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정세- 견해와 의견


(편주: 여기에 모은 글들은 범민련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혀 둡니다.)
[한겨레 사설] 남북 한쪽 노력만으론 ‘한반도의 봄날’은 오지 않는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노동당 8차 대회(당대회) 사업총화 보고를 통해 미국과 한국의 태도와 행동에 맞춰 대외정책을 펴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9일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에 대해선 “강 대 강, 선 대 선 원칙에서 상대”하고 “새로운 조(북)-미 관계 수립의 열쇠는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남쪽에 대해서는 “요구에 화답하는 만큼, 북남 합의 이행을 위해 움직이는 만큼” 상대하겠다고 말했다. 미국과 한국을 향해 대화의 문은 열어뒀지만, 두 나라에 공을 넘기고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김 위원장 발언을 보면 앞으로 상당 기간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한반도 상황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므로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선 북한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킬 핵 또는 미사일 실험 등 무력시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새로 출범하는 바이든 미 행정부는 북한과 대화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신속하게 보내길 바란다. 김 위원장은 “미국에서 누가 집권하든 미국이라는 실체와 대조선 정책의 본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며 “대외 정치활동을 최대 주적인 미국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지향시켜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최대 주적 미국’이란 표현이 거칠고 자극적이긴 하나, 역으로 북-미 관계 정상화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김 위원장은 또한 “핵 선제 및 보복 타격 능력을 고도화하겠다”며 핵잠수함 등 다양한 핵무력 발전 계획을 밝혔다. 북한은 당 규약도 개정해 ‘강력한 국방력으로 조선반도 안정과 평화환경을 수호하겠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북한의 안보불안 심리를 고려하더라도 이런 방향을 추구하는 건 한반도의 군사 대결과 남북 군비 경쟁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한쪽이 힘의 우위를 통해 안보를 추구하면 상대방도 똑같은 대응에 나서 양쪽이 작용-반작용의 군비 경쟁을 벌이다 오히려 안보가 취약해지는 ‘안보 딜레마’가 발생할 수 있다. 이미 2018년에 남북한 정상은 단계적 군축 실현과,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닌 신뢰와 합의 이행을 통한 평화를 다짐했음을 되새겨야 한다.

김 위원장은 현 남북관계를 ‘파국’이라 칭하며 ‘2018 판문점 이전으로 회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남조선 당국의 태도 여하에 따라 가까운 시일 안에 3년 전 봄날과 같은 평화와 번영의 새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밝혔다.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책임을 남쪽에만 돌리는 건 타당하지 않다. 3년 전과 같은 ‘한반도의 봄’은 남북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 꽃피울 수 없다. 함께 노력하는 게 절실하다. 한·미는 오는 3월의 한-미 연합군사훈련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함으로써 이를 한반도 정세를 푸는 변곡점으로 삼는 게 바람직하다. 북한 또한 인도적 사안부터 남쪽의 대화 요구에 적극 응하는 모습을 보이길 바란다.


[한겨레 사설] 윤석열 논란, 더이상 국정운영 부담되지 말아야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의 효력을 법원이 정지시킨 것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문 대통령은 “법원의 결정을 존중한다. 국민들께 불편과 혼란을 초래한 데 대해 인사권자로서 사과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법무부의 윤 총장 징계를 대통령이 재가했던 데 비춰보면, 이 발언은 결과적으로 징계 결정이 적절하지 않았음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 더이상 윤석열 검찰총장 거취를 둘러싼 논란이 국정운영에 부담이 되지 말기를 바란다.

문 대통령의 언급은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전해졌다. 그러나 이른바 ‘추-윤 갈등’이 너무 오랫동안 첨예하게 전개되며 국민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점에서, 인사권자인 문 대통령이 국민에게 직접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이해를 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리라 본다. 그래야 검찰개혁에 대한 국민 지지를 더 굳건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원 결정에 대해선 다양한 평가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다만 검찰개혁의 성공을 위해선 개인의 거취보다 제도적 장치를 뿌리내리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정부여당이 마음에 새기는 건 필요하다. 이번 일로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좌절됐다는 의견도 있지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출범하고 검경 수사권 조정을 통해 검찰 권한의 상당 부분이 경찰로 넘겨지는 등 그동안 이룬 제도 개혁의 성과가 크다는 건 분명하다. 앞으로 공수처를 국민 신뢰를 받는 기관으로 안착시키고, 경찰의 수사권 확대가 인권 침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힘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25일 업무에 복귀했다. 윤 총장은 사법부 결정의 의미를 잘 새겨서, 검찰 수사를 둘러싼 공정성과 정치적 논란이 더는 벌어지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이다. 법원 결정문을 보면, 윤 총장의 징계 사유 네가지 중 ‘판사 사찰 문건’과 ‘채널에이(A) 사건 감찰 방해’에 대해선 사유가 인정된다고 봤다. 특히 판사 사찰과 관련해 “매우 부적절하고 차후 이런 문건이 작성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음을 무겁게 돌아봐야 한다. 문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공정하고 절제된 검찰권 행사’를 주문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사안의 무게에 비춰 징계 결정 과정에서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는 법원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대통령이 사과하고 검찰총장은 업무에 복귀했지만, 중요한 논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법원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행정부 일원인 검찰총장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한 것을 집행 정지시키는 것은 공공복리를 침해한다’는 법무부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정무직 공무원인 검찰총장을 징계한 것을 두고 ‘선출되지 않은 판관’인 사법부가 최종 판단하는 게 과연 적절하냐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이 문제는 대통령제의 효시인 미국에서도 오랜 논쟁거리였다. 삼권분립과 대통령 권한 및 책임에 관한 건설적인 논쟁은 앞으로도 필요하리라 본다.


[한겨레 사설] 대검 반부패부장 출신이 ‘라임 로비’ 거액 받았다니

라임자산운용 사태와 관련해 고검장 출신 윤갑근 변호사(국민의힘 충북도당위원장)가 11일 구속됐다. 지난해 4월 우리은행이 라임펀드 판매를 중단하자 이 은행에 대한 로비 명목으로 라임 관계사로부터 2억여원을 받은 혐의다. 법원은 “도망과 증거 인멸의 염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현직 검사 3명 술접대’에 이어 검찰 고위직 출신 구속까지 라임 사태와 연루된 전·현직 검사들의 비위가 잇따라 확인되고 있다.

대검찰청 반부패부장을 지낸 윤 변호사가 다른 것도 아닌 로비와 관련해 거액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는 건 충격이다. 윤 변호사는 2017년 6월 대구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나기까지 대검 반부패부장·강력부장, 서울중앙지검 1·3차장, 특수2부장 등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대표적인 특수통 엘리트 검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퇴직한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펀드 사기와 관련한 금융권 로비 명목으로 금품을 수수했다니 과연 어떤 자세로 공직 생활을 했던 것인지 의문이 든다.

검찰 수사가 은폐·지연된 의혹도 커진다. 라임 사태의 핵심 인물인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은 지난 10월 옥중 입장문을 통해 ‘윤 변호사에게 수억원을 지급한 사실을 검찰에 얘기했음에도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김 전 회장의 윤 변호사 관련 진술은 당시 대검 반부패부를 거치지 않고 윤석열 검찰총장에게만 직보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윤 총장은 같은 달 국정감사에서 “지난 5월 남부지검장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철저히 수사하라고 지시했다”며 “광범위한 통신과 계좌 추적 등 지금 다 완벽하게 추적이 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검찰은 지난달 4일에야 우리금융그룹과 윤 변호사 사무실 압수수색에 나섰다. 김 전 회장의 폭로와 국정감사 이후 수사에 속도를 낸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김 전 회장의 폭로는 검사들에 대한 술접대에 이어 윤 변호사 금품 수수까지 신빙성이 높아졌다. 김 전 회장의 진술이 처음부터 제대로 보고됐는지, 또 수사는 정상적으로 이뤄졌는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검찰이 김 전 회장에게 여권 인사에 대한 진술을 회유·압박했다는 의혹도 진위를 가려야 한다. 라임 사태에 연루된 정치인들 수사 또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철저히 진행돼야 함은 물론이다.


[한겨레 사설] 승리 앞둔 바이든, 미국 앞에 놓인 무거운 책임

미국의 ‘역사적’ 대선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승리를 향해 다가서고 있다. 미시간과 위스콘신 등 주요 경합주에서 역전승을 거두면서 ‘선거인단 270명 확보’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무더기 소송전으로 맞서고 있지만, 바이든 후보의 당선 확정은 시간문제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바이든 캠프는 4일(현지시각) 인수위원회 사이트도 개설했다.

트럼프 시대가 가고 ‘바이든 시대’가 오더라도 미국 앞에 산적한 과제들은 그대로 남는다. 극단으로 분열된 미국의 모습은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났다. 인종주의와 미국 우선주의로 똘똘 뭉친 트럼프 지지층 가운데 많은 이들은 무분별한 세계화 속에서 소외됐다고 느끼는 저학력 백인들이다. 지금의 미국은 기득권층과 엘리트들이 빈부격차와 약자들의 어려움을 외면했을 때 사회가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타산지석이다. 미국 사회의 통합 외에도 바이든 앞에는 코로나19 대응과 경제문제 해결 등 많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외교에 반대하며 동맹과 협력하는 외교를 공언해온 바이든 후보가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복원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트럼프 임기 4년 동안 미국의 신뢰는 크게 추락했고 고립주의 여론도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바이든 후보가 4일 밤 트위터에 글을 올려 “정확히 77일 안에 파리협정에 다시 가입하겠다”고 밝힌 것인 매우 긍정적인 신호다. 77일은 이날부터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1월20일까지 기간이다.

미-중 갈등과 관련해선 바이든 역시 중국에 대한 견제를 이어가겠지만, 트럼프와 같은 극단적 방식보다는 동맹들을 결집해 ‘중국 대 다자’ 구도를 형성하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에겐 기회와 위험이 공존한다. 동맹을 중시하겠다는 바이든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 전작권 전환 등에서 한국 입장을 트럼프보다 존중할 가능성이 크지만, 우리에게 ‘반중국 동맹’에 참여하라는 요구 또한 커질 것이다. 바이든은 북한과의 외교를 지지하면서도 정상 간 담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트럼프의 톱다운 방식에는 반대한다. 우리 정부는 바이든 외교안보팀과 신속히 협의해 입장을 분명히 전달하고, 협력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북-미 협상이 선순환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가 주도하는 명확한 청사진도 마련해야 한다.


[한겨레 사설] ‘역사적’ 미국 대선, ‘혼돈’ 극복하고 ‘변화’ 만들어내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거’로 일컬어지는 미국 대선이 3일(미국시각) 치러진다. 코로나19와 기후변화 등 산적한 위기 해결을 위해 국제 공조가 절실한 때여서 전 세계가 숨죽인 채 이번 선거를 주목하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가 앞서는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지만, 미국 특유의 선거인단 제도와 우편투표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집요한 문제제기 등으로 누구도 선거 결과를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최종 승자를 언제 알게 될지, 선거 직후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미국 정치 지형이 극단적으로 갈린 가운데 ‘선거 불복’으로 인한 극심한 혼돈이 벌어질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패배하면 평화적 정권 이양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확답을 피하며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쳐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당일 저녁 일부 개표 결과에서 자신이 앞서는 흐름을 보이면 서둘러 승리를 선언해 재선을 기정사실화하는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도 나오고 있다. 민주주의 선거제도를 부정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바이든 지지자들이 거리로 나서고 트럼프 지지자들과 무력 충돌이 빚어질 수 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무장조직과 지지자들의 폭력을 옹호하고 부추겨왔다. 지난달 30일 텍사스주에서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차량이 민주당 대선 유세버스를 둘러싸고 위협하면서 들이받는 폭력 사태도 일어났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의 의미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 냉전 이후 세계 유일 패권국가가 된 미국은 무분별한 세계화로 양극화를 악화시키고 9·11 테러 이후 이라크 침공 등으로 국내외에 큰 고통을 초래했다. 그 결과로 등장한 트럼프 행정부는 인종차별을 부추기고 코로나19에 무책임하게 대응해 미국의 쇠락을 더욱 가속화했다. 지난 4년 동안 세계는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 탓에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파리 기후변화협정과 이란 핵합의 등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미-중 갈등을 크게 악화시켰고,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를 무력화하면서 세계를 ‘G제로’의 리더십 부재 상태에 빠뜨렸다.


[한겨레 사설] ‘전작권 전환’ 늦추며 ‘방위비 증액’ 압박한 미국

한-미 국방부 장관이 14일(현지시각) 미국에서 열린 제52차 한-미 안보협의회의(SCM)에서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의 환수 시기를 놓고 이견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머리발언에서 전작권 전환에 속도를 내겠다는 데 무게를 뒀다. 반면 마크 에스퍼 국방부 장관은 “전작권 전환을 위한 모든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조건 충족을 강조했다.

미국의 주장은 2014년 양국이 합의한 ‘조건에 기초한 전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당시 한-미는 한국군의 연합방위 주도 핵심 군사능력 확보,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비한 초기 필수 대응능력 구비, 안정적인 전작권 전환에 부합하는 한반도 및 지역 안보 환경 관리라는 세가지 전작권 전환 조건에 합의했고, 3단계 검증·평가 절차를 추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올해 한국과 미국은 코로나19 영향으로 3단계 중 2단계에 해당하는 미래연합군사령부의 완전운용능력(FOC) 검증 평가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송영무 전 국방부 장관은 전작권 환수를 위한 조건과 절차적 단계는 전작권 환수를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며 ‘확인 사항’이라고 밝혔다. 만약 일부 조건 충족이 미흡하다면 전작권 환수 이후에 보완·발전시켜 충족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1994년 12월 평시작전권 환수 때도 조기 경보를 위한 한미연합 정보관리 등 6개 임무는 연합권한위임사항(CODA)이란 유예조건을 두고 환수를 한 전례가 있다. 2022년 5월 문재인 정부 임기 안에 전작권을 환수하고 미흡한 분야가 있다면 평시작전권 환수 때처럼 ‘조건부 환수’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마치 조건을 ‘절대 불변’인 것처럼 내세우는 것은 전작권 환수를 늦추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된다. 미국은 앞으로 전작권 협상에서 전례를 적극적으로 고려하기 바란다.

에스퍼 장관은 전작권 환수에는 소극적 태도를 보이면서, 이번 회의 의제가 아니었던 방위비 분담금 대폭 증액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의 공동방위 비용 분담에 관해 더 공평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그래야 그게 미국 납세자들에게 불공평하게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치 한국이 안보를 주한미군에 기대 무임승차해왔다는 듯한 발언인데, 사실과 맞지 않는다. 에스퍼 장관은 교착 상태인 방위비 분담금 협상과 주한미군 주둔 규모를 연계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미국이 요구하는 증액 규모 자체가 비상식적인데다 미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우리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미는 상호 이익을 추구하며 이견을 조정해가야 한다. 정부는 미 대선 이후를 염두에 두고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한-미 현안에 대한 중장기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국내 일부에서 ‘한-미 동맹이 흔들린다’ 식으로 비난을 하는데,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자제해야 한다.


[한겨레 사설] 민간인 사살하고 불태운 북한의 충격적인 ‘범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연평도 해상에서 실종된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북한 해역에서 북한군의 총격으로 숨졌다고 군 당국이 24일 밝혔다. 북한군이 비무장한 민간인인 우리 공무원을 사살하고 주검에 기름을 부어 불태우기까지 했다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북한의 비인도적 만행을 강하게 규탄하며, 정확한 진상 공개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한다.

21일 실종된 이 공무원은 22일 오후 3시30분께 북한 수산사업소 선박에 의해 북한 등산곶 인근 해상에서 발견됐으며, 북한 쪽이 표류 경위 등을 물었다고 한다. 이후 6시간가량 뒤인 밤 9시40분 단속정의 북한군이 상부 지시에 따라 이 공무원에게 총을 쏘고 주검을 불태운 것으로 보인다고 국방부는 밝혔다. 이번 사건이 북한 해안경계병의 우발적 행위가 아니라, 북한군 지휘계통에 따른 사살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북한이 코로나19 감염 차단을 위해 주검을 불태웠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범죄’다.

청와대와 국방부는 24일 “북한군이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저항 의사도 없는 우리 국민을 총격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반인륜적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결과를 보고받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매우 유감스럽다”며 북한 당국의 책임 있는 답변과 조처를 촉구했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구상은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전날 문 대통령은 유엔총회 영상연설에서 “종전선언이야말로 한반도에서 비핵화와 함께 항구적 평화체제의 길을 여는 문이 될 것”이라고 국제사회 지지를 호소하며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밝힌 상태였다. 2008년 금강산에서 남쪽 관광객이 북한 경비병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 이후 12년 만에 벌어진 이번 사건으로, 대북 여론은 최악의 상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야당에선 정부를 거세게 비난했다. 국민의힘 등은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운운한 것은 무책임하다’ 또는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하자고 했는데 북한은 우리 국민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해수부 공무원이 실종된 건 21일이고, 23일 새벽에 화상 공개된 대통령의 유엔 연설은 15일 사전 녹화해 18일에 이미 유엔으로 보냈다고 한다. 시점을 따져본다면 이번 사건과 대통령의 유엔 연설을 직접 연결시키는 건 무리다. 다만, 군이 22일 오후 3시30분께 우리 공무원의 북한 해상 표류를 포착했으면서도 피살 때까지 6시간 동안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은 게 적절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국방부가 우리 공무원의 죽음을 처음 파악한 게 22일 밤이라고 하는데, 그 이후 정부 대응이 신속하고 적절했는지도 분명하게 짚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북한 당국이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을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북한은 유족과 우리 국민에게 사과하고, 반인륜적 대응을 주도한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


[한겨레 사설] 전교조 재합법화, 노동기본권 강화 계기 되길

대법원이 3일 전원합의체를 열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처분이 위법하다고 결정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10월 고용노동부가 전교조에 ‘교원노조법에 의한 노동조합으로 보지 않는다’며 법외노조를 통보한 것에 맞서 전교조가 취소 소송을 낸 지 7년 만에 내려진 판단이다. 그 7년은 노동기본권을 함부로 침해하는 행정처분을 바로잡는 데 걸린 우여곡절의 시간이기도 하다. 비로소 전교조가 합법노조 자격을 다시 얻을 길이 열렸다.

대법원은 이날 “법외노조 통보의 근거인 노동조합법의 시행령은 헌법상 보장된 노동 3권을 본질적으로 제약하는 결과를 초래하기에 무효”라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고용노동부의 처분은 전교조가 해직 교원 9명의 조합원 자격을 허용한 것은 위법이고, 이를 시정하지 않으면 노조 자격이 없다는 논리로 구성돼 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이 논리의 주요 근거인 시행령 조항 자체가 위법하다고 본 것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을 바로잡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전교조 법외노조 처분의 본질은 법리가 아니라 색깔론이었다고 봐야 한다. 전교조는 1989년 설립 당시부터 집요한 이념 공세의 대상이었고, 교원의 노조 할 권리를 인정받는 과정에서 조합원의 해고와 투옥 등 숱한 희생을 감내해야만 했다. 합법화 이후에도 조합원 명단 불법 공개 같은 부당한 공격에 시달렸다. 마침내 양승태 사법부가 전교조 소송을 박근혜 정부와의 사법 거래 대상으로 삼은 의혹까지 불거졌다.

국민의힘 소속 국회 법제사법위원들이 대법원 판결에 대해 “사법부가 독립성을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취지로 낸 성명은 양승태 사법부의 잘못은 안중에도 없는 주장이다. 이들은 대법원 판결이 정부가 지난 6월 현직이 아닌 교원도 조합원이 될 수 있도록 한 교원노조법 개정안을 발의한 것에 편승한 것처럼 호도했다. 그동안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가 우리 교원노조법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에 위배된다며 개정을 거듭 촉구해온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7월 실업자와 해직자의 노조 할 권리 등을 보장하는 협약 비준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민의힘은 대법 판결에 철 지난 정치적 색깔을 씌울 게 아니라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에 협조하고, 국제사회 표준에 크게 뒤처진 노동 관련 법률의 개정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바란다.


[한겨레 사설] 아베 총리 전격 사임, 한일관계 개선 출발점 되길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8일 사임 의사를 밝혔다. 아베 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8월 초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이 재발했다”며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만큼, 총리 자리에 계속 있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측근들도 예상치 못한 전격 사임이다. 자민당이 곧 차기 총리를 선출할 때까지는 아베 총리가 직무를 수행한다.

아베 총리는 2012년 12월 재집권한 뒤 7년8개월 넘게 재임한 역대 최장수 총리다. 1차 집권까지 합하면 8년 반을 집권했지만, 전체적인 평가는 부정적이다. ‘아베 1강’ 독주 체제가 장기간 계속되면서 관료들이 총리 관저의 눈치만 보는 ‘손타쿠 현상’의 폐해가 심해졌고, 측근 인사들이 연루된 특혜 스캔들도 잇따라 일어났다. 무소불위로 보였던 아베의 권력은 올해 들어 코로나19 대응 실패, 도쿄올림픽 연기 등으로 급격히 무너졌다. 아베노믹스를 앞세워 일본 경제의 체질 개선을 추진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전후 최악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아베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일본은 급격히 우경화했다. 아베 총리는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집단적 자위권 법제화를 강행했고, 평화헌법 9조를 바꾸려는 개헌을 줄기차게 추진했다. 무엇보다 아베 총리가 ‘혐한’을 정치적으로 악용해 한-일 관계를 크게 악화시킨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아베 총리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공격하면서 보복성 수출규제를 강행했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집요하게 방해했다.

아베 총리의 사임이 수교 이래 최악의 상황에 빠진 한-일 관계를 개선할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후임 총리로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 기시다 후미오 정조회장,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등이 거론된다. 누가 후임 총리가 되든 우리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오랜 세월 기다려온 일본 기업의 사과와 배상을 막지 말고, 외교적 해법 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 정부도 아베 정부의 퇴장을 계기로 한-일 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역사문제 해결과 외교·경제 사안을 투트랙으로 진전시킬 전략을 선제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미-중 신냉전의 거대한 파고에 대비하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라도 한-일 관계를 계속 이대로 가져갈 수는 없는 일이다.


[한겨레 사설] 주목되는 김정은 위원장의 ‘통치 형태’ 개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대남정책, 대미전략, 경제, 군사 분야 등의 권한과 책임을 핵심 간부들에게 분산시켜 ‘위임 통치’를 하고 있다고 국가정보원이 지난 20일 국회에 보고했다. 북한의 통치 형태 변화는 남북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므로 정부는 그 내용과 배경, 의미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처해야 한다.
‘위임 통치’라는 국정원 보고 내용이 언론 속보로 알려진 직후 ‘김정은 위원장의 건강이 나빠져 권력을 위임했다’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국정원은 ‘통치 스트레스를 줄이고 정책 실패 시 책임을 돌리려는 차원’이라며 “근본적으로는 9년간 통치하면서 갖게 된 자신감의 발로”라고 설명했다.

고위급 간부에게 역할과 권한을 줘서 통치 시스템의 효율화를 추구하는 방식은 여러 해 전부터 ‘김정은 리더십’의 특징으로 꼽혀왔다. 북한에서 수령은 혁명과 건설의 영도자이고, 유일하게 최고 결정권을 가진 무오류의 존재로 여겨진다. 김 위원장은 수령의 카리스마에 의존했던 통치 시스템을 당이 국가를 통치하는 ‘사회주의 당 국가 시스템’으로 전환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유명무실했던 당 전원회의, 정치국 회의, 정치국 확대회의 등 노동당의 공식적 의사결정체를 부활했다. 북한이 내년 1월 제8차 노동당 대회를 연다고 지난 20일 공개한 것도 이를 재확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통치 형태 개편은 당 국가 시스템의 복원 흐름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 사회주의 정상국가 이미지를 얻으면, ‘예측 불가 국가’라는 국제사회의 부정적 평가를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권한을 분산한 북한의 통치 형태 변화는 남북관계에서 안전판 구실도 할 수 있다. 지난 6월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남북관계 긴장을 고조시켰다가, 김정은 위원장이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보류하는 결정을 내려 고비를 넘긴 바 있다. 정부는 북한의 통치 형태 변화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면밀하게 검토해, 카운터파트 조정 등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 바란다.

한편 ‘위임 통치’라는 표현을 두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 위원장의 통치권 이양, 권력 기반 약화란 뉘앙스가 강하기 때문이다. 위임 통치는 북한에서 쓰는 용어가 아니고, 국정원에서 만든 용어라고 한다. 국민이 오해하고 북한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수 있다. 국정원의 신중한 처신이 필요하다.


[한겨레 사설] 위안부 피해자 운동, ‘29년 전 그날 용기’ 되새겨야

14일은 제8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이날은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생존자 가운데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것을 기려 정했다. 특히 올해는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회계 논란 등을 틈탄 한·일 극우세력의 ‘역사 뒤집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 ‘29년 전 그날의 용기’를 새로운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기림의 날을 맞아 무엇보다 일본 정부의 무책임하고 반인권적인 태도를 다시 한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 이후 피해자들의 증언이 쌓이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유엔보고서에 들어갔다. 국제사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쟁범죄로 보고 있다. 나아가 위안부 피해자 운동을 인류 보편의 가치를 실현하는 여성 인권운동이자 평화운동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일본군 및 관헌의 직접 개입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첫마디가 “일본군대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갔던 김학순입니다”였다. 일본 정부는 차고 넘치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무슨 염치로 외면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최근 국내외 일부 극우 단체들은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책임을 숨기고, “위안소는 고수익 시장”이라는 망언으로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역사 왜곡과 난폭한 2차 가해를 ‘학문의 자유’란 미명으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피해자들이 고령임을 감안해 문제 해결을 서둘러야 한다. 애초 240명이던 국내 생존자가 27명(2018년), 20명(2019년), 17명(올해)으로 줄어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영상 축사를 통해 “정부는 할머니들의 용기와 헌신이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는 것으로 보답받을 수 있도록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29년 전 김학순 할머니는 참혹한 사실을 증언하던 도중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못다 하겠어”라며 잠시 숨을 고른 뒤 “절대 이것은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하고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라고 증언을 마무리했다. 정의연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할머니들의 아픔을 가슴에 새기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 기림의 날을 맞아, 위안부 피해자 운동이 그동안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한겨레 사설] 집중호우 피해, 남북 ‘인도적 협력’ 재개할 때다

북한도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가 크다고 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황해북도 은파군 수해 현장을 찾아 ‘국무위원장 예비 양곡과 전략 예비분 물자’를 풀어 수해 복구를 지시했다고 7일 북한 언론이 보도했다. 대북 제재와 코로나19로 힘든 상황에서 홍수 피해까지 발생하자,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민생 챙기기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기상청은 다음주 후반까지 한반도 중북부 지방에 비가 계속 쏟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임진강 상류에 있는 북한 황강댐이 다시 물을 남쪽으로 방류할 가능성도 있다. 지난 6일 북한의 황강댐 무단 방류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과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직접 나서 ‘재발 방지’를 북한에 촉구했다. 북한은 황강댐 무단 방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러 이유를 떠나서 동포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황강댐 방류를 사전에 통보해주는 식의 ‘인도적 협력’이 남북 사이에 절실한 시기다. 임진강 주변이 저지대이고 상류 쪽 북한의 수방 대책이 허술해, 홍수가 나면 경기도 파주와 연천에 침수 피해가 발생해왔다. 2009년 9월 북한이 황강댐 물을 예고 없이 방류해 경기 연천에서 6명이 숨진 적도 있다. 남북은 그해 10월 황강댐 방류 시 남한에 사전 통보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북한은 남북관계 상황에 따라 이 합의를 지키기도 하고 때론 무시하기도 했다. 이번에 북한이 황강댐 방류를 사전에 알리지 않은 것은, 지난 6월 남북을 잇는 모든 통신수단을 끊고 남북관계를 단절한 것과 관련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남북이 정치적 이유로 홍수 같은 자연재해에 관한 협력까지 중단해서는 안 된다. 휴전선이 남과 북을 가르지만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 남북의 최고 지도자가 같은 시기에 각각 수해지역을 방문한 장면은, 같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새삼 일깨운다. 남북관계가 아무리 악화돼도 동포의 생명을 위협하는 접경지역 홍수나 가축 감염병, 전염병엔 공동 대응을 하는 게 꼭 필요하다.

지난 6일 통일부가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1000만달러 규모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고 밝히자, 일부에서 ‘대북 굴종’이라고 비난했다. 좁고 경직된 생각이다. 인도적 지원과 재난정보 공유 같은 지금 당장의 현안에서부터 남북관계를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북한 정부도 이런 남북 간 인도적 협력에 적극 나서길 촉구한다.


[한겨레 사설] 태영호 “사상 전향” 망언, 또 색깔론 꺼내든 통합당

태영호 의원을 비롯한 미래통합당 의원들이 23일 도를 넘는 색깔론 공세로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얼룩지게 했다. 태 의원은 “사상 전향”을 공개 선언하라는 망언까지 했다. 황당하다 못해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도대체 통합당은 이런 기본도 안 된 반헌법적 행태를 언제까지 보여주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탈북민 출신인 태 의원은 이날 청문회에서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면서 (이 후보자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서 언제 어디서 사상 전향을 했는지 못 찾았다”며 “저는 (탈북 이후)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혹시 후보자도 언제 어디서 이렇게 주체사상을 버렸다, 주체사상 신봉자가 아니라고 말한 적 있느냐”고 물었다. 이 후보자는 “이른바 전향이라는 건 북에서 남으로 오신 분한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겠느냐”며 “사상 검증과 사상 전향을 강요하는 건 다르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태 의원은 “아직도 주체사상 신봉자인가, 아닌가? 국민께 ‘나는 이제 버렸다’ 말씀하실 수 있지 않으냐”며 공개적 사상 전향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묵과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사상 전향은 일제의 독립운동가 탄압 수단이었던 ‘사상전향제’에 뿌리를 둔 용어다. 해방 이후 독재정권들도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양심수를 대상으로 사상 전향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비전향 양심수들이 고문으로 숨지거나 넬슨 만델라보다 더 오래 감옥살이를 한 어두운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1998년 국민의 정부에 와서야 사상전향제도가 폐지됐다. 헌법 19조 “양심의 자유”에는 누구도 내면의 생각을 강제로 드러내도록 억압받아선 안 된다는 원칙이 포함돼 있다는 사회적 합의의 결과였다.

태 의원은 탈북 뒤 “사상 전향”을 입증해야 했던 개인적 경험에 갇혀 자신의 행동이 부를 파장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후보자와 여당 의원들이 태 의원에게 반헌법적 질문이라고 여러 차례 지적했는데도 되레 “야당 의원에 대한 압박”이라며 반발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스스로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으면 국회 차원의 엄중한 조처가 따라야 할 것이다. 통합당의 박진·조태용 의원도 태 의원을 말리기는커녕, 이 후보자의 과거 전대협 의장 시절 활동 등을 거론하며 태 의원을 거들었다. 4·15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고도 여전히 색깔론에 집착하는 통합당의 구태가 개탄스럽기 이를 데 없다.


[한겨레 사설] 비건 “남북협력 지지”,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설 때

한국을 방문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가 8일 “미국은 남북 협력을 강력히 지지한다. 남북 협력이 한반도에서 보다 안정적인 환경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비건 대표는 또 북-미 협상 의지를 강조했지만,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이후 교착 상태를 돌파할 구체적 메시지를 내놓지는 않았다.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미국이 ‘남북 협력’ 중요성을 강조한 건 의미 있는 만큼, 이제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나서는 게 긴요해졌다.

비건 부장관은 외교부에서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면담한 뒤 기자들과 만나 “남북협력에서 북한과 공동의 목표를 추진하는 한국 정부를 전적으로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그동안 ‘남북협력은 비핵화 진전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며 여러 차례 발목을 잡은 걸 생각하면, 훨씬 진전된 입장 표시로 평가할 만하다. 미국의 이런 태도가 말로만 끝나지 말고 행동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우선 남북관계 진전을 가로막는다는 비판을 받아온 한-미 워킹그룹 운영을 대폭 개선할 구체적 방안을 한-미 당국이 빨리 내놓기를 바란다. 내달로 예정된 한-미연합훈련을 대폭 축소 또는 취소하는 것도 필요하리라 본다. 미국내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에서 수천명의 미군이 한국으로 이동하는 훈련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도 않고, 한반도 정세 관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은 북-미 협상 재개를 바란다는 ‘립 서비스’만으로는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7일(현지시각) “만약 도움이 된다면 하겠다”며 3번째 북-미 정상회담 개최에 긍정적 태도를 비쳤지만, 이 정도 말로는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기 어렵다. 북한에 일방적 비핵화 조치만 요구하지 말고,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비핵화와 대북 제재 완화를 단계적으로 이행하는 구체적 로드맵을 내놓아야 한다. 이제 우리 정부가 전면에 나서 남북관계를 진전시킴으로써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고, 북-미 협상 재개를 이끌어내야 할 때다. 지난달 북한의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군사적 긴장은 여전하고,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이 북한과 진지한 대화를 준비할 여유는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선 새 외교안보팀이 담대하게 돌파구를 만드는 게 절실하다. 미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야 함은 물론이다.


[한겨레 사설] 외교안보팀 파격 개편, 남북관계 돌파구 기대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안보팀 전면 개편을 통해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문 대통령은 3일,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 성사의 주역인 박지원 전 의원을 국가정보원장에 파격적으로 발탁했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때부터 대북 정책을 이끌어온 서훈 국정원장이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외교안보특보를 맡게 됐다.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와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 서훈 안보실장 내정자, 임종석 특보 내정자는 모두 남북관계 문제에서 소신과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이다. 지난달 16일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한반도 긴장을 높인 뒤 외교안보팀 쇄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은 상황에서, 이번 개편이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열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가동시키는 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 특히 박지원 후보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 특사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이끌어내는 등 오랫동안 남북관계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해왔다. 그간의 경륜을 살려 국정원장으로서 남북간 대화의 끈을 복원하는 역할을 해내길 바란다.

서훈 내정자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 열린 모든 남북정상회담에서 막후 역할을 했던 대북 업무의 베테랑이다. 미국과도 정보당국 채널을 통해 한반도 문제를 긴밀히 협의해왔다. 다만, 지난 2월 북-미 정상회담이 ‘하노이 노딜’로 끝난 이후 1년 넘게 악화된 남북관계의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서훈 내정자는 그동안 미흡했던 점들을 성찰하고, 외교안보 사령탑으로서 추진력을 제대로 발휘해야 한다.

이인영 후보자는 4선 국회의원으로 민주당 원내대표까지 지낸 정치적 무게를 갖고 있는 만큼, 통일부가 명실상부하게 남북관계 추진의 주무 부처로서 위상을 되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문재인 정부에서도 통일부가 남북대화 진전과 교류·협력 추진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음을 명심하길 바란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엄중한 시기에 새 외교안보팀의 역할은 막중하다. 다시 남북대화의 통로를 열고,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북-미 비핵화 협상이 재개될 수 있도록 과감하고 창의적인 노력을 다해야 한다. 특히 정부가 북-미 관계 개선만 기다리며 미국 의중을 살피면서 남북관계 진전엔 머뭇거리다가 한반도 정세가 크게 악화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새 외교안보팀은 담대한 발상의 전환을 통해 남북관계 돌파구를 마련하고 남북대화와 북-미 협상의 불씨를 되살려야 한다.
이번 외교안보팀 개편에 담긴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신호에 북한도 전향적으로 호응하길 기대한다.


[한겨레 사설] 수출 규제 1년, 아베 정부 ‘혐한 외교’ 중단해야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우리 첨단산업을 겨냥해 기습적인 수출 규제에 나선 지 꼭 1년이 됐다.
아베 정부는 지난해 7월1일 한국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반도체·디스플레이용 핵심 원료·부품 수출을 제한하는 조처를 우리 정부에 사전통보도 없이 발표했고, 한달 뒤에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우대국)에서도 제외했다. 우리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로 대응했다가, 11월 말 종료 유예를 발표하면서 일본 정부도 수출 규제 조처를 풀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베 정부는 규제 철회를 계속 미루고 있다. 일본은 여전히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할 바를 다 했으니 한국이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을 외면하고 양국 관계를 계속 악화시키고 있는 아베 정부의 태도에 실망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경제 보복으로 한국을 굴복시키려 했던 일본의 수출 규제는 1년 뒤 한국에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일본에는 자충수가 되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와 공급처 다변화를 통해 일본 의존에서 벗어나고 있다. 반면 일본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었다는 평가가 일본 언론과 연구기관에서도 나오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일본총합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탈일본화’는 수출 규제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며 “중장기적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은 성장할 것이고 일본의 몫이 줄어들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수출 규제의 배경에는 아베 총리의 ‘반한·혐한’ 외교가 자리잡고 있다. 근거도 없이 대북 제재 위반 의혹 등을 거론하며 수출 규제를 강행한 것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 타격을 주는 동시에 안보 문제에서 일본의 요구를 따르도록 우리 정부를 굴복시키려는 의도였다. 아베 정부가 미국 강경파와 손잡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집요하게 방해한 행적은 볼턴의 회고록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한국을 초청한 데 대해서도 아베 정부는 반대하는 등 한국을 견제하는 외교를 계속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한-일 관계를 최악으로 몰고 간 ‘혐한 외교’를 멈춰야 한다. 그 첫걸음으로 수출 규제를 조속히 철회하고, 강제동원 피해 해법 마련을 위한 대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


[한겨레 사설] 문 대통령 “가장 슬픈 전쟁 끝내자”, 북한 호응 기대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6·25전쟁 70주년 기념사 열쇳말은 종전, 평화, 번영이었다. 문 대통령은 “전쟁의 참혹함을 잊지 않는 것이 ‘종전’의 첫걸음”이라며 “6·25전쟁에서 실천한 애국과 가슴에 담은 자유민주주의를 평화와 번영의 동력으로 되살려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세계사에서 가장 슬픈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노력에 북한도 담대하게 나서주길 바란다”고 제안했다. 북한이 호응해 70년 동안 ‘끝나지 않는 전쟁’의 종전을 위해 전향적으로 나서기를 기대한다.

문 대통령의 기념사는 23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대남 군사행동 보류 지시를 내린 데 대한 첫 반응이라 더욱 관심을 모았다.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집권 당시 6·25전쟁 기념사에는 북한의 기습 남침 상기, 대북 경계심 고취, 북한 도발 분쇄 경고 등이 주로 담겼다. 이와 달리 문 대통령의 기념사는 평화를 통한 남북 상생의 길을 강조했다. “우리의 체제를 북한에 강요할 생각도 없다”며 “통일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사이좋은 이웃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보수 언론은 “종전 선언이 대북 선물 보따리이고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도와줄 것” “한-미 공조를 강화해야 할 판에 대북 조급증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이들의 주장과 달리 정전체제를 종전 선언을 거쳐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목표는 오래전부터 남북한과 국제사회가 논의해온 것이다. 1953년 7월27일 맺은 정전협정 자체가 평화협정을 전제로 전투행위를 멈추기 위한 것이었고, 67년 동안 정전체제에서 멈춰 있는 상태는 한반도 긴장과 갈등의 근본 원인이었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91년 12월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 1장 5조는 ‘정전 상태를 공고한 평화 상태로 전환하기 위한 공동 노력’을 명기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7년부터 남북, 미국, 중국이 개최한 ‘4자 회담’도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 전환 문제 협의’를 목표로 했다. 종전 선언을 북한에 대한 선물 보따리로 보는 시각은 이런 역사성을 무시한 단견이다.

한동안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트럼프 대통령이 25일 워싱턴 한국전쟁 참전기념비를 찾았다. 미국 대선을 앞둔 상황이라 쉽지는 않겠지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불씨를 되살리고 남북·북미 대화 재개를 위한 여건을 마련하는 데 우리가 적극 나서야 한다. 북한은 더이상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동을 멈추고 종전과 공동 번영을 향한 노력을 다시 시작하길 기대한다.


[한겨레 사설] ‘한반도 평화’ 안중에 없는 보수언론의 볼턴 보도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이 한국과 미국에서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국내 보수언론들이 볼턴의 일방적인 주장을 마치 진실인 양 받아들이면서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볼턴의 회고록은 사실관계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을 뿐 아니라, 볼턴이 한반도 비핵화 협상을 시종일관 방해해온 자신의 행동을 자의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런데도 국내 보수언론은 볼턴의 입장에 서서 우리 정부가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위해 기울인 노력을 폄훼한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일보>는 23일 사설 ‘한·미 정권에 필요했던 건 북핵 폐기 아닌 TV용 이벤트’에서 “볼턴의 회고에서 드러나는 일관된 사실 중 하나는 한·미 정권이 북핵 폐기의 실질적 내용이 아니라 TV 쇼에 몸이 달아 있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앙일보>와 <문화일보>는 사설에서 한국 정부가 국민과 미국을 속였다고 기정사실화하면서 “볼턴의 회고록에 대해 청와대가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동아일보>는 ‘북 비핵화 사기극, 남 중재자론 민낯 드러났다’는 사설에서 “이벤트에 치중한 중재자론, 운전자론”을 접으라고 했다.

“북한이 무조건 핵을 먼저 포기해야만 제재 완화도 가능하다”는 볼턴의 ‘리비아식 모델’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는 한반도 비핵화에 전쟁의 길만이 남게 된다. 한국 정부와 적극 협력했던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특별대표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영변 핵시설 폐기와 대북제재 부분해제’를 뼈대로 한 협상안을 마련했다. 볼턴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이를 좌초시켰음을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볼턴은 대화를 통한 비핵화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한반도 평화의 ‘훼방꾼’이다.

볼턴의 회고록은 역설적으로 한국 정부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의 돌파구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쓴 사실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북-미 협상을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트럼프 대통령, 협상을 좌초시키기 위해 온갖 일을 벌이는 볼턴과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 미국 정부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진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다. 그런데도 볼턴의 주장을 사실로 전제하면서 우리 정부의 역할을 부정하는 이들 신문을 보면 한반도 평화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미국 강경파와 한통속이 돼 한반도 평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길 바란다.


[한겨레 사설] 북의 거듭된 도발, 정부 단호하되 냉철한 대응을

남북관계가 20년 전으로 후퇴하고 있다. 북한이 16일 개성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을 일방적으로 폭파한 데 이어, 17일에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지구에 군부대를 다시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이 앞으로 또 어떤 조처를 취할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2000년 6·15 첫 남북정상회담의 결실이자 남북 평화와 협력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의 희망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북한은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 복구와 서해 군사훈련을 재개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9·19 군사합의를 파기하겠다는 얘기다. 우발적 군사충돌 우려까지 커졌다.

북한은 우리 정부가 15일 대북특사 파견을 제안했으나 이를 거부했다는 사실까지 <노동신문>에 이례적으로 공개하면서 “서푼짜리 광대극”이라 조롱했다. 당분간 남북 대화 재개의 여지도 전면 차단한 것이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6·15 선언 20돌 기념사를 정면으로 겨냥한 ‘말폭탄 담화’까지 내놓았다. 김 제1부부장이 ‘철면피한 감언이설을 듣자니 역스럽다’는 제목의 담화에서 문 대통령에 대해 “철면피한 궤변” 등의 막말을 퍼부었다. 매우 몰상식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다. 북한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최고 존엄’으로 존중하라고 남쪽을 강하게 몰아붙이는 태도와도 모순된다. 내가 존중받고 싶다면 상대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북한은 이런 언행이 ‘남북이 자주적으로 협력 공간을 넓혀가자’는 남쪽 여론마저 입지를 좁게 만들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북한은 남북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지 않도록 더 이상의 도발을 멈춰야 한다. 우리 정부는 도를 넘은 북한 행동에는 단호하게 대응하되, 냉철하게 상황을 관리하며 어떻게든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 대북전단 살포를 계기로 불거진 최근 사태에는 몇가지 요인이 얽혀 있다. 그중 핵심은 남쪽이 그동안 대북제재에 얽매여 남북 합의 내용을 지키지 않았다는 데 대한 북한의 실망과 분노다. 지난해 2월 북-미의 ‘하노이 노딜’ 이후 남북관계 진전을 통해 북-미 관계를 견인하는 과감한 해법이 필요했지만 정부는 계속 머뭇거렸다. 미-중 관계 악화와 코로나19 사태로 이제는 그동안 내놓은 해법마저 실행하기 어려워졌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이날 남북관계 악화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했다. 외교안보 라인 당국자들이 엄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심기일전하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

이날 북한 <노동신문>이 “남조선 당국의 태도를 지켜보며 대적 행동 조치들의 강도와 결행 시기를 정할 것”이라 밝혀, 다음 행동의 수위 조절 가능성을 내비쳤다. 김정은 위원장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도 ‘출구’를 염두에 둔 행보로 보인다. 정부는 우선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을 빨리 만들어 이번 사태의 불씨가 된 대북전단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외교안보통일정책도 냉정히 점검해 상황이 왜 이렇게 악화됐는지 규명하고, 창의적 해법을 가동해야 한다.


[한겨레 사설] 북-미 첫 정상회담 2년, 멈춰선 대화 되살려야 한다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은 한반도에서 평화와 비핵화의 길이 활짝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걸게 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그 기대는 차갑게 식었다.
북한은 탈북민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문제 삼으며 남쪽과의 연락 채널을 모두 폐쇄한 데 이어, 미국에도 강한 비판과 경고를 보냈다.

리선권 북한 외무상은 12일 발표한 담화에서 “두해 전 한껏 부풀어 올랐던 조미(북-미) 관계 개선 희망은 오늘날 절망으로 바뀌었다”며 “미국이 말로는 관계 개선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정세 격화에만 광분해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우리의 변함없는 전략적 목표는 미국의 장기적인 군사적 위협을 관리하기 위한 보다 확실한 힘을 키우는 것”이라며 무력시위 가능성도 시사했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다시는 아무런 대가 없이 치적 선전감 보따리를 던져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들은 영변 핵시설 포기까지 제안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자신의 재선을 위한 도구로 활용할 뿐 진정한 태도 변화가 없었다는 원망이다.

다만 리선권 외무상은 ‘합의 폐기’나 당장의 ‘대미 무력시위’는 언급하지 않았다. 여전히 미국이 태도를 바꿔 정상 간의 합의를 이행할 것을 희망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담화가 북한 주민들이 읽는 <노동신문>에는 실리지 않은 점도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남북한과 미국이 지난 2년 동안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시행착오를 바로잡고, 미래를 대비해야 할 때다. 북한은 아무리 대내외 사정이 어렵더라도 적대적인 대남 공세를 당장 멈춰야 한다. 또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버릴 수 있는 행동도 자제해야 한다. 미국도 대선 국면이라는 이유로 더이상 대북 외교를 방치하지 말고 최소한 상황이 악화하지는 않도록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인 한국은 대미 외교에 매달려 남북관계 진전에 소홀했던 점을 돌아보고, 남북관계 진전을 통해 북-미 대화를 견인하고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이뤄낼 준비 작업을 해야 한다. 남과 북이 대립과 갈등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함께 번영의 길로 나아가는 조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은 힘들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


[한겨레 사설] ‘인종차별 분노’에 기름 붓는 트럼프의 ‘증오 정치’

백인 경찰의 무릎에 눌려 “숨을 쉴 수 없다”고 절규하다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분노한 미국인들의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2주째에 들어섰다. 여러 도시에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지만 2일 밤(현지시각)에도 수많은 미국인들이 거리로 나섰다. 세계 각국에서도 미국인들의 뜻에 동조하는 인종차별 규탄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플로이드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과 경찰 폭력의 실상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분노한 시민들은 “숨을 쉴 수 없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고 외치며 이번에는 반드시 ‘변화’를 만들어내겠다고 다짐한다. 미국인 64%가 시위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고, 경찰들도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무릎 꿇기’에 동참하는 등 희망의 신호가 보인다.

하지만 정작 사태를 해결해야 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시위대의 분노를 달래고 인종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는커녕 시위대를 “폭도”라고 부르며 군 투입까지 거론하고 있다. 백악관 주변에선 군용 차량들이 주요 길목을 막고 상공에는 하루 종일 헬기가 시위대를 위협하듯 비행하고 있다. 미 국방부는 워싱턴에 투입할 수 있도록 1600명의 육군 병력을 인근에 배치했다. 전 세계가 미국의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모습을 충격 속에 지켜보고 있다. 미국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 모습을 보면서 1980년 광주를 떠올린다는 이들도 많다.

시위는 대부분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지만, 일부 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하면서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조지 플로이드의 동생,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 등 많은 이들이 평화시위를 호소하고 있다. 이번에는 반드시 인종차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나선 미국인들의 대의가 훼손되지 않도록 시위대도 폭력 사용은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대선을 앞두고 시위대에 대한 초강경 대응으로 보수 지지층을 결집시키려 한다는 분석이 많다. ‘증오의 정치’다. 코로나19에 대한 무책임한 대응으로 들끓는 비판 여론을 ‘중국 때리기’로 빠져나가려던 트럼프 대통령이 이젠 인종차별 반대 시위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콩판 국가보안법’ 탓에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는 중국마저 미국을 비웃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장 증오의 정치를 멈추고 시위대의 절규에 귀를 기울여 사태 수습에 나서야 한다.


[한겨레 사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왜 주일미군이 쓰나

지난해 한국이 낸 한-미 방위비분담금 중 134억원이 주일미군 F-35 전투기, 탐색구조헬기인 HH-60 정비 등에 쓰인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 국민 세금인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관련 법규는 물론 상식에도 어긋난다.
국방부는 26일 “한반도 바깥에 주둔하는 영외 미군장비 지원은 유사시 한반도에 증원되는 전력을 대상으로 이뤄지므로 궁극적으로 우리 안보에 기여하는 활동”이라고 밝혔다. 이어 “해당 장비 정비도 대한항공 등 우리 기업이 모두 맡아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방부 설명은 군사작전 관점에서만 좁게 본 것이다.

지난해 2월 맺은 제10차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제1조에는 “대한민국은 이 협정의 유효기간 동안 주한미군지위협정 제5조와 관련된 특별조치로서 주한미군의 주둔에 관련되는 경비의 일부를 부담한다”고 명시돼 있다. ‘주한미군 주둔경비 분담’이란 용도가 분명하다. 미국은 제10차 협정 때부터 한반도 바깥 전략무기의 전개 비용을 한국이 분담하라는 요구를 해왔다. 이에 대해 원칙적으로 방위비분담협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 정부의 일관된 태도였다.

1991년 제1차 방위비분담특별협정 이후 지금까지 한국은 방위비분담금 약 16조2767억원을 미국에 냈다. 한국 정부가 이 돈을 예산으로 지급했지만, 감사원은 결산심사나 회계감사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주일미군이 지난해 방위비분담금 1조389억원 가운데 134억원을 사용했다. 납세자인 국민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본도 주일미군 방위비를 분담하고 있다. 2019년 미 의회 조사국 보고서를 보면, 일본의 방위비 분담률은 74.5%다. 주일미군이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돈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현재 진행 중인 제11차 방위비분담금 협상에서 증액 규모를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무리한 요구 탓이다. 이번 협상에서 우리 정부는 주일미군 전용 등을 관행이라고 넘기지 말고 바로잡아야 한다.


[한겨레 사설] ‘반성 없는’ 박근혜·이명박 사면론 부적절하다

문희상 국회의장과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잇따라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 사면론을 제기해 논란이 일고 있다. 문 의장은 21일 퇴임 기자간담회에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상당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며 “사면을 겁내지 않아도 될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노무현 전 대통령 11주기를 하루 앞둔 22일 “대통령마다 예외 없이 불행해지는 ‘대통령의 비극’이 이제 끝나야 하지 않겠느냐”며 “(이명박·박근혜) 두 분 대통령을 사랑하고 지지했던 사람들의 아픔을 놔둔 채 국민 통합을 얘기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국민 통합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성급하고 부적절하다.

사면을 하려면 무엇보다 잘못을 저지른 이들의 진솔한 반성과 사죄, 그리고 진실 규명에 대한 협조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두 전직 대통령의 태도에선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수사를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에 대한 정치 보복”이라며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박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는 4·15 총선을 앞두고 “거대 야당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들었던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주실 것을 호소드린다”는 메시지를 내는 등 현실 정치에 개입했다.

앞서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 유승민 전 바른미래당 대표 등 야권 인사들이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요구했다. 하지만 어떤 반성과 사과도 없는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론을 국민은 외면했다.
게다가 사면의 법률적 요건도 갖추지 못한 상태다. 특정인에게 형 집행을 면제하는 특별사면은 형이 확정돼야 가능하다. 그런데 다스 자금 횡령 등의 혐의로 2심에서 징역 17년에 벌금 130억원을 선고받은 이 전 대통령은 이에 불복해 상고했다. 현재 대법원 판결을 남겨두고 있다. 국정농단 혐의 등으로 2심에서 징역 25년에 벌금 200억원을 선고받은 박 전 대통령 역시 7월로 예정된 파기환송심을 기다리고 있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합당한 죗값을 치르는 게 법치주의의 기본이다. 과거 국민 통합과 경제 살리기 등을 명분으로 삼은 특별사면이 잦았지만, 대부분 기대했던 효과는 거의 없었고 면죄부만 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내란 및 군사반란 수괴로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씨는 사면 뒤 추징금 납부를 회피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파렴치한 행동으로 다시 법정에 섰다. 법률 요건도 갖추지 못했고, 반성도 없는 이들을 허울뿐인 국민 통합을 명분 삼아 사면하는 잘못을 반복해선 안 될 것이다.


[한겨레 사설] 나눔의집, 뼈 깎는 자정 의지로 설립정신 회복해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의 불투명한 후원금 관리와 할머니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후원금이 지난해까지 64억원 이상 쌓였는데 정작 할머니들은 치료조차 제대로 못 받고 이사회는 이 돈으로 ‘호텔식 요양원’ 건립 계획을 추진했다니 분노를 넘어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한겨레> 보도로 드러난 이사회 녹취록을 보면 사회복지법인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집’ 이사회는 2018년부터 후원금으로 일반 요양원 설립을 논의했다. 이 계획을 뒷받침하듯 올해 2월 나눔의집은 법인 사업 종류를 ‘무료 양로시설’에서 돈을 받을 수 있는 ‘노인 양로시설’로 변경하는 내용을 담은 정관 개정안을 광주시에 제출했다. 또 목적이 불분명한 토지 매입과 생활관 증축 등을 하며 후원자 동의 없이 후원금을 유용하고, 직원들에게 일반인 할머니 입소자 모집까지 지시했다고 한다.

나눔의집 후원금은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해마다 20억원 가까이 모였다. 그런데도 할머니들은 여벌 옷 한벌 제때 맘 편히 사지 못하고, 다쳤을 때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직원들이 증언했다. 그뿐만 아니라 생활관 증축 공사 과정에서 할머니들의 유품·물품이 훼손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하나하나가 역사적 유산이 될 할머니들의 물품이 방치되고 훼손되다니 나눔의집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이런 의혹에 대해 “나눔의집은 대한불교조계종이 직접 관리감독하는 기관이 아니다”라며 “종단이 직접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해명했다. 관리감독권이 없다 하더라도 법인 정관에 따라 전체 이사의 3분의 2가 조계종 스님들로 채워져 있는데 법적 책임이 없다는 사실만 강조하는 태도는 실망스럽다. 1992년 나눔의집이 탄생하는 데 기여했던 스님들의 헌신까지 부정하는 꼴이다. 20년 넘게 나눔의집 운영에 관여해온 원행 스님이 현재 총무원장을 맡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조계종은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무엇보다 시설 운영진과 이사진은 제기되는 의혹에 대해 철저히 책임을 규명하고 개선책을 내놔야 한다. 또 후원금을 시설 운영을 위한 계좌가 아닌 법인계좌로 걷는 기형적 구조에 대해 제대로 관리감독을 하지 못한 지자체도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나눔의집은 정의기억연대와 함께 ‘위안부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곳이다. 많은 이들이 할머니들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조금이나마 보상하고 힘든 노년을 보살피고자 기꺼이 후원금을 냈다. 드러나는 의혹들은 후원자와 시민들의 마음에 큰 실망을 안겨줬다. 뼈를 깎는 자정 의지로 나눔의집 설립정신을 다시 살려야 한다. 그것이 돌아가신 할머니들과 남은 여섯 분을 위한 최소한의 예우이자, 상처 입은 위안부 인권 운동이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이다.


[한겨레 사설] 전 인류를 위한 ‘코로나 백신’, 돈벌이 수단 안 된다

다음주 세계보건기구(WHO) 총회를 앞두고 세계 각국의 지도자와 전문가 140명이 ‘전 인류를 위한 백신’이라는 제목의 공동 서한을 14일(현지시각) 유엔 사이트를 통해 발표했다. 안전하고 유효한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면 신속하게 대량 생산해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공급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이들은 부유한 국가들이 자금을 내어 전 세계적인 백신·치료약 제조·공급 계획을 마련해 투명하게 공급하고, 무엇보다 코로나19와 최전선에서 맞서는 의료진, 취약계층, 빈곤국에 우선적으로 공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지금은 가장 부유한 기업과 정부의 이익이 생명 구조라는 보편적 요구보다 앞서게 하거나 도덕적 임무를 시장의 힘에 맡겨서는 안 되는 시기”라고 호소한 대목이 마음에 와닿는다. 이 서한에는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임란 칸 파키스탄 총리,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 등이 참여했고, 한국에선 한승수 전 국무총리와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도 동참했다.

인류를 덮친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할 희망인 백신과 치료약은 특정 국가가 독점하거나 제약회사의 돈벌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전 세계가 백신과 치료약을 공유하자는 제안이 나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백신과 치료약 개발이 성공하더라도 가장 절실한 이들에게 제때에 공급될 수 있을지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미국은 이달 초 백신 개발을 위한 국제사회의 공조 회의와 자금 모금을 보이콧했다. 프랑스 제약회사 사노피는 자금을 지원한 미국에 백신을 최우선으로 공급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었다. 당장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격노하며 백신은 공정하게 공급돼야 한다고 반박했다. 다국적 제약업체 길리어드가 치료제 후보인 렘데시비르로 폭리를 취하려 한다는 ‘약값 갑질’ 의혹도 제기됐다.

미얀마 정부의 박해를 피해 탈출한 로힝야족 100만명이 거주하는 세계 최대 난민촌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는 등 가장 힘없는 이들이 코로나19 위협 앞에 속수무책으로 놓여 있다. 국제사회가 나서야 한다. 부유한 국가와 사람들만 백신과 치료약을 가질 수 있다면, 코로나19는 세계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해 인류를 끊임없이 공격할 것이다. 공존과 연대만이 인류를 구하는 길이다.


[한겨레 사설] 문재인 정부, 경제도 ‘국격 도약’ 기회 삼아 총력을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취임 3주년 특별연설을 했다. 문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찬사가 쏟아진 코로나19 방역 대응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번 위기를 원동력 삼아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으로 우리 국격을 도약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지금은 일상부터 국제 질서까지 인류 삶의 양상 전반이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갈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이다. 국난 한가운데서 집권 4년차를 맞은 문 대통령이 ‘코로나 이후’ 비전을 구체화함으로써 고양된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시킬 목표를 제시한 것은 시의적절했다고 본다. 정부는 주도면밀한 대응으로 문 대통령의 국정 구상 실현에 힘을 쏟기 바란다.

문 대통령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겠다”며 다섯 갈래 국정 목표를 제시했다. 먼저 질병관리본부의 질병관리청 승격 등 공공보건의료 체계와 감염병 대응역량 강화 구상을 밝혔다. 최근 ‘이태원 클럽’ 감염을 기점으로 제2의 지역사회 감염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미룰 수 없는 일들이다.
문 대통령이 가장 역점을 둔 건 ‘코로나 이후’ 세계 질서 변동에 대비한 선제적 대응 방안 마련이다. 특히 전체 연설 절반 이상을 경제·민생 위기 극복 방안 설명에 썼다. 한국의 정보통신과 바이오 기술 역량을 기반으로 신성장 산업을 육성하고, 뛰어난 방역 인프라를 앞세워 ‘안심 투자처’를 찾는 해외 투자를 유치해 한국을 ‘첨단산업의 세계공장’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나아가 데이터 수집·활용 인프라 구축과 비대면 산업 육성 등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한국판 뉴딜’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 ‘전국민 고용보험’ 기초를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산업 성장동력 확보에 머물지 않고 일자리 창출과 고용안전망 강화 등 민생 대책까지 한묶음으로 제시한 것은 진일보한 구상이라고 본다. 특히 ‘한국판 뉴딜’ 추진 과정에서 “개인정보 보호와 의료·교육의 공공성 확보라는 중요한 가치”가 지켜지게 하겠다고 밝힌 것도 주목할 만하다.

문 대통령은 남북관계와 관련해선 재난·질병 공동 대응 등을 포괄하는 ‘인간안보’라는 새로운 안보 개념에 입각해 협력 방안을 찾겠다고 밝혔다. 일단 코로나 공동 대응에서 출발하되 남북 철도 연결이나 개별관광 허용 등으로도 속도감 있게 남북관계 활로를 넓혀가야 할 것이다.

특별연설에서 기후와 경제 문제를 동시에 풀기 위한 ‘그린 뉴딜’ 구상이 빠진 건 아쉽다. 전지구적 재앙을 예고하는 기후 위기 극복을 선도할 대담한 구상 또한 깊이있게 검토해 제시하길 기대한다. 검찰개혁 등 미완의 권력기관 개혁 방안과 ‘협치’ 등 정치권에 대한 메시지도 없었다. 문 대통령은 “오늘은 당면하고 있는 경제 위기, 또 국난 극복을 위한 대책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임기 후반부에 ‘슈퍼여당’을 만들어준 4·15 총선 민의에는 흔들림 없는 개혁 추진에 대한 주문도 함께 담겨 있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한겨레 사설] ‘거리두기’ 실천한 시민의식, ‘생활방역’도 정착을

정부가 황금연휴가 끝나는 6일부터 ‘생활 속 거리두기’(생활방역)를 실시하겠다고 3일 발표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던 지난 3월22일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작한 지 45일 만에 내려진 결정이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아직 대내외 위험은 여전하지만 방역망 내에서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 방역당국의 평가”라며 “이처럼 목표했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적극 동참해준 국민 여러분 덕분”이라고 감사를 표시했다.
정 총리의 말처럼 우리나라는 국민들이 보여준 높은 시민의식에 힘입어 코로나 확산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두기를 위해 외부 활동을 자제했고 순번을 정해 마스크를 사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예방수칙을 지켰다.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생활방역으로 전환하더라도 ‘거리두기’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회적 비용과 경제적 피해를 고려할 때 생활방역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하지만,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코로나19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3일 브리핑에서 “공공시설 등이 단계적으로 운영 재개되겠지만 개인 위생수칙 준수와 집단 방역수칙 등의 실천은 지속되어야 한다”며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여전히 조용한 전파자”라고 강조했다. 생활방역으로의 전환은 국민 각자가 방역 주체로서 더 무거운 책임감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스크 착용, 기침 예절, 손씻기, 개인 간 최대한 거리 두기 등 방역수칙을 지키는 데 절대 느슨해져서는 안 된다. 정부는 상황이 악화되면 언제든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돌아간다는 걸 유념해달라고 당부했다.

정부는 코로나 재확산의 도화선이 될 수 있는 집단방역 관리에 더욱 신경을 쏟아야 한다. 요양병원과 폐쇄병동을 운영하는 정신병원 등 집단감염 위험이 높은 의료시설과 위생수칙 준수가 힘든 취약계층 밀집지역에 대한 방역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질병관리본부의 국민 의견수렴에서 생활방역 지침 중 가장 지키기 어렵다고 꼽힌 ‘아플 때 3~4일 쉬기’의 실행 방안도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이다.
교육부가 4일 등교 개학의 일정과 방식을 발표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안전이다. 교육부, 보건당국, 학교는 학생들이 코로나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빈틈없는 준비를 해야 한다.


[민중의소리 사설] 코로나19가 일깨워준 자유무역과 국제분업의 허상

미국 정부는 이달 초 국방물자생산법(DPA)을 발동해 다국적 기업 3M이 중국 현지에서 생산한 마스크에 대한 징발을 명령했다. 또 미국 정부는 미국 제조업체들에게 의료장비와 마스크 수출 금지도 요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예 “마스크를 수출하는 기업에게 거칠게 보복하겠다”고까지 협박했다.

급기야 이 사태는 독일 베를린시가 3M으로부터 구매한 마스크 20만 장을 미국이 태국에서 강탈하면서 ‘마스크 해적질’ 논쟁으로 번졌다. 이달 초 프랑스도 “중국에서 수입하려던 마스크 수백 만 장이 상하이 공항에서 미국 업자들에게 납치당했다”고 분통을 터뜨린 바 있다. 미국은 의료용품과 마스크 수출 규제로 이웃 캐나다와도 언쟁을 벌였다.

자유무역과 국제분업이 각 나라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명백해졌다. 바이러스의 위협 아래 강대국들은 서둘러 빗장을 걸고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했다. 위기가 닥치면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있는 나라는 빗장을 걸고 그 능력을 독점한다.
코로나19 사태는 우리에게 경제적 독립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우리에게 마스크를 생산할 능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 능력이 없었다면 한국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식량은 어떤가? 신자유주의와 자유무역 옹호론자들은 “식량이 부족하면 언제든지 국제 곡물시장에서 수입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마스크조차 해적질 논란이 벌어지는 판에, 전 지구적 식량 부족 사태가 터진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식량 대란 사태를 맞아야 한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국내 곡물 자급률은 1965년 93.3%에서 2018년 21.7%로 폭락했다. 이마저 쌀 자급률이 100%를 넘겼기 때문에 나온 수치다. 콩(25.4%)과 밀(1.2%), 옥수수(3%) 등의 자급률은 수치로 언급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세계 전체 평균 곡물 자급률이 101%인 점을 감안하면 한국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그래서 농업을 비롯해 국민 생존 및 건강과 직결된 산업은 국가가 적극 보호해야 한다. 자유무역은 돈을 위해 작동하지 국민의 생존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코로나 사태가 알려준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위기 앞에 자유무역과 국제분업은 전혀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겨레 사설] ‘국민 안전’이 ‘진짜 안보’, 국방비 삭감한 ‘추경’ 옳다

정부가 16일 국회에 제출한 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보면, 7조6천억원 규모의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올해 국방 예산 50조2천억원 중 9047억원을 삭감하기로 했다. F-35A 전투기, 해상작전헬기 등 외국 무기 구매 예산 가운데 계약이나 시험 운영이 지연되는 사업의 지출을 주로 줄일 방침이다.
일부 보수 언론은 ‘국방 예산을 빼내 재난지원금을 줘 안보 공백이 우려된다’고 주장한다. 과도한 주장이다. 오히려 이번 결정은 외부의 군사 위협에 대처하는 전통적인 안보 개념을 넘어, 감염병과 기후변화 등 새로운 위기 상황에서 개인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인간 안보’를 중시하는 흐름을 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코로나19는 전세계가 군비 확장에 막대한 예산을 쏟으면서 생명과 공존의 가치를 경시해온 현실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안토니우 쿠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달 “바이러스의 분노는 전쟁의 어리석음을 보여준다”며 전세계에 전쟁을 멈출 것을 호소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지난 12일 부활절 강론에서 “무기 생산과 거래를 멈추게 해주소서. 지금은 총이 아니라 빵이 필요한 시기입니다”라고 강조했다. 2018년 세계는 군사비로 약 1조8000억달러(약 2200조원)를 썼는데, 이 가운데 일부만 줄여도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큰 힘이 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튼튼한 안보가 평화의 바탕임을 강조하며, 연평균 7% 넘게 국방 예산을 늘려왔다. 박근혜 정부의 4.2%, 이명박 정부의 5.2%보다 높다. 올해 국방 예산은 사상 처음으로 50조원을 넘어 과도한 인상이란 비판도 나온 바 있다.
초유의 감염병 위기 상황에서 국방비를 줄여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라고 본다. 코로나19로 세계는 리더십이 무너진 ‘지(G) 제로 시대’를 맞고 있다. 한국은 개방적이면서 투명한 대처로 코로나19를 통제해 방역과 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였는데, 불요불급한 군사비를 줄여 인간 안보에 힘을 쏟는다면 또 하나의 모범이 될 것이다.
게다가 외국 무기 구매 예산 축소는 미국의 과도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에 대한 대응 방안도 될 수 있다. 미국이 과도한 인상 압박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미국에 무기 도입을 줄이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한겨레 사설] 180석 민주당, 낮은 자세로 ‘경제난 극복’ 힘 모아야

4·15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비례정당(더불어시민당) 의석을 합쳐 180석을 차지하는 초유의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선거를 통해서 한 정당이 국회 의석 5분의 3을 차지한 건 1987년 민주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정부 여당의 국정 운영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민심이 강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잘 드는 칼일수록 손을 베기 쉬운 법이다.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16일 “선거 결과가 무섭고 두렵다”고 말한 것도 그런 뜻이라 본다. 민심을 바로미터로 삼아 더욱 낮은 자세로, 야당 의견에도 귀 기울이며 지금의 경제 난국을 헤쳐나가는 데 모든 역량을 모으길 바란다.

국회 의석 180석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국회선진화법의 제약을 뛰어넘어 어떤 법안이든 여당 단독으로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에 지정할 수 있다. 국회 대다수 상임위에서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법안·예산 심사와 의결을 거침없이 밀어붙일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건, 문재인 정부 후반기에도 레임덕을 크게 걱정하지 않고 핵심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입법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를 비롯한 검찰 개혁도 좀 더 속도감 있게 추진하라는 게 선거에 담긴 민심이라고 본다.

국민이 민주당에 180석을 만들어준 건, 국회가 국민을 위해 ‘일을 하라’는 강한 질책을 담고 있다. 이제까진 ‘야당의 발목잡기 때문에 개혁 입법 추진이 쉽지 않다’거나 ‘국회 때문에 정부가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앞으로는 야당이나 국회에 책임을 돌리기는 어렵다. 모든 책임을 온전히 집권 여당이 지고서 국민 기대에 부응하는 성과를 내야 할 것이다. 그럴수록 ‘협치’의 정신으로 야당과 대화하며 국정을 운영해 나가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특히 지금은 전세계적인 감염병 위기 속에서 국가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게 매우 중요한 시기다. 야당을 파트너로 삼아 함께 위기 극복에 나서는 게 필요하다. 미래통합당도 총선 참패의 교훈을 받아들여 위기 극복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가장 긴급한 과제는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위한 7조6천억원 규모의 2차 추가경정예산안(추경)의 처리다. 정부는 애초 방침대로 건강보험료를 주된 기준으로 삼아 소득 하위 70% 가구를 선별해 최대 100만원(4인 가족)을 지급하는 방안을 추경에 담았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보편 방안’을 제시했다. 국회 심의 과정에서 신속하게 조정해야 한다.

고용 충격에 대한 대처도 하루가 급하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이미 일자리가 감소하고 실업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일수록 기업은 고용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며 노동계도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고통 분담’ 없이는 넘기 어려운 위기 상황인 만큼, 거대 여당이 앞장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바란다.


[한겨레 사설] ‘채널A-검찰 유착’ 의혹, 신속·엄정하게 감찰해야

종편 <채널에이(A)>와 검사장의 유착 의혹에 대한 대검찰청 감찰본부의 감찰 계획에 윤석열 검찰총장이 반대하고 나섰다. “추가 조사가 더 필요하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신중한 태도가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채널에이와 <문화방송>(MBC)이 녹취록을 제출하지 않고 있는데도, 윤 총장이 “녹취록 전문 내용을 파악하고 감찰 혐의가 있으면 감찰 여부를 결정하자”고 한 것은 ‘시간 끌기’라는 의심을 살 만하다. 언론과 검찰 고위간부가 특정인을 옭아매려고 짬짜미를 했다는 이번 의혹의 중대성을 생각하면, 감찰은 신속하고도 엄정하게 이뤄져야 한다.

이번 감찰을 두고 감찰 관련 규정에 대한 해석 논란도 벌어지고 있다. 논란을 주도하는 일부 보수언론은 한동수 감찰본부장이 윤 총장에게 대면보고를 하지 않고 문자메시지로 감찰 착수 계획을 알린 것을 ‘항명’이라고 공격한다. 중요 감찰 사건은 위원회 등에 사건 심의를 회부해야 한다는 ‘대검찰청 감찰위원회 운영규정’을 들어 감찰 착수가 직권남용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그러나 감찰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만든 ‘대검찰청 감찰본부 설치 및 운영규정’을 보면, 감찰본부는 감찰 개시 사실을 검찰총장 등에게 통보하고 감찰에 착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두 규정이 상충하는 면이 없지 않지만, 중요한 건 의혹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윤 총장 최측근이 의혹에 연루돼 있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윤 총장까지도 감찰 대상이 될지 모를 사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무엇보다 ‘감찰의 독립성’이 최우선순위가 돼야 마땅하다. 1차 감찰권은 대검에 있지만, 대검이 감찰을 수행하지 않으면 법무부가 직접 감찰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이 현실화되면 검찰로서는 그 자체가 불명예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 7일 채널에이 이아무개 기자와 ‘성명 불상의 검사장’을 협박죄로 검찰에 고발했다. 곧 사건이 배당돼 수사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대검의 내부 감찰에 대한 태도가 곧 이 고발 사건에 대한 수사 의지의 가늠자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검찰을 바라보는 국민 시선은 결코 곱지 않고,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여론도 식지 않고 있음을 윤 총장과 검찰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사건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읍참마속의 자세로 감찰하고 수사해야 할 것이다.


[한겨레 사설] ‘도쿄올림픽’ 연기 불가피, 신속히 결론 내야

도쿄올림픽 연기 논의가 급진전하고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22일(현지시각) 긴급 집행위원회 회의 뒤, 올해 7월로 예정된 도쿄올림픽을 연기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올림픽이 연기될 경우 후폭풍을 염려하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태도를 바꿔 도쿄올림픽 연기를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올림픽이 연기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모습이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도쿄올림픽을 정상적으로 개최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아베 총리도 ‘완전한 형태’로 올림픽을 열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선수의 안전과 건강을 우선해야 할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너무 안이하게 현실을 보고 있다는 비판이 각국에서 쇄도했다. 결국 국제올림픽위원회는 강행 방침을 철회하고 개최 연기 검토로 돌아섰다.

세계적 유행병이 된 코로나19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번지고 있다. 유럽에선 확진자가 16만명을 넘어섰고, 미국에서도 하루 1만명 가까운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개최 예정 시점인 7월이면 4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코로나19 확산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 4개월 뒤에 올림픽이 정상적으로 열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각국 선수들은 정부가 다중이용시설을 폐쇄하는 바람에 연습 장소를 찾지 못해 올림픽을 제대로 준비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캐나다는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지 않는 한 선수를 파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시간이 갈수록 올림픽 불참국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일본 내 여론도 올림픽을 연기해야 한다는 쪽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런 상황에서 올림픽 연기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지금 분위기로 보아 연기되더라도 올가을에 열리기는 쉽지 않고 내년에 개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캐나다가 1년 연기를 요청했고, 노르웨이·브라질·슬로베니아도 같은 제안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1년 연기 방안을 거론한 바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4주 안에 연기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가급적 신속하게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 그래야 연기에 따른 혼란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내년으로 연기될 경우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예상되지만 선수들의 생명과 안전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올림픽 연기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커진 만큼 국내에서도 연기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한겨레 사설] ‘진보 세력’ 분열 초래한 민주당의 비례정당 ‘꼼수’

더불어민주당이 친문 성향의 플랫폼 정당 ‘시민을위하여’와 함께 비례연합정당 ‘더불어시민당’을 창당하기로 하면서 후폭풍이 거세다. 비례정당 자체가 개정 선거법 취지를 훼손하는 것인데다, 설상가상으로 애초 함께하기로 한 정치개혁연합의 뒤통수를 친 격이 됐기 때문이다. 기득권에 집착한 민주당의 위성정당 책략 때문에 개혁진보 진영 전체가 사분오열된 형국이다.

이낙연 민주당 공동상임선대위원장은 19일 비례정당 논란과 관련해 “현재 전개가 몹시 민망하다”며 “오랫동안 걱정해주고 도와준 시민사회 원로들에게 서운함을 드린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민주화 원로들이 주도한 정치개혁연합이 밀려나고 녹색당·미래당 등의 참여가 불투명해진 데 따른 비판을 염두에 둔 것이다. 민주당은 ‘시민을위하여’, 기본소득당 등 몇몇 신생 정당들과 함께 비례정당을 하겠다는 것인데, 지금으로선 사실상 민주당 주도의 위성정당이라고 말할 수밖엔 없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민주당은 지금과 같은 위성정당 급조 방식을 재고하길 바란다. 민주당이 애초 전당원 투표를 통해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미래통합당의 비례의석 싹쓸이를 막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취지인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을 돕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민주당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소수 정당들을 마구 찍어누르는 모양새가 됐다.

집권당이자 개혁진보 세력의 맏형 격인 민주당은 그에 걸맞은 책임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잇단 비례정당 실책에 대해 사과하고, 책임질 사람은 책임져야 한다. 이낙연 위원장은 정치개혁연합과 관련해 “저희가 배제한 적이 없고 지금도 참여의 문이 열려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지금이라도 광범위한 선거연합의 취지를 살리기 위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정치개혁연합 등 시민사회 진영 역시 대승적 차원에서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한겨레 사설] 위성정당 ‘비례 명단’ 싸움, 이런 코미디가 없다

미래통합당이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으로 만든 미래한국당과 비례대표 후보 명단을 두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미래한국당이 16일 발표한 비례대표 후보자 명단에서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비례대표 후보로 점찍어 영입한 인사들이 당선권 밖으로 밀리자 미래통합당은 “위성정당임을 포기한 공천”이라고 맹비난했다. 이에 한선교 미래한국당 대표는 “젊음과 전문성에 치중한 공천”이라고 맞서다가 “공천관리위원회에 재심의를 요청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뭐라고 포장하든 보수진영의 위성정당 창당이 자초한 막장극일 뿐이다.

황교안 대표 등 미래통합당 지도부는 한선교 미래한국당 대표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개정에 맞서 ‘의원 꿔주기’를 통해 창당한 위성정당이 모정당의 영입 인사들을 비례대표 명단에서 제외했으니 분노가 치밀 것이다.
하지만 국민 눈에는 두 정당 모두 명분 없는 이권 다툼을 벌이는 걸로 비칠 뿐이다. 애초 비례대표 의석을 겨냥한 위성정당 창당 자체가 소수정당의 국회 진출을 촉진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을 무력화하려는 정치공학적 꼼수에서 비롯한 일이다. 더욱이 황 대표는 비난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례 순번을 앞당기기 위해 ‘의원 꿔주기’를 감행했으니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황 대표는 미래한국당은 ‘위성정당’으로 생각해 비례대표 명단을 자신의 뜻대로 작성할 거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법률상으로 보면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은 엄연히 별개의 정당이다. 미래통합당이 미래한국당 공천에 간섭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미래통합당은 미래한국당 한선교 대표와 공병호 공관위원장을 압박하기 위해 국회의원들을 다시 빼 오거나 별도의 비례용 위성정당을 만드는 방안까지 거론했다고 한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이미 미래통합당의 지역구 공천을 두고 황 대표 쪽과 김형오 공관위원장이 갈등을 빚어 김 위원장이 사퇴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엔 비례대표 명단을 두고 싸움을 벌이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미래한국당은 공천관리위원회 6인의 뜻을 모아 정상적이고 합법적으로 공천을 했다고 주장하더니, “재심 요청을 결정하는 최고위를 18일 열겠다”고 밝혔다. 법적으로 다른 정당의 압박에 공천 결과를 바꾼다면 스스로 독립성이 없다는 걸 자인하는 꼴이 될 것이다.


[한겨레 사설] 아베 정부, ‘한국인 입국 제한’ 철회해야 한다

일본 정부가 9일부터 한국과 중국 입국자에 대해 ‘2주간 대기’를 요청하겠다고 5일 밝혔다. 말은 ‘대기 요청’이지만 사실상 격리 조처로 입국을 거부하겠다는 뜻이다. 이미 발급한 입국 사증(비자)도 이달 말까지 효력을 정지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도 9일부터 일본인에 대한 사증 면제를 중단하고 이미 발급한 사증의 효력도 정지하겠다고 6일 밝혔다. 또 일본에서 입국하는 외국인에 대해 특별입국절차를 적용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코로나19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 정부와 사전 협의나 예고가 없었던 일방적인 조처다. 아베 정부가 초기 방역에 실패한 책임을 엉뚱한 데 떠넘기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악화된 한-일 관계에 더 나쁜 영향을 끼칠 게 분명하다. 문제 해결을 위해선 일본이 먼저 한국인 입국 제한 조처를 철회하는 게 옳다.

아베 정부가 이런 조처를 내놓은 것은 일본 내에서 감염병이 크게 확산하면서 정부의 방역 실패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의 확진자는 1천명을 넘어섰다. 일부에선 검사 수가 한국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확진자가 1만명을 넘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자민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정부의 방역 실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기에 다음달로 예정됐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일이 연기되면서 중국 입국자 차단의 정치적 부담을 덜게 되자, 이번 조처를 기습적으로 발표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일본 내 감염 확산은 아베 정부의 부실한 대응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예컨대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의 요코하마 입항 때 확진자를 확인하고도 사흘간 아무 조처를 하지 않다가 뒤늦게 탑승객 전원을 선상 격리하는 등 늑장 대처로 사태를 키웠다. 일본에서도 “이미 지역사회 감염이 진행된 상황이라 입국자 차단은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당장 할 일은 입국자 차단이 아니라 지역사회 방역 강화다.

우리 외교부는 이날 도미타 고지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강하게 항의한 데 이어 예고한 대로 대응 조처를 내놓았다. 사태가 이렇게 된 책임은 먼저 입국 제한에 나선 일본 쪽에 있다. 우리 정부는 일본 내 감염 확산 상황 등을 지켜보면서 추가 조처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양국 관계가 더 악화되기 전에 일본이 먼저 입국 제한을 철회해야 한다.

국내 확진자는 6천명을 넘어섰지만 누적 검사 수가 16만여건에 이르는 등 한국의 투명하고 체계적인 방역 시스템은 국제사회에서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일본 역시 이번에 적지 않은 허점을 보였지만 우수한 방역 시스템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일 두 나라는 임상 경험이나 정보 공유 등에서 긴밀히 협력하면서 함께 감염병 퇴치에 나서는 자세를 갖추는 게 필요하다. 일본 정부의 전향적인 조처를 다시 한번 촉구한다.


[한겨레 사설] ‘원세훈 공작’ 유죄, 법 고치지 않으면 재발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정치 공작 등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게 법원이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이미 국정원 직원을 동원한 댓글 공작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원 전 원장에게 민간인 댓글부대를 운영한 국정원법 위반 등 혐의를 추가로 인정했다. 법원이 정치 공작에 비교적 중형을 선고한 것은 늦었지만 당연한 판단이다. 정보기관의 정치개입에는 추호의 관용도 베풀어선 안 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재판장 이순형)는 7일 원세훈 전 원장 등의 국정원법 위반 등 사건 선고공판에서 “국정원 내 상당수 조직을 동원해 이명박 정부 당시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홍보하고, 반대하는 정치인·비정치인을 음해했을 뿐 아니라 특정인물을 미행하라는 지시도 했다”고 중형 선고 배경을 설명했다.

‘원세훈 국정원’의 범행은 직원들의 댓글 공작이 꼬리를 잡히면서 드러났으나 문재인 정부 들어 민간인 댓글부대 동원 증거 등이 새로 밝혀지면서 재수사로 이어졌다. 검찰이 9차례나 추가 기소한 끝에 3년여 만에 1심 판결이 나온 것이다.

검찰 수사에서 국정원이 민간인 댓글부대도 운영해 여론 조작을 지시하며 47억원의 예산을 지급한 사실이 드러나 이번에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국가발전미래교육협의회를 만들어 진보세력을 종북으로 몰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뒷조사하도록 한 사실도 인정됐다. 정권에 비판적인 방송인을 하차하도록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재철 전 문화방송 사장에게 노조 탄압 혐의가 인정돼 징역형이 내려진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국정원이 고문 등 폭력적 수법 대신 온라인 댓글이란 새로운 공작 방식을 시도하고, 야권 정치인 비방과 언론계·노동계에 대한 개입 등 고전적인 정치 공작도 계속해왔음을 잘 보여준다.

촛불시위로 정권이 바뀌고 청와대와 국정원에서 증거가 쏟아지지 않았다면 정보기관의 헌정 유린 행위가 그대로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 모두가 이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민주화 이후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정보기관의 정치 공작이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현시점에도 엄중한 교훈을 준다. 법과 제도로 분명하게 못박아놓고 조직 전체가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정권이 마음먹기에 따라 정보기관의 이런 악습은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겨레 사설] 방위비 협상, ‘휴직 압박’ 아닌 ‘합리적 타결’ 노력을

주한미군이 28일 방위비분담금 협정이 타결되지 않아 4월부터 무급휴직이 시행될 수 있다고 한국인 직원들에게 통보했다. 미군은 무급휴직을 시행 60일 전에 예고해야 한다는 미국 법에 따른 조처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미 간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미묘한 시점에 공개적으로 통보한 걸 보면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압박의 성격이 짙어 매우 유감스럽다.

한국인 직원 9천여명의 인건비는 대부분 방위비분담금에서 지원된다. 따라서 협상이 타결되지 않아 협정 공백 상태가 길어지면 한국인 직원의 인건비 지급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논리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원래 지난해 말까지 마무리했어야 할 협상이 해가 바뀌도록 타결되지 않은 게 미국 정부의 지나친 분담금 증액 요구 때문이라는 사실은 쏙 빼놓고 무급휴직을 운운하는 건 정정당당하지 못한 태도다.

미국의 요구액은 애초 50억달러(약 6조원)에서 다소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지만, 여전히 도 넘은 인상을 요구하는 입장엔 변화가 없다. 얼마 전엔 미국의 국무·국방장관이 공동 언론 기고를 통해 “한국은 부양 대상이 아니라 동맹국”이라며 노골적으로 증액을 압박했다. 한-미 간 실무협상에서도 미국 대표단은 방위비분담금 취지가 ‘주한미군 주둔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외면한 채, 이와 무관한 순환배치 비용이나 훈련, 장비 비용 등 이른바 ‘대비태세 비용’ 요구를 여전히 강하게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정부와 미군은 협상 타결 지연을 빌미로 한국인 직원의 무급휴직을 강제하기 전에, 먼저 이런 무리한 증액 요구부터 접고 합리적인 수준에서 타결하려는 노력을 하는 게 순서다.

과도한 증액 압박은 미국 내에서도 비판을 받는다는 점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무겁게 인식해야 한다. 상원의 민주당 외교위원회 간사와 군사위원회 간사는 28일 공개서한에서 “분담금에 대한 집착은 한-미 동맹 가치 등에 대한 근본적 착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고, 하원 청문회에서도 “협상이 동맹의 가치가 아니라 주한미군 주둔 비용에만 초점을 맞춘 것 같아 걱정스럽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방위비분담금 협상을 타결하지 못하고 협정 공백 상태가 길어지는 건 한·미 두나라 모두에 이롭지 않다. 더 늦기 전에 트럼프 행정부는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수준의 타협안을 내놓아야 한다.


[한겨레 사설] 끊이지 않는 검찰 내 갈등, 우려스럽다

검찰이 지난 23일 최강욱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을 불구속 기소한 것을 놓고 설 연휴에도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의 공방이 이어졌다. 인사 대상에 오른 송경호 서울중앙지검 3차장 등이 이성윤 지검장의 결재 없이 기소를 강행한 뒤 법무부가 감찰을 시사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잇따른 검찰 내 갈등에 국민적 우려가 커지고 있음을 법무부와 대검 수뇌부 모두 자각하기 바란다.

대검과 송 차장 등은 ‘검찰총장이 검찰청의 공무원을 지휘·감독한다’는 검찰청법 12조 2항을 근거로 드는 반면 서울중앙지검장 쪽은 ‘검사장이 소속 공무원을 지휘·감독한다’는 같은 법 21조 2항을 내세워 반박한다. 어느 쪽이 옳다고 판단 내리기가 쉽지 않다. 다만 시효가 임박한 상황도 아닌데 당사자 소환조사도 없이 기소한 것은 정상적인 절차로 보이지는 않는다. 윤석열 검찰총장과 송 차장 쪽은 ‘최 비서관에게 3차례나 피의자로 적시한 출석요구서를 보냈으나 출석하지 않아 출석 의사가 없는 것으로 봤다’고 한다. 반면 이 지검장 쪽은 ‘서면조사만으론 부족하니 법무부를 통해 출석을 설득해보자’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피의자로 3차례 출석을 요구했는지에 대해 최 비서관 쪽은 지난해 12월9일부터 올 1월3일까지 받은 3차례 출석요구서를 공개하며 피의자용 요구서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피의자로 언제 전환했는지 밝히라’고 요구한다.

여러 사정을 종합하면 송 차장 등이 중간간부 인사를 앞두고 기소를 서두른 건 틀림없어 보인다. 후임자가 오면 유야무야될지 모른다는 불신도 작용했을 법하다. 이른바 ‘윤석열 사단’을 둘러싼 갈등이 사건 처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면 우려할 일이다. 고위급 인사 ‘항명’ 논란과 상갓집 소동에 이어 벌써 세번째 충돌이다. 검찰의 권한은 함부로 휘두르라는 게 아니라 공익의 대표자로서 제 역할을 하라고 국민이 위임해준 것이다. 법무부와 대검 모두 깊은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한겨레 사설] 오만하기 짝이 없는 해리스 대사의 ‘주권침해’ 발언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가 16일 ‘남북협력이 제재를 촉발할 수 있다는 오해를 피하려면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 협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북한 개별관광’에 대놓고 제동을 거는 발언이다. 정부는 즉각 ‘대북 정책은 대한민국 주권에 해당한다’며 해리스 대사의 발언을 반박했지만, 앞으로 남북협력 사업 추진에 미국이 간섭하고 나설 가능성이 큰 만큼 한층 더 명확한 대응이 요구된다.

북한 개별관광은 남북협력을 통한 북-미 대화 촉진의 핵심 방안 가운데 하나로 문재인 대통령이 새해 기자회견에서 의욕적으로 제시한 사업이다. 개별관광은 국제 제재에 저촉되지 않아 미국의 승인도 필요하지 않다. 개별관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이 이래라저래라 할 사안은 아니다. 미국 정부도 아니고 주재국 대사가 ‘제재’라는 민감한 단어까지 사용하며 이 문제에 끼어드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을 자초하는 일이다. 해리스 대사는 월권적이고 오만한 발언에 대해 한국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해리스 대사는 이번 발언 말고도 여러 차례 도를 넘는 언행으로 우리 정부와 국민의 반발을 부른 바 있다. 지난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문제가 외교 쟁점이 됐을 때, 일방적으로 일본 정부를 편드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이혜훈 국회 정보위원장을 대사관저로 불러 ‘방위비 분담금 50억달러’를 내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여야 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종북좌파’에 둘러싸여 있느냐는 황당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사로서 자격을 의심케 한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는데, 이번에 또 한국 정부의 독자적인 대북 정책을 문제삼는 발언을 쏟아냈다.

해리스 대사의 발언이 미국 정부와의 교감 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문제는 더 크다. 미국은 겉으로는 우리 정부의 남북협력 노력에 직접 반대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과거 한-미 외교 채널을 통해 금강산관광 재개에 제동을 건 전력이 있어, 이번에도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말란 법이 없다.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이 북-미 대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점을 미국에 이해시킴과 동시에, 남북협력 사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한다. 특히 우리의 주권과 관련된 문제에는 미국이 과도하게 개입할 수 없도록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한겨레 사설] 한·일 정부, 강제동원 ‘해결 3원칙’에 귀 기울여야

강제동원 문제 해결에 참여해온 한·일 변호사와 시민단체들이 6일 서울과 도쿄에서 동시에 기자회견을 열어, 진정한 문제 해결을 위해선 △가해자의 사실 인정과 사죄 △배상 △사실과 교훈의 후세 계승 등 3가지 원칙이 충족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한·일 양쪽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대변해온 이들이 문제 해결의 기본 입장을 확인한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이들은 지난해 이 문제가 한-일 외교의 핵심 현안으로 부각된 이후, 해결 방안을 두고 몇달 동안 협의를 거듭한 끝에 이번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하게 됐다고 밝혔다. 양국 정부, 특히 일본 정부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라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강제동원 문제 해결에 나서길 바란다.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 청구권에 대해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다 해결된 문제”라며 외면하고 있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일본의 각급 법원은 “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한 것은 외교적 보호권일 뿐 개인 청구권은 살아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아베 신조 정부는 더는 55년 전 협정 뒤에 숨을 게 아니라, 일본 사법부와 양심적인 시민사회의 판단을 존중하는 게 옳다. 당장 직접 나서는 게 부담스럽다면, 우선 일본제철과 미쓰비시 등에 내린 ‘피해자의 권리구제 요청에 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철회해, 당사자 간 자율적 화해 모색의 길부터 열어야 한다.

강제동원 문제의 본질은, 두 나라 변호사·시민단체들이 밝혔듯이 ‘피해자의 인권’ 문제이다. 국가 간 어떤 합의도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때 피해자의 의견 수렴 없이 덜컥 정부 간 합의를 했다가 큰 후유증을 겪고, 한국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과거사 문제 해결의 원칙으로 확립한 바 있다. 강제동원 문제 해결 과정에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한·일 정부는 이번에 제시된 ‘3원칙’을 문제 해결의 바탕으로 삼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날 기자회견에선 구체적 해결 방안을 검토하기 위해 한·일 양국의 정치·경제계와 학계, 변호사, 시민단체 인사 등이 함께 참여하는 ‘협의체 창설’ 제안도 나왔다. 강제동원 문제가 한-일 정부 간 입장 차이로 진척이 없는 상황에서 다양한 분야 인사들의 광범한 합의에 기초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는 검토해볼 만하다. 한·일 정부와 정치권의 전향적인 논의를 기대한다.


[한겨레 사설] ‘대화로 긴장 해결’ 한·중 정상 뜻, 북한 경청해야

중국을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베이징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회담했다. 두 정상의 만남은 북-미 비핵화 협상 교착 장기화로 한반도 긴장이 급속히 고조되는 상황인 만큼 각별한 주목을 끌었다. 회담이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겨 진행된 것은 두 정상이 한반도 상황을 그만큼 엄중히 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정상은 ‘북한과 미국이 대화 모멘텀을 살려나가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며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 원칙을 강조했다. 그러나 북한이 연말 시한을 앞두고 강경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는 터라, 이번 정상회담 결과가 북-미 대화 재개로 이어질 수 있을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국면이다.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북-미 대화가 중단되고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는 최근 상황은 한·중 양국은 물론이고 북한에도 이롭지 않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 말대로 북-미 대치 악화는 동북아 안정을 해치고 군비경쟁을 야기할 수 있어 중국에도 큰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지난주 러시아와 함께 대북 제재 완화 결의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한 바 있다. 제재 완화를 요구하는 북한의 입장을 거들면서, 고조되는 ‘연말 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행보라고 할 수 있다. 시 주석은 이날 정상회담에서도 “한반도 긴장 상황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문 대통령의 뜻에 동조했다.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온 중국이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하여 북-미 대치 해소를 위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와 중국의 경제보복으로 촉발된 한-중 갈등을 해소하는 문제를 논의한 것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잠시 섭섭할 수는 있지만 양국 관계는 결코 멀어질 수 없다”며 사드 갈등으로 인해 훼손된 양국 관계의 완전한 복원을 희망했다. 시 주석도 “우리는 긴밀하게 협력해온 친구이자 파트너”라며 “문 대통령과 함께 양자 관계가 새롭고 높은 수준에 오르도록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화답한 것은 한-중 관계의 복원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내년 가까운 시일에 방한해 달라고 시 주석을 정식으로 초청한 데 대해 시 주석도 긍정적으로 답함으로써 시 주석 방한도 확정 단계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내년 시 주석 방한 때까지는 사드 배치가 야기한 경제 갈등이 깨끗이 해소될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다하기 바란다.


[한겨레 사설] 북한, 비건 대표의 공개적 ‘대화 제안’ 받아들이길

방한 중인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16일 북한을 향해 “일을 할 때이고, 완수하자. 우리는 여기에 있고 당신들은 우리를 어떻게 접촉하는지 안다”고 말했다. 판문점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공개적으로 한 셈이다. 북한이 정한 ‘연말 시한’이 다가오면서 대미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비건의 ‘즉각적인 접촉’ 제안은 의미가 있다. 북한은 미국의 대화 제의에 호응하길 바란다.

비건 대표는 북한이 협상 시한을 ‘연말’로 못박은 데 대해 “미국은 마감 시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역사적인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사항을 실현하기 위한 목표가 있다”고 지속적인 협상 의지를 내보였다. 그는 또 “우리는 양쪽 모두의 목표를 만족하게 할 균형 잡힌 합의를 위해 타당성 있는 단계와 유연성 있는 여러 창의적인 방법을 (북한에) 제공한 바 있다”고 말했다. ‘타당성 있는 단계’란 표현은 비건 대표가 과거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는 용어인데, 이날 이 표현을 쓴 건 비핵화의 ‘단계적 이행’을 주장해온 북한 입장을 일정 정도 수용할 뜻이 있음을 강조하려는 뜻으로 보여 주목된다.

최근 한반도 정세는 협상의 지속이냐, 군사적 대치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북한은 “중대한 시험”과 “또 다른 전략무기 개발” 등을 공언하며 한반도 상황을 위태롭게 몰아붙이면서, “대화도 낯설어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이런 고빗길에서 비건 대표가 서울을 방문한 자리에서 북한에 대화를 제안하며 ‘타당성 있는 단계’를 거론한 건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17일 출국하는 비건 대표는 방한 기간 중 판문점 등에서 북한 쪽과 대화하길 희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려운 국면일수록 우선 만나서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풀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다. 비건의 대화 제안이 북-미 대화의 물꼬를 트는 발판이 되길 바란다.


[한겨레 사설] 기지 반환, ‘오염자 부담 원칙’ 따라 미국이 책임져야

정부가 11일 원주와 부평, 동두천에 있는 미군기지 4곳을 즉시 돌려받고 용산 미군기지는 한-미 간 반환협의 절차를 밟기로 했다. 이번에 기지 4곳이 반환됨에 따라 이제 반환 대상 미군기지는 22곳이 남게 됐다. 미군기지가 주민 곁으로 돌아오게 됐지만, 기지 내 환경오염 정화 비용을 사실상 우리가 떠맡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미군은 ‘오염자 부담 원칙’에 따라 오염 정화에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정부가 기지 내 오염 정화 비용 1100억원을 떠맡고 반환받기로 한 것은 기지 주변 해당 지역의 거센 조기 반환 요청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 기지는 8~10년 전 폐쇄됐으나 양국 간 기지 내 오염의 정화 책임을 둘러싼 이견으로 반환이 계속 지연돼 왔다. 이에 따라 해당 지역에선 기지 내 오염의 확산 가능성과 개발 계획 차질에 따른 경제적·사회적 어려움을 계속 호소해 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지 조기반환을 하기 위해 정부가 오염 정화 비용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정부는 앞으로도 미국 쪽과 오염 정화 책임 문제 등을 계속 협의할 방침이라지만, 이는 ‘구색 맞추기’에 가까워 보인다.

미군기지의 환경오염은 오래전부터 제기돼온 문제다. 앞서 반환된 미군기지 24곳에서도 심각한 환경오염이 조사돼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됐지만, 미군은 한번도 정화 책임을 인정한 적이 없다. 미군은 일부 오염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널리 알려진, 급박하고 실질적으로 유해한 위험’만 치유한다는 이른바 ‘키세’(KISE) 원칙을 들어 빠져나갔는데, 어떻게든 책임을 모면하려는 치졸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번에 반환되는 부평의 ‘캠프 마켓’만 해도 2017년 정부 조사에서 조사 지점 33곳 중 7곳의 토양 시료에서 발암물질인 다이옥신류가 허용기준치인 1천피코그램을 넘어섰으며 최고 농도는 기준치의 10배 이상인 것으로 나타난 곳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미군이 책임이 없다고 버티는 것은, 한국이 주한미군에 안보의 상당 부분을 의존한다는 약점을 이용해 이른바 ‘갑질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등산을 가든 물놀이를 가든, 즐기다 돌아올 때는 자연환경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기지를 사용하다 환경오염이 발생했으면 ‘오염자 부담 원칙’에 따라 깨끗하게 정화한 뒤 반환해야 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미군의 각성을 촉구한다.


[한겨레 사설] 끝내 ‘강제노역 인정’ 약속 뒤집은 철면피 아베 정부

일본이 최근 유네스코에 제출한 메이지 시대의 산업 유적지에 대한 두번째 후속 조치 이행보고서에도 ‘한국인의 강제노역을 인정하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처 사항’은 포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가 1940년대 전시 물자의 공급을 위해 한국인을 강제노역에 동원한 사실마저 끝내 감추려는 의도로 읽힌다. 일본은 더는 불리한 역사라고 은폐하고 왜곡할 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은 지난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메이지 시대의 제철소와 조선소, 탄광 등 산업 유적지 23곳을 세계유산으로 올렸는데, 이 중 군함도 탄광 등 7곳이 한국인이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던 악명높은 곳이다. 일본은 당시 한국이 이들의 등재를 강력히 반대하자, 한국인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 노역했다고 인정하고 정보센터 등을 설치해 희생자들을 기리는 조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세계유산위원회는 결정문에서 일본에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일본은 2년 뒤인 2017년 12월 제출한 이행보고서에서 한국인의 강제노역 사실을 빼고 ‘일본의 산업을 지원한 한반도 출신자들이 있었다’고 표현했고, 정보센터도 희생자 추모와 무관한 싱크탱크 형태로 도쿄에 설치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이에 대해 세계유산위원회가 이듬해 6월 다시 ‘2015년 결정문’의 충실한 이행을 요구하며 업데이트된 추가 이행보고서 제출을 요청했으나, 이번에도 일본은 사실상 같은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다시 제출한 것이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철면피한 일본의 행태에 어처구니가 없다.

일본은 세계유산위원회가 당사국 간 대화를 권고했음에도 우리 정부의 대화 요청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의 이런 경직된 자세에는, 이 문제가 최근 한-일 간 첨예하게 맞붙은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불리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한 것 같다. 역사적 진실 앞에서 책임감은 없고 유불리의 주판알만 튕기는 모습에서 실망감을 넘어 비애를 느낀다.
한·일은 이달 말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양자 정상회담을 열어 관계 개선을 모색할 계획이다. 그러나 일본이 끝까지 역사적 책임을 방기한다면, 이번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한-일 갈등은 풀리기 쉽지 않다는 걸 일본은 명심해야 한다.


[한겨레 사설] “북-미 정상회담 자제” 나경원, 어느 나라 의원인가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내년 4월 총선 전 북-미 정상회담을 열지 말라고 미국에 요청한 것으로 나타나 논란이 일고 있다. 제1야당 원내대표가 국익은 물론 한반도 미래와 관련된 중대한 외교·안보 사안을 선거 유불리로 재단해 가로막고 나선 건 매우 부적절하다.

나 원내대표는 27일 “지난 7월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방한 때 총선 직전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는 것에 대한 우려를 전달한 건 맞다”고 밝혔다. 최근 3당 원내대표 미국 방문 때 나 원내대표가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에게 북-미 정상회담을 열지 말 것을 요청했다는 논란이 일자, 이를 부인하며 한 해명이다. 지난 7월에, 그것도 북-미 정상회담 ‘자제’가 아닌 ‘우려’를 표명했으니 문제될 게 없다고 나 원내대표는 말하는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북-미 정상회담은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에 중차대한 영향을 끼친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기회일 뿐 아니라,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관계 개선에도 돌파구를 열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책임있는 정치인이라면 당파적 이해나 여야를 떠나 국익을 우선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도 나 원내대표는 28일 “문재인 정권에 속아 엉뚱한 시점에 정상회담을 열지 말라고 미국 당국자에게 진실을 말해준 것”이라며 “제가 틀린 말 했냐”고 되레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경솔하고 무책임한 언행을 반성해도 모자랄 판에, 자기 합리화에 급급한 태도는 몹시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나 원내대표 발언은 선거 승리를 위해 북한을 끌어들인 ‘총풍’ ‘북풍’ 등 과거 보수 정권의 악행을 떠올리게 한다. ‘평화 방해자’를 자처하고 나선 그에게 어느 나라 국회의원인지 묻고 싶다. 미국에 이런 요청을 하는 것 자체가 사대주의의 표현 아니겠는가. 나 원내대표는 부끄러움을 알고, 국민에게 당장 사과하길 바란다.


[한겨레 사설] ‘주한미군 감축’까지 거론하는 도 넘은 미국 압박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이 19일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결렬될 경우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우리가 할지도, 하지 않을지도 모를 것에 대해 예측이나 추측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주한미군 문제를 방위비 분담금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얼마 전엔 마크 밀리 미군 합참의장이 “보통의 미국인은 주한·주일미군이 왜 거기에 있는지 묻는다”고 하더니, 이젠 드러내 놓고 ‘주한미군 감축’ 카드를 꺼내 흔들어대는 모양새다. 아무리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이 절실하다 해도, 주한미군 감축까지 들먹이는 행태엔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 압박은 전방위적이다. 최근 며칠 사이에 데이비드 스틸웰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마크 밀리 합참의장, 에스퍼 장관 등이 잇따라 한국에 와서 “한국이 더 부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는 국회 정보위원장인 이혜훈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50억달러(약 5조8천억원)의 분담금을 내야 한다는 얘기를 스무번쯤 반복했다고 한다. 이 의원은 “수십년간 많은 미국 대사를 만났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대사가 주재국 의회의 상임위원장에게 이런 식의 외교적 결례를 할 수 있는 건지, 그 무례함이 놀라울 정도다. 20일 열린 한-미 당국 간의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선 미국 쪽이 “한국 제안은 우리의 요구에 부응하는 게 아니다”라며 80분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방위비 분담금 증액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정책 어젠다여서, 관료들이 적극 나설 수밖에 없는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도 최소한 ‘동맹’ 사이라면, 넘어선 안 될 선이 있다. 오직 ‘돈’을 위해서 외교 관례를 무시하고 한-미 동맹 근간인 주한미군 문제까지 끄집어내는 건 한참 도를 넘은 것이다. 더욱이 에스퍼 장관은 지난 15일 한-미 안보협의회의(SCM) 공동성명에서 “현 안보 상황을 반영하여 주한미군의 현 수준을 유지하고 전투준비태세를 향상하겠다는 공약을 재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지 않은가.

미국이 ‘주한미군 서비스를 돈 주고 사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건 옳은 태도가 아니다. 이렇게 되면 공동의 안보이익과 가치를 나누는 ‘동맹’은 설 자리가 사라진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한-미 동맹의 모토는 ‘같이 갑시다’이지, ‘돈을 충분히 받으면 같이 간다’가 아니다”라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진정 무엇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지 숙고해야 한다.


[한겨레 사설]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 한반도에도 ‘탈냉전’을

1989년 11월9일,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서독은 통일의 기쁨을 만끽했고, 동구권 공산체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잇따라 붕괴했다. 2년 뒤엔 소련마저 무너지며 냉전은 역사의 유물이 됐다. 이렇게 탈냉전의 세기적 전환이 일어난 지 30년이 됐다. 그럼에도 한반도만 아직 탈냉전의 무풍지대로 남아 있는 현실을 보면 착잡하다. 남북이 냉전적 대결에서 벗어나 화해와 협력의 길을 닦기 위해 함께 노력하길 기대한다.

외신을 보면, 30년 전 당시 현장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를 겪은 인사들은 한결같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놀랍고 짜릿한 경험이었다”고 회고한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감독한 서독 출신 빔 벤더스는 처음에는 “장벽이 무너졌다고? 소련 탱크가 침공했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 베를린 장벽 붕괴는 서독이 1969년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 천명 이후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초당적으로 동-서독 간 화해와 교류·협력을 일관되게 추진한 결과라는 점엔 이견이 없다. 진보 정권이냐 보수 정권이냐에 따라 대북정책이 ‘화해’와 ‘대결’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는 국내 정치권이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독일 통일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 건 아니다. <한겨레>의 슈테펜 마우 훔볼트대 교수 인터뷰를 보면, 동·서독이 분열과 격차를 극복하고 통합에 이르기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서독의 정치·경제적 우위는 분명한 반면 동독엔 실업과 저소득·박탈감이 만연해 있다고 한다. 제도 통일이 사회 통합을 보장하지 못한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통일은 새로운 어려움의 시작일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독일 통일의 사례를 교훈 삼아, 어떻게 남북 화해와 교류, 협력을 이뤄나갈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사회 통합을 해나갈지 등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거쳐 밑그림을 그리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겨레 사설] 한·일 정상 ‘깜짝 환담’, 꽉 막힌 ‘대화의 문’ 열기를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4일 ‘아세안+3 정상회의’가 열린 방콕에서 단독으로 만나 11분간 ‘깜짝’ 환담했다. 두 정상이 따로 만난 것은 지난해 9월 정상회담 이후 13개월 만이다. 두 정상은 회동에서 “한-일 관계가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며 양국 관계의 현안은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고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두 정상이 손을 맞잡고 ‘대화를 통한 해법’ 모색에 공감한 것은 지금의 양국 관계에 비춰볼 때 의미가 크다. 한·일 두 나라는 이제 강제징용 문제에서 비롯해 무역, 군사협력 문제로까지 확대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고위급 대화에 나서길 바란다.

두 정상은 이날 환담에서 “양국 외교부의 공식 채널로 진행되고 있는 협의를 통해 실질적인 관계 진전 방안이 도출되기를 희망했다”고 청와대가 밝혔다. 또 문 대통령은 필요하다면 ‘고위급 협의’를 하는 방안을 검토하자고 제의했고 이에 아베 총리도 “모든 가능한 방법을 통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도록 노력하자”고 화답했다고 한다. 지난 6월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악수만 하고 헤어졌던 것과는 크게 비교된다.

청와대는 이번 환담이 사전에 계획된 게 아니라 문 대통령이 정상회의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뒤늦게 도착한 아베 총리를 옆자리로 인도해 이뤄진 것이라고 전했다. 문 대통령이 먼저 나서 아베 총리의 손을 이끌어 대화의 단초를 마련한 것은 바람직했다. 지난달 말 일왕 즉위식 때 이낙연 총리와 아베 총리가 만나 ‘대화 재개’ 필요성에 공감했는데, 이번에 두 나라 정상이 이를 확인했으니 곧바로 외교당국 간의 실효성 있는 협의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일본이 이번 환담과 관련해 “아베 총리가 원칙적 입장을 확실히 전달했다”고 밝힌 건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원칙적 입장이란 “징용 배상 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다 해결됐다”는 것이어서, 이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극은 여전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화 말고는 달리 해법이 없다는 건 분명하다. 역사 문제에서 인식 격차를 좁히기 어려우면, 우선 일본은 무역보복 조처를, 한국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철회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두 나라 정부는 즉각 갈등 해소를 위한 실천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


[한겨레 사설] ‘조국 이후’ 상황 엄중함 깨닫고 ‘쇄신’ 고민해야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를 겪으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이철희·표창원 의원이 28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나 당의 혁신과 쇄신을 건의했다. 이날 만남은 두 의원이 불출마의 변으로 ‘조국 사태’ 와중의 무력감, 자괴감을 토로하면서 인적 책임론과 쇄신론을 제기한 뒤여서 주목받았다. 이해찬 대표는 두 사람 의견에 원칙적으로 공감을 표했지만, 구체적인 쇄신안이 논의된 건 아니라고 한다. 이후 추이를 지켜봐야겠지만 두 의원의 소신이 여권 전반의 쇄신과 혁신의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조국 정국’ 이후 청와대와 정부, 민주당 등 여권 전반에선 몇몇 소장파의 문제제기만 있을 뿐 반성하고 성찰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14일 문재인 대통령이 사과한 것이 거의 전부다. 또 이낙연 국무총리가 28일 국회에서 야당 의원 질의에 떠밀리듯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이번 사태로 분출한 ‘공정’과 ‘정의’의 요구를 수렴하고 검찰개혁을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이야기는 많지만, 온 나라를 뒤흔들고 두달여간 국정 난맥을 초래한 점에 대해 집권여당으로서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심기일전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철희 의원이 “당이 대통령 뒤에 비겁하게 숨어 있었다”며 이해찬 대표 책임론을 거론했고, 표창원 의원이 “인적 쇄신을 가열차게 함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또 김해영 최고위원이 “집권여당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대단히 송구스러운 마음”이라고 말했고, 정성호 의원이 “책임 통감하는 자가 한명도 없다”고 비판한 정도다.

‘조국 이후’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가 집권여당인 민주당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문 대통령 역시 14일 사과 이후에 국회 시정연설과 청와대 기자단 간담회 등 몇몇 기회가 있었지만 국민에게 좀 더 진솔하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이진 못했다. 청와대 참모들이 국정 보좌기능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점검하고 반성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없다. 민주당에선 상당수 의원들이 속으론 부글부글 끓는다는데 정작 책임있게 발언하는 이는 극소수다. 민주당이 총선 6개월을 앞두고 관례대로 이번주 총선기획단을 발족하겠다는 것은 ‘인식의 안이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이 지금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넘어가는 건 곤란하다. 공정과 정의, 검찰개혁에 매진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번 사태가 어디에서 비롯됐고 어떻게 수습하고 새롭게 혁신하는 모습을 보일지 숙고해야 한다. 국정 혼선을 초래한 데 대해 국민에게 겸허한 마음으로 머리 숙여야 한다. 최소한 이번 사태로 표출된 다양한 민심을 경청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무조건 책임지고 물러나는 일이 능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놓고 있는 건 더욱 문제다. 여권 전체가 상황의 엄중함을 깨닫고 성찰과 쇄신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한겨레 사설] 실무협상 결렬, 북-미 접점 찾는 노력 계속해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5일 열린 북-미 실무회담이 성과 없이 끝났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뒤 7개월의 우여곡절 끝에 개최된 이번 회담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과 안타까움도 크다.

협상 실패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북한 측 단장인 김명길 수석대표가 미국의 “구태의연한 태도”를 비판하며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밝힌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회담을 앞두고 북한은 ‘새로운 계산법’을, 미국은 ‘새로운 방법’을 언급하며 양쪽이 장기 교착 상태인 북핵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하지만 북핵 폐기를 포함한 포괄적 합의를 주장해온 미국과 ‘단계적·동시적 이행’을 주장해온 북한이 평행선을 그으면서 북한이 불쾌감을 드러낸 채 결렬을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북핵 협상에 적극성을 보여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탄핵 위기를 맞았고, 내년 대선까지 앞둔 상황에서 어렵게 마련된 북-미 실무협상이 성과 없이 끝난 것은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다. 그런데도 북-미 양쪽이 대화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은 것은 다행스럽다. 북한은 “우리가 선제적으로 취한 비핵화 조치들에 미국이 성의있게 화답하면 다음 단계의 비핵화 조치를 위한 본격 논의에 들어갈 수 있다”며 “연말까지 좀 더 숙고해볼 것을 권고한다”고 밝혔다. 하노이 회담 이후 자신들의 조처에 대한 미국의 상응 조처를 압박하면서 대화를 이어가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미국도 “2주 이내에 스톡홀름으로 돌아와 다시 만나자는 스웨덴의 초청을 미국 대표단은 수락했다”고 말해, 조속히 대화를 재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북한은 체제 보장과 비핵화 상응 조처에 대해 미국을 신뢰하지 못하고, 미국 역시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면서 대북 제재 등 압박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지난한 비핵화 과정을 고려할 때 양쪽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비핵화 없는 한반도 평화와 북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 역시 북한에 일방적 무장해제를 주장하는 방식으로 비핵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판문점 회동 등으로 이어온 북핵 협상 자체를 미궁에 빠뜨려선 안 된다. 북-미 모두 조금씩 거리를 좁히고, 이른 시일 안에 다시 만나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접점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길 바란다.


[한겨레 사설] 검찰, 수사관행 개혁하라는 ‘촛불 요구’에 답해야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매우 높다”며 “모든 공권력은 국민 앞에 겸손해야 한다”고 밝혔다. 27일에 이어 3일 만에 다시 ‘검찰개혁’을 강조했다. 28일 100만이 넘는 촛불시민이 검찰청사를 에워싸고 검찰의 ‘조국 의혹’ 수사를 질타하며 검찰개혁을 요구한 데 화답한 셈이다. 패스트트랙에 오른 뒤 국회의 입법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검찰개혁 의지를 재확인하면서 검찰 수사에 절제를 요구한 것으로 읽힌다. 27일에 이어 29일엔 윤석열 검찰총장이 실명으로 ‘개혁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밝혔으나 서로 다른 ‘국민’과 ‘개혁’을 염두에 두고 겉도는 인상이 짙다. ‘윤석열 검찰’은 촛불시민들의 개혁 요구를 좀더 진정성을 갖고 성찰하길 바란다.

법무부는 이날 보고에서 형사부·공판부 강화와 피의사실 공보준칙 개정 등을 보고했고 문 대통령은 “개혁을 위해 필요한 법안들”이라고 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들이 대대적으로 동원돼 진행 중인 조국 법무부 장관 수사와 이 과정에서의 피의사실 공표 논란과 무관하지 않은 사안들이다. 윤 총장이 27일 ‘인권 존중 바탕에서 법 절차에 따라’ 수사하겠다고 밝힌 지 이틀 만에 다시 검찰이 ‘11시간 논란’에 반박한 데 대해서도 청와대와 법무부는 ‘인권’ ‘겸손’과는 거리가 먼 태도라며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다. 특히 문 대통령의 유엔 총회 참석과 한-미 정상회담 기간에 법무부 장관 집 압수수색을 한 데 대해서는 사실상 윤 총장의 ‘항명’으로 보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윤 총장과의 협의 없이 대검 감찰부장 등의 인사를 강행하기로 한 것도 이런 연장선으로 읽힌다.

문 대통령은 “검찰권 행사 방식이나 수사 관행, 조직문화 등에 있어서는 개선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며 검찰총장을 콕 집어 “국민에게서 신뢰받는 방안을 마련해 제시하라”고 지시했다. 검찰은 3일 전 ‘절제된 검찰권 행사’ 발언에 이은 지시가 압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굳이 문 대통령 말이 아니더라도 특수부 중심의 ‘표적수사’ ‘먼지털기 수사’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검찰개혁의 요체도 바로 그 대목이다.

조국 장관 수사도 권력형 비리에 집중하는 모양새는 아니다. 사모펀드 수사는 조 장관 5촌조카와 주가 조작 등 공범 혐의를 받는 100억원 안팎의 물주 등의 범죄는 덮은 채 장관 가족 표적수사에 몰두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적잖다. 이제라도 비례와 균형의 헌법정신까지 고려하는 ‘정도 수사’로 돌아오기 바란다.


[한겨레 사설] 국정원의 ‘민간 사찰’, 감찰만으론 근절 안된다

‘프락치’를 활용한 사찰·공작 폭로로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국가정보원이 이달 초 감찰실장을 외부 인사로 다시 교체한 것으로 확인됐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민간인 사찰이 있었다는 양심선언이 있던 터여서 국정원의 움직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정원 스스로 이번 사건을 엄중하게 감찰해 진상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 법 위반 가능성도 커서 검찰 등의 적극적인 수사도 필요해 보인다.

<한겨레> 취재에 따르면 송규종 서울고검 감찰부장이 추석 연휴 직전 국정원 감찰실장으로 부임했다. 국정원 쪽은 “지속적인 국정원 개혁의 일환으로 업무 감찰에 객관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라고 밝혔다. 시기적으로 보아 지난달 27일 <한겨레> 등의 보도로 알려진 국정원의 프락치 공작 폭로가 발단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조사해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시민단체들은 24일 국정원이 서울의 한 대학 단과대 학생회장 출신 ㄱ씨에게 억대 금품을 제공하며 시민단체 인사들의 동향을 캐내고 대화를 녹음해 오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ㄱ씨는 시민단체 ‘통일경제포럼’ 운영진으로 활동하며 5년간 민간인 50여명과 나눈 대화를 녹음해 넘기면서 국정원 요청에 따라 거짓 진술서까지 작성했다고 한다. 회원들의 중국 단둥 기행 등을 ‘북한 공작원 접선 목적’이라고 거짓 진술서를 쓰게 하면서 “불법이지만 네가 진술하면 합법이 된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국정원은 “본인이 국가보안법 위반 조직을 먼저 신고해온 것”이라며 “적법한 내사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ㄱ씨 주장이 워낙 구체적이어서 과거 수십년간 보아왔던 ‘사건 조작’ 시도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정원은 현 정부 출범 직후 개혁발전위원회를 통해 댓글조작과 정치공작 등 불법 사실을 확인해 검찰에 넘기고, 국내 정치와 대공수사에서 손을 떼는 조직 개편 방안도 선도적으로 내놓았다. 정부기구와 민간기관을 무상출입해온 연락관을 없애기도 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국정원 개혁법 처리가 지지부진한 사이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법과 제도로 확실하게 뜯어고치지 않는 한 뿌리 깊이 심어진 조직문화와 생리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한다. 국회는 이제라도 국정원 개혁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


[한겨레 사설] 국제사회 흐름과 거꾸로 가는 기후위기 대응

21일 서울 대학로를 비롯해 전국의 여러 도시에서 ‘기후위기 비상행동’ 행사가 열린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 시민사회가 20~27일을 ‘기후위기 주간’으로 정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유엔 총회 기간인 23일 미국 뉴욕에서는 ‘기후행동 정상회의’가 열린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소집한 이 회의는 세계기후회의 사상 처음으로 이름에 ‘행동’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 회의에는 문재인 대통령도 참석한다.

전세계가 기후 문제로 전례 없는 동시 행동에 나서는 것은 국가와 시민사회 할 것 없이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최근 들어 국가 차원의 대응이 도드라진다.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 18개 국가가 앞다퉈 기후위기 비상선언을 내놨다.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제로’로 만드는 목표를 법에 명문화하거나, 내연기관차 판매를 중단하겠다는 발표도 잇따르고 있다.

그동안 경고음은 쉼 없이 울려왔지만, 각국 정부는 ‘말 따로 행동 따로’ 식으로 일관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해 10월 발표된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 ‘1.5도 보고서’가 큰 변곡점이 됐다. 과학자들이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의 1.5도 안쪽으로 유지하려면 온실가스 배출을 10년 이내에 45% 줄이고 2050년에는 0%를 달성해야 한다고 ‘최후통첩’을 보내자, 상황의 심각성을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국제사회 흐름에 비해 우리 정부의 대응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말로는 ‘에너지 전환’을 한다면서 온실가스 감축 정책은 외려 뒷걸음질 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2014년 빼고는 해마다 늘었다. 지난해에는 세계 7위였고, 올해는 6위가 될 거라고 한다. 지난 10년 동안 배출증가율은 2위다. 2020년까지 잡은 감축 목표는 폐기됐고, 2030년까지 목표는 아이피시시 권고의 18.5%에 그치고 있다.

기후위기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다. 더구나 현재의 위기는 사회적 약자들이, 가까운 미래의 재앙은 다음 세대가 오롯이 겪어야 한다. 또한 기후위기는 인류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안이한 대응은 다른 나라들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 한국을 ‘기후 악당’이라고 부르는 국제사회 비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엔으로 향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당국자들은 깊이 새기길 바란다.


[한겨레 사설] ‘강경 우익’ 중용한 아베, 한-일 관계 우려스럽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1일 두번째 집권 이후 최대 규모의 개각을 단행했다. 그동안 일제 침략전쟁 등을 부인하는 망언을 일삼아온 강경 우익 인사들이 대거 발탁됐다. 아베 총리의 숙원사업인 평화헌법 개정과 과거사 미화 등 ‘역사 수정주의’ 움직임에 속도를 내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한-일 간 과거사를 둘러싼 갈등 요인이 더 늘어나면서, 양국 관계가 더 악화될까 우려된다.

이번 개각에선 하기우다 고이치 문부과학상과 에토 세이이치 영토담당상, 다카이치 사나에 총무상 등 일제의 과거 침략을 옹호해온 인사가 대거 각료로 중용됐다. 특히 하기우다 문부상은 8·15 패전일에 아베 총리를 대신해 공물을 들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으며,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의 수정을 주장한 대표적인 극우 성향 인사다. 이런 인물을 교육 담당 각료로 앉힌 것을 보면, 앞으로 대놓고 역사교과서 왜곡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7월에 주일 한국대사를 불러 “무례하다”고 호통치고 한국 대법원의 징용 판결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억지를 부린 고노 다로 외무상은 이번에 방위상으로 자리를 옮겨, 안보 분야에서 한국에 대한 강경책을 주도하게 됐다. 대한 수출규제 책임자인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은 교체됐지만, 후임인 스가와라 잇슈 자민당 국회대책 수석부위원장도 ‘고노 담화’를 부정하고 정기적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는 강경 우익 인사다. 그러니 한-일 무역갈등의 해소를 기대할 상황은 아닌 듯싶다.

아베 총리는 개각 발표 직후 “새로운 체제에서 우리 당의 오랜 세월 비원인 헌법 개정을 당이 한 덩어리가 되어 강력히 추진하고 싶다”며 ‘전쟁할 수 있는 일본’ 만들기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 아베 총리는 개헌 추진 과정에서 과거 침략전쟁을 적극 옹호하며, 이를 비판하는 한국과 맞대결도 마다하지 않을 개연성이 높다. 그렇지 않아도 꽁꽁 얼어붙은 양국 관계가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한겨레 사설] 이해할 수 없는 미국의 반응과 적반하장 일본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한 뒤 미국이 ‘실망’과 ‘우려’가 담긴 논평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는 22일(현지시각) 한국 정부가 지소미아를 연장하지 않은 데 대해 “강한 우려와 실망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따로 한국 정부의 결정에 ‘실망했다’는 반응을 내놨고,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도 정경두 국방장관과 한 통화에서 ‘우려’를 표명했다. 한국 정부의 결정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이다.

미국이 지소미아 유지를 강하게 희망해온 만큼 이런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한-일 갈등이 최고조에 이를 때까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다가 이제 와서 우리 정부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야말로 실망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삼아 경제보복 조처를 내놨을 때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한국이 대항 조처를 취하자 흥분하는 것은 동맹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라고 볼 수 없다. 미국은 이제라도 일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비판할 것은 적극적으로 비판해야 한다.

일본이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적반하장식으로 무례하게 나서는 데 대해서도 깊은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이 나자 한밤중에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항의한 것도 상례에 어긋나는 일일뿐더러, 고노 다로 외상이 “한국이 극히 부정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항의한 것도 적반하장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고노 외상의 주장이야말로 그대로 일본에 돌려주어야 할 말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한국이 한-일 청구권협정을 위반하는 등 국가와 국가 간의 신뢰관계를 해치는 대응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 것도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성찰의 태도를 찾아볼 수 없는 발언이라는 점에서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일본은 이런 적반하장식 태도가 한-일 관계를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며 한국 국민의 반감만 키울 뿐임을 알아야 한다.

국내 정치권 일각에서 지소미아 종료를 두고 안보위기를 과장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북한의 김정은은 만세를 부르고 중국과 러시아는 축배를 들며 반길 것”이라며 정부가 안보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황 대표가 정말로 국익에 관심이 있다면 이런 앞뒤 안 맞는 부풀리기식 발언부터 삼가야 한다. 지소미아가 종료되더라도 한-일 간의 정보 교환이 줄어드는 것일 뿐이지 한-미 동맹 자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님은 보수 정치권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본이 반발하고 미국이 항의하는 상황이지만, 우리 정부는 이런 때일수록 국민을 믿고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지소미아 종료는 일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며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한 조처다. 정부는 원칙을 지켜가면서 한-일 관계가 상호 존중과 호혜 속에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한겨레 사설] 7년째 ‘가해 책임’ 실종된 아베 총리 ‘종전 기념사’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올해 전몰자 추도식에서도 ‘가해 책임’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1993년 이후 ‘패전일’인 8월15일마다 해오던 총리들의 ‘반성’과 ‘애도’가 2012년 아베 총리 재집권 이후 7년째 끊겼다. 그는 이날 1급 전범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신사에 공물을 보냈다. 이 또한 7년째다. 극우 성향 의원 50명은 직접 참배까지 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종전 기념사’에서 가해 책임 대신 2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일본의 피해를 유난히 강조했다. “역사의 교훈을 깊이 가슴에 새겨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힘을 다해왔다”는 말도 했다. 일본 정부의 2차 가해를 당하고 있는 ‘위안부’ 등 강제 동원 피해자들을 거듭 모욕하는 발언이다.

하루 전인 14일 한국에서는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을 맞아 중요한 국제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중국 연구자들은 전시 성범죄와 관련해 일본군 전범들이 직접 쓴 ‘자백서’ 등을 공개했다. 사단장급 전범들이 쓴 자백서에는 “위안소를 만들라고 명령을 내렸다”거나 “중국과 조선의 여성을 유괴하거나 속여서 끌고 오라고 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고 한다. ‘위안부’ 강제 동원과 위안소 운영에 일본군이 직접 개입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하는 증거들인 셈이다.

아베 정부는 2015년 말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 제출한 공식 답변서 등을 통해 ‘위안부’ 강제 연행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가 없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내세우고 있다. 자신들의 조사 범위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한국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문서까지 아울렀다고도 주장한다. 그렇다면 자기 나라 장성들이 직접 작성한 서류를 조사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아베 총리는 2015년 발표한 ‘아베 담화’에서 “후손들에게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선 안 된다”고 했다. 명백한 역사적 진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것만이 그 뜻을 이루는 길임을 더 늦기 전에 깨닫기 바란다.