를 헌병대사무실에 끌고 가 라체상태로 만들고 수색까지 하는 야만적인 행위를 감행하였다.(《한국일보》 1959. 6. 12)

6월 23일 밤 11시 30분경 미제침략군 2명은 서울시 종로구 내수동에 있는 김영구가 경영하는 술집에서 1,500환분의 술을 마시고 술값을 내지 않았을뿐아니라 가장집물들을 파괴한후 도망쳤다.(《련합신문》 1959. 6. 24)

8월 2일 인천 미제532병참 중대소속 일등병 스티븐 아르, 개부러스는 강옥자(22살) 녀성을 구타하여 중상을 입히고 손시계와 팔찌를 강탈하였다.(《동아일보》 1959. 8. 4)

10월 10일 밤 미제4유도탄사령부소속 일등병 래리 엘스 나이더는 춘천시 소양로 박찬식의 상점에 달려 들어 그를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상점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협하여 물건을 빼앗았는가 하면(《한국일보》 1959. 10. 13) 11월 미제침략군 서울지구사령부본부 파견대소속 이등병 토마스 에프, 웨이러(19살)는 룡산구 리태원동에 있는 홍숙자의 집에 몰래 들어 가 라지오를 도적질해 갔다.(《서울신문》 1960. 1. 13)

오늘도 남조선에서는 미제의 폭행과 살인만행이 때와 장소,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공공연히 감행되고 있다. 제반 사실들은 미제침략군을 그대로 두고서는 남조선인민들이 가슴 아픈 불행과 고통에서 언제 가도 벗어 날수 없으며 우리 민족이 당하는 치욕의 력사도 끝장날수 없다는것을 보여 준다.
조선인민은 력사가 흐르고 세기가 바뀌여도 침략자, 살인자이며 민족이 겪고 있는 모든 불행과 고통, 재난의 화근인 미제침략자들을 결코 용서치 않을것이며 그 대가를 천백배로 받아 내고야 말것이다.

주체92(2003)년 6월 13일
평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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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공동백서(4)

(평양 3월30일발 조선중앙통신)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 민족특별조사위원회는 29일 조선전쟁시기에 이어 정전후 남조선에서 미제침략자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들 가운데서 남조선출판물에공개된 일부 자료들을 재조사장악하고 년도별로 묶어 공동백서(4)를 발표하였다.그 전문은다음과같다.

미제침략자들은 조선전쟁이 끝난 때로부터 50년이 되는 오늘까지도 남조선을 강점한채 주인행세를 하면서 인간의 리성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수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강간,략탈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전시도 아닌 때에 남조선인민들을 대상으로 미군이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는 반인륜적인 극악한 범죄행위들은 미제야말로 우리 민족의 불구대천의 원쑤이며 백년숙적이라는것을 똑똑히 보여 주고 있다.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는 조선전쟁시기에 이어 정전후 남조선에서 미제침략자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들 가운데서 남조선출판물에 공개된 일부 자료들을 재조사장악하고 년도별로 묶어 공동백서로 발표한다.

1.남조선인민들에 대한 살인,폭행만행

-1954년
1월 24일 오후 3시경 미제침략군은 경기도 고양군 일산리 길가에서 정한영(45살)을 리유없이 권총으로 쏘아 살해하였으며 3월 15일 오전 9시경 미군렬차승무원 브라운외 1명은 대전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제135화물렬차에 <교통부>직원 리종근이 올랐다고 하여권총으로 그를 심히 구타하여 타박상을 입힌 다음 량팔,량손을 묶어 달리는 렬차에서 차 내려 뜨리는 귀축 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4월 9일 저녁 7시경 미제72헌병대소속 하사 딕슨은 서울시 청량리역 운전사무소앞에서 리경섭(29살)과 장난 삼아 씨름을 하다가 지자 조선사람에게 졌다는 분풀이로 권총으로 그를 쏘아 죽이였다.(<평화신문> 1954.4.12)
4월 30일 부산에 있는 미제7항만사령부의 미군은 조선인로동자들이 최저생활비의 10분의1도 못되는 임금을 반대한다고 하여 그들에게 총을 쏘아 2명을 죽였다.(<동아일보> 1954.5.1)
5월 3일 오전 9시 40분경 군용차를 몰고 가던 미제침략군 1명은 걸어 가던 대학생 류용봉(29살)의 모자를 뒤에서 잡아 채여 그가 차에 치워 죽게 하였다.(<평화신문> 1954.5.5)
5월 21일 2시 5분경 부산시 부산진역구내에서 미제772헌병대 대원들은 역에서 조차원으로 일하고 있는 정기조가 고역에 시달린 나머지 약 10분간 졸았다는 리유로 그를 헌병대에 끌고 가 폭행을 하여 절명시켰다.(<자유신보> 1954.5.24)
7월 2일 12시 35분경 미해병대소속 운전사 일등병 알트엘 스티워드(25살)는 서울시서대문구에서 청년을 총으로 쏘아 즉사시켰다.(<중앙신문> 1954.7.4)
7월 31일 저녁 8시 30분경 미제21륙군병원소속 미제침략군 1명은 부산시 대연동 371번지 김준식의 집에 달려 들어 식칼로 김영자(20살)와 박숙자(24살)를 마구 찔러 김영자는 즉사시키고 박숙자에게는 중상을 입혔으며 계속하여 길 가던 윤준호(44살)에게 중상을 입혔을뿐아니라 김삼만의 집에 뛰여 들어 그들 부부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달아 났다.

9월 10일 오전 10시 40분경 부산시 중앙동 4가에서 미친듯이 찌프차를 몰고 가던 미제침략군은 인도로 걸어 가는 사람들을 들이 받아 녀성 한명을 즉사시키고 박성춘(48살)에게 치명상을 입혔으며(<부산일보> 1954.9.11) 10월 3일 부산시 대연동에있는 미제21륙군병원소속 하사 젬비는 길 가던 송종만을 단도로 찔러 죽이였다.(<한국일보> 1954.10.12)

11월 1일 11시 10분경 미제24포병단소속 운전사 하사 도널은 서울시 성동구 송정동앞도로에서 차를 고속으로 몰다가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을 고의적으로 들이받아 송덕운을 즉사시키고 그밖의 7명에게는 중상을 입혔다.(<한국일보> 1954.11.3)

-1955년
1월 9일 오전 10시 서울시 성북구 석곳동에서 송유관을 지키던 미제침략군 경비병은 송유관에서 새여 나오는 휘발유를 깡통에 받았다고 하여 안복실(19살)을 <도적>으로 몰아총으로 쏘아 죽였다.(<동아일보> 1955.1.11) 1월 14일 <대한해운공사 부산지점>앞에서 미제침략군 운전사 도날드 이 후리클은 고속으로 차를 몰다가 길 가던 서병근외 5명을 깔아 죽이고 다른 4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며(<동아일보> 1955.2.11) 서울시 동대문구 리문동에서는 미제침략군 경비병이 안인숙(14살)을 무턱대고 총으로 쏘아 즉사시켰다.(<동아일보> 1955.1.15)

3월 4일 밤 10시경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금파리에 있던 미제24사단 21련대소속 침략군은 <통행금지구역에 접근하였다>는 <리유>로 리용수(19살),김옥순(29살),리용순(21살),김일남(30살),정상복(24살) 등의 녀성들에게 카빙총을 쏘아 전부 살해하였다.(<서울신문> 1955.3.8)
5월 18일 9시경 경상북도 금릉군 아포면 대신역에서 제54렬차에 타고 있던 미제침략군은 밭에 일하러 나온 어머니 리용단(26살)을 따라 와 놀고 있는 천진란만한 인영자(8살)와 그의 동무 서후률(7살)을 카빙총으로 쏘아 중상을 입혔다.(<경향신문> 1955.5.22)
6월 15일 미제침략군 중사 브라운은 대구시 칠성동에서 추교득(17살)을 리유없이 총으로 쏘아 즉사시켰으며(<령남일보> 1955.6.17) 6월 19일 인천에서 권총사격연습을 하던 미제침략군 1명은 인천사범학교 녀학생 송옥분(18살)을 연습과녁으로 쏘아 즉사시켰다.(<경향신문> 1955.7.28)
7월 24일 오후 5시경 미제6173부대소속 사병은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원정리에서 사는 8살난 고두기어린이가 부대근방에서 장난을 한다고 하여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한국일보> 1955.8.6)
8월 12일 월미도 앞바다에서 어로작업을 하는 어부들에게 미제침략군 초계정이 리유없이 포를 쏘아 신한균(33살)을 죽이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자유신문> 1955.8.13)
10월 22일 오전 8시 30분경 <대지공격훈련>을 하던 미공군소속 비행사는 경상북도 상주군 중동면 간상리에서 보리파종을 하고 있던 농민들을 훈련목표로 삼아 폭탄을 투하하여박문선(27살)을 즉사시켰다.(<경향신문> 1955.10.24)
11월 30일 오후 3시 5분경 미제55부대소속 일등병 트리스나피는 찌프차를 몰고 가면서 서울시 세종로에서 민윤식을 무턱대고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한국일보>,<동아일보>1955.12.1)
12월 4일 10시경 서울시 동대문구 리문동에 있는 미제8191송유관보급중대소속 일등병버질 에이 수피(22살)는 자기 앞을 지나가는 김병권(38살)을 아무 리유없이 총으로 쏘아 즉사시켰다.(<평화신문> 1955.12.5)

-1956년
1월 12일 오후 2시 30분경 미제침략군 제10포병대소속 일등병 보갈은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 300번지 앞도로상에서 달리는 차에 장갑준(18살)이 매달렸다 하여 그를 권총으로 쏘아 즉사시켰다.(<경향신문> 1956.1.14)
1월 21일 3시경 미제863수송대소속 미제침략군 2명은 부산항 제3부두앞에서 어로작업을 하고 있는 어선 <덕신>호외 한척이 자기들의 <신호에 불응한다>는 리유로 사격하여 배에서 일하던 김창식(32살)을 즉사시키고 신수복(31살) 등 3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7월 27일 미제침략군 사병 모리스 길조는 인천시 숭의동 438번지에서 살고 있는 장성권(42살)의 안해가 송유관에서 새여 나와 땅에 떨어 지는 휘발유를 좀 받아 가지고 왔다 하여 그의 집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방에서 자고 있던 장성권의 어머니 김선화(72살)를 불 태워 죽이였으며 11살,7살,2살 난 딸 3명에게 화상을 입혔다.
8월 9일 밤 9시 20분경 미제34련대 중포중대소속 사병놈은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 가던 윤명구가 보초소근처를 지나간다고 하여 총으로 쏘아 죽였다.(<한국일보> 1956.8.18)
9월 24일 경기도 파주군 문산리에 있는 미제24사단소속 일등병 훌벨(27살)은 아무런리유도 없이 서울사범대학 학생 김은검과 농민 우원환에게 권총을 쏘아 우원환을 즉사시키고김은검에게 중상을 입혔다.(<동아일보> 1956.9.26)
10월 13일 오후 6시 25분경 김포에 있는 미제6167부대 소속 이등병 사오피 헤데이는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오류리에 거주하고 있는 리성렬,김재철,김일만에게 카빙총을 쏘아 리성렬과 김일만을 살해하고 김재철에게 치명상을 입혔다.(<조선일보> 1956.10.15,<동아일보> 1956.10.17)
12월 8일 오후 5시경 미제7사단 37련대소속 일등병 케이오는 부산시 범일동에서 저녁을 먹고 밖에 나와 놀고 있는 16살의 우덕룡소년을 리유 없이 <M-1>총으로 사격하여즉사시켰다.(<부산일보> 1956.12.10)
12월 28일 밤 8시경 제124렬차에 타고 있던 미제침략군은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에사는 김상원을 조치원역에서 렬차에 끌어 들인 다음 그를 조치원역으로부터 약 4키로메터 떨어 진 전동면에 이르러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달리는 렬차에서 차 내려 뜨렸다.(<자유신문>1957.1.4)

2.남조선녀성들에 대한 릉욕,살인만행

-1954년
6월 14일 밤 9시경 인천시 룡현동 3구에 살고 있는 김희자(21살)의 집에 달려든 미제침략군 4명은 그를 집에서부터 약 500메터 떨어 진 산으로 끌고 가 강간하였을뿐아니라 이 만행을 보고 경찰에 알리려던 그의 할머니 조아무개로인을 심히 구타하여 중상을 입혔다.(<인천일보> 1954.6.16)
6월 23일 3시경 미군철도수송사령부소속 침략군 3명은 인천시 북성동 2가 2번지에서 살고 있는 함신숙(31살)녀성을 강제로 린근역 구내로 끌고 가 화물차안에서 집단륜간하였다.(<자유신보> 1954.6.25)
7월 5일 서울시 중구 을지로 1가 51번지 앞도로에서 미제침략군 30여명은 길 가는 리경순(33살)외 2명의 녀성들에게 집단폭행을 가하여 리경순을 졸도시켰으며 2명에게는 중상을 입히고 달아 났다.(<동아일보>,<서울신문> 1954.7.7)
8월 2일 밤 9시경 미제침략군 20여명은 서울시 영등포구에서 길 가는 리인순녀성을 때려 정신을 잃게 한 다음 집단적으로 륜간한 후 하수도에 처 넣고 달아 났으며(<평화신문> 1954.8.27) 같은 시각 다른 미제침략군 10여명은 19살가량 되는 처녀를 집단륜간하였다.(<평화신문> 1954.8.27)
9월 1일 11시경 미제침략군 경비병은 부산역구내를 통과하는 임신 5개월가량의 녀성이 자기의 더러운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 하여 총으로 쏘아 죽였다.(<민주신보> 1954.9.3)
11월 6일 오후 5시경 미공군소속 팔찌 죤지외 2명의 미제침략군놈은 전라북도 군산시 군산역구내를 통과하던 안복순(19살)에게 카빙총을 쏘아 멎어 서게 한 후 강제로 부근에있는 빈 화차안에 끌고 들어 가 륜간하였다.(<한국일보>,<동아일보> 1954.11.11)
11월 13일 4시경 남조선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오만성녀성의 집에 달려 든 미제침략군 보급부대사병 워카는 오만성녀성이 자기의 추잡한 요구에 불응한다고 하여 그의 집에 불을 질렀으며 그로하여 린근살림집 11동까지 모두 타버렸다.(<경향신문> 1954.11.17) 12월 23일 미제침략군 6명은 부산시 초량역구내에서 석탄을 줏고 있는 김영옥(26살)과 리금순(14살)을 끌고 가 목욕탕에 몰아 넣고 옷을 벗긴 다음 온갖 희롱을 다하였다.(<경향신문> 1954.12.29)

-1955년,1956년
<서울신문>에 의하면 미제야수들은 1955년 1월까지 남조선 각지에서 약 10만명의 녀성들을 미군<위안부>로 강제등록시키고 총검의 위협밑에서 그들에게 온갖 만행을 다 감행하였다.
그로하여 1954년 한해동안에 성병관계로 검진을 받은 녀성들만 하여도 연 100만명이나된다고 1월 17일 <동양통신>이 보도하였다.
2월 1일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서 미제침략군 4명은 20살 난 처녀에게 폭행을 가하였으며 이를 말리던 량아무개청년을 몽둥이로 때려 중상을 입혔다.(1955년 남조선<외무부 장관>이 <유엔군사령관>에게 보낸 편지자료)
7월 16일 밤 12시경 미제728헌병대소속 일등병 뮤린스 데웨일은 인천시 일신동에서 잠 자고 있는 13살 난 리아무개소녀의 방에 뛰여 들어 수욕을 채우려 하다가 그의 부모들의 제지로 하여 실현하지 못하자 권총으로 그들을 구타하여 부상을 입혔다.(<서울신문>1955.7.18)
9월 3일 미제7사단소속 미제침략군은 경기도 양주군 백성면에서 농민 신현오의 안해인 임신 10개월이 된 전보배(22살)를 릉욕하려 하다가 반항한다 하여 단도로 배와 가슴을 찔러 무참히 살해하였다.
1956년 1월 22일 밤 10시 40분경 미제침략군 2명은 서울시 영등포구 도림동에서영화를 보고 돌아 오는 최금임(19살)녀성을 강간하려다가 응하지 않는다 하여 권총으로 쏘아 중상을 입혔으며(<동아일보> 1956.1.24) 6월 어느날에는 미제침략군 사병 랜솜이 인천시에서 사는 14살 어린 소녀를 강간하였다.(<동아일보> 1957.3.24)

3.남조선인민들의 재산과 재물에 대한 략탈,파괴만행

 -1953년
9월 27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시 종로4가 83번지에 거주하고 있는 남상일(82살)의 시계점에 뛰여 든 3명의 미제침략군은 로인을 구타하여 쓰러 뜨린 후 진렬장을 파괴하고 시계를 강탈하여 가지고 달아 났다.(<경향신문> 1953.9.29)
11월 22일 저녁 7시 15분경 서울에서 부평까지 류태옥(42살)의 택시를 타고 가던미제침략군은 조용한 곳에서 단도를 빼들고 그를 협박한 후 차창밖으로 밀어 던지고 택시를강탈하여 가지고 영등포 방면으로 달아 났다.(<서울신문> 1953.11.24)

 -1954년
2월 16일 3시 35분경 군용차를 몰고 가던 미제침략군은 부산에 있는 일신려관을 들이받아 완전파괴하였으며 잠자던 손님 3명을 즉사시켰다.(<경향신문> 1954.2.18)
10월 9일밤 10시경 미제침략군 1명은 서울시 성동구 신당동에 있는 채규선의 상점에 달려 들어 그를 쇠절구공이로 때려 죽인 후 담배 11갑과 현금 150환을 략탈하여 가지고 달아 났다.(<한국일보> 1954.10.12)

-1955년
1월 17일 부산시 대창동3가 2번지 우만수(36살)의 상점에 달려든 미제침략군 15명은 그를 집단구타한 후 칼로 목을 찌르고 상품을 략탈하였으며 대창동 도로상에서 김덕림(35살)과 박재우(37살)를 집단구타하고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힌 다음 그들의 소지품을강탈하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 있던 여러명의 녀성들도 실신상태가 되도록 곤봉으로 집단구타하였다.
5월 1일 부산 미제414부대소속 일등병 라니 하지상은 부산시 초량동 400번지에 사는김길자에게 많은 수면제를 먹여 실신케 한후 라지오를 비롯한 금품을 강탈하였다.(<민주신보>1955.5.4) 월 31일 부산시 영주동
에서 미제 772헌병대 부산제2중대소속 이등상사 악센 엔지외1명은 리만우(48살)와 김덕술을 곤봉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려 실신상태에 빠뜨려 놓은후김덕술의 집 유리창을 부시고 달아 났다.(<국제신보>1955.6.2)
12월 7일 오후 6시경 충청남도 천만읍에서 미제침략군 3명은 김흥룡의 시계점에 달려 들어 권총으로 주인을 구타한 후 시계 5개를 강탈하였다.
12월 19일 밤 8시경 미제침략군 2명은 리명규(32살)가 운전하는 영업차를 타고 부산역에서 초량동 제4부두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료금지불을 요구하는 운전사를 구타한 다음칼로 온몸을 찔러 치명상을 입히였다.(<국제신보>1955.12.21,<경향신문> 1955.12.22)

 -1956년
3월 18일 경기도 양주군 백성면 방성리에서 미제7사단소속 침략군 2명은 박명제(16살)에게 커피 6상자를 팔아 주겠다고 하고 대금 100딸라를 가져 오게 한 다음 그를 산중에 끌고 가서 살해하고 현금을 략탈하였다.
4월 10일 새벽 미제침략군 2명은 부산시 주거리에 있는 김영훈의 주택에 침입하여 권총으로 위협한 후 현금 6만여환과 옷들을 강탈하여 가지고 달아 났다.
7월 18일 김포비행장소속 미제침략군 하사 단스(21살)는 물건을 사준다고 하면서 로무자 송세훈(16살)으로부터 50딸라를빼앗았는데 그가 돈을 돌려 줄것을 요구하자 권총 3발을 쏘아 살해하였다.(<동아일보> 1956.7.20)
8월 11일 오후 4시 30분경 <36gp547e> 표식을 단 6대의 군용차에 분승한 미제침략군 70여명은 경기도 양주군 도봉리에 있는 잡화상점들과 주택들에 뛰여 들어 물건을 모두 빼앗아 싣고 달아 났다.(<한국일보> 1956.8.13)
9월 18일 밤 12시경 백색복면을 하고 단도를 든 미제침략군 1명은 경기도 파주군 선유리에서 사는 리병성의 집에 달려 들어 잠자고 있는 명심순(25살)녀성의 가슴에 칼을 대고 위협한 다음 금품을 강탈하였다.(<서울신문> 1956.9.20) 11월 5일 밤 11시 40분경 리강덕이 운전하는 찌프차를 타고 가던 미제침략군 1명은그가 대구시 교동에 있는 누이집에 잠간 들린 사이에 차를 몰고 달아 났다.(<대구일보>1956.11.7)
11월 17일 저녁 6시 30분경 미제7사단 32련대 소속 이등병 다레스 오일(20살)과 일등병 왓슈ㄴ 에아니 스트(20살)는 리석락(47살)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가다가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중학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권총으로 그의 얼굴을 구타하여 치명상을입힌 후 현금 4,800환을 강탈하였다.
12월 2일 오후 6시 45분경 미제501통신대대소속 침략군 3명은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347번지에서 김현상(32살)의 집에 달려 들어 라지오를 팔겠다고 하고는 110딸라를 받아 가진 후 주인을 구타하고 돈과 라지오를 가지고 달아 났다.(<동아일보> 1956.12.4)

전후 몇년간의 사실들은 미제야말로 인간의 탈을 쓴 극악한 살인마,야수들이며 침략자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남조선인민들이 가슴 아픈 불행과 고통에서 벗어 날수 없고 우리 민족이 당하는 치욕의 력사도 끝장 낼수 없다는것을 뚜렷이 보여 준다.
온 겨레는 범죄와 재난의 화근인 미제를 이 땅에서 몰아 내기 위한 반미성전을 더욱 힘차게 벌려야 할것이다.

전민특위 공동백서(3)-미군의 야수적폭격과 포격 고발

(평양 12월12일발 조선중앙통신)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가 11일 조선전쟁시기 공화국북반부 지역에 대한 미군의 야수적폭격과 포격만행가운데서 그 일부를 묶은 공동백서(3)를 발표하였다.
올해 4월과 5월에 이어 세번째로 발표된 장문의 이 문건에는 1951년 1월부터 1953년 7월까지의 기간의 자료들이 들어 있다.
공동백서(3)은 다음과 같다.

미제침략자들은 지난 조선전쟁시기 공화국북반부를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다가 쫓겨 난 이후에도전선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하고 조선민족을 멸살하기 위하여 공화국북반부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과 포격을 더욱 발광적으로 감행함으로써 희세의 살인마,극악한 야수로서의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는 1951년 1월부터 1953년 7월까지의 기간 공화국북반부 지역에 대한 미군의 야수적폭격과 포격만행가운데서 그 일부를 묶어 이 공동백서를 발표한다.

1.도시와 농촌파괴와 주민대량학살 만행

조선전쟁 초시기부터 감행한 미군의 <초토화작전>에 의하여 공화국북반부의 도시와 농촌은 이미 파괴될대로 파괴되여 있었다.
미제가 줄여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미군은 전쟁을 도발한 이후 330일동안에만 하여도 연 20만 180대의 비행기를 출격시켜 8만 9,400t의 폭탄과 9,052만 5,000발의 기총탄,24만 7,000여개의 로케트탄,700만gal(갈론)의 나팜탄을 공화국북반부지역에 퍼 부어 거의 모든 도시와 농촌을 재더미로 만들었다.

미제승냥이들은 1951년에 접어 들면서부터 조선사람을 멸족시키고 저들의 음흉한 군사적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B29>를 비롯한 각종 폭격기,추격기,전투기들과 미제7함대의 함선들까지 총동원하여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폭격,포격만행을 보다 광란적으로 감행하였다.

미제는 1951년 1월부터 3월까지의 기간에 함경남도에 연 3,821대의 비행기들을 출격시켜 6,770여개의 각종 폭탄과 수만개의 소이탄을 투하하여 8,464동의 살림집과 339동의 공공건물 그리고 2,896호의 농가를 파괴소각하였다.
함경북도에는 연 2,149대의 미군비행기들이 날아 들어 6,940여개의 각종 폭탄과 수백개의 소이탄을 퍼부음으로써 6,700호의 농가와 시,군소재지들의 3만 8,269동의 살림집이 불 타게 하였다.
5월 6일 남포시에 날아 든 미군 <B29>폭격기 12대는 43개의 대형폭탄과 6,000여개의 소이탄을 투하하여 120여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1,698동의 살림집을 완전히 파괴소각하였다.

원산앞바다에 기여든 미군함선들은 5월 23일 밤중에만도 시내에 6,750여발의 함포탄을발사하여 65동의 공공건물과 49동의 살림집을 파괴하였으며 주민 11명을 살해하고 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미제야수들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포격만행으로 하여 5월현재 남포시에는 6만명의 인구중 3만여명,원산시에는 12만3,100여명의 인구중 5만7,0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개천시에서는 8만명이상이였던 인구가 약 6만명으로 줄어 들고 1만3,000호의 집가운데서 6,500호이상이 파괴되였다.
6월 10일 미군폭격기 13대는 사리원시의 살림집지구에 70여개의 대형폭탄과 380여개의 소이탄을 떨구어 44명의 부녀자를 포함한 69명의 시민을 살해하고 69동의 살림집을불 태워 버리였다.

미군의 만행은 1951년 하반기에 들어 서면서 더욱 악랄해 졌다.
7월부터 8월 10일까지의 장마철기간에 황해남북도일대에 연 1만8,685대의 미군비행기가 3,202회에 걸쳐 폭격과 기총사격을 감행하고 미군함선들이 531회의 함포사격을 가하여 4,458동의 살림집을 파괴소각하고 625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6,894명의 평화적주민을 살해하였다.
신평군 신평읍에서만도 7월 19일 미군비행기들은 밭에서 일하는 24명의 농민에게 48개의 류산탄을 뿌려 그들중 23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7월 11일부터 8월 20일까지사이 평양시에는 250회이상에 걸쳐 연 1만대이상의 미군비행기들이 날아 들어 4,000여개의 폭탄을 투하하여 4,000여명의 시민을 살해하고 2,500명이상에게 중상을 입히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7월 30일 하루동안에만도 <B29>폭격기를 포함한 135대의 각종 미군비행기들이 비내리는 날씨를 리용하여 평양시내에 2,000여개의 각종 폭탄을 4시간동안 투하하여 529명의 주민을 즉사시키고 329명에게 부상을 입히였으며 840동의 살림집을 파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조국광복 6돐을 맞이하는 전날인 8월 14일 평양시상공에 날아 든 650대의 미군비행기들은 무차별폭격으로 1,547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2,020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980동의 살림집을 파괴소각하였다.
또한 미군은 8월 한달동안에 함경북도에 2,120여개의 폭탄과 6,090여발의 함포탄을 퍼부어 2,857명의 평화적주민을 살해하였으며 당시의 라진군에만도 8월 25일 하루동안270여개의 폭탄을 투하하여 69명의 시민을 죽이고 150개의 토굴집을 파괴하였다.

11월부터 12월까지 미제야수들은 함경남도에 연1,363대의 비행기들을 들이밀어1,920여개에 달하는 폭탄을 마구 퍼부음으로써510동의 살림집을 완전히 파괴하고1,932명의 주민을 죽이는 범죄적행위를 저질렀다.
미군의 야만적인 폭격에 의하여 평양시에서는 1951년 12월 31일현재 8만여동이던 살림집중에서 6만 4,000여동이 파괴되였으며 1951년 한해사이에 4,768명의 주민이살해되고 2,438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리하여 전쟁전 46만 4,000명이였던 평양시의 인구가 1951년 12월 31일에는 18만 1,000명으로 줄어 들게 되였다.

1952년에 들어 서면서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미군의 폭격,포격만행은 더욱 우심해 졌다. 1952년 1월 24일과 27일 미군비행기들은 자강도의 거의 모든 군들의 소재지에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하였으며 27일 폭격시에만 하여도 자강도의 농촌들에서 138명의 소년을포함한 242명의 주민이 살해되거나 부상 당하게 하였다.
2월 18일 미군비행기 34대는 혜산시 주민지대에 210여개의 폭탄을 투하하여 48명의주민들을 폭사시키고 400여동의 살림집을 파괴하였으며 3월 25일 하루에만도 63대의 미군비행기들이 연 39회에 걸쳐 평양시 중구역,선교구역,사동구역,력포구역의 주민지대들에기여 들어 1,370개의 폭탄을 퍼부어 120명이상의 주민을 살해하고 124동의 토굴집과 기타 건물들을 파괴하였다.

4월 6일 미군은 원산시 중청동에 함포사격을 해댔으며 4월 11일에는 구장군,5월 9일에는 중화군,5월 13일에는 대동군일대에 나팜탄과 지뢰탄을 비롯한 각종 폭탄을 떨구고 기총사격을 가하여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하고 방대한 면적의 논밭과 산림을 황페화시켰으며 관개망들을 파괴하였다.
미군비행기들은 5월 19일부터 6월 17일 사이에 강동군,청진시,사리원시,평산군,정평군에 날아 들어 폭격과 기총사격으로 밖에서 놀고 있던 어린이 9명을 비롯하여 무고한 주민들을 수많이 살해하고 농가와 건물들을 파괴소각하였다.

6월 23일과 24일 이틀동안에 걸쳐 수백대의 미군비행기들은 트루맨과 미합동참모본부가 비준한 계획에 따라 수풍발전소에 대한 폭격을 대대적으로 벌린데 이어 장진강,부전강,허천강발전소들도 폭격하여 혹심하게 파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7월 6일과 13일 미군 <B29>폭격기들은 함흥시내의 밀집된 주민지대에 400여개의 대형폭탄을 퍼부었으며 7월 11일과 12일 새벽까지 사이에는 평양시와 그 주변일대에 전쟁이 시작된 이래 가장 잔인무도한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하였다.

평양시에만 하여도 미군의 6,000여개의 나팜탄,지뢰탄,파렬탄 및 시한탄이 투하되여 1,600개이상의 토굴집이 파괴소각되고 약 6,000명의 부녀자와 로인,아이들이 살해되였으며 주민밀집지대였던 서평양지구가 페허로 되였다.
7월 11일부터 31일까지의 기간에 자강도에 날아 든 미제공중비적들은 1,000여개의 나팜탄을 비롯한 약 6,000개의 폭탄을 퍼부어 200개이상의 농촌마을을 페허로 만들었다.
이 도에서 7월 한달동안의 희생자수는 1951년 1년간의 도내 전체 희생자수의 3.5배에 달하였다.

8월 5일 미극동군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북조선에는 쓸어도 걸릴것이 없게>하기 위해 북조선의 78개 도시를 <지도우에서 완전히 없애버리겠다>고 하면서 이른바 <타격계획>을 발표한 후 미군의 폭격,포격만행은 더욱 대대적으로 감행되였다.
미제는 8월 한달동안 강원도에만도 1만 684개의 폭탄을 주민지대에 떨구었으며 8월 10일 새벽 1시부터 4시사이에는 평양시의 주민밀집지대에 10여차의 맹폭격을 가하여 로인,어린이,부녀자들을 포함한 1,000여명의 평화적주민을 학살하고 수많은 살림집과 토굴집을 파괴하였다.

미제공중비적들은 9월 25일에는 평양시 형제산구역에,9월 26일부터 10월 23일 사이에는 홍원군에,9월 28일에는 랑림군에 각종 폭탄 5,370여개를 떨구어 542명의 주민을 살륙하고 362호의 농가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미제살인귀들은 10월 8일부터 29일까지의 기간에 3,000대이상의 폭격기,전투기들을 동원하여 평양시와 그 주변에 주야간 30여차의 맹폭격을 가함으로써 수많은 시민들을 살해하고 수백개의 토굴집과 살림집들을 파괴하거나 불 태워 버리였다.

같은 기간 황해남북도 일대의 도시와 농촌들에 날아 든 미제야수들은 5,000여회의 폭격을 가하여 14개의 군소재지와 27개의 부락을 완전히 불 태워 버렸거나 파괴하고 8,000여정보의 농토를 황페화시켰으며 막대한 인적피해를 주었다.
미제는 10월 9일 하루동안에만 하여도 160대의 비행기로 1,110여개의 폭탄을 강계시에 떨구어 608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242동의 살림집과 많은 토굴집을 파괴소각하였다.
10월 15일 미군 <B29>폭격기들은 함경남북도의 거의 모든 군들과 리들에 대한 폭격을 일제히 감행하였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미군함선들은 함경남북도의 해안지대들에 대한 맹렬한 함포사격을 감행하여 367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7,000여정보의 농경지를 황페화시켰다.

10월 18일과 19일 200여대의 미군비행기들은 두번에 걸쳐 대동군일대의 농가와 논,수수밭에 약 2,500개의 대소폭탄을 쏟아 부음으로써 전번 폭격에서 파괴되지 않은 살림집의 반수이상을 파괴하고 어린이만도 386명을 살상하였다.
10월 19일 미군승냥이들은 98대의 중폭격기들을 동원하여 함흥시와 그 주변에 대한 폭격과 기총사격을 주야간 들이댐으로써 시내의 남부지역에서만 하여도 273명의 주민이 죽거나 부상 당하였으며 시내는 완전한 재더미로 변하였다.

10월 20일,21일,22일,23일,25일,28일 미제는 강원도의 군과 리소재지들에 야간폭격을 들이대여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많은 농토와 산림을 황페화시켰으며 8개의 어촌을 완전히 페허로 만들었다.
10월 29일 밤 2시경 미군야만들은 불 타는 집과 건물에서 간신히 살아 교외로 빠져 나온 수백명의 평양시민들에게 조명탄까지 걸어 놓고 무려 3시간동안이나 폭탄을 퍼붓고 기총사격을 가하면서 류혈적인 참극을 빚어 내였다. 이날 약 260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되고 284명이 부상 당하였는데 그중에는 2살부터 14살까지의 어린이 247명과 32명의 늙은이가 포함되여 있었다.

10월 31일 미군 <B29>폭격기 16대는 원산시 주민지구에 160여개의 폭탄을 투하하여 215명의 주민을 살륙하고 393개의 토굴집을 파괴하였으며 11월 17일 8시 20분부터 무려 10시간동안 청진시에 무차별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했는가 하면 순양함 1척과 10척의 구축함은 240여발의 함포탄을 시내 살림집지구들에 쏘아 대여 225개의 토굴집을 파괴하고 189명의 주민을 살해하였다.
이외에도 미제야수들은 11월 23일과 28일 평양시와 신의주시,의주군에 대한 무차별적인폭격을 감행하였다.

미군은 1952년 1년동안에만도 공화국북반부의 평화적도시와 농촌들에 20여만개의 대,중폭탄을 투하하였으며 5억여발의 기총탄을 란사하고 40여만개의 로케트탄,1,500여만개의나팜탄을 퍼붓는 범죄행위를 감행하였다.
평양시에만도 미제공중비적들은 지뢰탄,소이탄,세균탄을 포함한 각종 폭탄 5만 2,380개를 투하하였다. 이것은 평양시의 매 당 1,000개의 폭탄을 떨군것으로 된다.

1953년에 들어서면서 미제침략자들은 아이젠하워의 <신공세>기도를 실현하기 위한 유리한조건을 마련해 보려고 전선에서 최후발악하는 한편 후방에 대한 폭격과 포격만행을 더욱 발광적으로 감행하였다.
1953년 1월 1일과 5일,22일,23일 미군비행기들은 평양시의 주민지구에 깊은 밤중에도 폭격을 련이어 들이대여 148명의 주민들을 살해하고 570여동의 살림집과 토굴집을파괴하였다.
1월 2일에는 <b29>를 포함한 약 50대의 미군비행기들이 대동군,룡강군,강서구역일대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을 감행하였다.
이날 남포시 교외에서만도 100여호의 농가가 파괴되고 수많은 농민들과 어린이,녀성들이 무참히 학살되였다.

1월 7일 새벽 2시 미군폭격기 2대는 정평군 정평읍과 그 주변지역에 각종 폭탄 140여개를 쏟아 부어 47명의 어린이와 33명의 늙은이를 포함하여 잠자고 있던 수많은 주민들을 무참히 살륙하고 190여동의 살림집을 파괴소각하였다.
미제야수들은 1월 10일부터 5일동안 박천군에 련일 발광적인 폭격을 감행하였는데 이때 어린이들을 살해할 목적으로 교활하게도 각양각색 꽃모양의 소형탄이 장치된 지뢰탄을 사용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14일에는 고원군,16일에는 순천시,17일 에는 홍원군,19일에는 사리원시,20일에는 원산시에 집중공습과 함포사격을 들이댄것을 비롯하여 매일과 같이 공화국북반부 각지에서 야만적인 폭격과 포격만행을 일 삼았다.
1월 21일에만도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야밤삼경에 미군 <B29>폭격기 20대는 10여차에 걸쳐 대형폭탄 200여개를 비롯한 각종 폭탄을 함흥시 주변 농촌들에 퍼부어 320여호의 농가와 많은 량곡을 재더미로 만들고 2,000여명의 무고한 주민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이날 10여명의 가족을 가진 도유친농민을 비롯한 27세대의 가족이 멸살 당하였다.

1월 24일 새벽 2시경에는 미군폭격기 수십대가 평양을 또다시 폭격하여 36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100여명을 폭사시키고 수백명의 주민이 한지에 나앉게 하였다.
미제야수들은 3월 7일 밤에는 대동군의 3개 마을에 20분간에만도 500여개의 대소폭탄을 퍼부어 전부 재더미로 만듦으로써 많은 시체를 재더미와 흙속에서 파내지 않으면 안되게하였다.
4월 13일 미군승냥이들은 120여대의 각종 전투기를 동원하여 청진시내와 주변 산골짜기들에 파렬탄,소이탄을 포함한 각종 폭탄 400여개를 퍼붓고 60여발의 함포탄을 쏘아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학살하였으며 병원과 소학교,수많은 토굴집과 살림집을 파괴소각하였다.

미군야만들은 국제협약과 전쟁법규도 란폭하게 유린하면서 관개용 저수지들을 마구 폭격하는 범죄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미군은 1953년 5월 13일과 14일 평원군 석암저수지(견룡저수지)에 36대의 전투폭격기를 내몰아 4차에 걸쳐 40여개의 폭탄을 퍼부어 저수지제방과 수문을 파괴하였다.
결과 당시 대동군과 순안군의 20개리 70여개 부락에서 800여호의 농가가 물에 잠기거나 파괴되였으며 400여명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였다.또한 약 6,000여정보의 농경지가 침수,류실되였으며 5,000여명의 농민들이 농경지와 집짐승 그리고 종곡을 잃고 리재민으로 되였다.

미제는 5월 15일과 16일에 당시 순천군에 있는 대봉산저수지에도 집중폭격을 들이대였다.
이틀동안 련이어 날아 든 미제공중비적들의 야만적인 폭격에 의하여 저수지의 제방 60m가파괴되고 막대한 저수지물이 부근일대를 휩쓸어 60만 9,000여평의 농경지가 침수,류실되였다.
5월 21일 6대의 미군 <B29>폭격기들은 불과 일주일전에 감행한 석암저수지 폭격으로말미암아 리재민이 된 대동군 지구의 주민들이 림시로 살고 있는 토굴집들을 야수와 같이 폭격하였다.
이날 새벽 2시 30분경 리재민들이 깊이 잠든 틈을 리용하여 갑자기 달려든 미군폭격기들은 6차에 걸쳐 600여개의 폭탄을 퍼부어 120여명을 살해하고 수백개의 토굴집을 파괴하였다.
미제는 그 다음날 새벽에는 대동군의 한 저수지에 대한 폭격을 감행하여 그 일대를 물에 잠기게 하였다.

6월 12일부터 15일까지 사이에 미제공중비적들은 청진시 주변농촌과 부령,회령,경성,어랑,화성,화대,길주,김책 등 함경북도일대에 끊임없이 날아 들어 수많은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가하였다.
6월 24일부터 29일에 이르는 6일간 미제는 흥남시와 함주,영광,락원,북청,홍원 등 시,군에만도 각종 전투폭격기들을 들이밀어 폭탄을 마구 퍼부음으로써 100여개의 토굴집과농가들을 파괴하였으며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였다.

6월 29일 오후 5시경 염주군 농촌주민지대에 무리로 달려 든 미군전투폭격기 28대는 30여호의 농가와 토굴집을 파괴하고 수많은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미제침략군은 정전담판이 최종단계에 들어선 시기에도 야수적인 폭격,포격만행을 계속하였다. 7월 1일 밤 함주군 일대에 날아 든 미군폭격기 7대는 농촌주민지대에 250여개의 폭탄을 투하하여 200여호의 농가와 토굴집을 파괴하고 1만 5,000여평의 밭을 황페화시켰으며 같은날 이천군 일대에서는 갑자기 날아 든 미군비행기들의 기총사격으로 많은 농가들이순식간에 불 타버리고 수십명의 농촌부녀자들이 무참히 희생되였다.
7월 2일 황주군과 안악군 등지의 주민지대를 목표로 날아 든 미군 <B29>폭격기와 전투기들은 400여개의 각종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근 100명의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살륙하고 80여호의 농가와 토굴집을 형체없이 만들었으며 8,000여평의 농경지에 피해를 입혔다.
7월 5일 어랑군과 김책시 해상에 침입한 미군구축함들은 함포사격으로 수많은 어린이들의 생명을 앗아 가고 살림집들을 파괴하였다.

미제승냥이들은 7월 6일에는 문덕군에,7일에는 김책시에,8일에는 함주군과 흥남시일대에,10일에는 순천시와 고원군 일대에 련이어 날아 들어 무차별적인 폭격과 기총사격으로 헤아릴수 없는 인적,물적피해를 입혔다.
7월 12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평양시와 평원군,은천군,안악군,어랑군 등지의 주민지구와 농촌지대들에서는 미군전투기와 <B29>폭격기들의 야수적인 폭격이 하루종일 계속되였다.
이날 오전 10시 30분경 은천군에 날아 든 미군폭격기 2대는 논밭에서 김매는 농민들을향하여 20여개의 폭탄을 투하하는 동시에 20여회에 걸친 맹렬한 기총사격을 가하여 무리로 쓰러뜨렸으며 같은 날 오후 1시경에는 안악군 농촌부락들에 소이탄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가하여 10여호의 농가를 불 태우고 수많은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2.교육,문화,보건기관,민족문화유산 파괴만행

미제침략자들은 조선전쟁을 발발한 첫날부터 공화국북반부의 교육,문화,보건기관들과 문화유적들을 대대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 초에 이르러서는 공화국북반부의 학교,병원,극장,휴양소,구락부 및 문화유적의 거의 전부가 파괴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제침략군은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날까지 공화국북반부의 교육문화발전을 억제하고 우리 민족이 이루어 놓은 찬란한 문화전통과 그 재부를 말살하려는 목적밑에 파괴행위를 계속하였다.

미군의 야수적폭격으로 하여 1951년 5월 현재 평양시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과 단과대학 6개,소학교 43개,중학교 20개,전문학교 5개,기술전문학교 4개,야간성인학교 20개 등 99개의 학교가,남포시에서는 각급 학교 24개,개천시에서는 고급중학교 1개와 중학교6개,소학교 31개,강계시에서는 사범학교 2개,림산학교 1개,고급중학교 1개,소학교 4개,사리원시에서는 11개의 학교가 무참히 파괴되였다.
6월 10일 미군폭격기 4대는 북청군에 21개의 폭탄을 투하하여 4개의 소학교와 1개의중학교를 완전히 파괴하고 공부하고 있던 수십명의 학생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9월14일 미군의 폭격으로 원산시 주변농촌에 소개된 제1중학교가 불타 버리는것과 함께 3명의 학생이 숨지였다.
미제는 9월 21일 천내군 풍전리를 폭격하여 소학교와 2개의 병원을 파괴하고 8명의 학생과 17명의 환자를 학살하였다.
11월7일 미군전투기 8대는 숙천군을 폭격하여 숙천고급중학교건물을 페허로 만들고 35명의 학생을 살해하였다.
1952년 1월부터 11월에 이르는 기간 미군야수들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복구신축된 각급학교들이 파괴 또는 소각된것은 무려 200여개에 달한다.

평양시 중구역 지구에서는 1952년 7월 11일부터 12월 31일사이에만도 56개의 분교사가 폭격당하였고 자강도와 평안북도를 제외한 도들에서 미군의 폭격에 의하여 1952년에 희생된 학생수는 수천명을 헤아리고 있다.
교육기관들에 대한 미제의 야수적인 폭격행위는 리원,길주를 비롯한 많은 지역들에서 끊임없이 감행되였다.
6월 15일 27대의 미군비행기들은 김책시를 폭격하여 도서관과 3개의 구락부를 불 태워버리였으며 7월 3일에는 함경북도 고무산골짜기에 있는 소학교까지 폭격파괴하고 학생 5명을 살해하였다.
7월 19일 미제공중비적들은 평양제10소학교에서 국가졸업시험을 치고 있는 학생들과 교정에서 뛰놀고 있는 수백명의 학생들에게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하여 80여명을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고 6개의 교실을 완전히 파괴하는 범죄행위를 감행하였다.

미제는 9월 16일 사리원시 부근에 있는 고아원에도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하여 18명의 고아를 살해하고 건물을 파괴하였으며 29일에는 창성군에 있는 애육원과 유자녀학원에 12대의 비행기로 맹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하여 건물들을 완전히 파괴하였다.이 폭격에 의하여 43명의 어린이가 살해되고 17명이 부상 당하였다.
10월 16일 미군비행기들은 자강도 강계시에 대한 무차별적폭격을 감행하여 3개의 소학교와 4개의 애육원을 파괴하였으며 17명의 어린이를 살륙하였다.
10월 18일과 19일 대동군에 대한 폭격시에는 18개의 소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진료소와 종합병원,가축병원들이 파괴되였다.

10월 20일,21일,22일,23일,25일,28일 강원도의 군소재지들에 대한 야간폭격을감행한 미군비행기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을뿐아니라 2개의 대학과 3개의 전문학교를 포함한 수십개의 학교와 병원을 파괴하였다.
미제승냥이들의 폭격,포격만행에 의하여 공화국북반부의 교육시설들은 거의 다 파괴되였으며 남은것은 안전지대에 건설된 일부 가교사와 지하교실뿐이였다.
미제에 의하여 전쟁기간 파괴된 소학교와 중학교,고급중학교,사범전문학교수는 3,746개이며 교실수는 2만 4,804개이다.
이것은 전쟁전 학교수의 72프로,교실수의 88프로에 달하는것이다.

미제침략자들은 우리 인민의 문화정서생활의 중요한 거점의 하나인 극장,영화관을 비롯한 문화시설들에 대한 파괴행위도 서슴없이 감행하였으며 심지어 교회당도 마구 폭격하였다.
1951년 1월부터 6월까지 사이에 미군폭격기들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의하여 평양모란봉극장을 비롯하여 평안남도도립극장,평양국립극장,함흥영화관,함경남도도립극장,원산시립도서관,강원도 철원도서관,황해남도 장연영화관 등이 혹심하게 파괴되였으며 7월 하순부터 8월 중순사이에는 평양시립극장을 비롯하여 평양시내의 2개의 영화관과 원산영화관,강서영화관이 완전히 파괴되였다.
7월 30일 미제야수들은 평양교외에 있는 국립영화촬영소(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수십개의 폭탄을 투하하여 파괴하였으며 8월 14일에는 평양해방투쟁관(조선혁명박물관),평양레코드제작소,국립예술극장을 폭격하여 파괴하였다.

전쟁기간 미군의 폭격에 의하여 평양시에서는 9개의 극장과 20개의 영화관,64개의 교회당이,사리원시에서는 1개의 도서관,4개의 구락부,4개의 교회당이,안악군에서는 2개의 교회당이,강계시에서는 4개의 교회당이 파괴되였다.
그뿐아니라 미군의 폭격으로 신의주시에서는 17개의 교회당가운데서 2개만이,남포시에서는 1개의 작은 교회당만이 남게 되였다.
미제승냥이들은 적십자표식이 있는 건물들과 병원은 공격하지 않기로 되여 있는 국제협약마저짓밟고 보건기관들에 대한 파괴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1951년 1월 3일과 4일 평양중앙병원의 지붕우에는 고도 6,000∼8,000m에서도볼수 있는 적십자표식이 뚜렷이 띄여 져 있었지만 미제공중비적들은 30m의 저공으로 날며폭탄을 마구 투하하여 병원을 파괴하고 보건성건물을 페허로 만들었다. 미제는 2월 강계시중앙병원에 대한 폭격을 감행하여 의사와 환자 200여명을 살해하였으며9월 23일에는 안변군에 있는 양로원을 완전히 파괴하고 로인 27명을 학살하였다.

미제공중비적들은 10월 13일 성천군료양소에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하여 33명을 살해하고50동의 건물을 파괴하였으며 16일에는 강계시에 대한 무차별폭격을 감행하여 적십자병원을파괴하고 치료중에 있던 33명의 환자와 17명 어린이의 생명을 앗아 갔다. 17일에는 병원과 아동공원이 있는 동창군 대유로동자구에 대한 야간폭격을 감행하여 134명의 어린이와 26명의 환자를 살해하였다. 미제승냥이들의 날강도적인 폭격에 의하여 1951년 한해에만 하여도 평양시에서는 32개의병원과 진료소가,사리원시에서는 16개의 병원과 진료소가 파괴되였다. 미군은 군사적목표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옛절간,고분,루각,성문들도 가차없이 폭격파괴하였다.

미군야만들은 1951년 1월 3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모란봉의 영명사에 수많은 폭탄과 소이탄,휘발유통을 투하하여 완전히 파괴하였으며 5월 6일에는 고대건축유적인 절간들이 있는 금강산 일대에 많은 량의 나팜탄과 소이탄을 투하하여 가장 경치 좋은 곳에있던 옛절간인 장안사의 건물 700간을 불 태워 버렸다.
6월 13일,14일 2일간에 걸쳐 미제공중비적들은 고산군 설봉리에 대한 맹폭격을 감행하여 석왕사를 파괴소각하였다.
그리하여 석왕사의 응진전과 호지문,대웅전과 팔상전을 비롯하여 50채에 달하는 웅대하고 호화스러웠던 건물들이 일시에 재더미로 되고 말았다.

  6월 25일 미제야수들은 또다시 금강산일대를 폭격하여 외금강 특수박물관으로 귀중히 리용되여 오던 대웅전을 비롯한 신계사의 목조건물들을 모조리 불 태워 버리였다.
미제의 야만적인 폭격에 의하여 거대한 절간이였던 백운사도 파괴소각되였으며 내금강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던 표훈사도 심히 파괴되였다.
특히 미제는 금강산 4대 절간가운데서 가장 컸으며 금강산에 있는 총 60여개 절간의 중심이였던 유점사를 완전히 재더미로 만드는 귀축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그리하여 3,000여간에 달하는 40여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과 돌등,9층탑 등이 완전히 재더미로 되였으며금강산의 4대절간은 불 타버렸거나 못쓰게 되였다.

전쟁기간 묘향산에 있는 보현사의 대웅전,만세루,심검당 등 여러채의 중심건물들이 미군의 폭격에 의하여 불 타 없어졌을뿐아니라 해주의 부용당과 안주의 백상루,성천의 동명관,강계의 북문과 인풍루,희천의 위성관,평양의 숭령전과 숭인전도 그 형체를 찾아 볼수 없게 되였다.
이처럼 미군의 야만적인 폭격만행에 의하여 웅장화려하고 우아하던 공화국북반부의 민족문화유산들,절간들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불 타버리고 말았다.

미제침략자들의 폭격,포격만행에 의하여 공화국북반부에서 입은 인민경제피해액은 초보적인 자료에 의하더라도 약 4,200억원(당시 화페)에 이르렀다.
공업부문에서는 8,700여개소의 공장과 제조소,생산설비들이 파괴되였으며 농촌에서는 37만정보의 농토가 피해를 입고 농경지가 9만정보나 줄어 들었다.
그리고 60여만동의 살림집,5,000여개의 각급 학교,1,000여개의 병원과 진료소,260여개의 극장 및 영화관과 수천개의 문화후생시설들이 파괴되였으며 도시와 농촌은 재더미로 되였다.
도시와 농촌을 페허로 만들고 전쟁력사에 일찌기 있어 보지 못한 온갖 야수적방법과 범죄적수단을 다 동원하여 우리 민족을 멸족시키려고 한 미제의 만행은 그 류례를 찾아 볼수 없는 가장 극악무도한것이였다.

조선인민은 천추에도 잊지 못할 미제침략자들의 이 극악한 만행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것이며그 값을 천백배로 받아 내고야 말것이다.

미제의 생화학전은 조선민족멸살을 노린고의적인 범죄행위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공동백서(2)

미제침략자들은 지난 조선전쟁시기 우리 민족을 멸살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았다.
이미 알려 진바와 같이 미군은 수십만개의 폭탄과 포탄을 퍼부어 무고한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고 중세기적방법으로 사람의 가죽을 벗기고 머리에 대못을 박아 죽이였는가 하면 지어는 세균무기와 화학무기까지도 꺼리낌 없이 사용하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다.
미군이 조선전쟁에서 세균무기와 화학무기를 사용한것은 오랜 기간 계획적으로 준비하고 실전에 적용한것으로서 국제법규에 대한 란폭한 유린은 물론 우리 민족멸살을 노린 고의적인 범죄행위이다.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는 지난 조선전쟁시기 미군이 저지른 세균전과 화학무기사용에 대한 범죄적사실을 재조사확증하고 그 자료의 일부를 묶어 공개한다.

     1.미군의 세균전만행

조선전쟁시기 인민군대에 의하여 패배를 거듭하게 되자 미군은 저들의 수치스러운 참패를 만회해 보려고 세균무기사용을 서슴지 않았다.
미군은 1950년 가을 미합동참모본부에서 이미전부터 준비하여 온 세균무기를 실전에 대대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계획을 정식으로 작성비준하고 시험적단계와 그를 본격화하는 작전단계로 나누어 세균전을 계단식으로 확대해 나갔다.
미군이 이처럼 조선전쟁을 발발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세균무기를 사용한 목적은 전 전선에서 거듭되는 군사적참패를 만회하고 실전을 통해 세균무기를 더욱 연구완성하자는데 있었으며동시에 그 효과성을 검증하고 세균전경험자들을 더 많이 길러 내자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전쟁 전 기간 우리 나라는 미제의 세균전의 마당으로,그 첫 시험장으로 되였다.

미군은 1950년 12월 초 공화국북반부의 일시적강점지역에서 쫓겨 가면서 평양시,평안남북도,강원도,함경남도,황해남북도 등 여러 지역들에 천연두를 비롯한 수많은 전염병균들을 음흉한 방법으로 전파시키였다.
미군은 1950년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평양시에서,1950년 12월 1일부터 2일까지 평안남도 양덕군과 함경남도 고원군에서,1950년 12월 7일부터 8일까지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교활한 방법으로 전염병균을 퍼뜨리였다.
미군은 <가택수색>을 구실로 인민들을 강제로 집에서 몰아 내고는 천연두균에 오염된 헌 옷가지들과 어린이놀이감들을 집안에 마구 널어 놓았다.
이리하여 미군이 쫓겨 간 때로부터 7∼8일간의 잠복기가 지난 천연두가 12월 중순에 이르러 35개 지역들에서 동시에 발생하였다.

미제야수들이 퍼뜨린 세균들에 의한 전염병은 1950년 12월 중순부터 1951년 1월까지 미군이 쫓겨 난 평양시,평안남북도,강원도,황해남북도 등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발생하였으며 발병건수는 급격히 증가되여 1951년 4월에 이르러서는 3,500건 이상에 달하였다.
특히 미군의 일시적강점으로부터 해방된 강원도에서 1,126건,함경남도에서 817건,황해남북도에서 602건으로서 가장 심하게 천연두가 만연되였는데 발병자중 10프로가 죽었다.
미군은 또한 이 시기 천연두와 함께 류행성출혈열병원체도 마구 뿌리는 야수적만행을 감행하였다.
인민군대의 노도와 같은 재진격에 의하여 패배를 거듭한 미군은 서울이남 37도선까지 쫓겨가게 되자 인민군대의 진격을 막아 보려고 발악하면서 38도선 중부이남지방과 서울이북사이에 류행성출혈열병원체를 뿌리여 이 지역에 살던 수많은 주민들에게 심한 고통을 주고 귀중한 생명을 빼앗아 가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후 전선이 38도선에서 고착된것으로 하여 류행성출혈열병원체의 피해를 오히려 제놈들자신이 입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였다.이것은 응당한 징벌이였다.
당시 적들이 극히 줄여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이 지역에서 미군이 이 병에 걸려 2,100여명이나 쓰러졌다고 한다.
이것이 미제가 전파한 류행성출혈열병원체에 의해 미군자신이 벼락을 맞게 되여 당시 세계적물의를 일으킨 유명한 <손오열사건>이였다.
미군은 또한 무질서하게 패주하면서 미군과 남조선괴뢰군안에서 폭발적으로 발생한 매개성티브스환자들을 격리시킬대신 의도적으로 제놈들이 지나가는 길가주변 집들에 마구 들이 밀어 주민들속에 발진티브스와 재귀열을 대대적으로 퍼뜨리였다.
미군은 평화적주민들뿐아니라 거제도와 태평양상의 여러 섬들에 인민군전쟁포로들을 가두어 넣고 세균무기 시험대상으로 삼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살륙하는 야수적만행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1951년 3월 <유엔군총사령부>의 <위생복리처장> 젬스준장이 인솔하는 제1091호 세균살륙정은 비밀리에 동해안 원산앞바다와 거제도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으면서 인민군전쟁포로들을 대상으로 매일 3,000여회의 세균무기<실험>을 감행하였다.그 결과 1,400명은 중병에 걸렸고 나머지 포로들중 80프로는 원인모를 여러가지 병에 걸려 애처롭게 신음하다가 죽었다.
미군은 또한 제14호<야전병원>으로 가장된 수용소안에서 적리(붉은 배앓이)균을 퍼뜨려 1950년 11월 23일 단 하루동안에만도 91명을 죽이였으며 제4호 수용소안에서는 7개월간이나 세균무기로 무려 2,000명이상의 포로들을 죽이였다.

한편 미군은 지상화학부대에 의한 세균산포와 함께 은밀한 방법으로 <B-26>,<B-29>형의 비행기로 세균탄을 떨구는 만행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미군은 세균작전계획에 따라 1951년 11월 군산공군기지에 있던 미제3폭격기련대와 일본오끼나와에 기지를 두고 있은 미극동공군사령부직속 제19폭격기련대를 동원하여 조선의 서북부(청천강이북-압록강남안지대)와 양덕,함흥,원산에 첫 세균탄을 떨군데 뒤이어 1952년에 이르러서는 국부적인 단계로부터 전면적인 단계에로 이행하여 지역에 관계없이 대대적으로세균탄을 투하하였다.

미군은 세균전을 정규작전으로 벌릴데 대한 상전의 명령에 따라 1952년 1월부터 3월까지 질병의 만연성정도,세균무기와 용기의 종류별상태,운반수단으로서의 비행기의 종류별 적합성,각이한 지대에 대한 세균무기의 사용효과,투하하는 방법 등 세균전을 련마하려는 목적으로부터 공화국북반부의 서북부와 중요 수송로,후방의 중요철도간선,분기점들과 그 주변의 주민지대에 매월 평균 10여차이상 세균탄을 계획적으로 떨구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미군은 1952년 1월 28일부터 페스트,콜레라 등 전염병을 전파하는 많은 량의 각종 독충들을 비행기로 실어다 공화국북반부 전 지역에 련속 산포하였다.
미군은 1952년 1월 28일 강원도 평강군에,2월 11일 철원군에,17일 평강군에,18일 평안남도 안주시에,23일 평원군에,25일 강원도 문천시에,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27일 평양시 강동군과 평안남도 순천시에,29일 황해북도 수안군에 파리와 모기,거미를 비롯한 전염병균을 가진 각종 독충들을 대량적으로 뿌리였다.

미제침략자들은 1952년 1월과 2월에 이어 3월 1일에는 평안북도 철산군과 평안남도 양덕군에,2일과 4일에는 함경남도 고원군과 평양시 중구역에 파리,벼룩 기타 곤충들을 뿌린것을 비롯하여 거의 매일과 같이 독충들을 산포하였다.
미제살인귀들은 전면적인 세균전을 벌리기 시작한 1952년 1월 초순부터 3월에 이르는 기간에만도 공화국북반부의 169개 지역에 연 804차에 걸쳐 독충들과 균이 묻은 여러가지 물건들을 떨구었을뿐아니라 중국동북지방의 광범한 지역에 이르기까지 세균탄을 떨구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당시 조선에 파견되였던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이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였거나 체험자들에게서 청취한 증언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지적되여 있다.
1952년 1월 30일 조사단은 강원도 이천 동남지역에서 파리,빈대,거미가 눈우와 돌사이를 기여 다니는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불 태워 버렸다.그를 구체적으로 조사한 결과파리들은 콜레라균에 감염되여 있었다.
1952년 2월 18일 조사단은 평안남도 안주군 대니면 발남리(당시)에서 파리,거미,딱정벌레들을 발견하였는데 추위속에서도 그것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
파리는 조선파리와는 달리 긴 날개를 가지고 있었으며 몸집은 크고 머리는 조선파리보다 비교적 큰 편이였다.
거미는 종래의것은 큰것과 작은것 두 종류로서 색갈은 검은것이였으나 발견된 거미는 그 크기가 중간쯤 되였으며 몸빛은 조금 희였다.
딱정벌레역시 종래의것은 몸집이 둥글고 약간 누른빛인데 발견된것은 몸집이 납작하였으며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이 지방에서는 계절적으로 이때에 파리와 거미를 본 일이 전혀 없었다.
곤충들이 발견되기 전날 야밤에 미군비행기들이 이 지역 상공에 낮추 떠 수차례 선회하였으나 폭격 또는 소이탄을 떨구거나 기총사격을 한적이 없었다.
조사결과 이 곤충들은 페스트균에 감염되여 있었다는것이 확증되였다.
1주일이 지나 이 부락에서는 50명의 페스트환자가 발생하였는데 3월 11일까지 약 600명의 부락인구중에서 36명이나 사망하였다.

1952년 2월 22일 황해도 봉산군 초와면 양동리(당시)와 사인면(당시)에서는 얼음과눈우에서 보통파리보다 머리가 작고 날개가 길며 몸에 털이 많은 파리들이 발견되였다.
평안남도 개천군(당시)에서는 2월 25일 이후 파리와 기타 곤충들이 9차례나 발견되였는데 그것 역시 지금까지 보지 못한 종류의 곤충들이였다.
이 군에서는 4월전에 파리가 나타나는 일이 없었다.
2월 26일 개천군 북면(당시)에서는 누런 종이에 싼 곤충이 눈 녹은 습지우에 뭉쳐 있었고 2월 28일 평안남도 강동군 원탄면 송오리(당시)부근에서 개미같은 곤충들이 발견되였는데 직경이 약 30센치가량의 몇개의 무리로 되여 있었으며 각 무리의 간격은 약 3메터∼5메터였다.
다음날 그것들은 이미 800메터의 거리에까지 흩어 져 있었다.
곤충들이 발견되기 전날에 5대의 미군비행기들이 반시간동안 그 장소우로 선회하였으나 역시폭탄이나 소이탄을 투하하지 않았고 기총사격도 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조사한 결과 그 곤충들은 장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에 감염되여 있었다는것이 판명되였다.

3월 3일과 4일에 평안남도 순천군의 자산면 고읍리(당시)와 순천면 마상리(당시)에서는이상한 모양의 파리들이 약 1평방야드(1평방야드는 대략 0.836평방메터)가량의 면적우에 뭉쳐 있는것을 발견하였다.
파리들은 령하 10도씨이하의 눈우에 있었으나 살아 있었다.
파리의 머리는 조선파리보다 작고 날개는 서로 붙어 있었으며 몸집은 보통파리보다 길었다. 이 지역에서는 보통 이 계절에 집밖에서 파리들이 살고 있는것을 볼수가 없었다.
이날 안주부근에서는 모기들이 무데기로 발견되였는데 보통모기들은 머리로부터 몸까지 약간의털이 가볍게 덮여 있는데 발견된 모기들은 털이 훨씬 더 많았다.

1952년 3월 5일 평양시 중구 남문리(당시) 길우에서는 파리들이 크고 작은 무리로 발견되였는데 그 다음날 이 거리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였다.
3월 11일 벽동군에 있는 전쟁포로수용소로부터 몇키로메터 떨어 져 있는 곳에서도 파리와기타 곤충들이 눈우에 떨어 져 서로 뭉쳐 있는것이 발견되였다.
조사단이 콜레라환자를 처음 진단한것은 1952년 2월 20일이였다.
환자는 강원도 철원군 북면(당시)에 사는 김학문(40살)이라는 사람이였는데 그는 2월 23일에 사망하였다.
같은 마을에서 3월 5일 두사람이 역시 병 들어 누웠는데 그 다음날 두사람 다 사망하였다.
3월 8일에 3명이 더 앓아 누웠고 그중 한 사람은 그날로 죽고 나머지는 3월 9일에 죽었다.

평양시에서는 3월 6일에 2명이 병들어 눕고 또 한 사람은 3월 8일에 병들어 누웠다.그중 2명이 3월 8일에 죽었다.
황해도(당시)에서는 곤충이 발견된것이 36건인데 수안군 수구면 석달리(당시)에서 3월 8일에 콜레라로 2명이 병들어 누웠는데 그중 한 사람은 3월 9일에 죽었다. 이 지역에서 콜레라발병자수는 13명인데 그중 9명이 죽었다.
페스트환자를 처음으로 진단한것은 2월 25일인데 이 환자는 안주군 대니면 발남리(당시)에 사는 29살나는 황리채였으며 2월 29일에는 같은 마을에 사는 26살나는 박순옥이가이 병에 걸렸다.
조사단이 현장에서 조사확증한 이상의 자료들은 실재한 사실들중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피해장소들을 조사단이 다 돌아 볼수 없었기때문이다.

공화국북반부에는 적어도 전쟁전 4년동안에 이러한 전염병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었다.
미군의 이러한 야수적만행은 우리 인민의 끓어 오르는 분노와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인민들의 영웅적투쟁앞에서 세균산포전은 여지 없이 부서 지고 세계인민들의 저주와 규탄을 면치 못하였다.
미군은 우리 인민의 영웅적인 반세균전투쟁에 의하여 저들의 목적을 달성할수 없게 되자 1952년 4월부터 감염지대를 설정하여 반복오염시키는 방법으로 세균전의 범위를 넓히고 그 효과를 높이려고 더욱더 미쳐 날뛰였다.
미군은 1952년 5월부터 세균전대상을 3개의 방향 즉 공화국북반부를 횡단하는 2개의 오염지대와 서해안지대,동해안 지대로 설정하고 7일∼10일 간격으로 집중적으로 재오염시키기 위한 작전을 대규모적으로 감행하였으며 1952년 11월부터는 선행세균작전의 실패를 만회해 보려고 후방의 중요군사적요충지대와 교통중심지들을 오염시키며 아군의 수송로를 차단해 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였다.

미군은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9개의 비행련대를 동원하여 신안주주변에 대한 집중적인세균공격을 기도하면서 매일 대규모적인 폭격과 함께 세균탄을 쏟아 붓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미군의 이 범죄적인 세균전에는 일본 오끼나와에 기지를 둔 폭격기들은 물론 남조선에 기여든 미공군 제3,제17경폭격기련대,제4,제51전투추격기련대,제8,제18,제49,제58,제474전투폭격기련대,해군륙전대 제1공군련대의 <B-29>,<B-26>폭격기들과 <F-51>,<F-80>,<F-84>,<F-86> 전투폭격기들,해군륙전대의 야간전투기들 등 공화국북반부지역의 폭격에 동원된 비행기의 4분의 1이 망라되였으며 어떤 날에는 하루에 무려 480대까지 출격하여 세균탄을 떨구었다.
미군이 세균전에 동원시킨 비행기대수들과 실지로 세균탄을 뿌린 지역들을 보면 세계전쟁사에있어 보지 못한 최대규모의 범죄적인 첫 세균전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미군은 또한 세균무기를 더욱 광범히 적용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미군은 세균무기 적용수단으로 세균폭탄,세균산포탕크,세균포탄,종이탄(종이를 여러겹 압착하여 만든 폭탄),원통형의 나무함 등을 리용하였으며 세균폭탄으로서는 500LB(폰트)(1LB는 대략 0.454키로그람)폭탄형세균탄,1,000LB폭탄형세균탄,락하산형 세균탄,기름상자형의 세균탄 등을 사용하였다.
미제공중비적들은 1952년 1월 22일 밤 황해북도 봉산군에 날아 들어 군내 여러 지구에 폭발되지 않은 폭탄을 떨구었는데 여기에서 나온 수천수만마리의 파리,거미,진드기 등 곤충들의 전부가 콜레라,페스트,파라티브스,적리균에 감염되여 있었다.

미제공중비적들은 1952년 2월 26일과 28일에는 강원도 련천군에 연막탄과 함께 류탄포를 발사하여 페스트,콜레라,티브스에 감염된 세균독충을 산포하였다.
1952년 2월 11일 미제공중비적들은 강원도 철원군에 락하산이 달린 원추형종이탄과 립방형종이탄을 떨구었으며 1952년 3월 26일 평안남도 강동군(당시)에,3월 5일 함경남도 금야군에,1952년 2월 27일과 3월 7일에는 평안남도 성천군에,2월 28일과 3월 5일,6일,6월 6일에는 평안남도 중화군(당시),평양시,함경남도 금야군,평안북도 벽동군을 비롯한 여러 지역들에 각종 형태의 종이봉지에 독충을 넣어 떨구는 귀축 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미제공중비적들은 1952년 3월 7일 자강도 강계시를 비롯한 많은 지역들에 세균에 오염된 쥐,벼룩,모기를 비롯한 각종 독충들을 원추형 또는 사각형의 나무함에 넣어 뿌리였다.

미군은 전염성병균을 리용하는데서도 감염경로가 각이하고 감염성과 치사률이 높으며 저항성이강하고 잠복기가 다른 세균들을 선택하여 세균전만행을 최대한 은페하고 전염속도를 높임으로써 우리 인민에 대한 대량살륙을 기도하였다.
미군이 리용한 세균무기의 종류로서는 악성,급성,전염성세균들인 페스트,콜레라,천연두,류행성출혈열을 비롯하여 비타저,장티브스,파라티브스(A,B),적리,발진티브스,살모넬라,파스투렐라,물토치다,콩의 자반병,식물의 탄저병,륜문병의 병원체 등 20여종에 달하고 세균에 감염시켜 떨어 뜨린 곤충과 동물들로서는 파리(5종),모기(3종),벼룩,빈대,쥐를 비롯하여 무려 34종이상에 달하였다.
이처럼 미군의 야수적이고 전면적인 세균전은 공화국북반부의 전 지역을 포괄하는 작전범위와규모가 방대한 계획적이며 집중적인 세균공세로서 전쟁력사상 그 류례를 찾아 볼수 없는 범죄였으며 세균무기의 적용수단과 방법의 다양성,악랄성에 있어서 전대미문의 대인간살륙전,조선민족말살전이였다.

2.화학무기사용만행

조선전쟁시기 미군의 야수적만행가운데서 가장 범죄적인 죄행의 하나는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수많은 인민들을 대량적으로 살륙한것이다.
미제살인마들은 공인된 국제법과 인간의 초보적량심마저 다 줴버리고 가장 야만적인 화학무기를 세균무기사용과 때를 같이 하여 사용하는 천추에 용서 못할 범죄를 저질렀다.
미군은 1951년 2월부터 1953년 7월까지의 기간에 우리 나라의 강원도,황해남북도,평안남도를 비롯한 공화국북반부의 24개 시,군과 전선지구들에 수많은 화학무기를 사용하였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침략자들의 세균 및 화학무기 피해정형을 현지에서 조사하였던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군비행기는 많은 경우에 질식성 및 기타의 독가스 또는 화학무기들을 사용하였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지적되여 있다.
남포시인민위원회 보건과장이 본 조사단에 제공한 증빙서류에 의하면 1951년 5월 6일 오후 5시 5분부터 6시 30분까지 이 도시는 네차례의 폭격을 당하였다.이 폭격이 있었을 때 날씨는 좋았고 온도는 23도씨였는데 13개소가 폭격을 받았다.마지막 공습때 주민들은 모두 대피하였다.이때 미제침략군 폭격기 <B-29>3대가 당시의 삼화리,후포리,축동리,룡정리,룡수리의 일부 즉 그 면적으로 보아 0.3평방키로메터 되는 지역을 가스탄으로 폭격하였다.그 결과 1,379명의 사상자를 내였다.그중 480명은 질식으로 사망하고647명은 가스로 중독되였다.또한 이 공습으로 76명이 피살되고 176명이 부상 당하였다.

본 조사단이 청취한 목격자의 증언과 전문가의 증언 그리고 조사단에 제출된 물질적 및 문서상 증거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확증되였다.
가스는 폭탄의 폭발후 즉시로 퍼졌으며 시초에는 검은색으로,다음에는 황록색으로,그것이 다시 황색으로 변하였으며 나중에 무색으로 되였다.
이 가스연기는 염소의 냄새와 비슷한 불쾌한 냄새를 냈으며 그 독성은 이 연기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되였는데 그 시간은 약 2시간이였다.
대피호안에 있던 사람들(그중에 아이들이 많았다)이 중독이 심하였으며 희생자의 증후는 다음과 같았다.

호흡이 곤난하여 지고 음성은 거칠어 졌으며 현기증이 나고 기침을 하고 눈물이 나고 코물이 흐르고 두통이 심하였으며 감각과 맥이 없어 지고 피부가 뜨거워 지고 구토증이 생기고입에서 거품이 나오고 피를 토하고 열이 나고 피부에 청색반점이 나타났으며 맥박이 약하여지고 심한 기관지염 등이 생겼다.
혈액검사결과 백혈구와 적혈구가 증가되고 헤모글로빈이 15르로 증가되였다.
검진결과 페의 용량과 중량이 증대되여 륵골의 외면선에 닿았으며 분비물이 섞인 검붉은 액체가 세포조직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그리고 신장과 심장에는 혈액결핍의 징조가 보이고 모세관조직의 확대에 의하여 반점이 생기였으며 뇌막은 평평하여 지고 팽창하였으며 해부한 척수골 골수에는 충혈이 있었다.
본 조사단이 남포에 갔을 때 이상의 시체해부결과를 보았으며 가스탄공격을 받은 이 지역의풀은 황갈색으로,동합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청록색으로,은가락지는 흑색으로 변하여 있었다.

1951년 7월 6일 오전 8시에 미국제트기 2대가 원산시 동북방향으로부터 서남방향인 풍포리의 상공을 비행하였다.
그때 기온은 27도씨였으며 가벼운 바람이 서북에서 불었고 공기는 비교적 습기를 띠고 있었으며 공중에는 구름이 없었다.
가스 혹은 어떠한 식별할수 없는 화학물질이 이 마을의 동쪽 약 200메터의 지점에서 100메터-200메터의 지역에 퍼졌다.
농민 안영화와 그의 안해 양춘옥 2명이 밭갈이하러 나가는 도중에 피부에 불이 붙는것 같은 뜨거움을 느꼈고 호흡이 곤난해 졌으며 눈물이 나고 눈을 뜰수가 없었다.
조사단은 이 두 피해자가 1951년 7월 6일전까지는 건강하였다는것을 증명하였다.
이 비행기들이 지나간 직후 그들의 신체 로출부분(얼굴과 손발)이 근질거리였고 붉은점이 생겨서 그것이 콩알만하게 커지고 그 다음에는 부풀어 올라 그 내부가 화농했다.
이 상처는 어떤 내과병의 증후로써는 올수 없는것이며 2화상과 흡사하나 미란작용이 보다 심하고 회복하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남자는 7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 입원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녀자는 8월 20일까지퇴원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입원하여 있는 동안 아연화연고를 바르고 난후 피부에 고름 혹은 물이 차 기포가 터지고 살가죽이 벗겨 졌다.
그러나 치료후에도 약간의 흔적은 남았다.
이 가스가 퍼진 곳에서는 농작물의 10프로,특히 콩잎에는 약 1센치의 사이를 두고 둥근흰점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그 피해자의 신체로출부분에서 발견된 붉은점과 흡사하였다.
목격자들은 폭탄폭발소리도 없었으며 기관총사격도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1951년 9월 1일 당시의 황해도 연백군 연성리와 당시의 장연군 원촌리에 2개의 폭탄이 투하되였다.
이 폭탄은 보통때와 다른 약한 소리를 내고 공중에서 터져서 검은 연기를 내였으며 그 다음에 황록색의 구름이 지면에 퍼졌다.그로하여 일반주민 4명이 사망되고 40명이 중독되였는데 그 결과는 1951년 5월 6일 남포폭격때에 발생된것과 류사하였다.
나무잎은 떨어 지고 지상의 곡식은 피해를 입었으며 놋그릇은 흑색으로 변했다.

미군의 악랄한 화학무기사용은 1952년도에 들어 서면서 전면적인 세균전과 때를 같이 하여 더욱 강화되였다.
미군은 평화적도시들은 물론 자그마한 농촌마을에까지 화학무기를 사용하였다.
1952년 1월 9일 오후 4시경 원산 북쪽에 있는 학선리마을이 적비행기 2대의 습격을받았다.
그때 구름은 없었고 기온이 5도씨정도 되였다.
이날 폭격후 83명이 중독되였는데 그 증후는 남포폭격때에 발견된것과 흡사하였다.
그 외에 목이 가려워 지고 입안에 단맛이 생기는것이 다를뿐이였다.
이 사실은 조사단이 질문한 의사와 기타 목격자에 의하여 확인되였으며 또 강원도인민위원회보건부 부장이 제공한 자료와 원산중앙병원(당시)의 여러 의사들의 보고에 의하여 확증되였다.

이상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이 현지에서 조사확증한 자료들은 미제침략군이 지난 조선전쟁시기 각종 화학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러 기회에 일반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용함으로써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것을 의심할 여지 없이 증명하여 주었다.
미군공중비적들은 1952년 5월 18일에는 평안남도 대동군에 독해물을 묻힌 조개를 떨구었으며 1952년 9월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간 1동과 황해남도 연안지방에 주로 어두운 밤을 리용하여 독해물을 묻힌 가짜돈과 삐라를 뿌리였다.
미제공중비적들은 또한 1952년 2월 27일부터 4월 9일까지의 기간에 33차에 걸쳐 독가스탄을 사용하였으며 거의 같은기간 미군지상부대들은 질식성 및 최루성가스탄을 41차에걸쳐 우리의 방어진지에 발사하였다.

미군이 조선전쟁시기 사용한 대량살륙무기가운데서 스파나팜탄만 하여도 무려 1,500여만개에 달한다.
미군은 또한 전쟁포로대우에 관한 국제적협정을 란폭하게 유린하면서 우리측 포로들을 독해물<실험>대상으로 삼아 야수적으로 학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였다.
미제살인귀들은 1952년 거제도 제76호 수용소와 룡초도수용소들을 비롯한 모든 수용소들에서 악랄한 방법으로 최루성독가스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독해물로 우리측 포로들에 대한 생체<실험>을 진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정신적불구자로 되게 하였다.
미군은 1952년 7월 7일 거제도수용소에서 <작업>에 동원시킨다는 구실밑에 우리측 포로 120명을 특별한 장치를 한 자동차 2대에 갈라 싣고 4시간동안 차에 감금한채 가스무기의 <실험>을 하여 그들 전부가 두달동안이나 눈을 뜨지 못하게 하였으며 나중에는 불구자로 만들었다.

1952년 8월 13일 룡초도 제2호 수용소에서 미군은 자그마한 철조망안에 인민군포로들을 가두어 넣고 1,000여개의 가스탄을 퍼부어 중독상태를 알아 보는 <실험>을 하였다.
놈들의 이 살인적인 <실험>으로 350명이상이 중한 화상을 입었고 44명이 의식을 상실하고 4명이 희생되였으며 3명이 청각을,6명이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이것은 사실상 실험이 아니라 야만적인 살인행위였다.

미군야수들은 1952년 6월 10일 거제도 제76호 수용소에서 27대의 땅크와 12문의포를 리용하여 포로들에게 화학탄을 발사하는 귀축 같은 살인만행을 감행하였다.
놈들의 이 야수적인 살인만행으로 227명이 죽고 수많은 부상자가 났으며 1952년 9월29일 거제도 제15호 수용소에서는 24명의 포로들을 군용차에 태운 다음 <실험>을 목적으로 5개의 화학수류탄을 던져 차에 탔던 인원 전부가 의식을 잃게 하였다.
미군은 1952년 12월 30일에는 비행기를 동원하여 거제도 제17호 수용소상공에 독가스를 뿌림으로써 포로전원을 눈병에 걸려 보지 못하는 불구자로 만든 다음 그들을 철저히 격리시키고 1주일에 두번씩 그 중독상태와 그 후과까지 조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군의 야수적인 화학무기사용만행은 1953년에 이르러 더욱더 악랄하게 감행되였다.

1953년 2월 2일 거제도 제11호 수용소에서 미군은 인민군포로들에게 산포기를 리용하여 가스를 뿌려 의식을 잃게 하거나 부상을 입힌 후 <치료>해 준다는 구실밑에 병원에 끌고 가 6월 16일에 독가스의 반복중독으로 두 눈을 잃게 하였으며 역시 같은날 거제도 제13호 수용소에서도 독가스의 <실험>대상으로 끌려 간 포로들이 가스중독으로 시력을 잃었다.
1953년 3월 10일 미제살인귀들은 거제도 제15호 수용소에서 인민군포로들에게 화학수류탄을 던지거나 화학탄을 쏘아 가스작용시간을 측정하는 만행까지 감행하였다.
미군이 지난 조선전쟁시기 감행한 생화학전은 우리 민족을 멸살시키고 우리 조국강토를 무참히 파괴하기 위하여 저지른 고의적이고도 계획적인 범죄행위이다.
미군의 무분별한 생화학무기사용으로 수많은 우리 인민들이 무참히 목숨을 잃거나 불구자로 되였으며 아름다운 우리 조국강산이 심히 오염되고 생태환경이 엄중히 파괴되였다.
우리 민족은 조선인민에게 참을수 없는 고통과 불행의 재난을 들씌운 미제살인마들의 죄행을절대로 용서치 않을것이며 피의 대가를 반드시 받아 내고야 말것이다.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공동백서 (1)

(평양 4월3일발 조선중앙통신)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는 지난 조선전쟁시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사위원회가 조사장악한 미군이 남반부지역에서 저지른 무고한 주민들에 대한 살륙행위를 비롯한 만행자료들과 최근 남반부에서 새로 발굴된 자료들 가운데서 그 일부를 묶어 2일 공동백서를 발표하였다.
백서의 첫째부분은 다음과 같다.

미제의 살륙,략탈,파괴행위는 잔악무도한 반인륜적범죄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공동백서(1)

세월이 가고 해가 바뀔수록 잊을래야 잊을수 없고 지울래야 지울수 없는것이 바로 미군이 지난 조선전쟁시기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살인,략탈,파괴행위이다.
산천초목도 분노에 떨게 하는 미군의 이 치 떨리는 만행은 세상에 그 류례가 없는 범죄로서 마땅히 조선민족과 인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는 지난 조선전쟁시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사위원회가 조사장악한 미군이 남반부지역에서 저지른 무고한 주민들에 대한 살륙행위를 비롯한 만행자료들과 최근 남반부에서 새로 발굴된 자료들 가운데서 그 일부를 묶어 공동백서를 발표한다.

주민들에 대한 야수적학살만행

미제침략자들은 조선전쟁을 도발한 후 공화국북반부지역은 물론 남반부지역들에 대한 야수적폭격만행을 련일 감행하여 무고한 주민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
1950년 7월 5일 남조선강원도 신탄에 날아 든 4대의 미제침략군 공중비적들은 맹폭격으로 농촌주민 10여명을 살해하고 충청북도 제천군 제천면 활산리에 날아 든 미군비행기 4대는 산으로 피신하는 주민들에게 20여개의 폭탄을 퍼붓고 기총사격을 가하여 25명을 살해하고 3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7월 9일 당시 전라북도 김제군 룡지면(이하 당시 지명)에 날아 든 미군폭격기 4대는 폭탄을 퍼부어 철도로동자 김재근,황영규 등 170여명의 주민들을 살해하였으며 충청북도 영동군 산익리에 날아 든 2대의 미군비행기는 산으로 피신하는 농민들에게 4개의 폭탄을 투하하여 9명을 살해하고 15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 2대는 7월 10일 대장리부근 나무밑에서 젖을 먹이고 있는 녀성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어린애와 함께 즉사케 하였으며 이날 경기도 려주군 려주읍에 날아 든 3대의 미군폭격기는 수많은 폭탄을 퍼부어 녀자 38명,어린이 48명,로인 11명을 포함한 151명의 평화적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미제공중비적들은 7월 11일 경기도 수원지구에서 주민 15명을 살해한데 뒤이어 11일부터 14일까지 전라북도 리리일대에 대한 야수적폭격으로 철도공무원 54명을 사살하고 학생과 시민 450여명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였다.
놈들은 7월 12일 충청북도 영동주변의 산에 피신중인 310명의 주민들에게 대형폭탄 10여개를 떨구고 기총사격을 가하여 6명을 살해하고 2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미제공중비적들은 7월 15일,16일,19일 3차에 걸쳐 야수적폭격으로 경기도 평택지구 주민 77명을 살해하였으며 인천에서는 <동양방직>공장을 파괴하고 그것도 성차지 않아 밭에서 김매기를 하는 8명의 농민들을 기총소사로 살해하였다.

7월 16일 서울에 날아 든 미군폭격기들은 맹폭격을 감행하여 1,096명의 주민들을 살해하고 1,201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으며 7,000여명의 리재민을 내게 하였다.
7월 20일 전라북도 김제군 죽산면 죽산리에 날아 든 놈들은 폭격과 기총사격으로 농민 200여명을 살해하였다.

7월 25일 미군폭격기 2대는 전라북도 익산군 왕궁면 구덕리 문둥병환자수용소에 기총사격을 가하여 환자 6명을 살해하고 4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여러대의 미군전투기가 충청북도청주에서 김을 매고 있던 농민과 길가에서 놀고 있던 어린 학생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5명을 살해하고 8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7월 25일부터 4일동안 미제는 충청북도 영동군 로근리 철길 및 쌍굴다리에 700여명의주민들과 피난민들을 몰아 넣고 기총사격으로 300여명,폭격으로 100여명을 살해하였다.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경기도 파주군에 날아 든 미군비행기의 폭격으로 63명이 사망하고 572명이 부상 당하였으며 남조선강원도 춘천시에서는 미군의 폭격으로 농민 리수영 외 3명,로동자 김학환의 안해 증매자(24살)와 그의 아들,강가에서 빨래하고 있던 김성숙(16살)과 목욕하던 그의 동생 김영숙(11살),인민학교 학생 리기훈(8살)도 미군비행기의 기총소사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였다.

미제공중비적들은 7월 30일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강외인민학교에 여러개의 폭탄을 투하하고 교실에서 뛰여 나오는 학생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학생 5명을 살해하였으며 19명을 부상시켰다.그리고 8월 초 충청북도 청주시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는 주변농촌상공을 저공비행하면서 산으로 대피하는 농민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12명을 살해하고 11명을 부상 입혔으며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에서는 소이탄 투하와 기총사격으로 30여명의 농민들을 살해하였다.

7월 31일 경상남도 사천군 곤명면 마곡리 하천제방에 피난을 나와 점심을 먹고 있는 이지역 주민들에게 미군전투기 5대가 갑자기 달려 들어 약 30분간에 걸쳐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하여 강남덕의 아버지와 3명의 동생 등 13명을 살해하고 8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8월 2일 전라북도 김제군 광활면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 26대는 논밭에서 김을 매고 있던 농민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농민 2명과 가정부인 1명을 살해하고 처녀 1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인천시 부평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들은 소이탄을 떨구어 주택지구에 불을 지른 다음 불을 끄려 동원된 군중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11명을 살해하고 15명에게 부상을 입혔다.또한 이날 경상남도 사천군 곤명면 조장리에 날아 든 미군폭격기 4대는 피난가던 주민 약 300명에게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하여 150여명을 살상하였다.

8월 3일 미군전투기 2대는 인천시 룡현동 선창에서 떠나려고 하는 려객선에 기총사격을 가하여 녀자 4명을 포함한 14명의 려객을 살해하였으며 대구쪽에서 날아 든 미군비행기 2대는 대전시 신안동거리를 걸어 가던 시민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3명을 즉사시키고 4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또한 이날 미군전투기편대는 경상남도 진주시 강남동,망경동 등의 주민 수백명이 대피한 주약동 약골의 진치령 굴에 대한 2차례의 폭격에 이어 다음날 오후 5시에 또 다시 나타나저녁을 먹으려던 피난민들에게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하여 50여명을 사살하고 50여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감행한것으로 하여 굴안에는 떨어져 나간 사람의 팔과 다리들이 널려져 차마 눈 뜨고 볼수 없는 광경이 펼쳐 졌다.

8월 4일 인천시 석남동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 3대는 집을 잃고 다리밑과 오막살이에서 살고 있는 리재민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52명을 살해하고 13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날 경기도 고양군에 날아 든 공중비적들은 참외를 팔고 있는 상인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3명을 살해하고 44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봉산리에 여러개의폭탄을 떨구어 15명의 평화적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8월 5일 미군폭격기 8대는 전라북도 전주시에 날아 들어 무차별폭격을 가하여 3개의 동을 완전히 불 태우고 153명의 시민들을 살상하였다.
8월 6일 미군전투기 2대는 전라남도 광산군에 날아 들어 도선장에서 나루배에 탄 주민 10명을 기총소사로 즉사시키고 5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경기도 룡인군 기흥면 상갈리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 2대는 길 가는 행인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3명을 살해하고 6명에게 부상을 입히였다.이날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는 강가매(당시 12살)어린이가 아침밥을 먹고 놀러 간 사이 그의 집과 이웃집들에 폭탄을 떨구고기총사격을 가하여 집에 있던 강가매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가족 4명을 즉사시키였으며 이웃에 있던 임신부녀성이 폭격으로 놀라 죽은 아이를 낳고 그후 그도 죽게 하였다.

8월 7일 남조선강원도 녕월군 녕월면과 전라북도 전주시 하천일대와 진북동,고사동 등지에날아 든 여러대의 미군전투기들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기총소사로 강가에서 빨래하던 부녀자들과 목욕하던 아이들을 비롯하여 373명의 주민들이 살상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경상남도 마산시 진전면 진목리 진목마을상공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의 폭격과 기총사격으로 황맹성 외 4명이 살해되고 황근성 외 2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8월 8일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면 신흥동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들은 일터로 나가는 김종록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팔에 부상을 입히고도 성차지 않아 그가 대피한 집에 폭탄을 퍼부어 집을 완전히 파괴하고 김종록과 그 집에 있던 사람 4명을 살해하였다.

8월 9일 미군폭격기와 전투기 20대는 서울시 서대문구 연초공장상공에 날아 들어 작업중인 로동자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11명을 살해하고 39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서울시 룡산구상공에 날아 든 미제공중비적들은 녀성상인 4명을 살해하여 젖먹이 어린애가 피 흘리며 쓰러진 어머니의 젖을 찾으며 애처롭게 울게 하는 비참한 사실까지 산생시켰다.

8월 10일 인천시 신흥동에서는 그전날 폭격으로 불 타고 있는 주택들에 대한 불끄기작업에 동원된 주민들에게 미군전투기 8대가 달려 들어 기총소사로 13명을 살해하고 17명에게 부상을 입히였으며 경기도 룡인군 룡인면 남리에서는 길 가는 사람들에게 수백발의 기총사격을 가하여 12명을 살해하고 련이어 이 군 이동면 천리(무내미고개)에서 7명을 살상하였다.
이날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면 하담리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 4대는 하담리 인민학교교사에 기총사격을 가하여 수업중이던 교원 변윤수,학생 김경환을 비롯한 수많은 학생들을 살상하였으며 리재민들이 림시로 거처하고 있는 룡산중학교를 폭격하여 204명을 살해하고 240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또한 이날 경상남도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는 뒤산에 피난한 100여명의 주민들을 향하여 기총사격을 가하여 80여명의 주민들을 살상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8월 10일,12일 량일간에 걸쳐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세브란스병원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들은 폭탄을 퍼부어 환자 3명을 즉사시켰으며 입원중인 환자 2명을 살해하고 그들을 간호하던 간호원들과 다른 환자 5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8월 11일 오후 1시경 경상남도 의령군 화정면 상일리 보천마을 상공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 4대는 피난민임을 육안으로 확인할수 있을 정도로 저공비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폭탄을투하하여 마을을 불 태우고 살아 남은 주민들이 불 타는 집에서 뛰쳐 나오는것을 보고 기총사격을 가하여 유지곡 외 23명을 죽이고 수십명에게 부상을 입히였다.

8월 12일과 13일 2일간에 걸쳐 미군비행기 19대가 충청북도 괴산상공에 날아 들어 50여개의 소이탄과 폭탄을 투하하고 폭격을 피하여 산으로 대피하는 주민들과 화재현장에서아우성치고 있는 부녀자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121명을 살해하고 376명을 부상시켰다.

8월 14일 전라북도 익산군 룡안면 흥왕인민학교에 8.15조국광복기념준비를 위하여 전교 학생들이 모여 있을 때 미군전투기 4대가 불의에 날아 들어 폭탄 2개를 퍼붓고 기총사격을 가하여 학생 13명을 즉사시키고 19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8월 16일 미제공중비적들은 충청북도 청주군 북이면 석성리 학교마당에서 급히 교실로 대피하는 어린이들에게 폭탄을 떨구고 기총사격을 가하여 학교를 심히 파괴하고 여러명의 학생들을 살해하였으며 진천군 덕산면 룡몽리 우물에서 3명의 부녀자들이 물 긷는것을 발견하고 기총사격으로 1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날 미군전투기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교리 농촌에서 밭일을 끝내고 돌아 오는 농민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6명을 살상하였으며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삼성리에서는 참외밭에서 참외 따는 농민 3명을 살해하였다.

8월 18일 충청남도 대전시에 날아 든 미제공중비적들은 기총사격으로 판암동 335번지에사는 대전중학교 1학년 리경무(15살)를 즉사시키고 6살 되는 그의 동생에게는 중상을 입혔다.

8월 20일 미군전투기들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장지리 일대에 모여 든 2,000여명의 피난민들에게 무려 2시간이나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하여 170여명을 죽이고 100여명을 부상시켰으며 같은 면 수곡리에서는 심육갑의 일가족 3명과 타지역에서 온 피난민 2명을,가야읍에서는 김종곤의 부친 등 4명을,의령군 의령읍 만천리에서는 12명을,부림면 단원리에서는 피난민 13명을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살해하였다.

8월 21일 대전시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는 룡운동 과수원에서 포도를 따고 있는 15살 난 어린 소년에게 기총사격을 퍼부어 그 자리에서 숨 지게 하였다.
이날 미군폭격기 12대와 전투기 8대는 서울시 영등포구에 날아 들어 수많은 폭탄과 소이탄을 투하하고 저공비행하면서 기총사격을 가하여 평화적주민 33명을 살해하고 52명을 중상시켰으며 동부동에서는 어린이 28명을 포함한 676명을 살해하고 많은 주민들을 부상시켰다.

8월 22일 공중비적들은 대전시의 한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고 있는 가정부인 김현숙에게 사격을 가하여 즉사케 하였으며 충청남도 대덕군 구즉면 송강리에서는 논김을 매고 있는 최인기와 그의 아들 최승은을 목표로 폭탄 5개를 투하하여 살해하고 200여평의 논을 못 쓰게 만들었다.
또한 경상남도 의령군 룡덕면 정동리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 4대가 저녁준비를 하는 마을주민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33명을 즉사시키고 30여명에게 부상을 입히였다.

8월 23일 미군폭격기들은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상공에 날아 들어 무차별폭격으로 20명의농민들을 살해하고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밤중에 모기불을 피우고 잠든 농가들에 폭탄을 떨구어 잠 자던 농민가족 7명을 살해하였으며 24일 서울시 룡산구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24명을 살상하였다.

8월 25일 미군폭격기 8대는 서울시 서대문구 은평면 수색동에 1톤짜리 폭탄 10여개를퍼부어 주민 34명을 살해하고 48명에게 부상을 입히였으며 충청북도 충주읍에 150개의폭탄을 투하하여 주민 89명을 살해하고 20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7월 12일부터 8월 25일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충청북도 괴산군 증평면에 날아 든 미제침략군 비행기들은 100여개의 폭탄을 투하하여 농민 68명을 살해하고 124명에게 부상을 입히였는데 사망자중에는 부녀자 39명과 어린이 13명이 포함되여 있었다.

8월 27일과 30일 미군전투기들은 서울시 룡산일대와 충청북도 청주에 날아 들어 밭일을하는 사람들과 대피호에 피신하는 사람들,소를 몰고 가는 사람과 빨래하는 녀인들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살해하였다.

1950년 가을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중천리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는 산청군 미천방향으로 피난을 가기 위해 부흥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느던 16명의 피난민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정용환의 어머니 등 4명을 사살하였으며 진주시 반성면에서는 주민들이 방공호로들어 가는것을 보고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가해 10여명을 살해하였다.

9월 2일과 3일,4일에 서울에 날아 든 미군폭격기와 전투기 12대는 주민들이 집결하고있는 곳에 기총사격을 가하고 폭탄을 떨구어 79명을 살해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공중에서뿐아니라 지상에서도 남반부의 무고한 주민들을 악랄하게 학살하였다.

7월 2일 남으로 쫓겨 가던 미군은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면 충의동에서 로동자,농민,학생들을 체포한 후 총부리를 들이대고 제놈들이 퇴각하는 곳으로 끌고 가면서 아들,딸들을 따라 나온 늙은 부모들을 총창으로 무참히 찔러 죽이였다.

7월 8일 미군은 기관총 5정을 자동차에 싣고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면 매천리에 달려 들어 부락주민들에게 피난시켜 준다고 하면서 산으로 끌고 가 52명을 학살하고 19명에게 부상을 입히였다.
7월 19일 인민군대가 충청남도 대전시 근방에 육박하자 이에 바빠 맞은 미군은 이날 아침 6시경부터 중동,정동,대흥동,인동 등 대전시의 각 지역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3,740호의 살림집과 35개의 기관건물,140개소의 평화산업시설,9개의 학교,12개의 병원을 재더미로 만들었다.

이날 미제침략자들은 대전시 판암동 623번지에서 사는 여신용(68살)과 그의 아들 여남복(12살)이 판암동 한 철길굴속에 숨어 있는것을 발견하고 총살하였다.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의 사이에 미제침략자들은 경기도 수원에서 형무소와 류치장에구금하였던 1,146명의 애국자들을 살해하고 충청북도 충주에서는 시민 739명을 체포하여 이원국민학교 교사에 가둔 다음 7월 5일 학교 뒤산에서 23명을 학살하였으며 나머지716명은 손발을 결박하여 트럭에 싣고 가다가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앞산 등지에서 10명 혹은 15명씩 묶어 놓고 기관총으로 학살하였다.

충청남도 공주에서도 미제야수들은 600여명의 시민을 체포하여 산골짜기에 몰아 넣고 무참히 살해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이와 류사한 방법으로 평택에서 600여명,안성에서 500여명,부여에서 2,000여명,조치원에서 158명,대전에서 8,644명,청주에서 2,000여명,전주에서4,000여명,군산에서 400여명,공주에서 600여명,안양에서 400여명,충주에서 2,060여명을 학살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1950년 9월부터 서울과 인천을 비롯한 남조선지역에 다시 기여 들어 평화적주민들에 대한 학살만행을 더욱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1950년 9월 16일 인천에 상륙한 미제야수들은 첫 하루동안에 1,300여명의 무고한시민들을 학살한데 이어 9월 28일부터 11월 13일까지의 기간에 5만 5,900여명의주민들을 <공산분자>로 몰아 투옥학살하였으며 인천시 금곡동지구에서만도 1,500여명의 녀성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한 2,700명의 인민들을 학살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서울에서 9월 28일부터 3일동안에만도 3만 8,800여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9월 30일 미국놈들은 서울 전차 차고 로동자 600여명을 <부역자>라는 혐의로 체포하여 야수적고문을 하던 끝에 30명을 즉석에서 학살한데 이어 직맹위원장 최금목과 123호전차 녀차장을 창으로 가슴을 찔러 죽이였다.

1951년 1월 4일 미제야수들은 경기도<경찰부>가 차지하고 있던 창영국민학교에서 48명,18일에는 동인천<경찰서> 창고에서 422명,인천<경찰서>에서 28명을 학살하고 불태워 버리였다.
양동,양신,금포,양촌에서도 애국자들과 그 가족 400여명이 학살되였다.
1950년 여름부터 1951년 여름까지 전쟁 1년동안에 미제야수들에 의하여 희생된 남조선인민들의 수는 초보적으로 조사확정한데 의하더라도 무려 100만여명에 달한다.

녀성들에 대한 추악한 만행

미제침략자들은 남조선각지에서 살인,방화,략탈을 하였을뿐아니라 수많은 녀성들을 릉욕강간하는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만행을 감행하였다.
1950년 7월 초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면 회동리에 침입한 미제침략군 5명은 이 마을 가정부인 김심순을 대구로 피난시켜 준다고 트럭에 싣고 가다가 산골짜기에서 륜간하고 총살하였다.

7월 15일 충청남도 대전시 목동에 기여든 미제야수 2명이 한 녀성의 집에 뛰여 들어 가 그를 륜간한것을 비롯하여 놈들은 시내에 머물러 있는동안 수많은 부녀자들을 닥치는대로릉욕강간하였다.
7월 18일 충청남도 대덕군 기성면에 침입한 미군 3명은 농가에 뛰여 들어 남자들은 피난 가라고 강요한 후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심지어 가정부인 김한녀를 강간하고 그 자리에서총살하였으며 충청남도 대전시 류천동에 사는 농민의 안해 리갑순이 앞내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집으로 들어 가 대문을 잠그자 미군야수는 담장을 뛰여 넘어 그를 강간하고 국부에 총을 쏘아 즉사시켰다.
7월 19일 미군야수 10명은 대전시에서 한 집에 뛰여 들어 남편을 강제로 내쫓은 다음그의 안해를 산속에 끌고 가 륜간하여 인사불성에 이르게 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우리 인민군대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서울과 인천을 비롯한 남조선지역에또다시 침입하여 수많은 부녀자들을 릉욕강간하는 귀축 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1950년 9월부터 12월까지 서울에서만도 875명의 녀성들을 강간한 다음 무참히 학살하였다.
9월 18일 서울시에 거주하고 있는 은행직원 권백모의 집에 침입한 미제침략군 6명은 그의 처를 붙잡아다가 3일동안 감금해 놓고 륜간하여 실신시켰으며 10월말 미제침략군 야수들은 송림동에 사는 최모의 14살나는 딸과 한모의 15살나는 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가지고 가는것을 랍치하여 1주일간 감금해 놓고 집단륜간한 다음 죽여 버리였다.
10월초 어느날 미제침략군 3명은 서울시 금곡동에 거주하는 40살난 과부 김씨의 집에 침하여 아들들을 총으로 위협하고 구타하면서 밤새도록 녀성을 륜간하였으며 그 다음날에는 김씨로인의 집에 뛰여 들어 어린 소녀를 강간하려는것을 제지시켰다고 하여 총탁으로 로인을때리고 그의 얼굴과 목을 칼로 찔러 죽이였다.
12월 15일 서울에 사는 김인수의 옆집에 침입한 야수들은 녀자의 몸에서 출생후 2주일된 어린아이를 빼앗아 방바닥에 내던지고 산모를 륜간한 다음 그것도 성차지 않아 다른 집으로 가서 어머니가 있는데서 그의 딸을 강간하였다.
12월 25일 서울교외 광장리에서는 미제침략군 3명이 무기로 위협하면서 50살나는 녀성을 야만적인 방법으로 강간하였다.
이에 격분한 녀성이 한 자의 생식기를 잡아 당겨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하자 남아 있던 2명은 그 녀자를 총살하였다.

또한 12월말에 미제침략군 여러명은 삼간동 부락에서 처녀를 붙잡아 륜간하고 산속수풀속에던져 버렸다.
이외에도 성북동과 은진리에서 300여명의 가정부인과 녀대학생,어린 처녀들이 강간당한것을비롯하여 미제침략자들의 더러운발길이 닿는 곳마다에서 부녀자들에 대한 릉욕강간만행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감행되였다.

인민의 재산과 문화시설의 략탈,파괴만행

미제침략자들은 남조선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인민의 재산과 문화시설에 대한 략탈과 파괴행위를 꺼리낌없이 감행하였다.
1950년 7월 초순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면에 침입한 미제침략자들은 이 부락인민들에게 피난 가라고 강요하여 내쫓은 다음 주민들의 재산을 략탈하였으며 갈춘자의 집에 뛰여 들어그의 할아버지(70살)와 아들이 피난 가지 않았다고 하면서 권총으로 쏴 죽이고 집재산을 모두 털어 냈다.

10월 1일부터 20일까지의 사이에 미제침략자들은 서울시 리태원일대에서 여러 기관들에서 일하던 일군들의 가정 21세대와 의용군에 나간 가정 45세대를 습격하여 의복류,침구,가구,식량 등 일체 재산을 략탈한것을 비롯하여 습격략탈행위를 매일과 같이 계획적으로 감행하였다.
12월중순 미제침략군 3명은 남대문로 3가에서 한 회사원이 은행에서 타 가지고 오는 현금 25만원을 백주에 략탈하였으며 12월 26일 충무로 3가에서 미군야수들은 갈월동에 거주하는 임영동이 가지고 있던 현금 30만원을 략탈하여 가지고 달아 났다.
12월 27일 미제침략군 2명은 명동의 큰길가에서 대낮에 회사원 지인봉을 권총으로 협박하여 현금과 소지품 등 40만원어치를 강탈하였다.
지어 미제침략자들은 1951년 1월 3일 20여대의 자동차를 타고 돈암동에 침입하여 조금이라도 값 나가는 물건은 모조리 략탈하는 집단강도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1950년 7월 4일 경기도 련천군 련천읍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 4대가 초급남자중학교,고급남자중학교,잠업기술학교에 기총사격을 가한 후 소이탄을 떨구어 불 태워 버렸으며 15일과 16일,19일 3일동안 경기도 평택시에 맹폭격을 가하여 평택인민학교와 병원 4개를 파괴하였다.

7월 16일과 20일,23일,30일 미군폭격기들은 맹폭격으로 서울시 룡산구에서 병원 14개와 교육기관 2개,카톨릭교회 및 고아원 1개,충청남도 대전시의 대전공업중학교 본관 14개 교실과 신관 8개 교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일체 교수용 비품을 완전히 불 태워 버렸으며 대덕군 구즉면 구즉인민학교,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신흥리 인민학교와 농업중학교,이 면에 있는 지정리 대신인민학교를 전부 파괴하거나 완전히 불 태워 버리였다.

8월 4일 미제침략군 전투기 4대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에 날아 들어 인민학교에 기총사격을 가하여 학교의 일부를 파괴하였으며 미군전투기 3대는 경기도 양주군 로해면 공덕리 공과대학을 폭격하여 그 대부분을 파괴하였다.
8월 5일 남조선강원도 강릉시에 날아 든 미군전투기 4대는 약 20차에 걸쳐 저공비행으로 무차별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하여 강릉인민학교와 강릉상업중학교,강릉옥적인민학교를 파괴하였을뿐아니라 기타 학교들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8월 8일부터 14일까지 수십대의 미군폭격기들은 폭격과 기총사격으로 충청북도 제천읍 제천인민학교와 제천인민병원,서울시 룡산구 룡산인민학교,중구 세브란스병원의 일부와 간호원 기숙사 1동,대방동의 병원 1개와 제약소 1개,학교 2개,인천시 인천자림극장,전라북도 익산군 룡안면 흥왕인민학교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8월 15일과 16일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와 제천군 제천면 활산리,청원군 북이면에 대한 미군폭격기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보천리인민학교와 활산리인민학교가 불 타버렸으며 석성리인민학교와 내추리인민학교가 여러개의 폭탄을 맞고 완전히 파괴되였다.

충청남도 일대에서는 인민군대에 의하여 해방된 때로부터 8월 25일까지사이에 미제침략군 공중비적들의 야만적폭격으로 수많은 문화기관 청사들과 기타 기관들이 심히 파괴되였는데 아산군에서는 병원 7개,대덕군에서는 병원 2개,학교 13개,기타 3개의 문화시설,연기군에서는 병원 6개,학교 16개,기관청사 15개,천안군에서는 병원 4개,학교 1개,보령군에서는 병원 4개,기관청사 6개,론산군에서는 병원 14개가 파괴되였다.이 기간 남조선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일대에서는 12차에 걸친 미제침략자들의 함포사격으로 근덕인민학교 및 기타 문화시설들이 파괴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서울에 있는 학교 76개를 완전히 파괴 또는 불 태워 버리고 79개 학교의 내부시설,38개 병원과 의료시설들을 파괴하였으며 방송국 2개,극장 6개,박물관 1개,신문사 4개를 불 태워 버렸다.
미제침략군 야수들은 종로의 종각과 덕수궁 석조전을 불 태워 버리는 등 서울시내의 많은 력사고적들과 유적들을 파괴하고 경복궁안의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였던 신라시기의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국보적진렬품들을 략탈하였으며 남산에 있는 민족박물관,창경원박물관,서울대학박물관의 귀중한 진렬품들을 전부 략취 또는 파괴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덕수궁미술관에 진렬하였던 유명한 고서화들을 전부 도적질하고 국립도서관,시립도서관,서울대학도서관 등에 있는 력사고서들과 귀중한 도서들도 불 태워 버렸으며 인천영화관,동방극장 등의 영사기와 기타 기구들을 략탈 또는 파괴해 버리였다.
이와 같이 미제침략자들이 조선전쟁을 도발한 후 남반부지역에서 감행한 야수적살륙,략탈,파괴행위는 력사에 그 류례를 찾아 볼수 없는 잔악무도한것이였다.
제반사실들은 미제승냥이들이 남반부지역에서 저지른 반인륜적범죄는 그들이 지금 떠벌이는것처럼 결코 그 어떤 우발적인 요인에 의한것이 아니라 조선민족말살을 목적으로 감행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살륙,략탈,파괴행위였다는것을 똑똑히 보여 준다.
자기의 존엄과 자주권을 목숨같이 귀중히 여기는 조선민족은 결코 미제식인종들에게 당한 치욕을 수수방관하지 않을것이다.
우리 민족은 천인공노할 미제의 죄행을 총결산하고 쌓이고 맺힌 한을 기어이 풀고야 말것이다.

주체91(2002)년 4월 2일
평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